20. 存齋 魏伯珪,
記念館 建立을 위한 提案書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선생은 장흥이 배출한 천재적 석학입니다. 10세에 천문, 지리, 복서, 율역, 의학, 관상, 도불, 병법, 산수 등을 읽었으며, 한번 보면 대의를 파악했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7세, 8세, 9세에 지었던 「詠星」「詠燈火」,「上春昊」등 한시는 영민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자연히 신동이라는 소문이 인구에 회자됐던 것입니다.
물론 더 조숙한 천재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매월당 김시습은 3세에 시를 짓고, 율곡 이이는 9번이나 장원급제해九度壯元이라 했답니다. 당시는 영재의 척도가 과거로 재단됐기에 그의 천재성을 웅변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존재는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덕산의 윤봉구(尹鳳九)의 문하에서 공부했어도 부모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는 12세부터 과거를 통해서 출세하기를 접었다합니다. 왜냐하면 역대 과거시험의 기출문제를 보면서 참다운 인재를 선발하려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과장에서 응시해보니 부정이 우심했답니다. 부정이 아니면 합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답니다. 그래서 현인이 되고자 爲己之學에 전념키로 결심하고 학문에 천착했습니다.
그 결과는 1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썼습니다. 작업을 마무리할 무렵 해일피해를 살피러 위유사 서영보가 장흥에 왔습니다. 그는 선생의 문명을 전해 듣고 왕에게 천거했습니다. 왕은 저서를 올려 보내라 이르고 선공감 부사용 등 벼슬을 내리고 입궐토록 했습니다. 1796년 3월 옥과현감에 제수돼 평소 경세관을 펴서 현민들의 마음을 샀습니다.
그런데 방대한 저술은 200여년 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1970년대부터 대학교수와 대학원생들이 선생의 저술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지금까지 약 40여년 동안 그의 학문을 연구해 박사학위 6명, 석사학위 10여명이 배출되고, 약 120편의 저술과 논문이 산출됐습니다. 특히 연시조「농가구장」은 2003년도 대입 예비시험에 출제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김석회 교수의 평을 보겠습니다. 이 작품의 특징은 그 언어적 자질에 있다. 농가구장을 통해 생활세계의 일상구어가 현장적 실감을 구성해 내는데 크게 기여했다라고 했습니다. 또 자회가는 노인의 삶을 이 정도로 탁월하게 묘사해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은 최근 박완서 단편을 제외하고는 한국 문학사상 그 유래가 없다라고 평했습니다.
경학관은 어떻습니까. 김형련(金亨連)은 전남대석사논문「위백규의 경학사상 연구」에서 존재의 이기론은 원리로서의 이를 중시하면서 이기를 통합한 일원론적인 입장을 관철하고 있다. 곧이가 기질 속에 있는 뒤에야 성(性)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니, 기질을 버리면 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경세론도 보겠습니다. 우종숙은 교원대석사논문 「존재의 교육사상 연구」에서다만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하여, 관과 민의 중간에서 그 중간자적인 역할을 교육자와 교육기관이 담당해야하며, 교육을 통해 사회가 개선됐을 때만이 국가기강의 확립과 민생의 안정을 기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곧 교육자치주의적 논리를 편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방대한 저술에 담긴 탁견은 빙산의 일각처럼 물밑에 있습니다. 지역마다 저술을 남긴 출신 선현은 물론 생존한 인물까지도 각종「기념관」을 건립해 고장의 자랑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선생에게는 그런 혜택마저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고작 태생지 방촌에「유물관」이 있으나 비좁아 체계적으로 전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독립된「기념관」과 「교육관」이 필요합니다. 현재 유물관에 전시된 선생의 유물은 고문서 몇 점과 문집 등에 불과합니다. 이 유물관은 원래 관내 여러 가정에서 보관하고 있는 고문서의 도난방지를 위해 1994년에 지어졌습니다. 그런 연유로 각 가정에서 내어놓은 교지 등 고문서를 수장고에 보관하는 기능에 그쳐 전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생의 저술과 유품들을 분야별로 전시하고, 저술에 담긴 유지를 전승하려면 「기념관」과 「교육관」이 동시에 갖추어져야 한 것입니다. 학계는 그의 리얼리즘적 문학작품은 오늘의 문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합니다. 경학관 그리고 요즘으로 말하면 지방자치를 위주로 하는 교육론 등은 다른 실학자와는 독특한 입론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생전에 자신의 불우를 삼벽(三僻)으로 치환하며 자조했습니다. 후미진 지역, 후미진 성씨, 후미진 능력을 한탄했습니다. 선생께서 타계하신지 2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삼벽의 한은 여전히 불식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이유를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늦었지만 열심히 하면 오히려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他山之石의 교훈을 찾아보기 위해 여러 자치단체에서 이미 마무리 했거나 지금도 추진 중에 있는 출신지역의 선현들에 대한 추모 기념사업의 몇몇 케이스를 다음과 같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밴드 멤버의 냉랭한 반응
2016년 8월 19일 타 성씨를 중심으로 구성된 존재 기년사업회 준비 위원회 결정사항으로 입회비 10,000원 연회비 20, 000원을 부담하는 회원 50명 확보와 기금 30, 000,000만원이 확보되면 사업회 총회를 거쳐 정식으로 출범할 수 있다는 요지의 글을 밴드에 게시했다. 그러나 방문자 104명 중 고작 4명이 댓글을 달고 호응하는 정도에 그쳤다.
또 20일에는 위씨의 성지인 백산재의 지붕의 석까래 6개 정도가 붕괴됐다는 사실을 사진과 함께 밴드에 게시했다. 그 소식을 전해도 역시 반응을 덤덤했다. 이는 무관심의 정도가 지나친 것이다. 밴드를 통해 다양한 문중의 역사가 소개되고, 하계수련회를 통해서도 많은 정보를 접한 종친이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많아 졌는데 시쿤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중의 숙원사업과 뜻하지 않은 성지의 상징 건물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전해도 무신경하다면 그 후손들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참으로 충격이 컸다. 산하촌 종친들에게 손가락질하는 외지의 종친들이 과연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위씨의 장래를 희망적으로 봤던 시각이 대단히 잘못된 것을 확인했다.
새삼스럽게 의문이 생겼다. 문중 일은 따로 하는 사람이 정해졌는가? 아니면 산하촌 출신만의 전담할 일인가? 2만원이 부담스러운가? 아니면 장흥 위씨 성지의 상징건물이 무너져도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때가 되면 다 알아서 할 것인데 미리 야단법석인가? 밴드가 개설되기 이전은 소통이 안됐지만 이젠 달라져야 하지 안ㄹ을까! <2016. 8. 21>
존재기념 사업회 준비모임
도문회는 8월 19일 백산재에서 존재 기년사업회 창립을 위한 준비 모임을 가졌다. 이날 모임은 지난 3월 7일자로 세무당국으로부터 「비영리법인 존재기념사업회(번호 402-82-86438)」의 인가 받은 후 처음으로 개최됐다. 모임에는 이미 도문회 운영위원회에서 위촉한 이사장 겸 회장 윤수옥(尹洙鈺)씨 등 7명 중 6명과 감사 1명을 비롯한 덕운 고문, 혜암 도문회장, 금봉 부회장, 종삼 재무 등이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도문회에서 준비한 전문 34조의 정관을 조항별로 심의해 미비점을 보완하고, 6장에 실무를 맡을 부서를 신설하는 것을 보완키로 했다. 또 회계연도는 매년 3월부터 2월말로 결정하고, 이날 모임의 성격은 「존재기념사업회」출범을 위한 준비 모임으로 정했다. 그리고 사업회 회원의 회비는 가입비 10,000원, 연회비 20,000원으로 정하고 이사와 도문회 등 전국의 종친을 대상으로 회원을 모집키로 했다.
또한 최소한의 운영기금을 약 3000만원 정도를 미리 마련하고, 회원이 50여명 이상 확보되면 창립총회를 열어 이 자리에서 정관을 확정하고, 이사진을 정식으로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정관 4조가 정하고 있는 사업의 목적은 △존재선생의 생애와 사상연구 △선생의 학문에 관한 연구 및 보급 △존재학 발표회 및 강연회 △존재학회지 간행 보급 △존재의 날 제정 운영 △존재할 관련 데이터베이스 구축 홈페이지 개설 △유적지 답사 등이다. 밴드 멤버 여러분! 참여하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원산 <2016. 8. 19>
백산재 지붕 석가래 붕괴
해주사 강당인 백산재 지붕 일부가 붕괴됐다. 지붕이 붕괴된 사실은 도문회 인환 부회장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인환 부회장은 이날 존재 기념사업회 준비모임을 위해 오전 일찍 백산재에 도착, 해주사 신실에 오르다 발견됐다. 그에 따르면 육안으로 보면 석가래 6개가 무너져 내린 것으로 보인다고 전하고 있다.
인환 부회장은 백산재 지붕 붕괴 사실을 바로 장흥군에 전했다. 군 당무자도 즉시 전남도에 보고해 대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그 결과 80% 정도의 석까래를 교체하는 보수공사를 벌일 경우 약 1억 5천만원 정도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됐다. 이 경우 건물주인 도문회가 30, 000만원의 부담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산재는 2011년 기와교체공사를 마쳤으며, 그 후에도 기와 밑에 깔린 진흙이 흘러내려 다시 보완공사를 벌이기도 했다. 장흥군과 전남도는 백산재의 경우 긴급한 보수공사 대상 문화재로 보고 대책을 서두르고 있다. 만일 문중에서 자부담을 감당하지 못하면 문화재에서 제외할 수 있다고도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