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크아웃
최장순
붉은 벽을 등지고 앉아 풍경을 바라본다. 통기타의 음률에 맞춰 배부른 비둘기가 뒤뚱거리고 연극 포스터를 든 종종걸음이 재바르다. 바람에 제 몸을 흔드는 은행나무 아래 사랑 한 잔씩 테이크아웃한 연인들과 추억을 곱씹는 공원 벤치의 노인이 대조된다. 진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있는 내 손이 천천히 바쁘다. ‘아메리카노’는 이미 토종이 아닌 토종이 되어버린 것 같다.
테이크아웃족이 흐른다. 커피, 샌드위치, 김밥과 같은 편리 음식을 파는 매장이 이들의 기대와 수요를 맞추어준다. 아침을 손에 들고 뛰는 직장인, 취업준비생들에게 게으르다는 오명을 씌울 수는 없다. 하지만 점심시간처럼 가벼운 휴식을 겸한 산책일 때는 달라진다. 빠름에 지친 사람들이 잠시 누릴 수 있는 여유가 한 손에 들린다. 느긋한 걸음으로 얘기를 나누거나 벤치에 앉아 햇살의 간지러움을 즐긴다. 잠시 일에서 해방되는 달콤한 시간이다.
단편소설 한 권을 손바닥만 한 크기로 만드는 출판사가 있다. 독특한 발상과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구축해가는 젊은 소설가를 선정하여 손안의 스토리를 탄생시킨다. 다양한 표현들을 한 번에 앉아 읽어낼 수 있는 분량이다. 저렴한 비용으로 즐기는 테이크아웃이다.
서핑 강사 겸 카페 운영자인 30대 남자는 잘 나가던 직장을 포기했다. 수입은 직장 연봉에 비해 반으로 줄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다. 안정된 삶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다. 동쪽 바닷바람에 검게 그을린 얼굴에서 자유와 개방이 주는 웃음꽃이 피어난다. 서핑은 좋은 파도를 만나야 한다며 “완벽한 1%의 순간을 위해 99%의 기다림이 설레고 즐겁다”고 덧붙인다. 정점을 위해 밋밋한 삶의 부분을 과감하게 테이크아웃한 결단이 부러웠다.
거주지를 수시로 옮기는 좀 별난 친구. 적게는 몇 달에서부터 많게는 일 년 이상을 제주도에서, 통영에서, 지리산에서, 속초에서 보내곤 한다. 특산물을 소포로 받았을 때에야 그의 새로운 주소지가 확인된다. 잠시 본가로 돌아왔을 때, 이제 이주는 끝났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돌아온 것은 손녀의 출생 때문이었다. 현실이 발목을 잡았지만 그는 여전히 자발적 유목민을 꿈꾼다.
집필 공산을 테이크아웃하는 작가도 있다. 벽촌의 오래된 집이나 소도시의 허름한 호텔에서 가져간 노트북을 펼 때, 고향집에 돌아온 듯 그렇게 마음 편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잠시나마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은 글에 집중하도록 스스로를 외로움에 빠뜨리는 일이다. 안부가 궁금해 그를 수소문하면 흙내 나는 기별을 뒤늦게야 전해 듣는다. 그가 내게 얼굴을 내밀 때면 쌓였던 원고청탁서의 압박에서 해방된 밝은 표정을 본다. 나는 그를 창작의 불루 존을 찾아가는 여행자라 부른다.
호출 벨의 신호를 기다리는 대형마트의 음식매장에 앉은 사람들. 부저가 울리면 주문한 음식을 바로 매장 테이블로 테이크아웃 한다. 식사하는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생 동안 앉은자리에서 밥상을 받기만 했던 아버님이 보셨다면 상것들이나 하는 행동이라며 혀를 차셨을 것이다. 같은 매장 안에서도 아웃과 인이 구분되는 경우도 있다. 식사를 마치고 앉은 커피 매장은 기껏 차단봉에 늘어뜨린 벨트 하나로 안과 밖을 구분 짓는다.
변화의 속도가 빠른 디지털 시대는 혁명적이다. 삶의 형태도 관습도 변하고 있다. 놀이와 일이 즐겁게 결합되고 그 경계마저 모호하다. 무엇이 변화를 이끄는가. 디지털의 결합과 융합이 삶의 방식을 바꾸고 있는 것인가. 휴대폰에 TV를 테이크아웃하고, 캠코더, 녹화, 음악, 영상을 손안에 테이크아웃 한다. 휴대폰은 각각의 영역을 무너뜨린 복합기기다. 이제 그것이 없다는 것은, 뇌를 잃어버린 듯 멍멍해진다는 말과도 같다.
아날로그에 의존하던 고정시설의 의미가 퇴색되어 사무실도 테아크아웃 한다. 휴대폰과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다 좋을 수는 없다. 하루 일과의 기준이 뒤죽박죽이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거리가 메시지로 쏟아질 때는 짜증이다. 도시의 수많은 사무실이 비워지고, 삶의 근거지를 수시로 바꾸어야 한다. 원하는 장소에서 식사하고, 제도를 벗어난 홀가분한 삶을 추구하려는 개인주의와 각자도생을 상상해본다. 무형식의 형식들이 기존의 제도와 질서를 추월하거나 파괴하는 혼란한 현실이 어지럼증을 낳는다.
사람의 꿈과 능력을 테이크아웃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다. 자유로운 세상에 절대 자유롭지 못한 오늘의 청춘들이다. 무한히 다름을 인정하고, 싱싱한 꿈을 테이크아웃해주는 사회는 건강하다. 그들의 실패를 격려로 보듬는 근사한 어른들이 필요한 세상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오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노인이 천대받는 사회는 슬프다.
묻혀 있는 이들의 전문성을 테이크아웃하지 못하는 단절된 세상은 불행하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존 키팅 선생처럼 진부함을 버리라고 가르치는 시대의 돈키호테는 없는 것일까. 죽은 듯 숨겨진 재능을 꽃피울 때, 세상은 살아 있는 사회로 거듭나지 않을까.
인류의 역사는 移住이주의 역사였다. 정착인의 삶에서 유목민으로, 그리고 또 다른 정착지로 움직이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삶의 방식이나 주어진 환경에 따라 집도, 일도, 먹는 것도, 테이크아웃하거나 테이크인 하게 된다. 안과 밖, 행복과 불행, 즐거움과 고통의 경계가 때론 애매하지만, 이 또한 한 세계 속에 존재하는 지극히 보편적인 삶의 유동일 뿐이다.
The 수필 – 2020 빛나는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