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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3) † 여섯 번째 교회, 빌라델비아/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나사로 가정교회(3:7-13)
계시록 3장 8절은 “보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한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시고 열면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분이신 주님은 오늘날 성경으로 돌아가, 초대교회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성경의 말씀을 회복하려는 신실한 믿는 이들에게 “닫을 사람이 없는 열린 문”을 주셨다.
그런데 오늘날 회복되고 합당한 교회가 존재할까? 교회 역사는 어떤 교회가 잠깐 회복되었다가는 소리 없이 타락하여 사라지는 자칭 ‘회복 교회’ 또는 ‘형제사랑 교회’ 또는 “빌라델비아 교회”들을 보아왔다. 인간은 둘 이상 모이면 갈등을 조장한다. 교회 내의 많은 갈등과 분열이 우리의 혼을 처리하기 위한 하나님의 다루심이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을 너무 도외시한 표현인 듯하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도 그가 하나님과의 서원을 맹세했다고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면 바위에 이끼가 끼듯이 이행될 수 없음을 깨우치신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사람의 영이 성전이므로 바로 사람의 영은 교회이다. 또한 단체적인 교회의 단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회복은 극히 개인적인 교회, 곧 믿는 이의 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리나 교회법 등으로 서로를 단절시킴으로써 불행히도 교회 간의 사람의 이동과 성령의 흐름이 차단되어 버렸다. 특히 물질적인 교회로 전락한 교회의 벽이 너무나 두껍고 견고하여, 개인의 회복 또는 성화가 교회의 개혁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어려우며 사실은 불가능하다.
마치 큰 바위 덩어리에 계란을 던지는 꼴일 뿐이다. 어떤 교회이든 막론하고 교회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두꺼운 이끼로 덮일 것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교회관에 대하여, 특히 고린도전․후서를 통하여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은 이 보다 훨씬 심각하여 치유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만일 사도 바울이 오늘날 다시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심하게 변질시켜버린 거대한 독립 국가인 정치적인 로마가톨릭교회과 수많은 종파로 분열된 개신교회의 허다한 문제점을 조금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자칫 바울이 교회의 개혁을 이야기한다면, 교리나 교회법이나 교회의 관례나 권위에의 도전이나 이단 시비나 괘심죄라는 명목으로 묵살당하고 마침내 파문당하거나 화형식에 처하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것은 예수님의 시대와 무엇이 다른가? 그러므로 나는 오늘날 빌라델비아 교회를 말할 때, 이것은 개인적인 교회로 이해하려고 한다. 곧 사람의 영이 성전이므로 바로 우리가 교회인 것이다. 단체적인 교회는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현실 불가능하다. 회복된 개인 교회 간의 깊은 영적인 유대관계를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부단히 확산시켜나가야 한다.
회복한 개인들이 모인 단체적인 교회, 곧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루어지도록 이를 위해 영안에서 지속적으로 기도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오늘날의 정보통신 매체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의 메시지를 띄우는 이유이다. 2025년부터는 네이버에 카페를 내고, 지난 10여년 간 다움 까페에서의 글씀을 총정리하여 체계화하면서 네이버 까페에도 “나사로 가정교회”를 확장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첫 단계는 개인적인 회복의 열매를 나는 ‘어느 가톨릭평신도의 하나님 말씀묵상’이라는 카페를 열고, 타락한 한국가톨릭교회를 향하여 “성경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 사도들의 가르침을 회복하자”는 이 시대 하나님의 갈망인 교회 개혁의 메시지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역으로 감당하고 용감하게 말씀을 선포하며 저항해 왔다.
두 번째 단계로는 4년 전부터 계속해온 한국가톨릭교회로부터의 탈출과 가정교회인 “나사로 교회”를 네이버 카페에도 확장하는 것이다. 동시에 지금까지의 모든 글씀의 내용을 재분류하고 정리하여 멧시지를 올리고, 또한 전체 성경에 대하여 나사로 가정교회 주석집 완성에 도전하고자 한다. 나사로 가정교회는 이제 개신교회 개혁과 회복에도 도전하고 저항할 것이다.
물론 나는 기존 교회를 신뢰하지는 않지만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들의 역할을 수행해 갈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지향하는 나사로 가정교회는 기존 교회들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진정한 진리의 추구를 양보하지 않으며, 오히려 진리와 자유를 선포해 나갈 것이다
나는 계3:7-13절의 빌라델비아 교회를 개인적인 교회로 규정하고 이해하며, 작은 “나사로 가정교회”는 타락한 교회 개혁과 회복을 부르짖고 실천해 나갈 것이다. 나는 4년전, 겉모습은 화려해 보이지만, 성경의 말씀을 왜곡하여 완전히 비성경적인 것을 교리와 교회법으로 묶어놓고 개혁을 봉쇄해 버린 두아디라, 곧 로마가톨릭교회를 탈출하였다.
또한 수없이 분열된 사데교회, 곧 개신교를 탈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할 것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부패한 가톨릭교회와 극도로 분열된 개신교회에서 공식 또는 비공식으로 교육받은 저급한 오늘날의 목사와 사제들의 제도는 개혁과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다.
부패하고 무능하며 사탄의 회에 속한 기존 제도에서 탈출하여, 작지만 빌라델비아를 지향한 나사로 가정교회를 설립하고 확장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나는 빌라델비아의 믿는 이가 되고 싶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회복을 위한 나의 작은 “나사로 가정교회’는 주의 회복을 위하여 활짝 열린, 늦은 가을에 핀 코스모스처럼 하나님의 시대적 선물이요 기회라고 믿는다.
이 일을 감당하고 있는 내 자신의 자질과 능력은 사실 너무 부족하다. 하나님 말씀의 메시지를 쓴다는 것은 너무 힘겹고, 너무 외롭고, 내 몸은 너무 피곤하여 피를 말릴 지경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피를 말리는 것보다 더 힘들고 외로운 작업임을 실감한다. 2023년 7월에 췌장암을 수술하고 항암주사를 11회 맞고, 다시 장폐색으로 2024년 4월에 수술한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2025년 이후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것은 살아계신 주님의 보호하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올해 내 나이 78세, 나는 “사나 죽으나 오직 주님의 것.” 고통 중에도 그러나 한량없는 자유와 평화를 느낀다. “다윗의 열쇠가 악한 자의 손안에 있지 않고, 주님께서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멀지 않는 장래에 주님께서는 전에도 잠깐 보여주신 천국으로 날 인도해 주실 것이다. 아멘.
나에게 주시는 계시를 뛰어 넘어 또 다른 계시 위에 새롭게 서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신성한 말씀과 생명으로 하나로 뭉쳐진 “나사로 가정교회”는 단체적인 빌라델비아 교회가 될 것이다. 많은 가정교회들이 열릴 것을 기도한다. 이제 그 문은 늘 우리에게 열려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능력이지만 이기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갈망하며 나아갈 것이다. 이 교회는 “네가 적은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많은 성경 해설가들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너무 높게 평가하여 이 교회가 매우 강하고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매우 높게 평가하는 반면에 주님은 그 교회가 적은 능력을 가졌다는 말씀하심에 주목해야 한다.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우리의 강함이 아니라, 우리가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오늘날 주님의 경륜 안에서 그분이 원하시는 시대적 계획에 따라 신실하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이상으로 결코 초월할 수 없다. 주의 은총을 강탈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믿는 이들 중에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것도 받은 것이 없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우리 중 가장 작은 자라도 그분으로부터 어느 만큼의 은총을 받았다. 우리는 그 은총을 사용하는데 최선을 다함으로 그것을 써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잘하였다! 너는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네가 가진 능력으로 내 말을 지켰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내 말을 지켰다”고 말한다. 빌라델비아의 뛰어난 한 가지 특색은 그 교회가 “주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이다. 나는 교회의 교리나 관례나 전통적인 방식으로가 아닌 순수한 말씀의 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진리를 크게 외친다. 이렇게 하는 것은 기존 교회와 그 안에 속한 믿는 이들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주의하며, 나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지향(指向)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또한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표현이며, 주님의 이름은 주님 자신이다. 변절된 교회는 주의 말씀에서 벗어나 사이비 이단이 되었다.
개신교회인 사데교회는 로마가톨릭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의 한계와 문제로부터 태동하였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개신교회의 한계와 문제로 인하여 태동하는 교회이다. 개신교회는 비록 천주교회 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많이 회복했지만, 그 자신을 루터파, 웨슬리파, 장로교파, 침례교파 등 실로 수많은 다른 이름으로 분열되어 주의 이름을 배반하였다.
주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은 변절이며 배교이다. 주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교회를 명명하는 것은 영적 간음이다. 회복된 믿는 이와 가정교회는 발람의 교훈(계2:14), 니골라당의 교훈(2:15), 이세벨의 교훈(2:20), 사탄의 비밀(2:24) 등이 전혀 없고, 주님께 절대적으로 속해 있으며, 어떤 교파들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고 그분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갖지 않았다.
계시록 3장 9절은 “보아라. 사탄의 회당에 속한 사람들,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지만, 사실은 유대인이 아니라 거짓말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그들을 오게 하여, 너의 발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한 줄을 알게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야이며 열조들의 소망이었던 다윗의 아들을 버렸고 유대인으로서의 태도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참으로 기꺼이 비천한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라야 유대인이며, 그렇지 않으면 육체로는 자칭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거짓의 아비에게서 났을 따름이다(요8:44). 그들에게는 지금 제사장도 제사도 없고 남은 것은 다만 회당에서의 예배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당과 그 안에서의 예배는 결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에게 속한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와 벗이 되지 않은 자는 그분을 대적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을 그분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들은 비록 문이 여전히 그들을 향해 열려 있다고 자랑하지만, 이것은 다만 그들의 거짓말일 뿐이다.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로 기꺼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육체적으로 유대인인 자가 반드시 다 유대인이 아님”을 증명한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첫 번째 사람이며, 아브라함이 한 것을 하지 않는 사람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다윗에게 기꺼이 항복하지 않는 사울의 후예들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들의 모임을 인정하지 않으시며, 그들을 다만 사탄의 회로 여기실 따름이다. 초대교회 안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지독히 모독하고 핍박했지만, 오늘날 믿는 이들은 그들의 손아래 있지 않다. 주님은 거짓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분이 칭찬하신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절하고, 주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시인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들의 나라는 본래 하나님의 최고의 약속을 받은 백성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마땅히 그들보다 더 높은 사람들 앞에서 엎드려야 했다. 그들은 과거에는 이방인들보다 더 높았지만, 그러나 나중 된 자가 처음 된 자보다 높아질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작은 교회
“오늘의 위기로부터 또 하나의 교회가 솟아나리라/많은 것을 잃고 보잘것없이 작아져 거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교회/번영의 시대에 지었던 건물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교회/신자 수는 격감하고 사회적으로 누리던 특권도 내려놔야 하는 교회/하지만 경험의 중심에 다시 신앙을 놓는 소수로부터 다시 시작하는/몹시 영적인 교회가 솟아나리라/좌파와 우파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정치적 중요성을 은근히 뽐냈던 모습과는 거리가 먼 한결 영적인 교회/가난한 이들의 가난한 교회가 나타나리라/마침내 세상은 보리라/이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믿음의 작은 무리를/세상은 얻으리라/그토록 찾아 헤맸던 해답을/자신들에게 희망이 될 작은 양떼를”
교황이 되기 한참 전의 신학자 라칭거의 글이다. 1969년 성탄 밤 독일의 한 방송국(Hessischer Rundfunk)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교회의 미래를 주제로 행한 강의 가운데 일부다. 비관적이면서도 희망적인 이 글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칼럼 등에 간간이 인용되었는데 대부분 라칭거의 사상적 ‘전향’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인터넷 가시에서 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