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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房 | 하는 일 - 교명(敎命), 의대(衣襨), 함궤상석, 병풍, 요채여. 의주 | 참여화가 --김양신, 장대원, 김재공, 신한평, 이인문, 김득신, 박인수, 장한종, 김건종, 김경두, 이사집, 변광복, 박유성, 이수민, 이명유, 신호, 최창우, 감한영, 이윤민, 윤인행, 김명원, 장완, 김철신, 김응수, 이유담, 정이항, 김재수, 임익수, 어굉, 조 경우, 박치경, 초중길, 김명기 |
二房 | 중궁전연여(中宮殿연輿), 의장, 유옥교(有屋轎)1좌. 옥교1좌. 안복(按袱)2쌍 | 김재수, 허포, 이유담, 김응수, 최중길 |
三房 | 옥책(玉冊) 금보(金寶) 동뢰연기명 | 김철신, 변광복, 박인수, 이사집 |
가례의계도에 참여한 화가는 미술사에서 이름이 알려진 화가들이 많다. 이것은 한국 미술사에서 도화서 화원들의 역할을 미루어 볼 수 있다.
2) 어진(御眞) 제작
임금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일은 도화서에서 가장 큰 업무 중의 하나이다. 더구나 임금의 어진 제작에는 화원들이 최대의 정성을 들여서 제작해야 하였다. 어진 제작을 할 때는 도감을 설치할 때도 있었다. 화원의 화가 중에 인물화에 뛰어난 화가를 골라서 맡겼다. 이를 어용화가(御容畵師)라고 하여 한 계급 더 올려주어서 문관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
어진 그림은 얼굴을 똑 같게 그려야 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그림을 아주 정교하고, 기계적으로 그렸다. 이런 이유로 사대부 초상화가 오히려 더 생기가 있게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이 많았다.
3) 자기화(磁氣畵)의 제작
도화서 화원이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었다. 궁중에 사용하는 자기에 그림을 그렸다. 19세기에 오면 사대부 관료나 돈있는 사람의 부탁을 받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많았다.
4) 지도 제작
지도 제작은 단순히 그림만을 그리는 작업이 아니다. 실지 측량이나 도면을 작성하는 일도 화원들이 하였다. 지방으로 직접 내려가서 실측한 후에 돌아와서 그리는 일이 많았다. 화원이 무관직으로 지방에 배치되어서 그리는 일도 많았다.
도화서는 예조에 소속되어서 조정의 일반적인 도화 업무를 맡았다면, 자비대령화원은 왕의 직속 기관인 규장각에 소속되어 왕과 관련되는 업무를 맡았다. 화원은 본래 예조 속아문(屬衙門)의 도화서 소속이다.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도 기본적으로 도화서 소속 화원이다. 항상 국왕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待令)서 대기하고 있다는 성격의 화원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기관의 정식 기관이라기 보다는 도화서에서 파견 근무한다는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직접 관리하는 사람은 왕이었으므로 녹봉이라든지, 실재의 그림 솜씨는 시대를 대표할 만한 화가들이었다. 따라서 자비대령화원 화가를 검토해보는 것은 정조 시대의 회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자비대령화원 화가를 뽑을 때는 시험을 치루었다.(녹취) 시험 과목은 인물, 속화, 산수, 누각, 영모, 초충, 매죽, 문방 등 8개 과목을 시행하였다. 도화서 녹취 과목과 차이점은 속화와 문방, 누각이 시험 과목에 포함된 것이다. 시험 과목이 추가된 것은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므로, 회화관에 변화가 나타난 것을 보여준다. 속화와 문방, 그리고 누각도는 조선 후기의 삶이 매우 현실적이었을 뿐아니라 도시화 되어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 정조 시대에 속화가 유행하고, 장식용인 책거리 그림과 민화가 유행한 것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제도적인 틀에 갇혀 규범화되어 있는 화원 제도로서는 변화하는 시대상을 담아 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미술사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화서 화원들로는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기가 어려웠고, 새로운 제도로 개편하기에도 부담스러웠으므로 ‘자비대령화원’이라는 임시 제도를 만들어서 운영하였으리라 한다. 19세기에 도화서가 폐지되는 운명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을 미리 예견할 수 있다.
그림을 평가하고, 그림에 근거한 화가의 평가는 화가를 후원하는 사람의 시각이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자비대령화원의 화가를 뽑는 일에 직접 관계하는 사람은 국왕이었다. 시험은 매우 까다로웠고, 지원하는 화가들의 질적 수준도 아주 높았다.
당시의 화가들은 생계가 무척 어려웠다. 많은 화가들이 지원하였다. 동료 화가들과 경쟁도 치열하였다. 도화서와 달리 정조가 직접 시험을 치루었으므로 정조의 회화관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단순히 정조의 취향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시대의 회화 양상을 결정하는데도 중요하다. 정조는 김홍도를 총애하였다. 변상벽의 아들인 변광복을 특히 아껴서 채용 시험에 특혜까지 주었다. 정조가 죽고 난 뒤의 순조 때는 변광복은 거의 이름을 드러내지 못한 것을 보아서 재능이 특출한 화가는 아니었으리라 한다.
신한평(신윤복의 아버지)은 정조의 시선을 거의 끌지 못 하였다. 취재 시험에서 아주 낮은 평가를 받았고, 심지어는 그림을 잘못 그렸다 하여 귀양을 간 일도 있었다. 그러나 속화를 잘 그렸다는 평을 받았다. 신윤복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신한평은 이후에 순조 때는 좋은 평가를 받으므로 변광복은 반대의 운명을 가진다.
이인문은 정조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 이인문의 그림을 봄으로 정조의 회화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정조 시대에 화원 취재에서 평가를 받은 화가를 살펴 봄으로 정조시대에 어떤 그림이 인정을 받았는지 알 수가 있다.
김덕성(1728-1797)은 산수와 인물, 속화를 잘 그렸고, 누각, 영모, 매죽은 점수가 낮았다.
김응환(1742-1789)은 누각, 문방 등의 계화에 능하였고, 인물은 성적이 낮았다.
김홍도는 모둔 화목에서 모두 뛰어났다고 평하였다. 우리는 정조가 이인문의 화풍을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조가 그런 유의
그림을 좋아하였다면 화원 화가에게는 그런 그림을 많이 그렸을 것이다.
이인문(1745-1821)은 산수와 인물에 점수가 높았고, 영모와 속화는 조금 낮았다.
김득신((1754-1822)은 산수와 초충을 잘 그렸고, 속화, 인물, 매죽도 점수가 아주 높았다.
장한종(1768-1815)은 속화를 잘 그렸고, 인물은 낮았다.
오순은 누각과 영모 및 산수를 잘 그렸다.
유운홍(1797-1859)은 매죽, 누각, 속화를 잘 그렸다.
이한철(1808-1880경)은 거의 모든 화문에 높은 점수를 받았다.
정조시대 때 녹취 시험의 평가를 참조해본다면, 이 시대의 화가들에게도 자기가 잘 그리는 화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한평과 변광복의 예에서 보면 그림의 평가는 절대적인 기준이라기 보다는 후원자 내지 감상자의 평가 기준이 중요하였음도 알 수 있다.
김홍도는 현감까지 지내고, 환갑과 진갑을 지낸 나이인데도 김득신과 한 자리에 앉아서 취재 시험에 응하였다. 그리고는 한참 후배인 김득신보다 낮은 점수를 받는 수모도 감내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화가들이 사회경제적 여건이 아주 열악하여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녹봉을 받는 일이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었음을 말한다.
자비대령화원의 응행절목(應行節目)에 의하면
“화원 화가는 원래 기본 급료가 없고 단지 6개월 마다 돌아가면서 받는 녹봉이 있을 뿐이다. 별도의 체아직으로 녹봉을 받는 화원과 지방관으로 나가 있는 화원 외에는 단지 윤번으로 돌아가며 식료(食料)를 받는다.”
라고 하였다.
자비대령화원의 취재를 기록한 자료에 의하면 화원 화가를 배출하는 유력한 화가 가문이 눈에 뜨인다. 김응환을 대표로 하는 개성 김씨. 이형록의 전주 이씨, 허굉의 양천 허씨, 장한종의 인동 장씨. 김덕성의 경주 김씨. 이명규의 전주 이씨, 백은배의 임천 백씨, 박기준의 밀양 박씨 가문이 대표적이다. 이들 가문 사이에는 혼인으로 서로 맺어져 있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 새로운 미술사조가 들어오면서 미술의 양식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화원화가를 배출한 가문 출신의 화풍은 진경산수와 풍속화의 전통을 지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제도의 규범 속에서 보수적인 성향의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반대로 화원 가문을 크게 형성하지 못한 집의 출신 화가들은 새로운 미술 사조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다. 김정희의 제자들로서 추사파라고 불리는 화가들에게 그런 경향이 강하였다. 이들은 이한철, 박인석, 유숙, 조중묵, 유재소 등으로서 자비대령화원의 바깥에서 활동한 화가들이다. 이한철은 아버지가 화원화가인 이의양이지만, 그 외에는 이름이 알려져 있는 화가가 없으므로 명문 화원 가문은 아니었다. 이들은 미술사에서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창의력을 발휘함으로 19세기 미술사에 이름을 남겼다.
자비대령화원 화가가 그리는 그림은 정조 시대의 화풍에 틀림없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또 정조의 회화관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조의 회화관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정조는 이인문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였다. 김홍도를 총애하였다. 김홍도는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을 여행하고 해산첩을 남겼다. 이들의 그림은 실경 산수적이면서 맑고 고아한 맛을 준다. 이것을 미루어서 정조의 회화관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화원의 기예를 시험보았는데, 옅은 먹으로 휘갈기고, 번지게 하여 사의법같은 그린 자가 있었다. 임금이 분부하기를 ‘화원 그림에서 말하는 남종은 귀한 점이 치밀하고, 섬세한데가 있거늘, 이처럼 아무렇게나 제 멋대로 그렸으니 이것이 비록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편치 않으니, 그 자를 가려서 쫗아내라”(검교직각 신 서용보가 1791년에 쓰다.)
위의 기록을 보면 정조는 작가가
“주관적으로 아무렇게나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치밀하고, 섬세하게 묘사하여 일정한 격식을 갖추어, 단지 형사를 넘어서서 최종적으로 신운(神韻)의 경지에 이르는 그림을 오구하는 것이다.”라고 강관식은 말하였다.(강관식, 조선후기궁중화원연구(상). 돌베개. 2001)
정조가 직접 언급한 말과, 강관식의 해설을 참조하면 정조는 조선의 전통적인 진경산수 계통의 그림과, 중국서 들어오는 문인화 계열의 화론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좋아한 화가의 그림은 진경산수에 가까운 그림이다.
진경산수를 그린 정선이 노론 집안의 안동 김씨와 가까웠던 점을 감안한다면 관변 주변의 화가들은 전통적인 그림을 그리므로 보수적인 경향을 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가 죽고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정조 시대의 관변 화가들이 그렸던 전통적인 양식의 그림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변화를 일으킨 사람은 관변 화가가 아니다.
도화서 구성원인 화원들은 조선시대 동안 천시를 받았다. 16세기에 이르러 약간의 신분 상승이 일어나면서, 도화서라는 국가 기관에서 녹봉을 받는 직책을 가지므로, 화원만 전문으로 배출하는 가문이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17-18세기 경에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약 45가문이 이름을 남기고 있다. 19세기가 되면 화원 가문의 수가 줄어들면서 특정 가문을 중심으로 도화서 화원이 형성되었다. 도화서는 관립 기관이므로 보수 성향을 띄는 것은 당연하다. 몇 몇 가문의 전통적인 회화가 도화서의 전통적인 화풍을 지배하면서 조선의 회화사에 하나의 역할을 한다.
중인 신분인 화원이 자신의 신분 상승을 위해서 노력하는 양상도 나타났다. 의관, 역관 등이 중심이 되어서 자신들의 신분상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서 연대를 하였다. 영조대 이후로 서얼들이 신분상승을 요구하는 통청운동이 정조대에 성과를 거두자 이의 영향도 받았다. 1851년 4월 25일에 기술직 중인들이 한 곳에 모여서 자신들의 신분 제약을 철페해주기를 요구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5월 20일에는 도화서에 다시 모여서 화원이 4명 유사로 뽑혔다. 이 운동에 참여한 중인 기술직인들은 1670명이었고, 이 중에 도화서 인원은 79명이었다. 거사 자금으로 20냥을 배정받았다. 8월 18일에는 왕의 행차에 맞추어서 길에서 시위를 벌이고, 상소문을 올렸다. 이후로 신분이 상승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 양반의 수는 급격히 늘어나고, 관직의 수는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생계가 어려운 양반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들은 노동과 같은 천한 일에 직접 뛰어들기 보다는 화업에 기웃거리면서 그림을 그리므로 화원의 신분 상승도 자연스레 일어났다. 서민 경제의 발달로 중산층의 생활이 여유로워지자 일반 가정(여염집)에서도 그림을 찾는 일이 많아졌다. 그림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화가들도 상업적인 그림을 그리는 일이 많았다. 도화서에서 녹봉을 받는 것보다 개인적인 화업을 열므로 생계를 꾸릴 수가 있었다. 도화서를 떠나는 화원도 많아지면서 도화서늘 활력을 잃고 침체하였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새로운 화풍이 외부로부터 유입되므로 도화서 화원들은 도전을 받는다. 그뿐아니고 도화서의 역할도 즐어들고 도화서의 활동도 미약해졌다. 돠화서에서 활동하던 관변화가들이 도화서를 떠나는 일이 많았다. 새롭게 떠오른 부유층이 사대부의 기호를 쫓아서 그림을 찾았다. 도화서를 떠나서 이들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제작하여 생활을 꾸리기도 하였다. 일부 화가는 도화서를 떠나서 ‘유랑화가’의 길을 떠나기도 하였다. 도화서 화가들이 조선의 미술사를 떠받드는 역할이 사라지면서 도화서의 폐지도 멀지 않았다.
도화서 폐지의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1883년에 대안동의 자기 집에 사진관을 채린 황철이 도화서를 폐지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이 사실은 이때까지는 도화서가 유지되어 있었음을 알려 준다. 도화서의 하는 일이 사진이 하는 일과 중복된다는 사실도 말해준다. 1905년에 도화서가 완전히 폐지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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