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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무의도로 연결되는 연도교가 있는
샘꾸미(광명항)로 나선다.
멀리 섬, 소무의도가 보이고
그 섬으로 넘어가는 다리, 소무의인도교가 놓여있다.
'소무의인도교',
명칭은 사람이 건너는 다리를 뜻한다.
나오는 길에 승용차가 통행하는 것을 보니
공용으로 사용중인것 같다.
총길이 414미터로
2011년 4월 준공되었다.
방금 지나온 광명항이다.
광명항 오른쪽 모습이다.
동해와 달리 바다색이 탁하다.
가치로 따질수 없는 것들을 품고 키워내는 갯벌은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며
깃들어 사는 사람들이 살아가게 한다.
소무의도 떼무리선착장이다.
'소무의도'는' 떼무리섬'이라는 옛이름을 가지고 있다.
본섬, 무의도(큰무리섬)에서
따로 떨어져나간 섬을 의미한다.
또한 대나무로 엮어 만든 '떼배'만 하다고 하여
띄무, 뙤무리, 떼무리로 불렸을 것으로도 추측된다.
'소무의도는 3백 여 년 전 ‘박동기’씨가
딸 3명과 정착한 섬으로
실제 대무의도보다 먼저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기계 유씨 청년을 데릴사위로 들이면서
유씨 집성촌이 형성됐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연도교를 지나 소무의도에 닿는다.
그리 넓지않은 곳이지만
풍광이 아름다워 섬을 일주하는 8개 구간,
약 2.5킬로미터 해안과 능선, 언덕과 마을을 잇는 길이다.
그 명칭이 '무의바다 누리길'이다.
1구간 '소무의인도교길'이
방금 건너온 연도교다.
순서를 따라 2구간으로 걷자면
다리 건너 왼쪽길, 떼무리항을 따라 해안길로 접어들어야하지만
정면 산으로 연결된 계단을 오르기로 한다.
8구간, '키작은 소나무길'이다.
해풍을 맞으며 자생하는
키작은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서 조금씩 터지는 전망 사이,
소무의인도교를 사진에 담는다.
안산 정상을 산길샘앱에서 확인하니
해발이 1백 미터를 조금 넘는다.
높지않은 산, 짧은 구간에 오르려니
제법 숨이 차온다.
진달래가 봄을 채색하고 있다.
안산 정상에 있는 전망대다.
스스럼없이 나누는 대화가
학교 동창사이인 듯한 무리가 정자를 차지하고있다.
이미 안개는 걷히고
제법 맑은 전망이 나온다.
바다 건너 송도국제신도시가 펼쳐졌다.
한국전쟁 당시 전세역전의 전환점이던 된
인천상륙작전에서 이정표 역할을 한 등대가 있는 팔미도가
오른쪽에 떠올랐다.
'하도정'이라는 이름이
안산정상전망대 현판에 걸려있다.
과거 동백하라는 이름의 새우가 풍부했던 곳이라
'새우 하(鰕)'자를 쓰게 된 것 같다.
안내도에 7경으로 표시된 장소다.
하도정을 내려와 7구간으로 접어든다.
남쪽에 떠있는 작은 섬 해녀도를 조망할 수 있는 능선길,
'해녀섬길'이다.
건너편으로 레이더기지탑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입출항 선박 관제를 위하여
해양항만청에서 설치한 레이더시스템이다.
진달래가 무리지어
화사하게 꽃을 피웠다.
해녀섬이 가깝게 보인다.
전복을 따던 해녀들이 쉬던 섬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ㅣ다.
과거에는 연안부두 조성 공사에
채석장으로 이용되었다.
이 후 채석이 금지된 후,
현재의 모습을 보존하게 되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6구간이 시작된다.
6구간, '명사의 해변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족, 지인들과
휴양을 즐겼던 곳이다.
경치가얼마나 좋았던지 미루어 짐작되는 내용이다.
한편, 과거 우기에는
죽은 사람 시체들이 자주 떠밀려왔던 곳이기도 했다.
6구간이 시작되는 초입,
해변에 방치된듯 허름한 집이 보인다.
이정표에 덧붙여진 안내문이 눈에 띈다.
'아껴주세요! 이곳은 개인의 사유지예요!
... 산주 정명구 올림'
젊은 산주 정명구의 따뜻한 마음과 간곡한 당부가
내 마음에도 와 닿는다.
'소무의도가 외국자본에 넘어가는 걸 막고싶어
가족들이 모두 합심하여 전 재산을 담보로 빚을 내
2010년 취득하여(섬 전체의 62%) 주민들과 가꾸어
2012년 '무의바다누리길'로 개통하여 무료로 개방...'
그런 따스한 마음은 외면받았는지
인적은 없고 폐가처럼 방치되어있다.
바다를 바라보는 남녀 한 쌍이
밀려드는 물결을 바라보고있다.
자그마한 해수욕장에는
하얗게 바랜 조가비가 잘게 부서져있다.
대통령휴양지로 사용되던 때에는
아마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으리라 짐작된다.
6구간은 다시 산으로 올라가
허리를 돌아간다.
산주 정명구의 간곡한 당부가 계단에도 붙어있다.
물밑에 있는 바위 두 개, 쌍여가 밀물에 드러나면
그 곳으로 나가는 길목이라하여 '목여'라 부르던 '몽여'다.
산책로를 보강하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6구간 '몽여해수욕장길'이다.
끝에 '몽여'가 보인다.
잘게 부서진 조가비가 곳곳에 덮여있고
바다가 닿는 곳에는 자잘한 돌이 깔려있어
맨발로 해수욕하기에는 적당치 않아 보인다.
해변에 세워진 '섬이야기 박물관'이다
소무의도는 작지만 다양한 어업으로 돈이 많았다고 한다.
섬 주민들은 이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순사들의 눈을 피해
독립 자금을 많이 지원했다고 한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 것’이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귀국 후
이 작은 섬을 찾아 시국 강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1946년 11월께 일이다.
바쁜 일정을 쪼개서 김구 선생이 이 섬까지 찾아 왔던 것은
아마도 독립을 향한 섬 주민들의 열정에 대한 답례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출처 : http://www.ekn.kr/news/article.html?no=426979>
해변을 벗어난 길은
바다에 닿는 야산을 돌아간다.
4구간 '부처깨미길'이다.
만선과 안전을 기원하는 풍어제를 지냈던 곳이다.
전망대가 나타난다.
소무의도의 모습이
또아리를 튼 뱀을 닮았다고 전해지는데
이 곳이 뱀의 머리부분에 해당한다.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 방향이다.
몽여해수욕장 앞바다다.
섬을 돌아 반대편으로 소무의인도교가 보인다.
야산 능선을 따라간다.
3구간 '떼무리길' 이다.
소무의도의 자연생태가 잘 보존되어 있고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 당산길이다.
방금 돌아온 길이다.
소무의인도교가 가깝게 다가온다.
이제는 어선만이 드나드는 떼무리항도
한눈에 들어온다.
3구간을 내려서며
소무의도 서쪽마을길이 시작된다.
2구간 '마주보는 길'이다.
본섬인 대무의도를 마주하며 걷는 길이다.
안내도에 소개된 '모예재'다.
동쪽과 서쪽마을을 넘나드는 고개마루로,
서쪽마을에 사는 효심 지극한 아들이
동쪽마을에 사는 어머니 문안을 드리기 위해
항시 넘어 다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 소무의인도교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소무의도 6경 '장군바위'를 찾아간다.
인도교에서는 바로 내려가지 못하고
왼쪽으로 돌아 다리 밑으로 돌아 해변으로 내려갈 수 있다.
남쪽해안에 있는 바위로
물이 빠졌을 때 걸어가서 볼 수 있다.
바위를 찾아가지만 안내하는 이 없으니
쉽게 알아 볼 수 없다.
두어구비를 돌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 나온다.
장군바위에는 전해지는 설화가 있다.
해적들이 섬을 약탈하기 위해 염탐을 하는데
시커먼 바위형상과 그 아래 하얗게 앉아있는 갈매기떼를 보고
장군와 병사로 착각하고 물러났다는 내용이다.
인도교라는 명칭과는 달리
승용차가 다리를 건너고 있다.
다시 샘꾸미선착장으로 돌아 나왔다.
다음 목적지는 하나개해수욕장이다.
호룡곡산으로 다시 올라
갈림길에서 하나개해수욕장으로 가는 길도 있지만
왔던 길 보다는 새로운 길을 걷기로 하고 도로, 대무의로를 걷는다.
삼거리에서 왼쪽도로로 접어들면
그 끝에서 하나개해수욕장을 만난다.
도로 끝, 하나개로가 개통되면서 끊어진
산길을 연결한 구름다리가 걸려있다.
희미하던 중앙차선이 없어졌다.
아니, 아예 차선이 그어져 있지 않다.
도로변에 걸린 '해상 관광탐방로 개통',
현수막이 눈길을 끌며 호기심을 자극한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하나개해수욕장,
유원지 입구를 들어선다.
해변에는 모래가 밀가루만큼이나 곱다.
몇 군데 지나친 해변과는 다른 모습이다.
국사봉 등산 중 들었던
구령과 함성소리 정체가 밝혀진다.
산행중에는 군부대 훈련중이라 여겼는데
막상 현장에 도착해보니
다소 자유스러운 분위기와 듬성듬성 섞인 여성들,
단체나 회사의 극기훈련장으로 판단된다.
무의도 영상단지다.
'칼잡이 오수정', '천국의 계단' 드라마 세트장이 남아있다.
그 외에서 '꽃보다 남자', '무한도전', '런닝맨' 등
촬영장소로 이용되었다.
광명항에서 다시 산을 넘어왔다면 나왔을 출구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번 목적지는
얼마 전 개통된 해상관광탐방로다.
하나개해수욕장 모래사장 옆,
바닷물이 빠진 개펄이 수백미터에 이른다.
그 위로 목재데크로 만든 다리가 길게 놓여있다.
2018년 6월 개통된
길이 550미터 해상관광탐방로다.
해수욕장 방면이다.
안내도 상 탐방로에는
이름 붙여진 바위가 12개 있다.
사자바위,
소나무의 기개, 만물상, 망부석,
자연의 신비,
바위틈 사이 시멘트를 발라놓은 듯한 모습이
바닥에 닿아있어서 나무뿌리가 자라는 것 같다고 표현하고있다.
해식동굴,
과거에는 이 곳에서 불을 피우면
광명항으로 이어지는 사시미재굴에서 연기가 났었다고 한다.
현재는 입구가 막혀 들어갈 수 없다.
부처바위, 만고풍상
불독바위,
협곡, 원숭이바위, 햄버거바위다.
해당 바위 앞에 사진과 안내문이 붙어있는데
비교하면서 찾는 재미가 처음엔 쏠쏠하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지치다 못해 짜증스럽다.
사진을 찍은 위치는 아래 개펄쪽인데
위에서 내려다 보며 찾자니 구별이 힘들다.
바위라는 명칭에 큰 바위를 찾는데
의외로 작은 바위들이 많다.
끝, 반환점이다.
다시 돌아나온다.
밀가루처럼 고운 해수욕장 모래사장이다.
하나개해수욕장을 나서며 주변 해안길을 찾는다.
큰무리선착장에서 산행
을 시작하면서 본 안내도에
해안으로 둘레길이 난 것으로 보았던 탓이다.
다시 사진을 돌려보니 일부구간에 대한 안내도였다.
해안 둘레길을 찾을수 없어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구름다리에서 잠시 갈등하다
국사봉 방향 산길을 올라간다.
국사봉을 오르며 만났던 갈림길,
실미고개를 찾아가기로 한다.
한참 오르막을 올라가니
방금 떠났던 하나개해수욕장과 드넓은 개펄이 보인다.
다음 목적지 실미도가 보인다.
실미고개에 당도하기 전,
실미유원지 방향 이정표를 확인하고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크고작은 바위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산길은 좌우로 이어지는데
가로질러가는 방향으로는 호우에 패인 자욱이 보인다.
그리 험해보이지 않아 들어선다.
마른 풀을 헤치며 비닐하우스 방향으로 간다.
비닐하우스 옆으로 난 길로 올라선다.
실미유원지 초입 방풍림이다.
방풍림을 지나 실미유원지, 해수욕장에 들어선다.
말뚝을 세워 출입로를 지정해 놓았다.
바깥쪽으로는 어촌계 양식장으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구간 일부에 바닷물이 남아 있지만
건너는데는 전혀 무리가 없다.
실미도에 들어섰다.
오른쪽으로 백사장 끝,
굵은 모래와 자잘한 돌이 널려있는 사이로
일부러 길을 만든듯 조개껍질을 뿌려놓았다.
해안 풍광이 아름답다.
보이는 곳 끝,
산이 떨어지는 곳 제법 큰 바위로 간다.
기묘한 형상을 한 바위들이 널려있다.
무작정 섬을 한 바퀴 돌기에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돌아서면서 빗각으로 기댄 바위와
방금 사진에 담았던 바위를 뒷면에서 본다.
바위 아슬하게 돌출된 부분에 얹은
돌탑이 가상하다.
하얗게 바랜 조가비가 밀려들어
두텁게 쌓였다.
무의도와 연결된 해변 왼쪽은
제법 긴 모래사장이 반원형으로 돌아간다.
모래사장이 끝나고
그 너머로는 다시 긴 해변이 펼쳐진다.
조금 더 걸어보고 싶기는 하지만
현재 시간이 4시 반,
물길 열리는 시간이 17시 16분 이라 욕심을 접고 돌아선다.
밀물은 아직도 개펄을 길게 드러내고있다.
풀등으로 열린 길을 걸어 실미도를 나온다.
1968년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1968년 4월 1일 북한침투작전을 위해 실미도 부대가 창설된다.
중앙정보부의 ‘특수공작 지시’로 창설된 실미도 부대는 ‘209파견대’, ‘684특공대’, ‘오소리공작대’ 등
다양한 명칭을 가지고 3년 4개월간 특수공작훈련을 받았다.
본래 ‘특수공작 기본계획서’에 의해
사형수로 구성될 예정이었으나
법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민간인으로 대체되었다.
중앙정보부는 예산지원과 정기적인 훈련 상태 점검을 담당하였고,
공군이 부대 운영과 훈련을 책임졌다.
혹독한 훈련과 열악한 보급 및 보수 미지급에 불만을 품은 공작원 24명이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경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하면서 시작되었다.
12시 20분경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하던 중
인천에서 육군과 최초의 총격전을 벌인 후
두 번째 버스를 탈취해
오후 2시 15분경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이들은 저지하는 군·경과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부대원 대부분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으로 경찰 2명과 민간인 6명,
그리고 공작원 20명이 사망하고,
생존 공작원 4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972년 3월 10일 사형 집행되었다.
<출처 : http://encykorea.aks.ac.kr/>
실미유원지를 나선다.
예정했던 장소를 둘러보고
큰무리선착장으로 가는 길이다.
차도를 따라 걸어
실미고개 갈림길에 당도한다.
산길을 다시 걸을까 잠시 망설이다가
차도를 내쳐걷는다.
물 빠진 개펄에
작은 어선이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선착장에 당도한다.
이제는 차량으로 닿을수 있는 무의도,
가파르지 않은 산, 자주 나무에 가리지만
가끔 트이는 전망은 서해바다를 시원하게 조망한다.
슬픈 역사를 간직한 실미도,
담담한 이야기를 오롯이 건네는 소무의도,
편안하게 소요하는 하루가 알차다.
다시 한 번 여도교 무의대교 개통 관련 기사를 게시합니다.
인천 잠진도와 무의도를 연결하는
무의대교가 오는 30일 임시 개통한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오는 30일부터 7월 29일까지
임시개통 기간 중 차량통행을 제한하며주변 도로상황이 정비되는 대로
단계별로 개통할 예정이라고 25일 밝혔다.
이에 따라 7월 29일까지 주말과 공휴일, 근로자의 날에는
차량 총량이 900대 미만으로 제한된다.
단, 평일에는 누구나 제한 없이
교량을 이용해 무의도를 오갈 수 있다.
통제 예외차량은
무의도 거주민, 공공운송 버스, 긴급차량과
교통약자(3세 미만, 75세 이상, 임산부, 장애인) 동승차량,
숙박시설 예약자, 식당예약 관광버스 등이다.
인천경제청은 방문객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현재 725면에 불과한 주차면을
내년 12월까지 2943면으로 늘리고
대중교통 노선을 확대할 계획이다.
잠진∼무의 연도교는
2014년 9월 공사비 612억 원을 들여 착공해
길이 1.6km, 폭 8∼12m 규모로 완공됐다.
인천시 관계자는
“개통 전 모든 교통시설을 완료하지 못해
불편을 드린 점에 대해 사과드린다”며
“임시개통 기간 중 발생된 문제점을
중구청, 경찰청과 지속적으로 점검해
교통소통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출처 : 쿠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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