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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북한 김정일 정권의 선군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
가.선군 정치의 본질
북한에서 발행 된 정치사전에 따르면 “정치란 한 계급이 사회에 대한 계급적 지배와 그 실현을 위한 투쟁과 활동”이라 정의 되어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정치는 수령의 위대한 혁명 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투쟁과 활동”으로서, 이는 “수령과 노동계급 계급의 당에 의해 영도되며 그것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방도와 대책도 노동계급의 당에 의해 제기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정치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이 아닌 “정치”라는 개념에서부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럼으로 북한에서의 “정치란 수령의 사상과 영도를 실현하는 정치적 무기인 노동당이 전 사회를 통제”하는 것을 의미 한다. 그러므로 노동당의 통제를 벗어난 군의 자율적인 정치적 역할이나 군의 독자적인 의사 결정이라는 것은 북한 체제의 특성상 존재하기에 매우 어려운 현상중에 하나이다.
따라서 북한의 선군정치는 군이 노동당의 영도적 지위와 역할을 대신해서 지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당의 군대”를 대표적으로 모범적인 당의 본보기로 내세워 소위 북한에서 이야기하는 “사회주의 위업” 을 달성하기
위해서 국가 전반에 걸친 지도 및 당 정책을 밀고 나가는 당의 영도 방식이라는 것이다. 즉 노동당의 철저한 독재와 그를 지원하는 군사 독재가 바로 “선군정치”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면 되며 이것은 당으로 국가를 통제하기 어려운 현 상황을 통제하기 위한 김정일의 정치 방식이다.
선군정치는 북한군에 대한 노동당의 정치적 영도를 전제로 하고 있다. 북한 노동당 규약 제 7장 제 46조에는 “조선 인민군은 항일 무장 투쟁의 혁명 전통을 계승한 조선 로동당의 혁명적 무장력이다” 라고 그 지위를 규정하고
있다. 북한 노동당은 ‘수령의 사상과 영도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무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으로 북한의 군대는 노동당의 군대 또는 김정일 김일성 개인의 군대 또는 소위 북한에서 이야기하는 수령의 군대로 정의 될 수 있다.
북한의 선군 정치를 이야기 할 때 우선 주의해서 살펴 보아야 할 부분이 군대와 당과의 관계 그리고 서로의 지위에 대한 문제이다. 즉 당과 군이 서열상 어느것이 상위의 조직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의 해답은
북한에서 정형화 되어 있는 “당의 군대”” 수령의 군대로” 그 지위가 이미 알려져 있다. 즉 노동당은 분명히 서열상 북한군의 위에 있으며 북한 군을 지휘 감독하고 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998년 3월 9일 “혁명의 기둥”이라는 제목의 기사 중 북한군에서 “당군화”의 중요성을 역설한 김정일의 다음과 같은 지시를 게재하였다. “구 소련의 몰락은 군대를 비 사상화, 비정치화 함으로써 총을 쥔 군대가 당이 변질되고 국가가 와해되는 것을 보고도 속수무책으로 나 앉아 혁명의 전취물을 지켜내지 못한 결과 였다.” 즉 김정일은 러시아가 몰락한 것은 당이 군을 사상화 정치화 하지 못했기 때문에 몰락했다고 본 것이다. 그럼으로써 북한은 당이 군을 사상화 정치화 시킴으로써 구 소련과 같은 몰락의 길로 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 한 것이다.
북한은 여러 매체를 통해서 김정일시대를 “선군 정치”의 시대라고 공언하고 있다. 1999년 6월 16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및 북한 노동당 정치이론 잡지 “근로자”는 공동논설 “우리 당의 선군 정치는 필승
불패이다” 에서 선군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선군정치는 군사 선행원칙에서 혁명과 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군대를 혁명의 기둥으로 내세워 사회주의 위업 전반을 밀고 나가는 우리 당의 독창적 영도
방식이다.” 즉 여기에서도 당이 군을 영도한다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일은 “나라와 민족, 사회주의의 운명과 전도는 정치에 달려 있으며, 정치의 위력은 정치 방식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 고 주장하고 있다. 김정일은 세습 독재 체제 유지를 위해 <선군 정치>를 자기의 정치방식으로
선택하였으며,”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에서 인민 대중의 무궁무진한 힘을 최대한 발양시키자면 인민군대를 본보기로 내세우고 , 혁명군대의 투쟁정신과 기풍을 따라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정일이 선군 정치의 방식을 택한 것은 당면한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는데서 의존 할 곳은 군부 밖에 없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북한은 현재 “선군 정치의 필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선전하고 있다.
1.군사를 중시하고 군대를 강화하는 정치가 군대의 위력에 의거해서 사회주의 위업 전반을 밀고 나가는 영도 방식이며,
2.인민군대의 혁명정신, 투쟁기풍, 사업방식이 국가 건설과 경제 발전을 추동하는 모델이며,
3.군대가 사회주의 체제 고수에서 혁명의 핵심 역량이며,
4.군대가 혁명의 참모부인 노동당의 전략 목표 및 과업 실현을 무장으로 받드는 기둥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 1998년 10월 20일 <조선 중앙방송>을 통해서 <선군정치>를 “ 김정일 특유의 독창적인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2002년 11월 20일 에는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을 통해서 <선군 정치는 인민군대를 혁명의
핵심부대로 내세우고 혁명군대를 강화하는 것으로서 혁명과 건설 전반을 밀고 나가는 정치 방식> 이라는 해석을 함으로서 군국주의 중심적인 사상의 본성을 나타내 주었다.
그리고 1994년 이후의 정치적 경제적인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김정일의 “선군정치”는 김일성이 시종일관 주장해온 “군사 제일주의 정치”와 본질상 같은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김일성의 군사 제일주의 정치시대와 김정일의 <선군정치> 시기의 국내외적 상황이 크게 변해서 김일성 시대에 비해 김정일의 시대가 더욱 김정일에게 불리하다는 것이다.
좀 더 상세히 살펴 보자면
1.세습독재체제 유지를 위한 국제적 환경이 악화 되었다는 것이다.
-구 소련 등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중국의 개혁 개방적 정책에로의 이행.
-김일성 사망으로 인한 북한 붕괴론 확산
-핵 미사일 개발에 의한 국제적 고립자초.
2.국내적으로는 김정일 집권 이후 독재체재내의 통제에 대한 위기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장기간의 경제 위기, 식량위기로 인한 통치기능의 급격한 악화
-당에 의한 주민 통제의 어려움
-주민생활의 국가의존도 이탈의 가속화
-각종 범죄행위 급증
-탈북자 급증
-김일성 시대와 김정일 시대에 대한 단순 비교와 불만 표출로 인한 권위 추락 및 통제 기능 저하
북한 조선 중앙방송은 지난 2003년 11월 9일 “선군 혁명사상은 주체 혁명 위업 완성의 길을 밝히는 확고한 지도적 지침” 이라는 제목의 방송기사에서 “선군 혁명은 현 시대의 혁명이론과 전략 전술의 기초이며 핵”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방송에서는 “선군 사상이 주체 혁명 위업을 위한 혁명이론으로 되는 근거” 에 대하여 “노동계급 대신 군대를 혁명의 주력군으로 규정하고 군대를 핵심으로 하여 혁명세력을 형성했기 때문” 이라고 주장했다.
-또 “군대를 혁명의 주력군”으로 규정하게 된 이유를 “혁명군대의 투쟁정신이 노동 계급이 발휘한 혁명 정신보다 더 투철하고 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과거에 노동계급이 당의 주력이라고 했던 주장을 군이 대신 함으로서 당의 통제의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면서 노동계급이 군을 배워야 한다고 함으로서 북한 주민들을 통제하고 노동계급의 주민들까지 군이 통제해야 하는 불가피성을 북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날 “조선중앙방송”은 “반제 계급투쟁의 견지에서 볼 때 오늘날의 혁명의 주력군은 지난 시기와 다르게 설정되어야 한다” 고 주장하면서 “ 군대를 혁명의 주력군으로 내세우는 것은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른 것” 이라는 변명으로서 현재 김정일 체제가 안고 있는 국내외적인 위기에 대해 북한식의 어려움을 표현 했다.
이것은 김일성 사망 이후에 김정일 정권과 그 추종자들이 주장했던 “ 온 사회를 주체 사상화 하자”라는 구호 대신 “온 사회를 선군 혁명 사상으로 일색화 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더욱 주민들을 통제하고 군사화해서 병영국가화 함으로서써 지배 체제를 강화 시키고 스탈린식 군국주의
국가화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스탈린식 군국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북한의 김정일 정권은
1.2003년 10월 최고 인민회의 제 11기 제 1차 회의에서 “선군 정치를 유일 지침으로 한 국방 공업 최우선” 정책을 공개적으로 채택 하고 모든 것을 핵 보유를 목표로 하는 국방 경제에 집중하도록 조치하였다.
** 노동신문 2003년 5월 29일자 “군사력이 강하면 남의 눈치를 볼 것 없다” 는 제목의 논설을 볼 것 같으면 : “군사화 될 대로 군사화 되고 힘의 과신에 사로잡혀 핵무기까지 휘두르며 세계 제패에 열을 올리는 제국주의자들에게 그 어떤 자비를 바라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오늘 세계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이 보여주는 교훈은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걸음 양보와 타협이 곧 전쟁과 재난을 불러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제국주의 강권과 전횡에 맞서 나라의 자주권과 존엄을 수호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오직 군력 강화에 있다.
제국주의의 침략을 억제 할 수 있는 강한 군사적 억제력을 가질 때에만 민족의 생존권과 자주권을 지킬 수 있다. 정치에서 자주적인 대를 확고히 견지하자면 나라의 정치 사상적 위력을 강화하여야 하며 여기에서 핵심으로 되는 것은 군력이다. 강력한 군력만 있으면 남의 눈치를 볼 것도 없고 남에게 눌리울 것도 없다” 고 주장했다.
2.군대를 “혁명의 주력군”, “혁명의 기둥”으로 치켜세우는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즉 공산주의 혁명에 군대의 역할을 강조 한 것이다.
3.전국민이 “김정일에 대한 군대의 충실성” “군대의 수령(김정일) 결사옹위 정신”, “김정일의 명령에 대한 군대의 결사 관철 정신”,”강성대국 체모에 맞는 군대의 집단적.규율적 생활 양식” 을 “적극적으로 따라
배우라” 고 북한 주민들을 다그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북한에서 김정일이 주장하는 선군
정치란 :
1.핵.미사일등 대량 살상 무기 보유에 의한 대외적 고립.위기 탈출 정책이며
2.군대를 최후의 폭력 수단으로 내세워 대내적 체제붕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서 북한 정권이 스탈린 주의적 군사 독재 정권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또 북한에서 김정일이 선군정치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 북한 내부의 어려운 식량사정과 늘어나는 각 지방 정부 주도의 고철 또는 공장기업소의 장비를 중국에 파는 행위를 막으려 했으나 당을 통해서 막을 경우 당과
주민과의 괴리와 불신을 막을 길이 없으며 어차피 지방 정부가 공장기업소의 장비와 부품을 팔고 있다면 당을 통해서 통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군을 통해서 통제하기로 한 것이며 이것을 좋은 말로 선군정치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 뿐이다. 북한이 당을 사용하지 않고
군을 사용했다는 것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우선 당은 주민들과 항상 같이 움직이며 보고 살아야 할 대상들이다. 또 비록 당의 생활총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인민반 활동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당의 조직과 여맹 사로청등 조직 생활 자체가 없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식량배급이 안 돼 는 주민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알고 있는 당 조직이 북한 주민들의 밀수와 농장에서의 농장물 도독들의 식량 훔치기를 막을 수 없다고 인정한 것이며 통제된 상태에 있던 군을 동원해서 주민들을 통제 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주민들이 군인들과 인간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초기에 군에 의한 주민 통제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군대의 공장기업소 및 협동농장 파견을 계속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북한군인들 역시 17세부터의 약관의 나이로 집을 떠나 복무하고 있는 청년들로서 다른 지역에 사는 자기들의 부모도 연상 할 수 밖에 없으며 초기에 강한 규율도 공장기업소와 협동농장에서의 장기 근무로 기강도 해이해 지고 군에 의한 사고도 늘 수 밖에 없어짐으로 인해서 군에 의한 통제도 쉽지는 않았다 특히 2000년 부터 2002년 사이에 군의 사고가 많이 발생했다.
물론 지금은 공장기업소 또는 군 인민위원회에 의한 조직적인 밀수가 감소해 있고 식량을 협동농장에서 조금씩 훔쳐먹는 행위는 많은 감소가 없으나 식량 탈취 행위는 감소세를 보임으로써 선군 정치라는 군을 이용한 주민 억압이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다시 96년 97년과 같은 어려움이 올 경우 과연 북한의 김정일이 군을 다시 사용해서 주민들을 압박할 수 있을지는 김정일이 얼마나 잔인한 인간인가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선군정치”란 북한의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주민을 구속하기 위한 또 다른 방안의 인권탄압 방법이다.
선군 정치의 기원
북한의 언론 또는 선전물에 따르면 선군정치는 김정일이 1995년 1월 1일 개성 지구의 북한군 제 214군 부대 포 진지를 현지 시찰 한 시점에서부터 시작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선군 정치”는1996년 11월 김정일이 “최고 사령관 명령”으로 북한군에 하달한 “수확기 농작물 도난 행위 방지와 식량징수 관련 특별 지시”에 따라 무장 군인들이 전국의 협동 농장들에 투입된 것이 그 첫 시작이다.
당시 북한 전역에서는 수년째 계속되는 식량난으로 인한 수확기 농작물 도난 사건이 수습 할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어 노동당에 의한 농산물 생산량의 집계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며 , 군량미 조차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었다. 그래서 당시 김정일의 특별
명령을 받은 북한군이 주둔지역 협동 농장들에 투입되어서 당시 아직 수확되지 못했던 논밭은 물론 탈곡장에 까지 무장한 보초들을 세우고 농작물을 더 이상 훔쳐가지 못하도록 감시를 하면서 여기에서 수확한 농산물들을 군량미로 우선 확보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었다.
김정일은 이어 1996년 12월 또 다시 북한 함경남북도, 양강도, 평안남북도, 자강도 일대의 공장,기업소들에서 식량부족으로 인한 주민들의 조직적이고 때로는 비조직적인 생산설비 파손 및 도난 그리고 밀수 행위를 막기위해서 “최고 사령관 특별 명령”으로 군대를 그 지역 설비 보호를 위해 파견하였다.
당시 중국 국경을 중심으로 구리 고철등 많은 북한의 공장 기업소의 시설들이 식량과 교환을 위해 공공연히 거래되고 있었으며 조직적으로 신의주 철교와 투만, 삼합, 회령 샛별군 등 여러 지역을 통해 공공연히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했었다.
북한에서 가장 먼저 식량위기를 겪은 이 지역의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서 1993년부터 공장.기업소의 설비 자재 특히 동을 훔쳐 중국에 밀수출하기 시작하였으며 1996년 초 부터는 각지역에서의 이러한 밀수가 도저히 지역 당으로서는 통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여러 지역에서는 지역 당인민위원회가 이러한 밀 수출을 주도한 경우도 많았었다. 김정일은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 기간 공장, 기업소에 군대를 투입하여 무장 경비를 세우도록 했으며, 특히 동을 밀수하는 행위는 “국가 반역행위”로 규정하고 무자비히게 적발 공개 총살하도록 하였는바, 이것이 선군정치를 김정일이 주장하게된 실질적인 두번째 이유이다.
즉 김정일은 군대를 앞장 세워서 당시 심각했던 국내적 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강제적인 행위들이 지금 북한이 주장하는 소위 “선군 정치의 첫 조치였다.
3.선군 정치와 북한군의 혁명주력군 부상
김일성 시대에 북한에서의 혁명의 주력군은 노동계급이었다. 김정일은 “선군 정치”를 표방하면서 북한군을 혁명의 주력군으로 부상 시켰다. 김정일이 주장하는 “선군 정치”란 것은 김일성이 이야기 했던 “군사 제1주의 정치시대”에 북한 군이 차지했던 역할을 더욱 확대 강화 한 것에 불과 한 것이다.
북한에서 선군 정치가 나오게 된 시점과 당시의 북한 국내외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북한이 선군정치를 주장한 이유를 알게 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김일성 사망, 핵,미상일 개발로 인한 국제적 고립 자초, 극심한 식량난, 그리고 경제난으로 인한 아사자, 탈북자 속출 및 주민통제기능마비, 각종 범죄의 급증 등으로 아버지인 김일성으로 부터 정권을 물려 받은 후 세습에 의한 독제체재가 가장 위기에 빠져 군이 아니고서는 사태를 수습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김정일은 80-90년대 북한의 경제사업과 국방 건설에서 북한군에 많은 일들을 맏겨서 재미를 봤었으며 당시 군대의 통제력과 명령에 대한 복종 그리고 사회로 부터의 차단 등 당보다 활용하기에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기본 인식으로 과거에 주장했던 “전국의 요새화” 에 바탕이 된 전 사회의 군사적인 영향을 기본으로 과거의 북한군의 역할을 사회치안, 주민생활 영역에 까지 극대화하여 체제붕괴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선군정치”를 선택 하였으며, 현재 이러한 선군 정치를 김정일의 독창적인 통치 방식, 정치이념이라고 주장하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미화 선전 하고 있다.
4.김정일의 “선군 정치”가 미친 영향
오늘날 북한에서 김정일의 “선군 정치”가 북한 사회에 미친 영향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핵 보유국 선언과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 위협
2.혁명의 주력군 – 북한군에 의한 북한 내에서의 스탈린식 군국주의로 나타났다.
이상과 같이 김정일의 “선군정치”의 목적은 처음부터 핵,미사일 보유에 의한 국제적 고립 탈피와 군이라는 군사적인 조직을 통해서 체재 안정과 정권을 유지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2.김일성에 의한 북한군 당군화 실현의 역사적 배경 “당군화”란 무엇인가? : 북한군을 당의 군대, 수령의 군대로 만든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8.15 해방 직후 군을 조직하면서 북한군을 당의 군대로 만들기 위해 당,군대내의 파벌들의 끊임없는 도전을 모두 제거하고 북한군을 김일성의 군대로 김일성 김정일 개인의 사병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시대적인 구분으로 본다면 김일성에 의한 북한군의 당군화 과정은 김일성 항일빨찌산파의 노동당내 주도권 장악 à– 김일성 유일 사상체계의 확립 ( 김일성 절대주의 스탈린식 독재체제 확립)à – 김정일 유일 지도체제 확립(김정일 후계체제 구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군의 역사를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김일성 김정일의 사상과 영도를 구현하는 정치적 무기인 노동당의 폭력 수단으로 변질되는 역사”라고 보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북한에서 주장하는 “ 당의 군대화” 즉 북한이 이야기하는 “당군화” 라고 보면 될 것이며 이것은 북한 주민들에게서 인권을 모두 뺏는 정치라고 보면 된다.
(1)당,군, 분리 환경에서의 군 신설과 ‘당군화(당에
속한 군대)추진 ( 1945-1950년)
해방 직후 김일성 일파는 북한 내에서 가장 미약한 정파였음에도 불구하고 건당,건국,건군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소련군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사업이었다. 소련군은 조직적으로 김일성이 북한 최고 지도자로 부상 할 수 있도록 반대 세력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1946년 2월 김일성을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김일성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지지도를 끌어 올리기 위해, 그를 조종하여 각종 소위 북한이 주장하는 “민주개혁 (토지개혁,산업국유화,노동법령, 남녀평등권 법령등)을 진행하도록하여 김일성이 대중적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각지방의 소련군 조직을 이용해서 조직적으로 김일성을 지원하도록 했으며 소련군을 이용해서 김일성에 대항 할만한 정적들을 제거해 주었다. 이러한 소련군의 적극적인 지지 후원에 의해 김일성은 1947년 2월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북한군의 창설에 들어 가게 된다. 또 1949년 9월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각 수상으로 취임했다. 소련정부의 이러한 적극적인 지지와 지원 그리고 영향력 행사가 없었다면 북한 지도자 김일성이란 인물과 현재의 김정일이란 인물은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 김일성 – 소련의 조종 후원 하에서의 북한군 창건
김일성은 8.15 해방 한달 후인 1945년 9월 19일 평양으로 들어 갔다. 김일성은 귀국 직후부터 소련군의 지휘 감독 아래에서 군대와 보안대를 조직하는 일을 주도 했다. 당시 소련군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치스챠코프
대장은 1945년 10월 12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자생적 무력 조직들 중에 오직 김일성 좌파의 보안대 활동만을 허용하는 것으로서 김일성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조선 중앙년감 1950년도 판, 조선 중앙통신사 발행 19-23Pages)
김일성은 소련의 이러한 절대적인 지지 환경 속에서 각 도 인민위원회에 보안대 명칭의 치안기구를 설치하였으며, 1945년 11월에는 5도 행정국에 각 도 보안대의 사업을 지휘하는 보안국을 조직하였다.
당시 보안대는 일종의 경찰 조직으로서 군대와는 성격이 달랐다 따라서 보안대가 북한군의 모체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국가 설립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규군부터 창설 할 수 는 없었을 것이며 차선으로 김일성이 보안대라는 치안기구의 보호막 속에서 북한군대 창설 준비를 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보안대의 확대 강화 과정은 자연히 북한군 창건 준비 과정과 겹치게 된다.
북한군 창설과 관련해서는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 1945년 10월 1일 김일성을 대동하고 해방전 일본군이 운영하던 평양시 평천리 ”병기 수리소”를 시찰 한 뒤, “앞으로 창설될 북한군 무장을 위해 병기수리소를 김일성에게 넘겨주고 소련의 전적인 군수 지원을 약속 하였다. 이 사건은 북한 역사 문헌에 따르면 김일성이 현지 지도 한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북한식 표현에 따르면 “현지 지도 1호” 이다.
김일성은 소련군의 지원과 지도 및 감독 하에 보안대를 설치.확대하면서 보안 및 군사 간부 양성기관도 설치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평양학원”이었다. 김일성은 1946년 2월 “평양학원은 정규군대를 창건하기 위한 군사 정치 간부들을 키우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그 설립 취지를 밝혔다. 그럼으로 많은 북한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사항 중에 하나는 평양학원의 설립으로 북한군 즉 소위 북한이 이야기하는 조선인민군의 창건 준비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이다.
김일성은 1946년 7월에는 군 초급 간부(소대장) 양성기관인 “중앙 보안간부 학교”를 설립하였다.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결정 35호 “보안간부 학교 설립에 관한 건”에 의하면 이 학교는 보안대 인재 양성이 목적으로 되어 있으나, 1946년 8월 16일 “새로 파견되는 중앙 보안 간부 학교 정치부 교장과 교무부장에게 한 훈시”*(김일성 전집 제 4권 109 Page) 에서 김일성은 중앙보안 간부 학교 설립 목적은 군사간부 육성에 있다고 밝혔다.
김일성은 또한 1946년 8월 15일에는 소련군 고문단의 제의로 3개의 훈련소를 갖춘 “보안 간부 훈련소”를 새로 설치하였는데, 이 기관은 훈련소”라는 명칭과는 달리 정규군대와 같은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실제로 나남 제2 훈련소는 실제 제 2사단이었으며 소련고문들은 이 훈련소를 제2 경보병 사단이라고 불렀다. 이 훈련소의 실체는 평양에 설치된 보안간부 훈련 대대부” 활동을 보면 알 수 있다. “보안 간부 훈련 대대부는 당시 정규군 건설과 부대들을 통합 지휘한 군 사령부 였다. 김일성은 소련군 고문단과 소련군 사령부의 지도와 감독 하에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1947년 5월 17일 모든
장병들에게 계급장을 수여하고 “조선 인민 집단군”을 공식 선포하였다 또 이것은 1948년 2월 8일 북한군 창설을 정식으로 세상에 발표하는 것으로 발전 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1948년 2월 8일 북한군 창설을 공식 선포하기는 했으나 북조선 노동당 내에 군을 지도 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지는 못했다. 당시 북한 노동당은 북한 내의 여러 정당들 중에 하나 였을 뿐이었으며 따라서 김일성은 북한 군내에 노동당 만의 조직을 둘 수 는 당시 만해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노동당과 군대는 물론 소련 군대와 소련 공산당의 철저한 지원과 지도로 발전하게 되었으나 공식적 조직적 관련이나 관계없이 초기에는 독자적으로 창설되고 발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김일성이 1948년 2월 8일 북한군 창건 기념 연설에서 군을 특정 정파의 군대가 아닌 “인민의 군대””통일전선군대”라고 그 성격을 규정한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또 김일성은 “오늘 우리가 창건하는 군대는 조선의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 인민의 아들 딸들로서 조직되었으며 조선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인민대중의 행복을 위하여 오래 제국주의 침략 세력과 국내 반동 세력을 반대하여 싸우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입니다 라고 연설 하였다. 즉 이때 만 하더라도 북한의 김일성은 북한내에서 노동당으로 모든 사람들을 아직은 통제 할 능력이 없었으며 모든 정파를 모을 수 밖에 없었으며 소련의 지원과 도움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당시 김일성이 군대와 노동당을 분리한 것은 기본적으로 당시 소련군 사령부 내의 군사고문단과 소련 정보기관의 판단으로는 무엇 보다가도 정치적인 당시 북한 상황이 각 정당 단체,파벌들의 통일전선을 필요로 하던 시기로 군사고문단은 김일성이 당과 군을 분리해서우선 당 조직을 강화시키도록 하였으며 또 김일성을 지도 감독 했던 소련 고문단의 북한 정세 판단 사정과 관련 된다.
초기 노동당 내에서도 세력이 약했던 김일성은 통일전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군의 정치 활동 참여를 금지 시켰지만, 군대내” 문화부 (현재의 정치부와 같다)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노동당원 관리 사업과 군인들에 대한 사상교양 사업을 진행 했다. 물론 이러한 사업은 소련군 정치부의 주도 면밀한 작업과 진두 지휘 아래 이루어졌으며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초기에는 문화부를 통한 군대내의 당 활동은 군 지휘체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했으며 창군 초기만 하더라도 군의 지휘체계는 “군사 유일 관리제” 였다.
** 김일성 : 북한군 문화부를 통한 내적 당군화 사업 추진
당시 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는 빨찌산파,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 국내파 등 주요 파벌이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국내파(갑산파)를 제외한 4개의 파는 북한군내에서도 분리되어 있었다.
노동당 안에서 김일성의 정치적 기반인 항일 빨찌산파는 북조선 노동당 제 1차 대회 및 제 2차 대회 때 까지는 소수였다. 그러나 북한군에서는 8.15 해방 직후 치안 유지를 위해 조직 되었던 준 무력 기관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항일 빨찌산 출신들이 북한군 창건과 함께 군 내의 요직을 거의 차지 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당과 군을 분리 해서 군을 통해서 김일성이 세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준 소련의 고도의 계산된 지원이었다. 군 창설을 위한 군사정치 간부 육성을 목적으로 창설되었던 평양 학원 교장직은 김책( 빨찌산 파)이 맡도록 했었으며,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1946년 2월)의 보안국장도 최용건이 맡도록 했다. 그리고 북한군 창건 당시 민족보위상 직책은 최용건이 맡고 총참모장으로는 강건(빨찌산파), 작전국장은 김광협(빨찌산파)가 각각 맏도록해서 향후에 김일성이 군을 통해서 세력을 확장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국내파는 숫자는 많았으나 자체의 군사조직이 없었던 관계로 군보다는 정치투쟁에 더 관심을 보였으며 소련파 역시 군 문제 보다는 당내의 헤게모니 쟁탈전에 더 관심을 보였었다. 또 연안파는 북한군 내에서 빨치산파에 대항 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었으나 바로 대항 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라는 이유 때문에 견제를 받아야 했다 또 남로당 출신들은 “서울 해방”에 더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소련 스탈린의 군대로부터 탄생한 북한군이 당의 통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는 없었다. 즉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으로부터 배운 “당군화”를 한시도 방관하지 않았으며 군대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소련의 지휘 감독 아래 집요하게 진행하였다.
김일성은 군 창건 단계에서부터 소련의 정치부 고문단의 지시에 따라 정치적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내에 문화부라는 정치 사상 교양 전담 부서를 두고 이를 통해 당군화를 획책하였다. 김일성은 평양학원 창설 할 때 참모장 산하 7개 부서에 문화부를 포함시켰고, “중앙 보안 간부 학교”에는 정치부 교장(김강)직책을 두도록 하였으며, “보안 간부 훈련 대대부” 창설 때에도 역사 문화부 사령관(김일)을 임명했다.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소련의 주도 면밀한 작전에 의해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선포와 함께 민족 보위성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 될 때 김일(항일 빨찌산파, 당시 중장)을 민족 보위성 부상 겸 문화 훈련국장으로 임명하였다. 이것은 물론 소련의 지도 감도의 역할이 컸으나 김일성이 “당군화”의 중요성을 누구 보다가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소련 정치부의 지도로 군대 내 정치 간부 임명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1949년부터 1950년 6월 초까지 중국 내전에 참전했던 약 10개 연대 병력의 조선 군인을 넘겨 받아 조선인민군에 편입했다.( 중공군 166사와 164사 가 중심이 된 부대로서 실재로 한국동란 당시 공격 연대 21개 중에 주력인 10개 연대가 중국 팔로군 출신의 조선족 군대였다.중국해방군사) 당시 편입 재편성 할 당시에 중국 공산당과 토의하여 군 간부를 임명하되 정치책임자 직책만은 비워 두도록 하고 그 후 자신이 직접 임명하였다. 또 김일성은 해방 직후 군사정치 간부 양성 기관으로 설립했던 평양학원을 군 정치간부 양성기관으로 개편하였다. 그만큼 문화부는 김일성의 당군화 달성에 꼭 필요한 부서였던 것이다.
김일성은 1949년 5월 27일 내각 결정 60호를 발표하여 북한군 대대까지 조직되어 있던 문화부를 하부조직인 중대까지 확대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이러한 결정은 문화부 중대장은 중대장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명시되는 단계였었다.
문화부의 임무는 군인들에 대한 사상교양 및 당원 관리였다. 당시의 문화부는 군대를 감시 통제하는 군 정치조직으로서의 성격까지는 띠지 못했었으나, 차후 북한군을 “당군화”로 전환시키려는 김일성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내부적 준비를 갖추는 데는 큰 역할을 했다.
김일성에 의한 당과 군대의 조직적인 통합(1950년-1958년)
1.북한군내 당조직 도입 과 그 실태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직후인 7월 , 당시 북한군 문화국장이었던 서휘(빨치산파)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중대,소대에는 당원 협의회를 대대 연대에는 군관 협의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까지 만해도 비공개로 진행되던 군내 당 활동은 단계적으로 공개적인 행사로 변했으며 이후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을 받음으로 위기에 몰리면서부터 당과 군의 관계도 급속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김일성은 1950년 10월 2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를 열고 북한군 안에 당 조직을 만들도록 결정하고 그 이유에 대해 군대의 당 조직은 인민군대에 대한 당의 영도와 전투력 강화를 위한 것(김일성 저작집 6권 145-154 pages) 이라고 밝혔다. 이 결정에 따라 당 중앙위원회는 1950년 11월 29일 조선인민군대 당 단체 사업 규정을 비준 함으로서 북한군내에 당 단체와 정치기관 설치 근거를 마련했다.
조선인민군 당 단체 사업 규정에 의해 문화훈련국은 총정치국으로, 각급 문화부는 정치부로 개편되었으며 각급 부대에는 정치부대장을 두고 중대에는 당세포, 대대에는 대대당위원회, 연대에는 연대 당위원회를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각급 당위원회는 해당 정치기관이 지도하도록
하고, 총정치국,군단,사단에는 당 조직 문제를 심의, 결정하는 비 상설 위원회를 두도록 했다.
“조선 인민군 당 단체 사업 규정”에서는 “군대 내 당 조직에 대한 정치적 지도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에 위임”하며 “조선 인민군 당 단체의 최고 지도기관은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군내의
당 단체들에 대한 구체적 지도는 인민군 총정치국에 위임 함으로서, 이후에도 총정치국은 중앙당으로부터 군대 내 당 사업에 관해 상당한 자율권을 상당 기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인민군 당 단체 사업 규정” 이 나온 뒤에도 군사지휘관은 여전히 부대의 최고 책임자였으며 야전 사령관이 당 사령관보다 작전권등 군의 업무에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군사 유일관리제 하에서 당의
통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김일성은 당시 느꼈으며 단계적으로 당의 군 장악이라는 목표를 준비해 갔다.
그 후 북한군은 1952년 7월 7일에 발표된 “ 인민군대 내 당 정치 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몇가지 과업에 대하여”라는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1952년 8-9월 사이 중대 당 세포로부터 연대 당위원회에 이르기 까지 당 지도 기관 결산 선거를 진행하고 당 조직을 새로 정비하였다.
이 당시에는 전선이 고착화 되어 있었으며 전선에서는 참호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군의 통제와 당의 군 장악을 위한 이러한 좋은 기회를 김일성이 당시 전선 상황을 이용하여 당 조직의 확장 계기로 만들었다.
군대에 대한 노동당의 완전한 통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당 안의 파벌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도 전선이 고착화되고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이때부터라고 추정하고 있다.
2.김일성에 의한 당군화 반대 세력과 파벌 숙청 북한군은 노동당 내의 헤게모니 투쟁을 거치면서 당의 군대로 그 성격이 점차 바뀌어 졌다. 과거의 당과 군대라는 두 제도가 북한군 내에 총정치국이라는 중앙당 기구 설치에 의해 변화되고, 군이 당의 군대화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안파, 소련파, 등의 김일성에 대한 저항과 김정일에 대한 과소 평가로 조선인민군의 성격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소련에서 파견되었던 소련파나 중국 팔로군 출신의 연안파들은 젊고 경험없고 아는 것 없는 김정일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 않았으며 능력에 대해서도 크게 평가하지 않았었다. 그들의 눈에 김일성은 단지 중학교 중퇴 학력의 공산당 이론에 대해서도 무지한 소련의 배경을 가진 “젊은 철없는 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연안파나 소련파는 김일성에 대한 소련군의 지도에 대해 과소 평가 했으며 소련파는 국내 정치에 대한 야심보다는 소련의 지휘 감독에 충실하려는 입장이었다)
당시 북한군 총 정치국 부국장 김을규는 “ 인민군대는 항일 유격대의 혁명 전통이 아니라 길주 명천 농민 운동을 계승해야 하며, 노동당의 군대가 아니라 통일전선 군대”라고 공공연히 주장했었다.( 김일성 저작집 12권 “조선인민군은 항일 무장 투쟁의 계승자이다” 73 page)
북한군의 성격에 대한 평가도 파벌간의 대립과 갈등이 어떻게 김일성에 의해 이용 되었는지와 김일성이 어떻게 파벌들을 숙청했는지를 보면 더 알기 쉬울 것이다.
1950년 12월 당시 김일성은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3차 전원회의’ 에서는 연안파 무정( 북한군 포병사령관), 소련파 김열 을, 1951년 11월 “조선 중앙위원회 제 4차 전원회의”에서는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를 1952년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5차 전원회의에서는 남로당파의 박헌영, 이승엽을 1955년에는 연안파 박일우 (당시 체신부상) 방호산(당시 김일성 군사학교 교장)등을 차례로 숙청하면서 다른 파벌의 영향력을 제거해 나갔다. 특히 김일성은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최창익(연안파) 박창옥(소련파) 윤공흡(연안파) 서휘(연안파)등을 숙청 함으로서 노동당에 대한 영도권과 북한군에 대한 당의 지배권을 완전히 실현하였다.
3.김일성에 의한 당의 군대화 당군화의 실현( 1958년-1972년)
(1)1956년 8월 종파 숙청과 북한군내 당위원회 도입 김일성은 1956년 8월 종파 숙청사건을 계기로 당과 군대 내의 연안파, 소련파를 완전히 숙청하였다.김일성은 먼저 노동당 안의 연안파 소련파를 숙청하였으며 이어 1958년부터는 지방 당 및 정권 기관, 군내에서의 숙청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즉 1958년도 3월의 조선 노동당 전원회의는 대규모 군 숙정을 예고하는 신호 였으며 특히 이 신호는 연안파 즉 1949년부터 1950년 6월 초까지 중국으로부터 조선으로 들어왔던 팔로군 출신의 조선족 또는 북한에서 팔로군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는 실로 어려운 해 였으며 죽음의 해 였다.
“조선 인민군내 당 정치사업을 개선 강화 할 데 대하여”라는 의제로 진행된 1958년 3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는 북한군 정치 사업만을 토의하였다.
전원회의에서 김광협은 북한군내에서 1956년에 당과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반당 음모가 있었다는 내용의 보고를 하였는데, 이 반당음모설이 북한군내의 연안파와 소련파를 전면 제거하기 위한 구실로 되었던 것이다. 결국 연안파인 민족보위부상 김웅 총참모장 리권무, 소련파인 총정치국장 최종학 등 많은 수의 군 고위 간부들이 숙청되어 어디론가로 모두들 사라졌다.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북한군내 권력기구로 부상한 총정치국을 견제하기 위한 주요 결정을 내렸다. 회의 결정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민군은 인민군 당 위원회를 구성” 하여 “당 중앙 위원회 상무 위원회의 지도를 받도록” 하며, 인민 군 당위원회 밑에는 군단 당위원회, 사단 당위원회, 연대 당위원회. 대대 초급 당위원회, 중대 세포위원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북한군 총정치국이 중앙당으로부터 자율성을 가지고 군대의 당 사업을 마음대로 결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당위원회라는 집단적인 지도기관이 각급 부대를 이끌어가는 방식, 즉 인민군 당위원회가 당의 지시를 받아 집단적 집행대책을 토의 결정하면 총정치국은 그에 기초해서 사업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총 정치국에는 군 당 위원회의 결정을 집행 할 의무만 부여하여 과거 처럼 독자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과거에는 각급 부대 당 위원회에 포함되지 않았던 부대장, 정치부대장등 모든 책임 간부들을 당위원회에 소속 시켜 언제든지 당이 감시하고 통제 할 수 있도록 하도록 하는 사업 체계를 만들었다.
김일성은 1960년 9월 8일 조선 노동당 인민군 위원회 전원회의 확대회의를 개최하고 당-군 관계를 또 다시 전면적으로 개정 하였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A.군의 당위원회는 군내부의 최고 조직이며 군 당위원회는 단순한 협의 기관이 아니라 집체적 군사정치적 영도기관이라고 하였다.
B.북한군의 모든 문제는 군의 당위원회를 통해 결정하도록 한다고 하였다.
C.“인민군대는 노동당이 조직한 것으로 당의 정책을 집행하고, 혁명의 전취물을 보위하기 위한 무장력” 이라고 선언 했다.
이 회의를 계기로 북한군 내에서는 어느 누구도 “당의 영도”를 벗어 난 독자적인 힘을 행사 할 수 없게 되었다.
김일성은 1962년 12월에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4기 제 5차 전원회의를 소집하고 “당 중앙위원회 군사위원회”설치를 결정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김일성은 북한군 내에는 노동당 조직이, 노동당 안에서는 군사기구가 설립되도록 했으며 북한군이 이념적으로나 조직적으로 당의 군대가 되게 함으로써 김일성 개인의 군대로 만드는 초기 작업을 마무리 할 수 있게 되었다.
(2)군 지휘관들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견지하기 위한 정치위원제 도입
북한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구 소련과 중국 관계의 악화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그 시기 김일성은 정치적으로는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1958년 1959년에 걸쳐서 북한이 제거한 연안파 군 출신의 문제로 이미 상황이 안 좋았던 중국과 관계회복이 쉽지 않았으며, 특히 중국은 당시 핵개발을 위해 모든 가용 자원을 투입하고 있어서 정치 경제 상황 마져 어려운 조건에서 북한은 중국의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1962년 10월 28일에 발생한 구 소련의 (쿠바 미사일 철수 사건)으로 김일성 일당이 후루시쵸프를 격렬히 비난 한 것에 대해 소련의 미움을 사서 대 소련관계도 악화 될 수 밖에 없었다.
-1962년 11월 당시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부수상이었던 김광협 대장은 소련의 군사원조를 받기 위해 소련을 방문하였으나, 소련의 거부로 빈손으로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수정했다는 계획자체가 무리였던 김일성에 의해 1961년부터 추진 되였던 야심적인 제 1차 7개년 계획을 “경제 국방 병진 노선”의 원칙에서 전면 수정하였다.
-김일성은 1962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제 4기 제 5차 전원회의에서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국방력을 강화” 할 데 대한 의제를 제기하고 “ 국방에서 자위의 원칙을 견지”하며, “ 인민 경제 발전에 제약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국방을 강화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1966년 10월 제 2차 당대표자 회의 에서는 제 4기 제 5차 전원회의 결정을 구체화하여 4대 군사 노선인 “전 군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인민의 무장화”,마지막으로 “전 군의 현대화”를 주장하면서 강조하기 시작했다.
-경제 국방 병진 노선에 따라 북한의 국가 예산 가운데에서 군사비의 지출은 1961년 2.5%, 1964년 에는 7.5%, 1966년에는 11.8%, 1967년에는 30.4%, 1971년에는 31.3%로 급증하였다.(** 북한이 공식 발표한 국방비 지출임)
-급격한 군비 증강과 사회전반에 대한 군사화 즉 4대 군사 노선은 북한 주민들에 대한 군의 영향력을 증대 시켰으며 이는 김일성이 신뢰하던 김일성파 즉 소위 “ 빨찌산파”가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를 주었다.
**** 1961년 9월 4차 당 대회에서 선출된 정치위원 11명중 최용건, 김일을 제외한 군 출신 간부는 부수상 겸 민족 보위상 김광협 뿐이 었다. 그러나 1966년 10월 당대표자회의에서 선출된 정치위원은 15명중 4명이나 빨치산 출신 ( 김광협, 김창봉, 최현, 이영호)들이었으며 정치국 후보위원으로는 석산, 허학봉, 최광, 오진우 등이 포진되었다.
<김창봉 허학봉 사건>
민족보위상 김창봉, 대남 사업 총책 허봉학등 일부 김일성의 지도력에 반감을 품고 있던 인물들이 1967년 5월 김일성에 의한 박금철, 리효순등 국내 갑산파 숙청과 김영주 등 김일성 친족에게로의 당권 집중에 불만을 품고 도전 했다가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한 사건을 말 한다.
김일성은 김창봉, 허봉학 사건을 계기로 군의 간부들이 독자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로 북한군내에 정치위원제를 도입했다.
1969년 1월 조선 인민군 당 위원회 제 4기 제 4차회의를 개최한 김일성은 군대 내에 정치위원제를 도입 할 것을 제안하고 북한군의 모든 부대 단위(군단, 사단, 연대에는 정치위원, 대대 중대에는 정치지도원)들에 정치위원 및 정치 지도원을 두도록 결정, 조치하였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금후 모든 명령서에는 군사 간부의 사인과 함께 정치위원의 사인이 있어야만 효력을 발생 할 수 있다” 고 지시하였다.
1970년 11월 조선 노동당 제 5차 대회에서 김일성은 군대 안의 당위원회들은 특히 군사 지휘관들이 언제나 당위원회에 의거하여 사업하며 당 조직 생활에 충실히 참가하도록 당적 통제를 강화하여야 한다” 고 지적하였다. 김일성은 과거 소련군의 제도를 원용하여 북한군에 도입한 정치위원제를 핵심으로 한 제도적인 당의 통제 장치는 1970년 조선 노동당 규약., 1972년 사회주의 헌법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으로서 일단 완결되었으며 이후 제도적인 군 내의 당의 통제 장치는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4.북한 군내에 김정일 체제 구축 시기 ( 1973년-1990년대초)
(1)김일성에 의한 김정일 후계자 결정
북한 노동당은 1973년 9월 4일-17일 사에에 진행된 당 중앙위원회 제 5기 제 7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제의에 따라 김정일을 노동당 조직 담당 비서 겸 조직 지도부장, 선전 담당 비서 겸 선전 선동 부장으로 임명 하였다. 그리고 1974년 2월에 진행된 당 중앙위원회 제 5기 제 8차 전원회의에서는 역시 김일성의 제의에 따라 김정일을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하고 그를 후계자로 결정하였다. 김정일은 이후에 당 군 정무등 모든 부문을 통제 장악하기 위해서 당 지도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2)1970년대 북한군 내에서의 김정일 후계체계 준비 작업
김정일은 우선 조치로 첫째 1974년 4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에서 “ 당의 유일사상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 개정판을 공식 채택 했다.
10대원칙은 김일성 유일사상과 김정일 유일 지도 체제를 당 생활 전반에서 실현하기 위한 실천 강령으로서, 헌법과 당규약에 우선하는 북한 최고의 법전으로 되었다.
(*** 북한이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의 차이이기도 한 유일사상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은 북한 주민들을 모든 일에서 관리 간섭하는 것으로 주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가정 중요한 독재의 도구 이다.)
둘째로 당의 기본 부서인 조직 지도부에 간부 사업, 검열 사업 등 모든 권력을 집중 시켰다.
셋째 1974년 하반기에는 북한군 당 조직에 대한 검열 지도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검열지도를 통해서 ** 북한 군내의 유일사상 체계, 우일 지도 체계 확립 정형을 검열하고 정치 간부 진영을 “ 만경대 혁명 학원” 출신들로 교체,보강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만경대 혁명학원 제 1기생인 오극렬을 총참모장으로 임명하는 등 군 수뇌부을 빨치산 2 세대들로 교체하고 군대내의 보위기구도 확대 개편하였는바, 군단, 사단, 연대에는 보위부를, 중대에는 보위 지도원제를 도입하도록 하였다.
-1975년부터 군에서 김일성에게 올리는 “제의서” 비준 문건은 반드시 김정일을 거치도록 제도화 되었다.김정일은 1979년에 이 제도를 더욱 강화시켜 “제의서” 중에 특별한 문건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자신이 직접 처리 했다.
-1975년부터 북한군에도 “3대혁명소조”를 파견하여 군에 대한 김정일 유일 관리제를 철저히 확립하도록 하였다. *** 3대 혁명 소조 운동은 1973년 김일성이 제기해서 시작된 운동이다. 김일성은 북한의 모든 기관, 모든 단위에 3대 혁명소조를 파견하여 사상 기술 문화 분야의 주체 사상화를 강력히 추진하였는데 , 북한군은 초기 이 운동에서 제외되어 있었었다.
-1975년부터 북한군의 모든 부대는 모든 부대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을 내 걸도록해서 김정일에 대한 우상화도 시작 했다. 또 “김일성 동지 혁명 사상 연구실”과 함께 김정일을 위해서 “ 김정일 동지 사상 이론 연구실”도 새로 만들도록 지시 했다.
-과거에는 형식적에 가까웠던 당 생활 총화 제도를 대폭 수정해서 전 당에 주당 생활 총화, 월 당 생활 총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사상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이 제도를 군대에도 똑같이 적용하였다.
-김정일은 또한 북한군을 더욱 철저하게 통제하기 위하여 제도적인 통제 뿐 아니라 철저한 감시체제도 함께 수립해서 북한군을 당의 종속물로 철저하게 변화시켜 김정일의 군대로 만들도록 군에 주입 시켰다.
넷째 김정일은 이 과정에서 조작된 “ 소위 김동규 일당 숙청 사건을 통해서 북한군내에서의 김정일에 대한 저항 세력을 모조리 제거 하였다.
** 김동규 일당 숙청 사건 : 1976년 6월 노동당 정치국 위원회를 통해서 김정일 후계 구도 구축과 김정일식 간부사업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부주석겸 정치국 위원 김동규와 이를 지지한 북한군 총정치국장 리용무,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류장식, 노동당 검열위원회 지경수 상장, 무력부 부부장 지병학 등을 제거한 사건이다. 이것은 사실상 노동당과 북한군 내에 비주류였던 김일성이 이끌던 빨치산 이외의 빨치산파들이 주류에서 비주류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숙청되는 과정이었으며 김일성파의 비주류가 주류가 되어서 다른 모든 파를 제거한 사건이다.
다섯째로 김정일은 김동규사건 후 1978년 예전의 북한군 창립절(2월 8일)을 김일성이 반일 유격대를 창건 했다는 1932년 4월 25일로 개정하고 “ 조선 인민군은 김일성 빨치산 전통을 계승한 노동당의 혁명적 무장력”이라고 주장하며 “역사적 사실”로 공식화 했다. 이렇게 함으로서 1970년대 북한군에 대한 김정일 후계 체제의 기초가 완성되었다.
(3)김정일의 북한군 장악
1980년대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서 북한군을 직접 장악하는 시기였다.
김정일은 1980년 10월 노동당 제 6차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노동당 비서국 비서, 당 중앙위원회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더욱 확실히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북한군을 직접 통제 할 수 있는 군 지도권 확보를 시도 했다.
-김정일은 1979년 12월 16일 전군에 “오증흡 김혁 동지를 따라 배우는 운동”을 전개하도록 하고 이를 군대 내 당 조직과 정치기관이 지도하도록 지시했다.
-1985년 4월 13일에는 북한군 지휘 간부들에게 군사 칭호 각종 훈장을 직접 수여하여 자신에 대한 군의 충성을 유도 했으며 군에 대한 장악을 강화했다.
-1988년 2월 “김창봉 허봉학 숙청사건 ”당시 지방으로 추방 되었던 최광을 다시 불러들여 북한군 총참모장에 임명하는 방식으로 북한군에 대한 통제를 김정일이 직접하고 있다는 것을 대내외에 증명 시켰으며 최광을 다시 불러들임으로서 실각한 사람들로 부터의 충성 유도도 아울러 실시하였다.
-북한 노동당의 정치 이론 잡지 “근로자”는 1988년 4월 초 북한군 총정치국 부총국장 이봉원의 기고문 “ 조선 인민군은 당의 위업을 옹호보위하는 불패의 혁명대오”를 통하여 “ 지금 인민군대는 지난날 조선 혁명군 대원들이 청년 장군 김일성 동지를 충성으로 모시고 장군님을 목숨으로 옹호 보위해 나가던 그 신념 대로 김정일 동지를 높이 받들어 나아가고 있다” 고 함으로서 북한군에 대한 후계체계가 군에서 일단락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김일성.김정일은 북한군을 개인의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 “ 계급의 군대”” 수령의 군대”로 부르며 우상화에 더욱 노력 했다.
(1)군대 내에 그 어느 부문 보다도 강력한 노동당의 유일 지도 체제를 수립하고, 군대의 모든 사업을 그 감시,통제 밑에서 진행되도록 하였다.
(2)북한군 간부 대열을 청년화 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많은 구 새대 지휘관과 과거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남로당파와 관련이 있었던 구 지휘관은 모두 내보냈다. 그리고 김정일의 “유일적 지도체제” 하에서 성장한 청년 군관들로 그 공백을 채웠다.
(3)군대의 하부 말단 까지 보위부의 감시선을 만들어서 군에 대한 감시를 더욱 철저히 했다.
(4)군인들에 대한 세뇌 작업을 그 어느 부문보다 더 중점을 두고 하였다.
이러한 세뇌 작업에 대하여 김일성은 “10년간 군사복무을 한 사람은 공산 대학을 나온 것과 같다”고 함으로서 사상교육에 얼마나 노력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 : 김일성은 1970년대 말 전쟁준비의 일환으로 인민무력부를 비롯한 평양시에 집결되어 있는 일부 국가 기관들의 소개 조치가 논의 되었을 때 당시 김정일에게 “ 무력부를 내 보내면 어수룩한데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 무력부 청사는 항상 노동당 청사 곁에 두어야 한다”고 훈시 했다.
특히 김정일은 1980년대 모택동이 중국에서 국공내전 당시 했던 말을 “ 정권은 총대에서 나오며 총대는 당이 장악한다”는 말로 표현하며 군국주의적인 궤변으로 북한군을 세습독재 체재의 유지를 위한 폭력 수단으로 만들기 위해 군 총정치국과 총참모부, 그리고 군 보위부를 서로 다른 조직을 감시하도록 해서 통제하였으며 “인민군대는 나의 군대” 라는 표어를 내 걸고 전체 북한군을 개인의 사병으로 세뇌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김일성 김정일에 의한 북한군의 철저한 당군화는 전사회의 군사화로 발전했으며 김정일은 북한군에 “ 조국 통일도 사회주의 건설도 우리(군대)가 맡자”는 구호를 제시하고 발전소 건설, 갑문 건설, 고속도로 건설, 공장 건설 등 각종 건설 공사들에 군을 대거 투입하고 이에 대한 전인민적인 지원을 주장함으로서 사회 전반의 군사화를 유도했다.( 물론 사회전반에 대한 군사화는 부정적인 영향이 더 컸으며 오히려 사회의 군에 대한 반감과 군의 기강 해이 등 부작용이 더 컸다.)
5. 선군 정치는 김정일 세습 독재 정권의 최후의 선택
(1)김정일 정권의 평화적인 붕괴의 관건은 북한에 대한 철저한 경제 봉쇄이다.
북한군은 지난 50년 이상 김일성 김정일에 의해서 철저하게 당의 군대화 된 폭력 수단으로서 “당과 수령의 사수”를 최대의 사명으로하는 수령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노동당의 군대, 수령의 군대가 되어 있다. (물론 충성도가 어느 정도이냐의 문제는 여기서 논외로 하겠다.) 지금까지 존재 했던 그 어느 독재 국가 사회주의 국가도 북한군과 같이 철저히 통제되고 당의 군대화 되어서 독재자의 철저한 사병으로 전락한 군대는 없었다.
김정일의 독재 정치로 인해서 국가 경제의 총 파산, 수백만 아사자 와 수십만 탈북자의 속출, 그리고 국제적인 비판과 고립의 자초 속에서도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연명해 나가고 있는 이유는 바로 사병화 시킨데에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북한 김정일 정권은 주민들의 얼굴 표정까지도 노동당이 직접 연출하는, 각종 악행과 인권 유린이 철저히 베일에 감춰져 있는 극장 국가이다.
그럼으로 북한 주민들은 물론 북한군의 장병들까지도 독재자의 야망과 현재 북한이 처한 실태와 위기를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정일 정권을 평화적으로 붕괴 시키자면 김정일 독재 정치의 한계를 빨리 인식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며, 이 과정을 통해서 북한 주민과 그 자녀인 군의 장병들이 독재자 김정일의 반 인민적이고 반 민족적이며 반 인륜적성을 빨리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 중국, 한국의 무 원칙한 대북 지원을 철저히 차단 하도록 하여야 한다.
(2)북한군의 정치적 영향과 그 전망
김정일의 선군 정치는 북한 사회 생활 전반에 극단주의적인 군국주의화로 갈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북한 체제의 전환기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오게 되면 북한 체제는 민족과 미래의 장래를 위해서 김정일 정권의 재거냐 아니냐의 기로에 설 것이다.
-김정일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사태를 나름대로 면밀히 분석하여, 비록 북한군이 당의 군대, 수령의 군대로 철저하게 당군화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극단의 경우 체제를 위협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앞으로 더더욱 북한군을 당의 통제 아래에 두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북한 김정일은 고르바쵸프 당시 구소련의 정보기관에 의해서 고르바쵸프가 잠시 권력을 잃었던 경험을 알고 있으며 이것은 정보기관의 장점이자 다르게는 김정일에게 최고의 위협 세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으로 정보기관에게는 군을 군에는 정보기관을 서로 감시 시킬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북한 독재 체재의 역사는 군대에 대한 노동당의 통제와 감시를 점차 강화 시켜온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김정일은 체제가 위기 상황에 처하였을 때 군대에 의존해서, 군사를 앞세워서 위기 탈출을 강행해 왔다.
앞으로도 김정일은 군대의 수령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기 위해 군에 대한 당적 통제와 병행하여 물질적 사회적인 투자를 다른 분야에 비해 더 많이 할 것이다.
-김정일 체제가 유지되는 한 당의 영도권에 공식적으로 도전 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 북한군부내 포함)은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다.
-김정일에 있어서 생명선과도 같은 “선군 정치” “당군화”는 계속 될 것이다. 이에 따라 반미에 기초한 북한의 자주적 대외 정책 역시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또 일부 사람들이 예측하는 군부내의 쿠테타에 의한 김정일 정권의 붕괴도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북한군은 “자율적 행위자” 또는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사람들의 집단” 이 아니다. 북한 체제 위기나 사회적 불안 요인 이 발생 할 경우 노동당으로부터 동원되어서 노동당의 꼭두각시로서 주민들 탄압과 김정일 정권 유지에 동원 될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 정권의 독재가 한계에 이르게 되면 노동당의 독점적 영도력이 상실되고 반 김정일 정치적 군사적 세력- 개혁 개방 세력에 의한 북한 체제 붕괴는 급격하게 이루어 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러한 급변시기에는 북한군이 특별한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급변 시기는 국제사회가 미국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을 바로 이해하고 그에 따른 정치 군사,외교, 경제적 공동 보조가 이루어지는 시기일 것이다.
미국 주도의 대 테러 전쟁은 최근 이라크에서 독재자 후세인을 체포하고 리비아의 지도자 가다피는 전략무기 생산 및 개발을 포기하고 부시 대통령의 지도력에 의해 국제 사회로 복귀 하도록 하는 결정을 내렸다. 가다피 대령의 이러한 결정은 본인의 표현에서도 “이라크의 후세인 의 전철을 밝지 않기 위해서”라고 밝혔듯이 많은 성과를 이룩하고 있다. 그리고 이란도 IAEA의 사찰을 받겠다고 밝혔으며 세계는 좀 더 테러에서 안전해 지는 사회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북한 김정일은 리비아의 가다피의 사례를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며, 현체재를 고수하기 위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핵무기를 결코 포기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미국과 북한에 해야 할 질문이다. 우선
첫번째 질문은 북한이 핵을 개발해서 판매 할 경우 그 핵무기를 구입하는 구매 단체 예를 들어 알 카에다가 구매 했을 경우 알 카에다가 기념품으로 가지고 만 있을지 사용한다고 믿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만약 사용하다면 어느 나라에 사용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핵무기가 만약 미국에 사용 된다면 미국 정치 지도자들은 북한을 위해 뉴욕이든 시키고이든 미국의 대도시를 희생 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두번째 질문은 북한에게 이다. 경제 개혁에 왜 100만이 넘는 군대가 필요한가이며 핵무기 개발이 어떻게 북한 주민들을 경제 위기에서 구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 개혁 개방이 어떻게 민족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또 김정일은 후세인이 토굴에서 끌려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그런 신세가 되고 싶을 것인가?
세번째 질문은 미국과 북한 에게 모두에게 하는 질문이다. 과연 미국은 종이 호랑이 인가? 북한에게 미국이 굴복하고 북한의 위협에 돈을 주면서 무마 할 것인가?
박 승제 군사평론가 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