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과 스데반
함석헌
백설이 산하를 뒤덮는 이 겨울날에 남산 위에 푸른 소나무만이 우뚝하고 서는 기상을 바라볼 때면 저것이 성의사(成義士)의 넋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이 노래를 읊어서 겨울에는 추위를 잊을 수 있고, 여름에는 더위를 모를 수 있다. 의기 땅에 떨어진 오늘날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이 노래를 읊을 때만은 뜨거운 혈조(血潮)가 방촌(方寸)사이에 넘침을 느낀다.
성삼문은 우리의 대변자다. 전 세계 사람이 다 들어붙어서 우리를 비겁한 놈이라 침을 뱉어도 그가 홀로 일어나서 우리를 위하여 변명을 한다. 사천 년 역사의 전부는 모른다 하더라도 적어도 근세 오백 년 일대에 있어서는 저를 중심으로 한 육의신(六義臣)의 사(死)라는 한 귀절을 빼고는 모두가 영(零)이다. 우리로 하여금 금수의 이름을 면케 한 것은 이 한 사실이다. 이로 인하여 조선사람에게서 의(義)의 씨가 끊어지지 않은 것이 증명되었고, 우리도 오히려 부끄러움을 참고 낯을 들 수가 있다. 죽은 삼문(三問) 하나가 산 이천만보다 더 생기 있게 살았다.
우리는 그를 향하여 말로 할 수 없는 경의를 가진다. 경의보다도 사모, 사모만 아니라 애모를 한다. 저의 사적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뜨거운 눈물이 흐름을 금할 수 없다. 저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가슴은 조선 사람이 아닐 뿐 아니라 사람이 아니다. 우선 그가 일명(一命)을 던지어 의(義)를 지키며, 사천 년의 역사를 구한 것을 위하여 감사하는 눈물이요, 다음은 그의 최후의 비장을 인하여하는 감격의 눈물이다. 천지가 있는 날까지는 의의 법칙이 그를 다스릴 것이요, 의가 사는 날까지는 성삼문의 이름이 없어질 수 없다. 자손만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역사위에 찬란한 빛을 발한다.
우리는 우리가 경앙(敬仰)애모(愛慕)하는 이 의사를 위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려는 자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위하여 흘리는 눈물이 또 하나 있다. 이는 감사나 감격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요, 비통비애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의 최후가 말할 수 없이 적막함으로 인하여 흘리는 동정의 눈물이다. 그가 형장을 향하여 출발할 때의 시라는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거두일욕사(擧頭日欲斜)
황천무일점(黃泉無一店)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한 수를 읽을 때는 실로 적막황량 비할 수 없고, 억제할 수 없는 느낌을 가진다. 의를 위하여 일신을 희생하는 그의 최후가 어찌하여 낙일이 서산에 지면서도 다시금 새 빛으로 내일 동천에 솟을 것을 약속하며 평화와 희망리에 가는 것 같지 않고, 마치 잔성효두(殘星曉頭)에 등의 꺼짐같이 적료(寂廖)하게 쓰러지고 말 따름인가? 이것이 우리가 그의 의기의 헌앙함, 지조의 고결(高潔)함을 경모불이(敬慕不已)하면서도 한편으로 잊을 수 없는 공허감을 갖는 까닭이다. 무엇인지 부족이 있다. 좀더 있었으면! 좀더 있어서 그에게 일가숙(一價宿)을 허(許)하여 주었으면! 좀더 있어서 그에게 그가 어디로 가는 것임을 밝히 가리켜주었으면!
의(義)는 즉의(則義)나 그를 영원에 연결하여주는 것이 없음을 어찌하나? 장(壯)은 즉장(則壯)이나 그에게 성애(聖愛)의 부족함을 어찌하나? 우리는 이를 스데반의 최후에 비하여 양자간에 건널 수 없는 공곡(空谷)이 있음을 안다. 하나는 자고, 하나는 일숙점(一宿店)이 없는 사(死)의 나라로 갔다. 이는 ‘독야청청’이나 저는 “이 죄를 저 사람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다. 우리는 성삼문의 인물이 이 스데반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애모하는 의사에게서 그가 한 바 그 이상의 것을 요구치 않는다. 사람인 그에게 그 이상을 바랄 수 없다. 도리어 우리는 지금 우리를 심판할 줄을 믿는다. 우리가 애석(哀惜)해 하는 것은 그가 단순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스데반에서 보는 것 같은 사람 이상의 무엇을 보지 못함이다.
의(義)는 곧 의(義)나 이 의가 있고, 저 의가 있다. 이 의는 사람의 의요, 저 의는 하나님의 의다. 물론 사람의 의도 그 근원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근원에서 끊어져 웅덩이에 괴인 물이다. 격할 때는 곧 능히 수장(數丈)의 비말(飛沫)을 공중에 던질 수 있으나, 대양의 거도(巨濤)가 만장의 해저에서 솟아 낭세(浪勢) 천지 사이에 넘치는 것의 유가 아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줄기에서 떠나도 역시 포도나무의 성질을 가진다. 의가 근원인 하나님을 잊고도 의의 일을 한다. 그러나 떨어진 포도가지의 생명이 일시인 것같이 떨어진 의의 생명도 일시다. 영구적으로 세상을 맑히는 의는 하나님에다 근원을 두고서야 나온다.
성서조선 1930. 2월, 14호
저작집30; 18-125
전집20; 9-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