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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근로정신대 문제
시민모임 사무국장 이국언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투쟁이 마침내 8부 능선을 넘었다. 일제강점기 여성 인권유린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인 근로정신대 문제는 바야흐로 이제 승리의 종착역을 향해 성큼 성큼 다가가고 있다. 이미 최고재판소 판결까지 끝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 같았던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문제가, 비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출구도 보이지 않는 20여년의 지리한 투쟁 끝에 얻은 극적인 국면전환은 ‘바보 같은 사람들’ ‘나고야 소송 지원회’의 헌신적인 투쟁 이외엔 더 설명할 길이 없다 하겠다.
지난 9월 12일 ‘나고야 소송 지원회’와 ‘공동변호단’이 광주를 방문한 바 있다. 이번 광주 방문의 목적은 이미 카페와 언론을 통해 알려져 있다. 하지만 후생연금 가입 사실 확인이 던져주는 그 정치적 의미와 향후 미칠 파장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게 주목되지 못했다. 이는 짧은 체류 일정과 당일 빠듯한 스케쥴에 기인한데서 전적으로 비롯됐다. 그러다보니 정작 광주방문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던 향후 활동과 관련한 논의는, 미처 제대로 얘기 한번 나눠보지 못한 채 쫓기듯 넘어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글은 전환점을 맞은 현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함께, 향후 시민모임의 활동방향과 관련해 논의를 보다 풍부히 할 목적으로, 광주 방문시 ‘나고야 소송 지원회’에서 준비한 문서, 언론 인터뷰, 대일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동향 등을 참고해 작성됐음을 밝힌다.
●일본정부, 사실 조회 12년 만에 강제노역 인정
일본 후생노동성 산하 사회보험청은 지난 9월 7일 원고 양금덕 할머니 등 8명(故김순례, 故김복례, 故김혜옥, 양금덕, 이동련, 김성주, 박해옥, 진진정)의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후생연금 가입 사실을 문서를 통해 공식 인정했다. 사실조회를 문의한 1998년 이래 12년 만에 전해진 낭보다.
후생연금이란 우리의 국민연금과 같은 일종으로, 서구식 제도를 일찍 수용한 일본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 임금 중 일부를 연금이란 형태로 반강제적으로 떼어왔었다. 전시하 일본정부는 재정적자를 면하기 위해 임금을 고의로 지급하지 않거나 각종 명목의 보험금과 저금을 강제로 공제해 왔으며, 아울러 해방 64년에 이른 현재까지 지급하지 않았다.
‘나고야 소송 지원회’와 ‘공동변호단’에 따르면, 사회보험청의 이 같은 회답은 전향적인 조치로 받아들여진다. 일본정부는 지금까지 후생연금 가입사실에 대해 일관되게 부인해 왔기 때문이다.
후생연금 가입사실이 주는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할머니들은 말 그대로 ‘근로정신대’ 강제노역 피해자라는 사실이다.
일부의 오해처럼 원고 할머니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아닌 미쓰비시중공업에서 강제 노역한 사실이 객관적으로 일본정부에 의해 공식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는 봉건적 유교질서가 아직 뿌리 깊었던 한국사회에서 고국에 돌아와서까지 오랜 기간 여성으로서의 존재감마저 상실당한 체 차가운 사회적 냉대를 받아야 했던 사정을 감안하면, 피해 할머니들에게 있어 각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혹자처럼 근로정신대가 일본군 위안부와 특별히 구별됨으로써 도리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또 다시 사회적으로 ‘배제’(?)하는 수단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반면에 지금까지의 사회적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나약한 피해 할머니들의 심적 상태를 이기심(?)으로 바라보는 시선 또한 경계해야 할 일이다.
문제의 본질은 할머니들의 이기심이 아니라, ‘위안부’ 출신이라는 꼬리표로는 사실상 공존을 허용하지 않았던 지난 시절 봉건적 질서에 있으며, 일본에 갔다 왔다는 사실 하나로 ‘몸 버린 여자’로 낙인찍었던 우리 사회의 야만성과 얕은 역사인식에 있다 할 것이다.
둘째, 해방 64년 만에 후생연금을 수령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후생연금은 원고들의 대리인인 ‘공동변호단’을 통해 조만간 계좌를 개설해 통지하는 절차를 거쳐 수령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대일 과거사 문제에 대한 현 정부의 입장에 비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한마디로 말하면 대한민국 정부가 스스로 포기하겠다고 했던 일제 피해자들의 미불임금을 고군분투 끝에 다름 아닌 피해자들이 찾아오는 상황이 도래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외교통상부는 지난 7월 일본정부가 현재까지 법무국에 공탁형태로 보관중인 최소 4조원대로 추정되는 일제피해자들의 미불임금에 대해 청구권을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대신,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위로’ 차원에서 일정액(당시 1엔당 2,000원)을 지원(?)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정부가 못 찾겠다고 하는 미불임금의 일종인 후생연금을 피해자들과 한일 양심적 시민들의 노력으로 손수 찾아오는 상황을 맞음으로써, 현 정부의 반민족적이고 굴욕적인 대일 정책을 폭로하는 가장 확실한 웅변이 되고 말았다.
한편, 후생연금이 얼마나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지금까지의 예에 따르면, 일본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을 구실로 당시 원금만을 지급하는 비열한 짓을 해 왔기 때문이다. 참고로 2005년 후생연금을 수령한 신일본제철 징용 피해자 여운택씨의 경우, 당시 원금인 316엔(한화 약 3,000원)만을 수령한 바 있다.
우리정부가 지금까지의 비굴한 태도를 전면 수정하지 않는 한 원고 근로정신대 할머니들 역시 이 같은 수모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액수를 떠나 후생연금을 수령하게 된 사실 자체가 갖는 대일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의 정치적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셋째, 일본정부 및 미쓰비시중공업의 강제연행, 강제노역의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은 1999년에 제기돼 2008년 최고재판소 최종 기각 판결(2008.11.11)로 끝난 10년에 이른 재판 기간 동안 줄 곳 강제연행과 강제노역 사실을 부인해왔다. 후생연금 가입 사실은 곧 강제노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당연하고 단순명료한 사실이지만,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은 이 단순명료한 사실마저 아예 부인해왔었다.
여기서 일본정부의 책임이란, 일제강점하 강제노역은 예외 없이 전시 노동력 조달을 위해 국가적 지시와 방조아래 철저히 조직적으로 이뤄진 결과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정부 및 미쓰비시중공업 책임 추궁을 위한 교두보 확보
앞서 언급한대로 후생연금 가입 사실이 문서로 확인됨으로써, 지금까지 줄 곳 그 사실을 부인해 오던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의 주장과 달리 그 불법행위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한 가지 유념해 둬야 할 것은 불법행위 사실이 드러난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아는 바와 같이 사법적 구제의 길은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낭보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문제해결이라는 총적 목표에 있어서는 중요한 교두보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한일협정을 구실로 한) 최고재판소 판결이 결코 미쓰비시중공업에 면책까지 부여한 것은 아니다. 강제연행과 불법노동의 책임은 여전히 남아있다”라는 ‘나고야 소송 지원회’의 입장표명을 통해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즉, 법적 책임은 비록 무산됐지만 도의적․사회적 책임은 끝까지 묻겠다는 점을 일찍부터 선언했다는 점이다.
이런 원칙아래 최고재판소 기각 판결과 무관하게 미쓰비시중공업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투쟁은 이 시각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계속되고 있고(9.20일 현재 만 2년2개월 104회째 금요시위), 시간이 갈수록 유리한 정치적 지형(정권교체, 후생연금 사실 확인)을 확보해 가고 있는 상황이다.
다카하시 회장은 이와 관련한 언론 인터뷰에서 “싸움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이 될 것이다. 문제해결을 위한 두 가지(정권교체, 후생연금 확인) 기회요인이 새로 생겼다”고 의미심장하게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이번 후생연금 사실 확인은 미쓰비시중공업의 향후 대응 여부와 상관없이 ‘끝장 투쟁’을 선언한 ‘나고야 소송 지원회’한테는 투쟁에 날개를 달아 준 격이나 다름없다.
‘나고야 소송 지원회’는 국민연금 사실 확인을 근거로 벌써부터 일본국와 미쓰비시중공업 측에 새로운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입장이다. 광주를 방문한 ‘나고야 소송 지원회’ 고이데 사무국장에 따르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전후 64년 만에, 후생연금 사실조회 신청 12년 만에서야 사실을 시인하는 늦장 조치로 인해, 도중 피해자와 원고 2명이 사망한데 따른 유감의 입장표명을 할 것
②나고야 고등재판소(2007.5.31)가 이미 일본정부에 대한 불법행위 책임을 수반한 강제연행과 강제노동 사실을 인정함에 따라, 일본정부는 스스로 사죄와 보상에 대한 입장 표명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금까지 회피해 왔음. 따라서 이에 대한, 일본정부(또는 후생노동성)의 공개 입장표명 또는 할머니들에 대한 서신 발송
③법정에서 완강하게 강제노역 사실을 부인해 온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해 시정을 강하게 재촉할 것. 아울러 미쓰비시중공업에 ‘나고야 소송 지원회’가 제시한 ‘화해안’ 등에 즉시 응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할 것 등이다.
나고야 소송 지원회는 후생연금 사실 확인을 근거로 ‘화해안’을 끌어내는 무기로 이를 적극 활용하겠다는 입장이다. ‘나고야 소송 지원회’가 미쓰비시 측에 제시한 ‘화해안’은 후생연금과 별개로, 미불임금을 포함한 65년간(1944년 기준)의 신체적․정신적 고통에 대한 사실상의 ‘보상’ 성격이다. 사법적 구제의 길은 끝났지만, ‘보상’ 성격에 준하는 책임을 관철하겠다는 입장이다.
●‘바보 같은 사람들’+한일 연대활동이 낳은 성과
냉혹한 현실을 감안하면, 후생연금 사실 확인 하나가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피해자 문제 해결에 얼마나 긍정적 영향을 미칠지는 극히 미지수다. 그것은 이 문제 역시, 대일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한․일간 정치적 상황과 밀접히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송 제기로부터 만 10년, 진상규명 투쟁에 나선(1986년) 것으로부터는 23년여 만에 거둔 하나의 괄목할만한 ‘성과’라고 볼 때, 우리에게 던지는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손에 아무것도 쥐지 못하면서도 2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일희일비 하지 않고 오로지 정의회복을 위해 한 길을 싸워 온 40여명의 ‘공동변호단’, 1,100여명의 ‘바보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감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미 최고재판소 판결까지 끝난 마당에 다시 360km 거리의 도쿄 원정 ‘금요시위’를 천명한 것은, 누가 뭐래도 ‘앞뒤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한 ‘무모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실낱같은 오늘의 ‘성과’는 두말할 것도 오직 반전평화와 인권을 염원하는 ‘나고야’의 양심적 시민들이 투쟁으로 쟁취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다만 ‘나고야 소송 지원회’가 초심을 힘 있게 견지해 오기까지는, 그에 함께 발맞춰 온 일제피해자들의 역할도 결코 간과돼서는 안 된다 할 것이다. 90세 이른 연세에도 불구하고 재판 투쟁에 온 몸을 다 바쳐 온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 노구를 이끌고 수차례 법정에 서야 했던 故 김혜옥 할머니를 비롯한 원고 할머니들의 지난한 노력, 일제피해자들에 의해 올 1월부터 시작된 미쓰비시중공업 서울사무소 앞에서의 한일 연대 금요시위 등이 뒷받침 되지 않았다면, ‘나고야 소송 지원회’는 또한 수차례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활동은 대중투쟁의 관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일제피해자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 투쟁의 한 주체로 나섰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그 성과 여부와는 별개로 지금까지의 소수 당사자 투쟁 중심에서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에 의한 대중적 투쟁으로, 재판 중심의 법적 투쟁 중심에서 식민지 ‘과거 청산’이란 역사 정치적 투쟁으로 전환하는 시발점이자, 제2의 새로운 투쟁으로 도약하는 전환점이 아닐 수 없었다. 단언컨대, 훗날 근로정신대 투쟁 국면을 구분 짓자면 그것은 광주 ‘시민모임’ 결성 이전과, 결성 후 두 단계로 나뉠 것이다.
양금덕 할머니의 명예졸업(2008.5)과 고이데 사무국장의 정식 초청, 다큐멘터리(‘14살 나고야로 끌려간 소녀들’) 제작, 소송 10주년 행사(2009.2)에 보내는 광주의 영상메시지, ‘시민모임’의 결성과 다카하시 회장의 초청 등 일련의 움직임은, 연이은 좌절을 맞아 기로에 서게 된 ‘나고야 소송 지원회’에게 있어, 실로 20여년 만에 빛고을 광주로부터 전해 진 한 줄기 ‘빛’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결정적인 힘은 지난 6월 전개한 ‘서명운동’이었다. 불과 한 달여 만에 조직된 28,174명분의 서명은, 가뭄 끝에 만난 소나기같이 ‘나고야 소송 지원회’ 입장에서는 이 투쟁에 한층 강력한 신심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실제 미쓰비시중공업측은 3만여명에 가까운 서명용지를 면전에 들이밀자(6.26), 아연 당황한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여기에 곧이어 한 달 뒤인 지난 7월 도쿄 금요행동 2주년에 맞춰 10명의 시민모임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나고야-도쿄를 방문(7.29~8.1)함으로써, 이제 나고야-광주의 교류․연대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고부동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음을 방증하게 되었다.
한편, 광주 신광중학교 66명의 학생들이 ‘나고야 소송 지원회’ 회원들한테 쓴 편지는 20년 활동의 고단함을 한 순간에 녹이는 가장 뜨거운 위로이자 격려였다. 이는 동시에 미래 세대를 통한 한․일간 평화 인프라 구축 차원에서, 청소년 교류활동(8월. ‘아이치 평화를 위한 전쟁전’ 전시회)의 새로운 장을 여는 사례로 기록될만한 것이었다.
다카하시 회장이 광주 방문에서 “서명운동이 큰 힘이 됐다”며 “시민모임과의 교류가 가장 큰 자산”이라고 거듭 언급한 것은 결코 언어적 수사만은 아니었다. 이런 차원에서 이미 최고재판소 판결마저 끝난(2008.11)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늦게나마 광주의 책무를 다하고자 했던 ‘시민모임’과 회원들의 역할 또한 능히 평가 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하늘이 준 기회...무르익는 정세
‘극적인 상황은 극적인 상황에서 나온다’. 어쩌면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20여년의 지난한 투쟁 끝에,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의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작은 단서를 확보한 순간, 동시에 생각지 않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전후 사상 최초로 54년 집권의 자민당이 몰락하고 민주당 정권이 출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토야마 총리를 비롯한 민주당 정권이 과거사 문제에 있어 자민당과 다른 입장을 피력해왔던 것을 고려할 때 민주당 정권 출현에 거는 기대는 적지 않다. 특히 집권 민주당은 미일동맹 중심의 외교정책에서 탈피, ‘아시아 중시’ 노선을 표방하겠다는 마당이어서, 국제정치적 그 배경과 무관하게 대일 과거청산 문제로만 보면 다시없는 호기를 맞은 셈이다. 왜냐면, 국민감정을 감안할 때 역사적 현실에서 한일간 과거청산 없이 결코 아시아의 한 축인 한국과 관계 진전을 이루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단순 물리적 시한이긴 하지만, 내년이 일제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다는 점도 호기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무릇 모든 일은 적절한 ‘때’가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향후 상황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100년’이란 물리적 시한은 ‘과거청산’이란 과제를 한일 양국에 동시에 강제하는 외적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벌써부터 ‘하토야마 담화’나 ‘일왕 한국 방문’ 얘기가 조심스럽게 회자되는 걸 보면,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과거사’ 문제가 한․일간 가장 큰 현안으로 곧 도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이러한 정치적 조건이 모두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란 기대는 아직 섣부르다. 북․일간 국교정상화 논의를 비롯한 동북아를 둘러싼 국제정치적 역학관계, 일본 내 민주당 정권의 정치적 입지, 한․일간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 무엇보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이명박 정권을 비롯한 정치권의 태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된 결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민주당이 위안부 문제와는 달리 강제 징용자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 할 직접적 언급이 없는 점도 주의해 봐야 할 점이다.
한일간 큰 틀의 정치적 분위기와 무관하게, 한편으로 민주당 정권의 출범은 과거사 문제 해결에 있어 그 자체로 미쓰비시 등 전범기업들한테 적지 않는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정부의 침략전쟁 책임과 더불어 그에 가담한 미쓰비시 등 전범기업 역시 그 책임에서 결코 비켜설 수 없기 때문이다.
전후 독일의 사례에서 비춰 볼 때, 일본정부의 태도 표명과 동시에 전범기업들이 그에 따른 보조를 취하거나, 아니면 우회적으로 전범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화해’에 나서는 모양새를 취하도록 정치적으로 이를 강제해 갈 가능성도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끝장 투쟁’에 나선 ‘나고야 소송 지원회’로서는 하늘이 내려준 다시없는 기회를 맞은 셈이다. 동시에 역으로 미쓰비시 입장에서는 바야흐로 전후 64년 만에 가장 고통스럽고 곤혹스런 시간이 도래하고 만 셈이다. 이미 내외적 정세는 시시각각 그 물리적 시한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아울러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 결과물을 떠나 ‘나고야 소송 지원회’의 20년 투쟁의 종착역도 그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점이다.
●종착역을 향한 마지막 관문
말 그대로 절호의 새로운 국면을 맞았지만, 이는 다만 객관적 조건일 뿐이다. 그리고 또하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정치적 조건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도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밑바탕에는 ‘나고야 소송 지원회’를 비롯한 반전 평화를 염원하는 한일간 양심적 시민들, 고통 속에서도 계속돼 온 일제피해자들의 지난한 투쟁이 내재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소 과한 얘기 같지만 이들의 줄기찬 투쟁이, 전후 일본 국민들의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데 자극제 역할을 함으로써, 자민당을 54년 권좌에서 끌어내리게 된 그 일면이 되었던 것이며, 마찬가지로 진부한 얘기 같지만 이들의 끈질긴 투쟁이 없었다면, 대일 과거사 문제 역시 영원히 ‘과거’에 그칠 뿐 오늘날 결코 ‘현재화’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주체적 노력이 없었다면, 객관적 호기 또한 없었다는 점이다.
향후 투쟁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주어진 객관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고 힘 있는 투쟁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림속의 떡일 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고야 소송 지원회’는 마지막 고지를 향해 향후 대정부 및 대 미쓰비시 투쟁에 막판 사력을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다카하시 회장은 이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내년 6월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싸움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이 될 것이다”고 언급한 바 있다. 내년 6월을 시점으로 한 것은 할머니들이 강제연행 돼 나고야에 도착한 시점(1944.6.1), 한일협정 체결일(6.22)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첫째, 일본정부에 대해서는
과거청산에 입장을 같이하는 각계 시민세력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강제연행․강제노동 보상을 위한 입법화를 촉구한다는 방침이다. 아울러 후생연금 문제에 관한 앞서 고이데 사무국장이 언급한 것과 같이 신정부의 ‘성의 있는 대응’을 요구한다는 계획이다.
둘째, 대 미쓰비시 투쟁과 관련해서는
4가지 세부적 행동을 개시․병행한다는 계획이다.
①후생연금 문제에 대해 단호하게 미쓰비시에 조기해결을 위한 교섭 실시
②미쓰비시 압박을 위한 ‘시민모임’ 측 서명운동 재추진 및 조기 해결을 위한 ‘시민모임’의 미쓰비시에 대한 직접교섭 추진(연내)
③조기해결을 촉구하는 국회의원 요청행동 진행
④한일 연대 금요시위 계속, 그 밖의 다른 사항으로는 ‘지원회’와 ‘시민모임’ 간의 교류 유지 등이다.
위 4가지 세부행동 중 ‘시민모임’ 측에 관한 것은 바로 ②항과 ④항이다. 그 중, 특히 주목해 봐야 할 점은 서명운동과 재추진과 함께 ‘시민모임’의 미쓰비시를 상대로 한 ‘직접교섭(연내)’을 언급하고 있는 ②번 항목이다.
이는 먼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서명운동이 지금까지의 투쟁 과정에서 일대 국면 전환을 가져 온 결정적 힘이었음을 다시 한 번 언급한 것으로, 향후 막판 투쟁에 있어서도 그 효력이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임을 재차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나고야 소송 지원회’는 지난 6월 1차 서명용지를 전달할 때도 이번 광주방문에서도 이런 점을 몇 차례 언급한 바 있다.
다음으로, ‘시민모임’과 미쓰비시와의 ‘직접교섭’은, ‘끝장 투쟁’을 마무리 짓는 또 하나의 승부수로 여겨진다.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더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피해국의 시민들이자, 기존 3만 서명운동, 향후 10만 서명을 조직하게 될 주체를 전면에 내세운 직접 교섭을 통해 미쓰비시를 정치적으로 압박하겠다는 대담하고도 고단수의 포석으로 읽혀진다. 시기를 연내로 언급한 것은 ‘때는 지금’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만 이는 서명운동의 진척여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고지가 다가올수록 어쩌면 길은 더욱 험난해 질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미 우리의 투쟁은 8부 능선에 와 있다는 것이다. 정세는 이미 우리에게 와 있고, 그 종착역에 다다를 시간 또한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일제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지금, 바야흐로 역사가 부여한 그 운명의 키는 능력 여하에 상관없이 감히 ‘나고야 소송 지원회’, 그리고 ‘광주 시민모임’의 손에 와 있다 할 것이다.
장장 23년여의 세월, 40대 젊은 청년 교사에서 이제는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60대 후반의 노객이 돼 버린 다카하시 회장의 한 마디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아직까지 미쓰비시에 특별한 입장변화는 없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미쓰비시가 변하고, 변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다. 나고야와 광주시민의 힘으로 미쓰비시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내 가슴속에서는 ‘희망’이란 두 글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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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로 소중한 글이며, 향후 시민모임의 방향을 제시한 글입니다. 꼭 읽어 보시길 바라며 지혜를 모아갑시다. 평화를 말하는 사람이 평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평화를 이뤄갑니다. 실천하는 걸음만이 길을 만듭니다.
저는 가방끈이 짧아서요 최소 3번은 읽어야 합니다 오늘은 시간이 안되 대충 읽엇구요 내일 퇴근후에 정독 하겟습니다 ㅡㅡ;;
이국장님 고생하셨습니다. 잘 읽어 보았습니다. 여러 생각이 드는군요.
김희용목시님 이국언님 수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할머님들에 한을 알고 도와주시는것 같습니다 앞으로 하나만 더 우리가 받아 낼 수 있다면 더 좋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