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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문(祭文)
덕계(德溪) 오건 선생(吳先生)께 올린 제문 /정구(鄭逑)
아, 애통합니다. 선생이시여, 과연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마셨단 말입니까. 선생께서 이제 세상을 떠나셨으니 소자는 장차 누구를 우러러보아야 하며, 가슴이 무너지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슬픔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아득하게 높기만 한 하늘은 어찌 한번 저의 호소를 듣고 저의 심정을 굽어살펴 주시지 않습니까.
보잘것없는 이 소자는 일찍이 어릴 적부터 선생을 곁에서 가까이 모시며 의지할 곳으로 삼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나이가 어리고 의지와 정신이 어두워 선생의 내면에 간직한 실체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으나, 친근감과 공경심이 일어나게 하는 드넓은 도덕과 기량에 자신도 모르게 심취하였습니다. 그 뒤에 문하에서 경서를 들고 생활하며 세월이 차츰 더 많이 흐르자 높디높은 태산을 개밋둑이나 조그만 언덕으로는 모방하고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알았습니다. 그 어찌 선생께서 타고나신 성정(性情)과 기백(氣魄)이 하나같이 다 본성에다 근본을 두었으며 말씀이나 행동으로 나오는 것들도 모두 간곡하고 애절한 정감이 드러난 것이었기 때문에 소자로 하여금 우러러 감복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게 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선생께서는 어릴 적부터 가정에서 부모를 모실 때 평소에는 사모하는 마음을 극진히 하고, 봉양할 때에는 즐겁게 해 드리고, 병환이 있을 때는 깊이 근심하며, 초상을 당했을 때는 깊이 슬퍼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경건한 마음을 다하는 등 일련의 일들이 지극한 정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시어, 부모가 칭찬하기를 효자라 하고 멀거나 가까운 친족들이 칭찬하기를 효자라 하였으며, 이웃 마을 사람들이나 사우들 사이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형제 자매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 두터운 우애가 더욱 여느 사람이 미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는데, 그 행하기 어려운 행실은 또 바깥 사람이 알 수 없는 점이 있는 것이므로 한집안의 친족이 그 사실을 보고서 워낙 특별하여 쉽게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바깥 사람들에게 간곡하게 이야기하였고, 그 말을 들은 자도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효성과 우애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고 그것이 공공연한 칭송으로 이어져 장차 조정에까지 알리려는 움직임이 있자, 선생의 마음에 쑥스럽고 미안한 나머지 남모르는 곳으로 숨어 버림으로써 감히 그 명예를 감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점은, 내실은 없이 요행으로 이름을 얻으려는 세속 무리로 하여금 다소나마 뭔가 뜨끔하게 양심에 닿아 부끄러움을 알게 했을 것입니다.
일찍이 문예에 관한 학문을 닦아 당대에 이름이 났고 또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가문에 영예를 안겨 주었는데, 이는 사실 세속 사람들이 간절히 추구하는 것이지만 선생에게는 대단찮은 일이었습니다. 만년에 대학자의 문하에 들어가 옛 성현의 연원을 탐구하셨는데, 그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이 실로 자신이 전일에 몸소 행하던 것과 부합되어 내심 기뻐하셨습니다. 준수한 기풍이 서릿발처럼 정갈하여 그 모습을 우러러볼 때 엄숙하였는데, 무엇보다 진퇴와 출처의 도리에 엄격한 것은 덕산(德山 조식(曺植))의 천 층 높은 기상이었습니다. 난초 향기 같은 덕을 쌓아 그 앞에 나아가면 따사로움을 느끼는데, 인의의 도를 몸에 지녀 도덕이 넓고 흡족한 것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만 경 너른 강이었습니다. 이들 두 선생 사이에 노닐며 그 기상을 우러러보고 도덕을 상상하는 가운데 많은 것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다가 견해가 더욱 진보되고 덕이 더욱 높아지기에 이르러서는 그 규모와 기상 또한 앞서 거론한 수준과 다르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성주(星州) 향교에 학관으로 계셨는데, 그때 또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황 선생(黃先生)이 본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여 의기가 서로 통한 나머지 마침내 뜻이 맞고 도가 같은 벗이 되어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함께 8권의 주자 글을 읽으셨고 무엇보다 경(敬)을 위주로 하고 이치를 궁구하는 설에 맛을 들였으며, 또 그 마음이 발동하기 이전에 함양하시는 기상은 실로 옛 성현들이 서로 전수한 심오한 뜻이었습니다.
선생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중용》, 《대학》, 《논어》, 《맹자》 등의 글을 예전에도 익히 읽고 애써 탐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 당시 강론한 것은 아무래도 입으로만 되뇌고 귀로만 듣는 형식적인 공부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미 통상적인 범위를 넘어 크게 깨달아 마치 술에서 깨고 잠에서 깨어난 것 같다. 학문이란 오직 깊은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니 문장을 잘 기억하는 것이야 무슨 말할 가치가 있겠는가. 그리고 저 견강부회하여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는 자는 앞뒤가 막힌 소소한 지혜로서 가련하기 그지없는데, 더구나 말로만 하고 마음과 본성을 수양하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외물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애초에 의심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일단 의심하면 깊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일단 생각을 하면 그것을 터득하지 않은 적이 없으셨는데, 터득하기 이전에는 침식까지 잊어버리고 구했으며 터득한 다음에는 또 애지중지 지켜 행여 놓쳐 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정밀하게 생각하는 공부는 미묘하고 심오한 이치를 깊이 탐구하였고, 이미 얻은 것을 지키는 신념은 확고하여 넘어뜨릴 수 없었습니다.
사무를 처리할 때의 엄격한 뜻은 금석처럼 단단하여 빼앗을 수 없고, 사람들을 대할 때의 부드러운 기운은 살랑살랑 봄바람이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부귀영화는 안중에 없고 물건 하나를 남에게 주거나 받을 때도 반드시 도의에 따라 하셨습니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을 보면 병을 앓고 있는 몸도 잊은 채 기꺼이 가르쳐 인도하였고, 소소한 것이라도 남의 장점을 들으면 자신이 그 장점을 지닌 것보다 더 깊이 좋아하셨습니다. 근본과 기초를 이처럼 튼튼하게 세운 뒤에 도를 배워 그것을 내실 있게 한 것이 또 이와 같았으며, 그것을 겉으로 발산하면 성대하고 충만하여 막힘이 없으셨으니, 이는 곧 선생의 학문이 체용(體用)이 다 구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어찌 근세의 유자(儒者)와는 같은 선상에서 함께 논의하지 못할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더 나아가 옛사람의 자취를 따라가 그들과 서로 어울릴 만하다 할 것입니다.
본심은 오직 자신의 자취를 거두어 적막한 물가에 숨고 싶을 뿐, 온 세상 사람들이 휩쓸려 추구하는 것들은 헌신짝보다 더 천하게 여기셨으나, 거룩한 덕행이 드러나 덮어 버릴 수 없고 벗들 사이에 명성이 오랫동안 자자하여 이끌어 주고 천거한 인물이 모두 당대의 군자였습니다. 나라의 은혜는 날로 깊어지고 백성의 고통은 잊기 어려워 마침내 벼슬살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또 정성껏 임금을 섬겨 종일토록 전전긍긍 긴장을 늦추지 않으셨습니다.
사간원에 들어가셔서는 조정의 잘못된 정사 보완을 급급히 하는 것만 아시고, 사헌부에 계실 때는 오직 과거의 국법을 고수할 뿐 사적인 생각으로 벗어나게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이조의 막료로 계실 때는 또 인물을 종합하여 따져 보아 유능한 자를 등용하고 무능한 자를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삼으시어, 비록 이로 인해 끝없는 증오와 원망을 쌓아 그 화가 장차 예측할 수 없을 정도까지 되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일의 옳고 그른 기준은 오직 의리상 어떠한가 따져 보아 의리에 맞는 것이라면 자신의 주장을 전혀 굽히지 않으셨으며, 가슴속에서 우러나와 외면에 응하는 일들이 모두 지극한 정성과 충정에 의한 것으로서 애초에 털끝만큼도 가식이 없으셨습니다.
당당한 왕좌(王佐 군왕을 보좌하여 왕업을 이룰 만한 인물)의 기풍이며 강직한 벼슬아치로서의 미덕은 매서운 추위에 홀로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 같고 드높은 산마루에 우뚝 선 난새와 고니 같았기에 군자는 가슴이 트여 용기가 솟고 소인은 목을 움츠리면서 두려워하고 꺼리는 대상이었습니다. 선생을 아는 자는 그처럼 지나치게 꼿꼿하게 할 것이 뭐가 있는가 하고, 선생을 모르는 자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퍼뜨려 함부로 비방하였습니다. 소인의 입이 흉악한 것은 예로부터 으레 그랬던 것으로, 드넓은 선생의 가슴에야 그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었겠습니까.
경호(鏡湖)의 안개와 달빛이 낙양(洛陽)의 나그네 가슴에 길이 들어오고 고향의 순채와 농어 맛이 길손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금할 수 없게 하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오랫동안 여기서 서성거리는지 모르겠다 하시며, 말이 그에 미치면 그때마다 반드시 한숨을 내쉬셨습니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옷깃을 펄럭이며 떠나오실 적에 길 가는 행인에게 앞길의 원근을 물을 것까지야 뭐가 있었겠습니까. 10년의 소원을 이제 비로소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동안 황폐해진 전원을 일구고 조그만 집의 남창을 활짝 열어놓은 곳에서 읊조리며 배회하는가 하면, 십 리의 허공을 굽어보는 누대 위에서 한눈에 모여드는 들판의 풍광을 좋아하셨습니다. 솔과 대나무를 섞어 심고 매화와 국화도 함께 가꾸어 놓았으며, 맑은 못물에는 차가운 달빛이 잠기고 푸른 연잎에는 가랑비가 뿌리는 가운데 섬돌 위에 떨어지는 샘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는가 하면, 맹물을 마시고 팔베개하는 청빈(淸貧)의 즐거움도 있으셨습니다. 서계(西溪) 한 구역의 맑고 기이하며 한적하고 툭 트인 경치는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기던 곳으로, 장차 그곳에 초당을 얽으면 충분히 소요하고 즐기실 만하였기에 앞으로 두세 문인들과 그곳에서 선왕(先王)의 도를 노래하며 몸이 늙어 가는 줄을 모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선생의 청아한 흥취가 수석(水石)을 즐기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또 누가 나라를 걱정하는 선생의 본심은 사실 잠시 잠깐이라도 해이해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한밤중에 지난날 몸담았던 도성의 꿈을 꿀 제 임 계신 천리의 구중궁궐이 지척인 양 가까웠고 임금에게 이 몸이 지닌 물가의 난초와 산기슭의 백지(白芷)를 바쳐 올리리라 기원하셨습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선생의 마음만 그처럼 애절했을 뿐 아니라, 선생을 아는 사람들의 기대 또한 매우 깊었습니다.
그리하여 선생을 위해 걱정하는 사람은 오직 질병이 혹시 저해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빨리 병마를 훌훌 떨쳐 버리고 이 세상을 위해 다시 일어나시어 우리 임금에게 훌륭한 계책을 올려 초췌한 백성을 구원해 주시거나, 아니면 도를 밝혀 문인 제자에게 전수하여 후학들의 안목을 트여 주시기를 바랐으니, 이 두 가지 중에 반드시 하나는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한편 믿었던 것은 저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었던 것은 끝내 믿을 수 없는 것이어서 선생으로 하여금 갑자기 뜻밖의 화를 당하게 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선한 이에게 복을 내린다는 말은 무슨 말이며 어진 이는 장수한다는 말은 또 무엇입니까. 천심을 헤아릴 수 없고 이치를 알기 어렵습니다. 본디 허무한 저 인사(人事)와 시운(時運)이야 이제 따져 물을 것도 없습니다만 세상의 그 많은 약물을 어디에 써 보겠습니까. 나라는 참담하여 현인을 잃었고 산림은 적막하여 푸른빛만 띨 뿐이니, 군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한탄하며 소인은 갓 먼지를 털고 서로 일어나 기뻐할 일입니다. 이는 소자가 한도 끝도 없이 사문(斯文)의 불행을 곡하고 세도(世道)의 불행을 곡하며 아울러 사적인 정을 위해 곡하느라 또 하늘을 부르짖으며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스스로 생각건대 저는 건방지고 경박한 자질에다 어릴 적에 또 부친을 잃어 제대로 배운 것이 없으므로 너무도 우매하고 태만하며 방자한 나머지 어디서도 저와 비슷한 자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니, 선생께서 거두어 돌보고 가르치고 바로잡으며 또 나아가 분발시켜 주신 일이 없었다면 저는 앞이 깜깜한 인생으로서 영원히 군자에게 버림받은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봄바람이 살랑이는 날 뜨락에서 산보하고 가을달 밝은 밤 텅 빈 마루에서 모실 적에 경서를 들고 행간의 뜻을 탐구하기도 하고 혹은 고요히 앉아 두 손을 맞잡고 있기도 하였는데, 청아한 담론이 진지하시고 정중한 가르침이 간절하였습니다. 위로는 천명(天命)의 오묘한 이치와 가까이는 인사(人事)의 타당한 도리, 크게는 나라를 다스리는 법과 절실하게는 덕을 쌓고 몸을 닦는 기준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되풀이해 가며 말씀하시어 반드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셨으니, 이 모두 소자가 모르는 점에 대해 숨김없이 일러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저의 객쩍은 혈기를 소멸하려면 천리(天理)를 깊이 탐구해야 하며 등골을 꼿꼿하게 펴고 앞으로 매진하려면 반드시 먼저 평이한 길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뜻으로 대면하여 간곡하게 말씀하신 적이 많았고 편지로도 부단히 일러 주셨습니다. 다만 저의 자질이 못나 행여 그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며, 그 무한한 은혜를 받들어 감사드리는 마음은 어찌 감히 시종여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제가 죽더라도 잊기 어려운 유감이 있는데, 지난 갑자년(1564, 명종19) 이후 10년 동안에 선생을 찾아가 곁에서 모신 적이 겨우 네 차례에 그쳤다는 점입니다. 이는 제 가문에 재앙과 우환이 거듭되어 반년도 무사히 넘어간 때가 없었으므로 비록 선생을 찾아가 모시며 학업을 마저 끝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기는 합니다만, 한편 어찌 정성이 두텁지 못한 소치가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늘 고개를 들어 생각할 때 부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생각하면, 작년 가을에 선생께서 잠시 구성(龜城)에 머무셨는데, 그것은 장차 임금의 부름에 응하기 위해 올라가시다가 병으로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게 되자 마침내 길가의 촌가를 구해 임시로 계셨던 것입니다. 이때 가까운 지역의 사자(士子)들이 모두 찾아와 배알하였는데 소자도 반달 동안 모셨습니다. 탕약을 살펴보는 여가에 수시로 고매한 가르침을 받들어 반평생의 의심들이 구름과 안개가 걷히듯 말끔히 풀렸습니다만, 스스로 돌아볼 때 무딘 자질을 변화할 수 없어 범상하고 속스러운 모습이 지난날 그대로였습니다. 10년의 가르침을 헛되이 저버려 순후하신 덕과 위의를 우러러보기가 부끄러운 나머지 아침에는 한낮이 되도록 밥 먹을 생각을 잊어버리고 저녁에는 밤이 깊도록 잠자리에 들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은 소자는 이미 가슴속의 의문을 남김없이 다 여쭈었고 선생께서도 저를 위해 저 밑바닥까지 철저히 분석하여 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외로운 생활을 한탄한 지 오래되었고 그대도 어울리는 사람이 없어 외로우니 어찌 내 곁으로 와서 한적하고 깊은 산골에서 지내보지 않으려는가. 정사를 새로 짓고서 한가로이 앉아 도를 강론하고 벽장에 가득한 옛 경전을 그대와 함께 한방에서 음미하고 싶네. 정밀한 예학(禮學)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데 무엇보다 《의례(儀禮)》를 읽어 내기 어려우니 더욱 그대와 함께 몇 달 동안 이 책을 가지고 논의했으면 하네.”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무능한 소자는 당장 계속 곁에서 모시면서 가르침을 청하고 싶었으나 한편으로는 또 세상일에 파묻힌 몸이 갑자기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기에 감히 즉시 응답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심은 확고하여 적절한 시기가 되면 결행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작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로 선생의 목소리와 모습이 천리 너머 막혀 있긴 하였으나 편지로 가르침을 주시는 보살핌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아, 이제는 어찌하면 좋습니까. 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부러졌으니 말입니다. 선생의 모습이 영원히 사라져 다시는 뵐 수 없게 되었으니 심장과 간장이 불에 타는 듯 아픕니다. 하늘의 재앙이 어찌 이리도 혹독한지 만사가 이제는 끝났습니다. 생각건대 선생의 끊긴 학문을 이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소자가 힘이 약해 그 책무를 감당하기에 부족하여 사문(師門)에 욕을 끼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만, 어찌 감히 저의 이 목숨을 걸고 있는 심력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소자의 변변찮은 글이 어찌 감히 선생의 일생을 그려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이것을 가지고 묘갈명과 묘지문을 구하려는 것입니다.
덧없이 흐르는 세월이 어느덧 장례를 치를 때가 되어 상여가 준비되고 상여 줄이 갖추어지니 길 가는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떨굽니다. 친지와 벗들이 모두 모여들고 부의가 답지하는데, 더구나 소자는 이제 누구를 의지한단 말입니까. 아픈 가슴은 어찌 칼끝에 찔린 정도만이겠습니까. 제물을 받들어 영전에 올리고 비통한 정을 쏟아 예물을 대신하며, 한잔 술을 바치며 통곡하니 두 뺨에 눈물이 줄줄 흐릅니다. 행여 선생의 영혼이 계시거든 제 이 정성을 굽어살펴 주소서. 아, 애통합니다.
[주]덕계(德溪) …… 제문 : 작자가 32세 때인 1574년(선조7)에 향년 54세로 죽은 오건(吳健)의 영전에 올린 글이다. 오건은 작자의 스승이자 종이모부(從姨母夫)로, 그의 자는 자강(自強),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조식(曺植),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의 문인이다. 작자가 13세 때 성주 향교의 학관(學官)으로 있던 그에게 《주역(周易)》을 배웠다.
祭德溪吳先生文
嗚呼哀哉。先生其果竟至於此而止邪。先生而止此。小子將復何所仰焉。而其所以崩摧隕割者。曷其有旣邪。上天茫茫而但高。何不聽我之呼而察我之志邪。藐玆小子。早自丱角之年。奉几杖於左右而以爲依歸之地也。當時年齡稚弱。志氣昏愚。固不足以測先生之所存。而其沖然德宇之可悅而可敬。則已不自覺其心醉也。旣又執經門下。而周旋進退。歲月漸久。則於是益知泰山之高。而丘垤阜陵。宜不可以準擬也。蓋豈非先生之所以得之稟受之初而爲性情氣魄者。一皆本之於性而發之言語事爲之間者。亦無非淳慤惻怛之所形。故使小子仰而感。感而慕。亦出於眞心之所激。而又不自知其所以者邪。於其自少而奉承家庭之間。則所以致其愛。致其樂。致其憂。致其哀。致其敬者。無非發於至情之極。而父母稱之則曰孝。宗黨親戚稱之則曰孝。以至閭里士友之間。其所以爲辭者無二也。至其所以處兄姊之間。則友愛之隆。
尤非人之所可及者。而其所處之難。又有非外人之所知者。故唯有門內之親見其然。而知其高而不可及。則切切轉語於人。而聞者亦皆歎嗟而噓噫也。及夫孝友之實。有以孚於人聞而發於公誦。至於將有以上徹天聽。則蹙然以爲未安於先生之心。而至於思有以隱避而不敢當者。此使世俗倖倖求名之輩。亦怛然少知感而愧之也。早事文藝之學。著名當世。而旣又發迹場屋。以爲門戶之榮。此固世俗之所慕。而在先生則爲餘事也。晩親有道。泝洄古人之淵源。其所謂學問者。實與吾前日之躬行。有以暗符。而心獨覺其憙憙也。淸標霜潔。望之儼然。而尤嚴於進退出處之幾。德山之千層壁立也。馨德蘭薰。卽之也溫。而仁義在躬。道德博洽。退溪之萬頃止水也。優游乎二老先生之間。而得之於觀望瞻想之際。至於見益進德益就。則其規模氣像。亦有與曩時之云云者。有不得不異者也。曾試敎於星黌。
而又得錦溪黃先生之適來刺是州。聲相應氣相求。遂成同人之契。斷金不足喩其利也。相與讀八卷朱子之書。而尤有味於主敬窮理之說。又其所涵養於未發之前之氣像者。實亦古昔聖賢相傳之深旨也。謂庸學語孟之書。舊亦何嘗不熟讀而力索。顧其所講說者。終不過乎口耳也。今旣脫然而大悟。若醒醉而喚睡也。學惟貴於深造。何足道其强記也。彼又穿鑿而爲說者。哀規規之小智也。況徒言而又不能存養者。皆是爲外物之所累也。有所不疑。疑之未嘗不爲之思。思之未嘗不爲之得。其未得之也。則至忘寢食而求之。其旣得之也。則又眷眷奉持而猶恐其失墜也。故其精思之功。有以窮深乎微賾。操守之堅。有以確乎其不可躓也。其制事之嚴。則如金石之不可奪。其接物之和。則如習習春風之被也。千駟之富貴。視之如無有。一箇之取與。必據乎道義也。見人之志學。則樂爲之誨導。而不知沈痾之在體。聞人之片善。則心好之如己出之不啻也。夫旣定本立脚之實如許。而學而充之者又如此。而又其發之者。又將沛然而無窮。此先生之學所以爲體用具備者也。豈徒近世之儒者不可與議爲。亦將追古人之塗轍。而庶幾乎參跂也。素懷惟欲卷而藏之寂寞之濱。擧世之所奔波顚倒者。
曾不若乎弊屣也。茂實騰而不可掩。名聲久荷乎朋友。援引薦拔。總皆當世之君子也。國恩日深。民病難忘。而終不可乎不仕之無義。則又爲之黽勉服事。而窮日乎惴惴也。入薇垣而唯知補拾闕遺之爲急。在柏府則唯先憲舊章之固守。而不可以私意而貳之也。佐僚天官。則又以綜核人物。進退賢邪。斷以爲己任。雖復以此積嫌怨之無窮。而其禍將有所不可言者。而皆有所不避也。事之當否。惟問乎義之如何。而義之所安。則坦乎不可撓。由中應外者。無非至誠悃愊之所爲。而初無一毫之有所爲也。堂堂王佐之風。謇謇廷紳之懿也。毅乎其松柏之獨秀。屹乎其鸞鵠之孤峙也。君子所爲開心而增氣。小人所爲縮頸而畏忌也。知之者。謂先生何至於甚。不知者。又復胥動無理之談。以恣乎罵詈也。小人口之罔極。自古而莫不然。畢竟何有於曠然之胷次也。鏡湖煙月。長入洛陽之羈懷。故國蓴鱸。不禁遠客之歸思也。吾何爲久此棲棲。言必及而興喟也。飄風吹其征衣。前路何必問人。十年所願。今始遂也。闢就蕪之田園。開數楹之南窓。聊永言乎徙倚也。軒臨十里之半空。却愛野景來斯萃也。松與竹其交栽。梅與菊其幷蒔也。淸沼寒月。綠荷疏雨。又復傾耳落階之泉脉。樂亦在乎飮水而枕臂也。一區西溪。淸奇幽曠。天破慳而地出祕也。擬將誅茅結椽。亦足以逍遙樂玩。願與二三子。於焉乎歌詠先王之道。不知老之將至也。於是人皆知先生之雅趣。膏肓乎水石。又誰知先生憂國之本心。則實未嘗須臾之暫弛也。
半夜時回思舊之夢。九重天闕。隔千里其如咫也。望美人吾有所贈之。汀有蘭而岸有芷也。不唯先生之所不能自已者如是。抑亦有識之相期者甚深。其所以爲先生爲憂者。則唯以疾病之爲祟也。願蚤除乎二豎。爲世道而再起也。獻訏謨於吾君。救生民之憔悴也。否者。明道而授徒。開後來之聽視也。二者將必有一得焉。抑又所恃者。蒼蒼之彼也。豈謂所恃者終有所不可恃。而使先生遽爲奇禍之所嬰。福善如何。仁壽如何。天莫測而理難揆也。人事時運。兩茫茫其不足詰。亦何所售其藥餌也。邦國慘惔而失賢。山林寂寞空蒼翠也。君子所爲扼腕而悼歎。小人所爲彈冠而交喜也。此小子斯文之哭。世道之哭。哭之不已。而其所以爲私情哭者。又呼天而不已者也。自惟狂妄輕躁之質。小又早孤而無所學焉。其昏惰放縱之甚。實亦無所肖似也。非先生之收恤之。敎誨之。匡直之。又從而振作之。吾知面墻之生。永不免爲君子之所棄也。春風庭除之散步。秋月虛堂之參侍也。或執經而尋行。或靜坐而拱手也。或淸談之諄諄。或鐫誨之切至也。上而天命之微。近而人事之誼也。
大而經綸之法。切而進修之軌也。論難反覆。必極其歸趣。蓋亦無隱乎爾也。謂我消磨乎客氣。務宜涵泳乎天理也。堅脊梁以勤邁。必先由乎平易也。多面命之慇懃。亦書諭之不置也。惟薄質之淺率。恐不克乎遵履也。恩奉戴之罔極。敢替心於終始也。但有遺憾抵死而難忘者。蓋自甲子以後。十年之間。獲進陪於左右者。僅止於四也。旣緣私門禍患之連。仍未嘗有半歲之無事。雖欲徒步往從之卒業。而不可得焉。而亦豈非微誠之不篤而然也。則每向風而愧恥也。憶昨去歲之秋。高軒暫滯於龜城。蓋將赴嚴召。而病不得而進前。則遂索路傍之村舍而僑寄也。近方士子。咸來拜謁。而小子亦叨半月之執篲也。湯藥之餘。時獲奉承淸誨。半生疑晦。豁若雲霧之披也。自顧頑鈍之莫變。依舊昔日之庸鄙也。空負十年之敎育。
愧瞻德儀之充粹也。朝徹晝而忘餐。夜參半而不寐也。小子之愚昧。旣盡以胷臆之所存。而仰質而不諱。先生亦爲之剖析解破。傾倒乎底裏也。謂余長懷索居之歎。子亦無伴而踽踽。盍亦來我乎婆娑林壑之幽邃也。新構精舍。端合宴坐而講道。滿龕遺經。深願與子共入室而齊胾也。禮學精密。不可以不講。而最苦儀禮之難讀。則尤欲與子共數月之論議也。於是小子之不敏。亟欲趨走請敎。而又懼私宂汨沒。不可遽以自脫。則不敢卽以奉唯也。然矢心則靡他。唯歲月之是俟也。忽奉別而退私。音容邈乎千里也。猶尺書之警誨。得蒙荷乎恩庇也。嗟今焉其奈何忽山梁之摧圮也。儀刑永隔。不得以復覿。痛心肝之如燬也。何天禍之斯酷。哀萬事之已矣也。獨念夫墜緖之茫茫。伊有手者孰是也。弱力不足以承當。恐祇爲師門之羞辱。然敢不竭其心力。繼之以死也邪。重惟不腆之文。豈敢爲先生之狀也哉。蓋欲奉之。以求幽堂之銘誌也。日月忽其不居。卽遠期之迫邇也。柳車飭而繐綍具。行路咸其隕淚也。親朋畢其會集。紛奠賻之來致也。矧小子之疇依。痛豈但乎鋒刺也。奉時羞以羅前。薄寫情而代贄也。奠單杯而痛哭。交兩頤之涕泗也。幸先生之不昧。有以鑑此之誠意也。嗚呼哀哉。
중씨(仲氏) 서천군(西川君) 곤수 에게 올린 제문/정구(鄭逑)
아, 애통합니다. 선인(先人)께서 남기신 자식이 네 명이었으나 백씨와 누나는 진즉 세상을 떠났고 세상에 남은 것은 우리 형제 두 사람뿐이어서, 그동안 서로 의지하여 밀접하게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한몸의 수족 같다는 말로도 그에 비유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형께서 또 갑자기 이렇게 되셨으니 의지할 데 없이 고단한 이 몸이 장차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형의 그처럼 아름다운 덕과 높은 행실로도 끝내 하늘의 큰 보답을 받지 못하셨으니, 천도가 과연 있으며 신의 이치가 또 과연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벼슬은 1품의 반열까지 올랐으나 평소의 뜻을 펴지 못하고 수명은 60여 세를 헤아리나 장수를 누리지 못하셨습니다. 가승(家乘)과 세보(世譜)는 50년 동안 초안을 잡아왔으나 결국 난리로 인해 잃어버렸고 의택(義宅)을 지으려는 뜻을 지녔으나 이루지 못했으며, 정원의 정자와 들판의 별장에 대한 기문(記文)을 지어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뜻을 보였으나 단 하루도 그 낙을 누려 보지 못하셨습니다. 이 모두 어찌 어리석은 저희들 자제가 그 유지를 받들어 계승하여 이루어 낼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비록 만년에 쓸쓸한 모습으로 집안에 홀로 앉아 당대에 어떤 영향을 행사하신 일은 없었으나 온 세상이 우러러보고 사림이 의지하였으며, 내외의 친족들이 친소(親疏)와 원근의 관계를 막론하고 모두 태산 북두처럼 추앙하여 믿고 의지하였으니, 길흉을 판단하는 시초(蓍草)와 거북의 영검이며 말없이 혜택을 끼치는 산천의 은덕 같은 위상으로서 세도(世道)와 가정에 과연 얼마만 한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산이 무너지듯 들보가 쓰러지듯 갑자기 세상을 떠나 붙잡을 수 없었으니, 그 깊은 슬픔과 큰 아픔은 어찌 우리 한 가문만의 사적인 일이겠습니까.
임진년 난리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을 때 임금의 행차를 호종하고 중국 조정을 감동시켜 우리나라 삼도(三都 강화(江華), 수원(水原), 개성(開城))를 수복하심으로써 제일가는 공을 세워 종정(鍾鼎)에 그 공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철권(鐵券)이 곧 이루어질 시기에 병이 들어 조정에서는 한 해가 지나도록 그 대상 인물에 대한 심사를 늦추었고 반드시 병세가 차도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는 성상의 간곡하신 하교에 그 소식을 들은 자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나 끝내 하루의 목숨을 더 연장하여 기린각(麒麟閣)에 공신으로서의 초상화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이 또한 만조 백관이 모두 슬퍼한 일로, 임금께서도 부음을 접하고 놀라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심지어 저 길 가는 보통 사람들까지도 다 “원훈(元勳)을 잃었구나.”, “나라의 원로가 죽었구나.”, “덕 있으신 분이 가셨구나.”, “어진 이가 사라졌구나.”라고 하지 않은 자가 없어 평소에 형과 서로 알던 사람이건 모르던 사람이건 할 것 없이 모두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으니, 누가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겠습니까.
40년 동안 병을 안고 살아온 이 아우는 한평생을 신음 속에 지냈는데, 항상 우리 형을 우러러보면 덕 있으신 모습이 충만한 데다 정신이 온화하고 기운이 넘치며 또 쌓은 덕이 두터워 세상 사람들이 그 은혜에 감복하고 있으니, 반드시 신령의 도움을 받아 꼭 장수를 누리실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는 우리 집의 자제만 그처럼 믿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내심으로 ‘나는 반드시 형보다 먼저 죽을 것인데 내가 죽은 뒤에 우리 형의 마음이 어떠할까?’ 하였는데, 그 믿었던 것은 헛되었고 꼭 그렇게 되었어야 할 것이 잘못되어 이 아우가 도리어 우리 형이 차마 견디지 못했을 슬픔을 대신하게 될 줄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형께서는 막연하게 아무것도 모르시겠지만 이 아우만은 깊은 슬픔으로 가슴이 시리고 쓰라립니다. 저는 평소에 불평스러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우리 형에게 호소하곤 하였는데 앞으로는 이 속마음을 누구에게 호소한단 말입니까.
형께서는 병을 앓은 지 80일이 지났으나 정신은 날로 더 맑아지고 눈빛도 날로 더 밝아졌으며, 사고력이 날로 더 정밀하여 담소하시는 정도가 평소 때와 다름없으셨으므로 비록 병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음식을 들지 못하시어 자제들의 깊은 걱정이 되기는 하였으나 믿는 데가 있어 행여 잘못되리라고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그 믿었던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이처럼 정신이 나가고 꿈속 같은 슬픈 일이 생기고 말았으니,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이제 어찌한단 말입니까. 천심이 어디에 있고 신령이 어디에 있으며, 형은 이제 어찌되고 이 아우는 또 어찌한단 말입니까. 선한 이는 복을 주고 악한 자는 화를 내려야 할 저 하늘은 아득하고 감감할 뿐이어서 이미 신령이 없고 믿을 수 없으니, 이 억울함을 누구에게 묻고 누구에게 따진단 말입니까.
앞으로 죽기 전까지 남은 생은 순전히 형을 그리는 날로 이어질 것이니, 비록 약간 생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어찌 살아가는 낙이 있겠습니까. 앞으로의 여생은 많이 남지 않았고 후일에 과연 우리 가족이 지난날 이 세상에서처럼 한자리에 모이게 되면 정말 슬픔은 한계가 있고 즐거움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형은 지금 과연 먼저 가신 부모와 형이며 누나들과 서로 모여 즐거움을 나누시기를 제 후일의 기대처럼 하고 계십니까? 진짜 그러십니까? 이제는 절망입니다. 앞으로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이승에 미련이 있겠습니까. 눈물이 말라붙고 입은 더듬거리며 목이 메고 가슴이 갑갑한데, 곡소리답지 않은 곡소리와 조리 없는 이 말씀이 어찌 우리 형의 영혼이 굽어살펴 주실 만하겠습니까. 아, 이제 절망입니다. 아, 애통합니다.
[주]중씨(仲氏) …… 제문 : 작자가 61세 때인 1603년(선조36) 2월에 지은 글이다. 서천군은 작자의 중형 정곤수(鄭崐壽)의 봉호로, 처음 이름은 규(逵)이다. 1587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대기근을 구제하고 돌아와 서천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우승지에 올라 선조를 의주(義州)에 호종하고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파견토록 했으며,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오자 영위사(迎慰使)로 그를 영접하는 한편, 평양에 머물러 있던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에게 서울의 수복을 재촉하는 등 국가의 최대 수난기에 탁월한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그로 인해 이항복(李恒福)과 함꼐 호종(扈從)의 원훈(元勳)에 녹훈되었다. 65세 때인 1602년 11월 14일에 죽었고, 이듬해 2월 9일 경기 장단(長湍) 백곡(柏谷) 뒷산의 선영에 장사 지냈다. 《寒岡集 卷14 西川府院君鄭公行狀》
祭仲氏西川君文
嗚呼痛哉。先人遺體四人。而先伯先姊。旣已早世。在世只有我兄弟兩人。而相依爲生。手足不足以擬其如。而兄又遽至於此。惸惸殘形。將何以爲心於餘生也邪。以兄之懿德峻行。竟不食天之大報。天道如何。神理如何。官一品之崇。而不得展素志。壽六十之餘。而不得究遐齡。家乘世譜。起草五十年。而竟不復於亂燬之餘。義宅有志。而莫遂園亭郊墅。皆有記而不得一日之享焉。豈皆愚騃子弟所得奉承遺志。而可以繼述成就者邪。雖晩歲蕭然。獨坐於家。無所爲於時。而擧世仰之。士林依之。內外門族。不問親踈遠近。皆共戴若北斗泰山。倚而爲重。蓍龜之靈。山澤之滋。其有裨於世道家庭者如何。而如山之頹。如梁之放。忽忽不可以及焉。則深悲大痛。豈獨爲一家之私也。亂離顚沛。扶扈日駕。感動天心。恢復三都。勳爲第一。記功鐘鼎。鐵券將成。疾病乘之。停勘閱歲。必待病間。聖敎丁寧。
聞者感涕。而竟不得延一日。以留麟閣之形。此又滿朝所共悲。而宸聽亦爲驚痛。至於行路愚智。咸莫不曰元勳喪矣。耆舊亡矣。德人逝矣。仁者已矣。無問識與不識。莫不咨嗟涕洟。是孰使之然哉。四十年抱疾之弟。一生長在呻吟之中。而每仰覿吾兄德容充粹。神和氣盛。又積德之厚。爲世所服。必受陰隲。當享壽考。不惟子弟之所恃。人人皆以爲信。每意吾必先兄。而兄何以爲心於吾沒之後。孰謂可恃者莫恃。當必者不必。而使弟反爲兄之不能爲者邪。兄則漠然不知。而弟獨含疚懷痛。深酸永苦。吾於平生。凡有所不平。則必訴於吾兄。今後誰訴於此懷乎。兄病八十日矣。精神日益爽。而眼目日益朗。思慮日益精。而笑語無減於平昔。
雖疾痛之苦。飮食之廢。爲子弟之深憂。而有所恃而不以爲疑。竟不能保其所恃。終有如此如癡如夢之慟。已矣乎已矣乎。忍焉哉忍焉哉。天竟奈何。神竟奈何。兄竟奈何。弟竟奈何。茫茫夢夢。悠悠冥冥。旣無神而無信。又孰徵而孰詰。自此未死餘年。盡是思兄之日。生雖復少活。亦何足以爲生之樂邪。餘生無幾。而他日果有相聚有同此世。則信乎其悲者有限。而其樂者無窮期矣。亦不知吾兄今日果與先父母先兄先姊相聚。而樂有如吾他日之所期也邪。其然乎。已矣乎已矣乎。自此豈復有一毫餘念於此生也邪。目枯口。哽咽胷塞。難聲之哭。不文之言。豈足以爲吾兄未亡之鑑也邪。已矣乎已矣乎。痛焉哉痛焉哉。
정경부인(貞敬夫人) 하동 정씨(河東鄭氏)에게 올린 제문/정구(鄭逑)
아, 형수의 장례를 치른 지 지금 42년이 지났습니다. 지난겨울에 중씨(仲氏)께서 세상을 떠났는데, 형수의 무덤을 옮겨 중씨와 같은 장소에 모시도록 한 것은 사실 중씨의 유지였기에 삼가 조카 및 종손(從孫)들과 의논하여 중씨의 뜻을 이루려고 합니다.
생각하면 제가 어리석고 못나 미처 형수님을 뵙지 못했는데, 이제 유체(遺體)를 뵙고 몸소 소렴(小斂)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생각건대 형수께서 자식 하나를 두셨으나 재롱부리며 노는 모습을 보지 못하셨고,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그만 일찍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여러 자녀가 있어 우리 형수께서 남기신 음덕을 충분히 누리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픔 속의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이장할 날짜를 정하고 무덤을 손질하는 이때 삼가 한잔 술을 올리며 정성을 바칩니다.
[주]정경부인(貞敬夫人) …… 제문 :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작자의 중형 정곤수(鄭崐壽)의 첫째 부인으로 정희수(鄭希壽)의 딸인데, 시집온 지 7년 만인 1562년(명종17)에 죽었다. 본 제문은 작자가 61세 때인 1603년(선조36)에 그를 남편의 무덤 곁에 이장할 때 지은 것이다.
祭貞敬夫人河東鄭氏文
嗚呼。嫂之葬今四十有二年矣。去冬。仲氏去世。而遷嫂之窆。與之同原者。實仲氏遺意。則謹與孤姪孤孫輩同議。以遂仲氏之志。追惟小弟愚騃無狀。未及拜嫂於堂。今者得覿遺體。親小斂焉。復念嫂有一兒在孩。而嫂不獲見其戲嬉。兒旣壯成而早世。得有諸子諸女。猶足以享吾兄嫂之遺德。其不爲悲中之幸也邪。祔奉有期。幽宅方理。恭奠一斝。敬薦潔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