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외할머니 / 정선례
이성에게 관심이 별로였던 나에게 남편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는 말수가 적고 진중하여 내 마음에 든든한 느티나무로 뿌리를 내렸다. 어느 날 믿음이 생기는지 마음이 열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였다. 그는 8남매 장남이며 혼기가 꽉 찬 32살 되던 해였다. 위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아 투병 중이던 어머니께 며느리 얼굴 한 번 보여드려야 마음이 놓였나 보다. 그것도 모르고, 사랑이라 착각하며 결혼까지 했으니, 단단히 속았다. 억울해서 어쩌나, 인연이라 생각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앞산이 단풍으로 물들어 깊어가는 가을날, 백발이 허연 팔십 살 할머니와 스물셋 수줍은 새색시의 불편한 동거는 17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녀의 첫인상은 아담한 체구에 옛날 노인답지 않게 눈에는 총기가 서려 있고 동그란 얼굴에 굵고 오뚝한 콧대는 후일 당신의 성품을 짐작게 했다. 귀는 부처님 닮아 옛날 노인답지 않게 이목구비가 뚜렷하였다. 젊은 체구와 달리 동네 남자들도 할머니 앞에서는 예의를 갖추게 하는 카리스마가 있으시고 농을 즐기실 만큼 호탕한 성품의 여장부였다. 젊어서 서방님 먼저 보내고 홀로 딸 셋 키우며 온갖 풍상 겪으신 세월에도 귀여운 이미지가 남아 있었으니, 친정에서 부잣집 막내딸로 자란 영향이리라.
결혼 전 나는 잠이 많기로 소문이 났었다. 결혼후에도 잠은 여전히 많아 곤란을 겪었다. 동네 사람들 다 들에 나왔다며 신랑은 이불속에서 아직 나오지 않는 나를 깨운다. 할머니는 담배 두어 개비 풀어 당신의 키만큼 한 곰방대에 넣어서 연달아 피우시곤 했다. 재떨이에 탕탕 두들기며 재를 떠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잠을 잤다. 아침 해가 중천에 떠올라도 밥도 안 하고 세상모르고 잠만 자는 손부 며느리로 인해 얼마나 속을 태우셨을까? 할머니의 일상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동백기름을 머리에 바르셨다. 촘촘한 참 빛으로 치렁한 백발 머리를 빗어 비녀로 쪽을 지었다. 새파란 며느리가 어느 날 “할머니 커트하면 시원할 것 같아요.” 설득해서 미용실에 모시고 가서 짧게 자르고 거울 보여 드렸더니 어색해하면서도 머리가 가볍다고 하셨다. 평소 반찬 투정 한 번 하지 않고 이가 부실한데도 국물도 찾지 않고 식사를 잘하시곤 했다. 고기보다는 생선을 좋아하시고 젓갈보다는 야채 겉절이를 좋아해 양푼에 밥을 비벼 들기름 한 방울 떨어뜨려 드리면 맛나게 잡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천성이 부지런한 할머니는 곰방대로 담배 피우시는 시간 외에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셨다. 돈사 안을 하루에도 몇 번씩 돼지들이 이상 없나 살펴보고 밭에 풀이 삐죽 올라오면 호미로 긁어 주었다. 수시로 집안 구석구석 물걸레로 닦아 마루가 기름칠한 것처럼 번들번들하고 걸레는 방망이로 두들겨 빨아 놓았다. 해 질 녘이면 파란 수세미에 비누를 묻혀 당신 신발은 물론 흙 묻은 식구들 신발을 죄다 닦아 평상에 엎어 놓았다. 한 평생 큰 손자 바라기였던 할머니 사랑이 증손자에게 이어져 우리 아이들을 예뻐하시며 잘 돌봐 주셨다.
할머니는 젊었을 때 영감님과 아들을 병으로 잃었다. 큰 딸을 시집보낸 후 두 딸과 살고 있는데 어렵게 살던 출가한 딸이 남편의 성화로 친정으로 들어와서 같이 살 게 되었다고 한다. 술이 과하여 게으르고 무능력한 사위와 살면서 얼마나 마음고생 하셨을지 짐작이 된다. 술로 세월을 보낸 남편에게 속을 끓이며 살아왔던 딸이 위암 판정을 받아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딸을 보내고 당신이 살아있음을 먼 산 바라보며 한탄하시는 모습에 새파란 새댁은 짠하면서도 듣기 거북했다. 연세 탓인지 어지러워 자주 넘어지곤 하였는데 얼굴이며 팔에서 피가 나고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돈사 들어갔다 나오면 냄새가 옷에 배는데 바로 갈아입지 않는다고 나는 짜증 냈다. 홀로 지내는 몸이 불편한 시동생에게 불쌍하다며 담배 권하는 것도 싫었고 증손자가 유치원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도로까지 나가서 기다리는 것도 싫었다. 할머니는 남편과 아들 대신 큰손자인 남편을 의지하며 한평생 사신 분이다. 그래서인지 외출한 직후부터 거실 창문을 내다보며 기다리신다. 아무리 밤이 늦어도 손자 들어온 걸 확인한 뒤에 잠자리에 들곤 하셨다. 알코올중독 시아버지와 아픈 시동생으로 인해 내 안에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과 마주할 때면 괜스레 할머니께 짜증을 냈다. 젓가락이 서둘러 간혹 손으로 음식을 집어 드시는 것도 못마땅했고 상을 물리면 음식이 방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한마디 했다. 노환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반복해서 뭘 물어보시는 것도 싫어서 큰 소리 냈다. 서로 할 말은 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품인 우리는 자주 언쟁을 하였다.
외손자와 함께 지내는 할머니를 마을 이장님이 면사무소에 신청해주어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로 선정되었다. 워낙 연세가 많아서 생신이나 계절이 바뀔 때면 군청이나 면사무소 복지 담당자들이 안부를 살피러 종종 찾아왔다. 방금 싸우고 난 후에도 그들에게 “우리 손부가 고기반찬에 잘 해줘서 살이 통통 찐다”며 칭찬을 하셨다. 막내로 귀하게 자란 할머니에게 환갑 넘은 친정 조카들이 멀리서 자주 찾아오셨다. 그들에게도 손부 며느리 자랑을 하도 해서 할머니 돌아가신 뒤에도 외숙님이 종종 오셔서 할머니께 잘 해드려서 고맙다고 이야기하시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당신 두 딸에게 한 번도 손부의 허물을 들추지 않으시고 “우리 손부가 성깔은 있어도 속이 실 것이라며 칭찬하셨다고 이모님들이 말씀하셨다. 연로하셔서인지 돌아가시기 2, 3년 전부터 종종 대소변도 가리지 못할 만큼 앓아누우셨다. 할머니 바라기였던 남편은 모시고 가서 영양제 주사를 놔드리고 대소변을 가려 드렸다. 비위가 약한 나는 노인 냄새가 견디기 힘들었다. 대변을 치우고 나면 어디 가도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속이 불편해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고 실습을 나가 다른 어르신들을 돌봐 드리며 노인들의 특성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보였던 모습은 당신 의지대로 안되는 것이었고 늙음이란, 또 다른 질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할머니는 옆에 안 계셨다. 새파란 젊은 새색시도 어느덧 머리가 하얘지고 했던 말 또 한다.
나는 할머니에게 시집살이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탁구공처럼 어디로 튈지 몰랐던 손부가 조마조마했으리라. 함께 했던 시간만큼 당신을 보낸 세월이 흐르는 즈음에 고백한다. “할머니 당신은 큰 어른이셨습니다.” 라고, 돌아가신 후 시간이 흘러가도 할머니와 지냈던 순간들이 엊그제 같다. 그리고 못 해 드렸던 생각만 차오른다.
거친 폭풍우와 안개 속을 지나온 지난날이 위태로 왔다. 어느덧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은 나이에 이르렀다. 지금의 평화와 고요가 너무나 소중하여 나는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