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베히사오 - 3
이후 田邊尙雄(다나베 히사오)은 조선을 방문하여「이왕직 아악부」
를 자세히 둘러보고 당시의 몰락위기 직전의 당시 상황을 이렇게 남긴다.
“이 장악원 건물을 지금은 송병준 백작이 양도 받아 별장으로 쓰고 있는데,
원래의 장악원 건물에 동양척식회사가 세워졌다. 이 장악원에 소속된 5개의
창고에는 음악서류가 가득 차 있었다는데, 그 서류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거의 알 수가 없다 한다.
옛날에는 윗 계급에 있던 악사는 친임관과 칙임관으로 대산의 자격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보잘것없는 임시 보조직원에 불과한 형편이니,
그 쇠퇴함에 놀랄 지경이다. 새로이 아악대를 들어 올려는 사람은
거의 없고, 현재 아악대에 있는 사람마저 자기 아이를 넣으려고
생각하지 않고 이런 형편이니 이제 몇 년 못가서 노악사들이 죽고
난 다음에 이왕직 아악도 폐멸하고 말 염려가 있다.
지금 남은 아악사는 평균연령이 60세 쯤이며 지금의 아악사장은 명완벽이란
78세의 노인이었다. 더구나 아악사는 10명 정도밖에 안된다. 해마다
3, 4명은 사망하니 이대로 가면 4, 5년 후에는 능숙한 아악사는
하나도 남지 않을 상황이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어떻게든 선대의 음악을 지키겠다는 악사들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다나베히사오는 한국음악의 높은 예술성
앞에 예술가적 양심을 속이지 못하고 느낀 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그는 본국 정부에 장악원의 직제개편이나 악사의 처우개선,
악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등, 조선의 음악장려를 위한
다양한 건의를 적극적으로 하였고 그 내용이 긍정적으로 검토되었다고 한다.
다나베는 공적 기관에서의 파견이 아니고 개인적인 조사명목으로
소위 궁내성 아악부 강사의 직함을 가지고 조선으로 왔던것이다.
그때가 1921년 4월 1일이었다. 도착 하자마자 이왕가에 가서
취지를 말하고 아악을 상세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2주간 체류
하면서 영화와 무용등도 감상하고 평양 기생학교도 방문했다.
이리하여 조선 아악에 대한 조사를 마칠 수 있었다.
음악을 대하는 비범한 그의 음악관은 높이 사야할 일이다.
그보다 더 고마운 것은 이처럼 상대를 감동으로 몰아넣을 수
있도록 예술성 높은 전통 음악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점이고
또한 이를 연주해 준 훌륭한 악사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음악이 오늘날까지 우리가 계승해 오고 있는 자랑스러운
‘민족의 얼’이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전통음악인 것이다.
문화의 암흑기 일제시대의「이왕직아악부」라는 기관을 거처
오늘날「국립국악원」으로 정악의 맥이 이어지고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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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유명한「기성(箕城) 기생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과 함께
(다나베히사오 자서전에서)
다시는 되풀이 되지 말하야 할 부끄러운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