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습
내 마음은 오로지 신과 함께 하는 생각만 담고 있다.
129) 이 세상 너머에 내가 원하는 세상이 있다.
130) 두 세상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
[예수의 추가 설명]
수년 간 기적수업을 실천한 사람은 두 세상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대가 기적수업을 하면서 레슨을 실천하도록 하는 에고의 세상이 하나이다.
그리고 에고의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다.
그 세상은 평화와 행복과 기쁨의 세상이며, 그대의 생각, 믿음, 그리고 감정적인 안내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세상이다.
그대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과, 믿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기 시작한다.
많은 이가 잘못 생각했지만, 경험이 많아지면서 자신이 가진 모든 생각을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님을 알 것이다.
마음 안에 있는 모든 생각이 주의를 기울일만하고 사랑할만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이 진리가 아니라고 하니 이야말로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이건 사랑하는 생각이 아니네!
누가 이 믿음을 거기에 넣었을까?
그 믿음이 무엇인지 알아보자!”라고 생각되는 것이 그대의 마음에 떠오를 수 있다.
그 생각은 사랑하지 않는 믿음이 그 뒤에 숨어있음을 말해준다.
사랑하지 않는 생각을 한다면, 아마도 에고의 영역에 있음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이는 아마도 그대는 최근에 에고의 세상에 기반한 결정을 – 물질주의적 생각, 믿음, 관찰, 판단 등 무언가 사랑하지 않는 것 – 내렸음을 의미한다.
일단 에고의 사고체계 안으로 발을 디디면, 같은 진동을 갖는 생각들이 점점 더 많이 일어난다.
그 모두가 반드시 뇌 안에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에고의 사고체계는 거대한 사고체계로서, 그대의 사회에서 너무도 많은 먹이를 주어서 하나의 사념체(thought form)로 자리 잡았다.
전쟁, 홀로코스트, 굶주림, 강간 및 살인 등에 관한 영화, TV 드라마가 수천 편이나 되고, 살인을 핵심으로 다루는 TV쇼 등은 에고 사고체계의 먹이이며, 따라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에고 사고체계 안으로 한걸음 들어가면, 그대를 꼼짝 못하게 사로잡을 수 있다.
마치 그동안 배운 수업이 완전히 허사가 된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대는 다른 진동 안으로 들어갔을 뿐이며, 그 진동 안에서 그대는 사랑하지 않는 믿음과 아이디어를 끌어들이는 안테나가 되었을 뿐이다.
사랑과 친절의 사고체계인, 성령의 사고체계 안의 그대의 자리를 빨리 되찾는 것이 좋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대들 모두 말하듯이, 기적수업 초기 단계에서는 며칠 동안 토끼 구멍에 빠져서 끔찍한 실수를 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사람들은 기적수업이 황당하다고, 그대가 미쳤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자아의 사고 시스템 속으로 들어갔을 때 덮쳐올 수 있는 생각들이다.
며칠 동안 그대로 있으면, 그러한 사고 형식에 발을 들여놓게 한 본래의 생각을 정확히 집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하면 가능한 한 빨리 스스로 확인하고 물으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오, 다음 달 월세를 걱정하고 있구나.
혹은 남편이 늦네, 혹시 바람을 피우는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구나.”
이러한 생각들은 기분을 급격히 나빠지게 하고 에고의 사고체계 안으로 몰아넣을 것이며, 이 모든 레슨이 창밖으로 사라져버리는 듯이 느낄 것이다.
그러나 창밖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대는 두 사고체계에 발을 걸쳐놓고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초기 단계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약간 덜 안정적인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것이니, 한 사고체계에서 다른 사고체계로 건너뛰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적수업을 알기 전에는 다른 사고체계로 건너뛰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그대는 그저 에고 사고체계 안에 있었다.
에고 사고체계는 요란하고, 무서웠으며, 종잡을 수 없었다.
지금 일어나는 것은 평화로운 시간으로서, 기분이 좋고 편안하며 행복하고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에고의 굴속으로 곤두박질치면서, 오히려 늘 그 안에 있던 때보다 더 나쁘게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고 느끼면 하던 일을 멈추고 기적수업 책을 찾아서, 집에 있다면 침대로, 사무실이라면 화장실로 가서, 혹은 가능하다면 좀 이른 시간에 점심을 먹으면서, 기적수업을 읽으면서 가능한 한 빨리 다시 궤도에 올라서라.
이런 일이 그대가 실패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대가 나쁜 기적수업 학도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대는 단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것, 곧 그대의 마음을 바꾸기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하고 있을 뿐이다.
...
[알렌의 설명]
비록 신의 아들의 마음은 오직 신과 함께 생각하는 것만 담고 있지만, 용서 없이는 이 생각을 의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보는 세상은, 용서하지 않음이 내게 보여주는 세상입니다.
그것은 죄책감에 미친 자들의 망상체계입니다.
이 세상의 실재성 -- 처벌, 고통, 슬픔, 분리, 죽음 등 실제인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포함한 -- 이라는 환상을 유지하는 유일한 것은 바로 용서의 결핍(lack of forgiveness)입니다.
왜 내 몸이 나의 정체처럼 보일까요?
왜 내가 경험하는 정신적인, 감정적인, 육체적인 고통이 그렇게도 실제적으로 보일까요?
왜 상실이 그렇게도 실제적으로 보일까요?
세상의 모든 실재성은 바로 내 마음속의 용서의 결핍에 기인하고, 그것에 의해 유지됩니다.
이것이 바로 121과가 말하듯이 용서는 행복의 열쇠인 이유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세상, 즉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세상이 있습니다.
기적수업은 이것을 실재세상이라고 부릅니다.
실재 세상은, 세상의 유일한 목적은 용서임을 보는 마음 상태입니다.
실재 세상은 단지 낡은 것, 즉 용서 없이 보는 세상을 완전히 용서함으로써 얻어집니다.
나의 지각은 오직 하나의 수단, 즉 용서를 통해 고통의 세상을 보는 것에서 실재 세상을 보는 것으로 전환합니다.
이것이 바로 두 개의 세상을 보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입니다.
내 마음은 용서하거나, 혹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은 자신이 보는 것을 정죄하거나, 혹은 그것을 자비로운 용서로 받아들입니다.
먼저 이것을 자신 안에서 시작해 봅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얼마나 불친절한 방식으로 생각하는지요!
우리는 자신의 실수를 얼마나 무자비하게 비판하는지요!
내 자신에 대한 이런 가혹함이 바로 내가 보는 세상의 가혹함의 근원입니다.
내 안에 그리고 우리 모두 안에 광대한 친절의 공간, 모든 것들을 사랑 안에 품어 안을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신과 함께 나누는 마음입니다.
내 안에는 또한, 나 자신이 우주를 영원히 망쳐버렸다고 믿고 있는 고통에 휩싸여 두려워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나로 하여금 사랑으로 나 자신의 그 상처 입은 부분으로 돌아서서, 위로와 부드러운 자애로 팔을 벌리게 하소서.
내 가슴은 그것을 거부하는 대신에 품어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습니다.
내가 신과 나누는 사랑은, 나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을 만큼 광대합니다.
나로 하여금 더 이상 나 자신을 스스로의 마음으로부터 내쫓지 않도록 하소서.
나로 하여금 따뜻하고 부드럽게 환영하며, 나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하소서.
나로 하여금 또한 가까운 이들을 똑같이 부드럽고 친절한 수용으로 바라보도록 하소서."
여기에 나의 외로움과 고통에 대한 치료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닫힌 마음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직 이 고통 밖에 없습니다.
고통은 마음이 수축되는 것입니다.
고통은 나의 정체인 사랑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미묘하고 내적인 거부의 몸짓에 내가 보는 세상의 기원이 있습니다.
이런 고통스런 움츠러듦을 무효화하는 것이 나의 구원이며, 세상의 구원입니다.
여기에 실재 세상, 즉 사랑으로 밝게 빛나고 희망으로 눈부시며, 자신의 기쁨을 확신하는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이 세상 너머에 내가 원하는 세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을 여는 열쇠는 바로 용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