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와 2박 3일 / 정선례
딸의 “엄마 생일 선물 뭐 받고 싶어?”라는 물음에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50대 후반의 나는 80대 초반의 친정어머니와 20대 초반의 딸과 함께 생전 처음 떠나는 여행에 벌써 마음이 들떠 새벽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최대한 짐을 줄여야 한다는 게 내 철학인데 강원도는 춥다고 알고 있는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패딩을 챙겨 입고 강원도 2박 3일 여정으로 여행길에 나섰다. 청량리역에서 강릉행 케이티엑스(KTX) 타고 강릉역에 1시간 45분 정도 걸려 도착하니 점심때가 되었다. 딸이 예약해 두었던 교동 대게 정식을 먹었다. 강릉 시내는 평일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적하고 거리는 번잡하지 않은 황량함이 오히려 좋았다. 숙소는 4성급 호텔이다. 넓은 방에 더블 침대도 각각 있고 심지어 안마의자도 있었다.
차를 두고 와 뚜벅이였던 우리는 숙소에 짐부터 풀고 근처 경포호수를 따라 걸었다. 해변에 파도가 곤두서서 사납게 달려들다가 밀려가는 파도를 보자 왜 다들 동해 동해 하는지 알겠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천혜의 자연 그대로인 무인도에 온 느낌이다. 쉼 없이 거칠게 밀려왔다 쓸려 가는 파도가 그 틈을 주지 않고 덮쳐 순간 신발을 적셔 버렸다. 깊이를 가늠키 어려운 동해 해변의 바닷물이 어찌나 맑던지 하늘과 바다가 같은 색이었다. 너울거리는 파도와 한 호흡으로 걸었더니 춥다기보다 정신이 맑아졌다. 휴대전화로 연신 사진을 찍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몸은 속절없이 늙었어도 마음은 이팔청춘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농산물이며 해산물을 철 따라 보냈지만, 함께 여행을 온 것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여서 죄송스럽다. 강원도 지역의 크고 작은 해변은 어디를 가도 기대 이상이어서 천혜의 비경을 만끽했다.
화장실을 가려고 눈을 떠 보니 어머니가 침대에 걸터앉아서 수평선을 따라 길게 늘어선 불빛을 바라본다. 생계를 위해 새벽 찬 바람에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어부들의 오징어잡이 배 집어등을 보니 자식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느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던 때가 생각났을까? 어머니는 평소에 종종 말씀하셨다. “나는 젊어서부터 딸 둘에 아들 셋 낳고, 예순 살부터는 일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생각대로 다 되었어야”. 숱한 날 우리 오 남매는 어머니에게 거미줄 같았을 것이다.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모든 걸 기꺼이 내려놓고 거미줄에 오롯이 순응하며 제 새끼들이 열매를 맺도록 지켜 낸 모성은 위대하다. 울컥 북받쳐 오르는 입안 가득 담긴 말이 오래도록 목젖을 건드린다. 어머니의 가슴안에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생채기가 있다면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에 다 씻겨 나갔으면 좋겠다. 50년 전 내 어릴 적 이야기부터 80세의 감성을 놓고 나직하게 나누는 모녀의 대화 소리가 파도에 묻힌다. 자는 딸의 숨소리가 더없이 평화롭게 들리는 새벽이다.
삼척 바다열차, 도째비골 해랑 전망대, 바람의 언덕 벽화 마을 외 이 작은 종이에 다 적지도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 오랜 세월 파도에 부딪혀 만들어진 촛대바위에서 일출을 감상했다. 마치 촛불을 밝히고 기도하는 어머니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기암괴석 사이로 구름을 뚫고 붉은 해가 수평선을 물들이며 솟아오른다. 동해의 해돋이 명소로 유명한 정동진 쪽빛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는 순간을 맞이한 감회는 고단했던 지난날을 치유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감동이다. 이곳에서 딸이 어머니와 내 사진을 여러 장 찍었는데 풍경이 아름다워서인지 딸의 사진 찍는 기술이 남달라서인지 작품 사진 같아 보기에 흐뭇했다. 삼척 해변에는 바다를 배경으로 지역을 상징하는 커피잔 등 여러 조형물이 설치되어 인증 사진을 남기기에 더없이 좋았다. 강원도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은 어느 해변을 가도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세찬 파도 소리 들으며 걷는 낭만과 수려한 해안 절경과 바다를 제대로 보고 느끼고 돌아와서 한동안 생활에 활력이 되어줄 것이다.
어머니가 온몸으로 사랑의 씨앗을 우리 마음 밭에 심어준 것처럼 비 오고 바람 불어도 올곧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아낌없이 내어 주는 자연은 더 줄 게 없어 안타까워하는 어머니의 질박한 성품과 닮았다. 어머니는 굴곡진 에움길을 지나왔는데도 연세가 무색할 정도로 때 묻지 않은 심성을 간직하고 있으니 존경스럽다. 또한 정갈한 음식 솜씨와 부드럽고 다정한 말투를 닮고 싶은데 나는 아직 그림자도 못 따라잡을 정도로 멀었다. 두 발로 걷고 스스로 음식 잡수실 때 자주 모시고 다녀야겠다. 여행 틈틈이 나누었던 소소한 대화에서 가족의 정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에게 기억의 사진첩으로 남아 시간이 흐른 뒤 때때로 펼쳐질 것이다. 생일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지는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선물로 받은 바다들이 가슴속 깊이 남아있다. 집 뒷산에 우뚝 솟은 바위를 보며 동해안 바위 절경이 떠오르고, 뜨거운 온돌방에서마저 차가운 바다 냄새와 해파랑 파도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어느 먼 훗날 몽글몽글 떠올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우리 어머니에게 이 봄은 몇 번이나 남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