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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을 쏘아라
이 홍사
땅콩이여! 그대~ 나에게로 와라~ 껍데길랑 멀리~ 가고 알짜만이 모여라~
노트북을 켜면서 땅콩을 생각하고는 그렇게 흥얼거렸다. 어린 시절에 불렀던 가락인데 이런 노래가 있는지 모르겠다.
모처럼 한가하고 나른한 오후다.
봄이 오고 있는지 나무에 벌써 물이 오르는지 오늘 저녁에는 고로쇠나무 수액을 먹으러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물론, 비닐하우스 재배이겠지만 첫물 미나리도 나왔다며 미나리와 삼겹살, 그리고 소주의 궁합이 괜찮다는 문자 메시지 전갈이었다. 시계를 힐끔 본다. 아직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다.
땅콩!
비행기 안에서 나눠주는 심심풀이 땅콩이 한 때 세간의 관심거리로 부각되어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땅콩으로 인하여 활주로에서 이륙준비를 하던 비행기가 회항이 되는 가당찮은 사건이었다. 그게 이른바 갑질 논란으로 확대되어 그 갑으로 일컬어지던 여자가 실형으로 구속까지 되었던 일이었다. 그 갑은 항공사 회장의 딸로서 전무 직함을 갖고 있었던가? 아무튼, 세간의 흙수저들로 하여금 맹비난을 산 적이 있다. 당시에는 그 사건이 연일 매스컴을 달구다가 구속으로 이어지면서 다수의 흙수저들로 하여금 속이 후련하고 땅콩만큼이나 고소하다고 입을 모았다.
땅콩!
땅콩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가을 미얀마에서였다. 심심풀이로 비행기에서 나눠주는 땅콩이 아니라 포대에 담겨 차곡차곡 쌓여 컨테이너에 가득 담긴 땅콩이 눈에 어른거렸다.
땅콩을 수입하고 싶었다. 수입이 아니라 미얀마에서 한국으로 땅콩을 수출하고 싶었던 것이다. 중국땅콩이 많이 들어온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품종이 다른 미얀마 땅콩을 한국으로 들여와 틈새시장을 노려서 미얀마를 들락거리는 항공경비와 채류경비 정도를 벌고 싶었던 것이다. 미얀마 사업은 한마디로 지지부진하다. 아르바이트 삼아서 미얀마 주택사업에 투자를 했으나 그 시기로 미루어볼 때 상투를 잡은 격이다. 날로 뛰던 집값이 내가 집을 지으니 거꾸로 내려가고 환율이 군사정부에서 민간정부로 이양되면서 오른 게 아니라 발기된 거시기가 든 팬티마냥 순식간에 치솟아 투자한 금액을 순식간에 반 토막으로 만들어놓았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그렇게 설쳐대던 주택대란의 매기마저 사라졌고 주택 임차료도 내렸다. 미얀마에서는 물건을 사고 계산을 마치면 절대로 물려주는 법이 없다. 사서 바로 돌아서서 다른 물건과 바꾸겠다고 하더라도 인정이 되지 않는다. 비단 미얀마뿐만 아니겠지만 사업과 투자는 역시 미얀마에서 물건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릴 수가 없는 일이다.
주택 매기가 없어지자 먼저 시작한 현장에 분양이 되는 것을 보고 몇 개의 현장은 막바지 공사를 중단시켜놓은 상태다. 처음에는 한국의 사업을 그대로 병행하면서 아르바이트 삼아서 시작했는데 진 빚으로 보아 도저히 아르바이트라고 할 수 없을 지경으로 둔갑했다. 손가락으로 살짝 찍어서 간을 보지 않고 너무 크게 시작해버린 것이었다. 일테면, 호수에 비친 달을 보고 달을 잡겠다고 호수로 풍덩 뛰어든 격이다.
이미 상환 능력이상의 빚을 지고 있는데 한국에서 더 빚을 내어 막바지 공사를 하기에는 불안감이 작용을 했다. 이미 완공된 것을 분양해서 그 돈으로 막바지 공사를 마칠 속셈으로 몇 개 현장은 마지막공정을 중단시켜놓고 미얀마를 들락거리니 경비와 관리비만 축이 났다. 하여 눈을 돌린 게 미얀마에서 흔한 농산물 수입이었다. 토란, 참깨, 생강, 삼채, 검정콩 등을 훑으며 품목을 찾다가 매입에 손이 쉽고 유통기한과 보관기간이 다소 긴 땅콩을 주목하게 되었다.
땅콩을 쏘아라!
땅콩에 초점을 맞추고 타이틀은 그렇게 걸었지만 언제부터 어떻게 하겠노라는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못하고 막연하게 땅콩만은 한국으로 쏘아보고 싶은 심정만 간절했다.
중국땅콩과 미얀마땅콩은 품종이 다르다.
중국땅콩은 씨알이 굵고 고소한 맛이 덜 한데 반해 미얀마땅콩은 옛날 우리나라의 토종땅콩처럼 씨알이 작은 대신에 볶아놓으면 굉장히 고소하다. 미얀마땅콩을 먹다가 중국땅콩을 먹으면 맛이 밋밋한 게 단박에 표시가 난다. 그 고소한 땅콩을 들여와 중국땅콩의 틈새시장을 파고들고 싶었지만 무역이라는 것을 해보지 않아서 들여오는 루트를 모른다.
미얀마에서 인터넷으로 그렇게 훑어보고 양곤의 무역센터까지 찾아가서 물어보고 한국으로 들어와서는 서울농산물 유통공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도매상의 전화번호를 알아서 그렇게 많이 물어보았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걸 어떻게 들여오지? 관세가 몇 %인가?
그게 얼마 전까지 내 관심거리였다. 생콩으로 들여오면 농산물로 분류되어 관세가 비싸고 볶아서 들여오면 가공식품으로 편입되어 관세가 싸다고 들었지만 정확히 땅콩의 관세가 몇 %인지는 어디에도 나와 있질 않았다. 현지에서 땅콩을 구매할 적에 드는 원가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누가 일러주어서 아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혼자서 미얀마의 농산물시장을 돌아다니며 파악을 한 것이다. 농산물시장 뿐만 아니라 중간도매상의 도매금과 소매로 파는 점포들을 두루 순례하고 파악한 것이다. 미얀마에서 땅콩을 싸게 매수하고 볶는 방법도 현지인들과 돌아다니며 연구해 두었다.
한국으로 땅콩을 들여와서 내가 직접 판매하는 것이 아니고 중간도매상에게 넘기거나 아예 관세도 내가 내지 않고 미얀마에서 무역업자 이름으로 보내기만 하는 루트를 찾고 싶었다. 그렇다면 중간도매상이나 땅콩 수입업자를 찾아야할 일인데 전혀 연줄이 닿거나 아는 바가 없으니 답답한 일이었다. 누가 들으면 손도 안 대고 코풀려고 한다고 하겠지만 큰 이윤을 기대하지 않고 미얀마에서 소일거리를 만들고 싶었다.
필요는 학습을 낳는다고 했지만 학습의 진도는 거기서 더 나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직접 서울 가락동 농산물센터에 가서 땅콩 전문수입업자를 찾아보고 물어보는 게 마땅하다고 미루고 한국으로 들어와 언제 서울을 갈까 궁리를 하며 연말을 보냈다. 연말이라 무슨 모임이 그리 많은지 땅콩을 쏘아라는 진도가 나가지 못하고 해를 넘기고 말았다. 헌데 엊그제 서울에 갈 일이 생겼다. 임도 보고 뽕도 따면 되겠구나 생각했었다.
옛날에는 좋은 문우 하나 사귀려면 백리 길을 마다않고 걸어가야 했다지만 세상이 좋아져서 커피 한잔 나눈 적도 없으면서, 심지어 얼굴도 모르면서 친구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이버, 가상공간의 친구라는 걸 거의가 눈치 챌 것이다. 환갑 밑자리를 깔아놓은 나에게도 그런 얼굴 모르는 친구, 문우가 있다.
그 친구가 바로 칸트다.
칸트!
칸트라고 하면 순수이성비판이 먼저 떠오르는데 그가 쓴 글을 보면 바로 칸트라는 별명이 붙은 게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다. 칸트라는 별명은 그가 말하거나 온라인에 닉네임으로 쓰는 게 아니라 어느 신문 문화코너에서 그를 취재하면서 헤드라인에 붙은 별명이었다.
그가 그려가는 이성비판의 글에 대해 비판, 아니 비평을 할 능력은 나에게 없어 그의 글을 읽으면 감히 비평의 리플을 달지 못한다. 어줍지 않은 내 소설 카페에 자주 들어와서 글을 남기고 가는데 한 번도 비평의 댓글을 달지 못했다. 그가 내 카페에 들어와 던지고 가는 언어는 현학하고, 고급용어로 구사를 해서 독해력이 아둔한 나로서는 두 번을 읽어야 이해가 가능하다. 한 번은 채택하는 단어로 읽고 또 한 번은 문장으로 읽는다. 그가 우편으로 보내준 책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두 번씩 읽고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 칸트가 또 책을 낸 것이다.
그로서는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 출간한 책인데 이번에는 장편소설이다. 그 말이 그 말이겠지만 출판기념회가 아니고 북 콘서트를 한다고 참석해서 얼굴 한번 보자는 리플이 달렸다. 카페에 실린 그의 출간소식에 축하드린다고 댓글을 달았더니 얼굴보자는 리플이 달렸다. 나는 그 리플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너무 오래 들여다보아서 눈물이 고여 활자가 흐릿해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궁리했었다.
결론은 이번 기회에 얼굴을 한 번 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서울에 올라가는 김에 북 콘서트에 날을 맞추어 올라가는 게 아니라 하루나 이틀 전에 올라가서 구체적으로 땅콩을 쏘는 방법부터 파악해서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하고 북 콘서트에 참석했다가 얼굴을 보고 내려오면 되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북 콘서트는 토요일 저녁이다. 장소를 보고 지하철 노선도를 찾아보니 서울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러니 목요일 오후에 올라가서 여유 있게 땅콩에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고 금요일 새벽에 가락동 농산물시장에 들러서 경매하는 과정도 둘러보고 토요일 낮에는 오랜만에 인사동으로 가서 소위 말하는 문화충전을 조금 하고 저녁시간에 북 콘서트에 참석을 했다가 끝나는 대로 서둘러 서울역으로 가서 밤차를 타고 내려오면 되겠다 싶었다. 일요일 낮에는 또 대구의 모임이 있으니 밤차로 내려와야 할 일이었다.
계획을 그렇게 세우고 바로 강부장에게 연락을 했다.
강부장이란 녀석은 내가 미얀마에서 초기에 데리고 있던 직원이다. 부장이란 직함도 내가 붙여준 것이다. 거의 이 년을 내 일을 도와주었는데 한창 일이 바빠서 손이 모자랄 때 다른 회사에서 미얀마에 상주할 통역 및 관리직을 뽑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회사로 간다며 개밥그릇 차듯이 나를 차고 나갔다. 그때는 투자기간이라 월급을 최소한으로 주었으니 잡을 수가 없었다. 헌데 녀석은 거기에 응시했다가 보기 좋게 떨어지고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미얀마에 관련된 이권을 개입하며 빈둥거리고 있는 인간이다. 다시 부르고 싶었지만 그 녀석의 자리는 인건비가 더 싼 현지인으로 채우고 난 뒤였다.
가끔 전화가 오거나 내가 전화를 해서 뭐하느냐고 물으면 프리랜스로 뛰고 있다고 한다. 주제는 넓은데 눈치가 부족한 녀석이라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 치고나가는 것은 잘하는데 언제나 뒤에 수습하는 인간을 하나 붙여야하는 골 때리는 위인이다.
혹여, 서울에 있나 싶어서 전화를 했는데 인도에서 그제께 돌아와 서울이라며 전화를 받았다. 인도에는 무슨 일로 갔었는지 묻지도 않았다. 분명 영양가 없는 일로 다녀왔으리라 생각하고 내 용건만 간단히 말했다.
땅콩을 쏘아라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는데 그에 관련된 사람들을 좀 알아보고 내가 목요일 오후에 서울에 가는데 서울지리를 모르니 가이드를 좀 부탁한다고 했다. 녀석은 알겠다며 땅콩업자를 수소문을 해보겠다고 했고 서울 도착시간을 일러주면 서울역으로 마중을 나오겠노라고 했다. 그러는 녀석에게 빈둥거리지 말고 사흘간 시간을 비워놓으라고 했다.
지난 목요일에 서울로 가는 기차표를 끊고 강부장에게 전화를 해서 서울역 도착시간을 일러주었다. 구미에서 서울까지는 거의 세 시간이 걸린다. KTX가 있지만 역사가 김천에 있어서 집에서 출발하면 도착시간은 거기서 거기다. 하여, 나는 가급적이면 운임이 싼 무궁화호를 선호한다. 녀석이 역으로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다. 나로서는 오랜만의 서울나들이였다. 대학원에서 문예창작 청강을 들으면서 번질나게 들락거렸는데 영등포역과 학교까지 가는 길만 익숙한 촌놈이라 서울지리를 잘 모른다. 지하철 노선도를 보고 땅속으로는 억지로 길을 찾는데 지하에서 올라오면 젬병이다.
서울로 올라가면서 기차 안에서 휴대폰으로 인터넷카페를 검색해서 칸트가 며칠 전에 올린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에는 그의 글을 읽는 게 그만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라는 소설에 나오는 싱아를 얘기하고 있었다. 물론 싱아의 사진도 올라와 있었지만 식물에 관해서 둔하다 못해 문외한인 내가 사진으로 보아서는 다른 풀과 식별이 불가능했다. 나는 싱아가 어떤 식물인지 심히 궁금하다고 했고 그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라고 했다. 물론 리플로 주고받은 얘기다. 그는 식물에 대해서 상당히 박식했고 관심이 많았다. 싱아가 흔한 풀이라면 농촌에서 자란 내가 분명 보았을 것인데 우리고장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는 지리산에 살짝 맛이 간 인물이다. 지리산을 유독 자주 다니는데 그의 글에도 지리산의 비원이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산에 갔다가 오면 꼭 이름 모를 야생화나 식물의 사진을 찍어서 카페에 올려 내 카페의 청량제 구실을 톡톡히 한다.
그와 인연을 맺어준 건 하뜨크다.
하뜨크란 몽골에서 사용하는 몽골물건이고 몽골이름이다. 목도리처럼 생긴 비단 천인데 행운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아이들이 아파도 하뜨크를 목에 감아주고 스님이나 스승에겐 무슨 기념일이 되면 노란색 하뜨크를 바치고 이사를 갈 집 천정 전등에 파란색 하뜨크를 묶어두어 행운을 부른다. 몽골에서는 무슨 의식이든 하뜨크가 등장을 한다. 심지어 기르던 낙타가 늙어서 초원이나 사막으로 방생을 할 적에 무탈하라고 하뜨크 여러 개를 이어서 목에 묶어서 내보내기도 한다.
그만큼 흔한 것인데 한국 인터넷에는 하뜨크가 한글로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미얀마로 나가기 전에 아르바이트로 몽골에서 중기업을 칠 년이나 했다. 거기서 글을 쓰니 자연스레 하뜨크가 등장을 하게 된 건 당연한 이치. 그 하뜨크를 소재로 글을 몇 편 썼다. 아마도 칸트가 몽골을 다녀와서 그걸 보고 인터넷에 하뜨크를 치고 들어오니 내 카페로 바로 연결이 되었던 모양이다. 칸트는 그런 루트로 내 카페에 들어왔지 싶다.
내가 인터넷카페를 만든 것은 모여서 노닥거리자고 만든 것이 아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사무실에 좀도둑이 들어 노트북을 두 번이나 도둑맞았다. 중고가 된 노트북은 아깝지 않은데 내가 쓰다가 저장해 둔 글이 다 날아간 것이다. 말은 이렇게 수월하게 하지만 그건 실로 미칠 지경이었다. 두 번이나 그런 일을 당하고 나서 USB도 못 미더워 카페를 만들었다. 글을 쓰면 퇴고도 하지 않고 맨 먼저 카페에 실어놓는다. 그러니 노트북은 잊어버리더라도 글은 잊어버릴 수가 없어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커피도 팔지 않는 카페를 만들어 놓으니 초청하지는 않았지만 너도나도 들락거려 한때는 회원이 삼백 명을 웃돌았다. 그 카페를 관리하느라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이 년쯤 지나서 가입만 하고 초기에 들락거리다가 일 년 간 들어오지 않는 불량회원을 안면몰수하고 강제탈퇴 조치를 했다. 그러니 겨우 사십여 명이 남았다. 카페는 대문을 열어놓았으므로 어느 지나가던 객이 들어왔다가 가는지도 모르고 정회원은 고작 마흔 명 남짓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칸트가 들어와 하뜨크에 대해 유장한 글을 남겼다. 시도 아니고 수필도 아닌 짧은 단문이었는데 히뜨크에 대해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며 사유하게 하는 글이었다. 하뜨크에 대해 거론하는 사람을 그때까지 보지 못했는데 특이해서 하뜨크를 어떻게 아느냐고 댓글을 달았다. 헌데 댓글에는 답이 없이 다음날 또 몽골사막의 사진과 울트라 마라톤에 대해서 글을 올렸다. 나는 울트라 마라톤을 말로만 들었지 정확히 어떻게 하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그의 글을 읽고 알았다. 몽골에서 사막을 일주일간에 걸쳐 몇 백 킬로를 달렸다는 것이다. 그걸 울트라 마라톤이라고 했다. 자고나면 뛰고, 밥을 먹고 뛰고, 오줌을 누고 뛰고 오로지 일주일간 막막한 사막을 뛰었다고 했다. 그걸로 자신의 삶과 생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적었다.
한 번도 마라톤에 출전해본 적도 없는 나는 군에서 단체로 구보를 하면 늘 낙오자로 얼차려를 받아야 했으니 그렇게 뛰는 기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뛰면 허벅지와 종아리에 통증이 오고 그 통증으로 희열을 느낀다는 괴상한 인물이었다. 어느 책에선가 그가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릎관절에 이상이 오고부터였다고 했다. 무릎에 이상이 있으면 뛰어야 하나? 그게 치유의 방법인가? 관절에 이상이 있으면 침을 맞거나 뜸을 떠야지? 이구일침이라고 하지 않았든가? 그 글귀를 고 고개를 갸웃하며 내가 흘린 말이다.
그는 육군 장교로 예편한 사람이다. 육군병장 출신인 내가 모르는 세계를 많이 알고 있었다. 그가 받은 책의 프로필을 보고 군 생활을 오래했음을 알았다. 푸른 제복을 입고 젊은 시절을 보내고....... 항상 이런 식으로 프로필을 적었다. 학사나 ROTC 출신인지 아니면 사관학교출신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소대장시절, 중대장시절, 이런 식으로 써놓았으니 하사관이 아니라 장교출신임이 분명하다. 전방 GP에서도 근무를 했고 남해안 해안경계 초소에서도 중대장을 했다고 했다. 그가 어느 계급에서 예편을 했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책이나 카페에 올리는 어느 글에도 그런 얘기는 없었다. 예편을 하고 어떤 루트로 들어갔는지 지금은 공무원이 되어 정부 종합청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과천에 근무한다는 것만 알고 직급이 무엇인지는 그의 군 시절 계급처럼 모르고 있다. 알고 있는 건 전화번호뿐이다. 댓글로 전화번호를 주고받아서 몇 번 통화를 한 적은 있었다. 절친한 문우라면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아무튼, 칸트가 쌍칼을 들고 등장함으로부터 카페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그의 유장한 글은 조회수가 많이 올라갔고 댓글도 달렸다. 내 카페의 ‘문을 열어둔 방’ 이라는 아무나 들어와 글을 올릴 수 있는 코너가 있는데 이제 그 코너는 칸트의 방이 되어버렸다. 가끔은 내 카페에 들어가면서 주객전도를 생각한다. 내가 카페지기인지 칸트가 카페지기인지 아리송할 때가 있다. 내가 올리는 글보다 칸트가 올리는 글이 확실히 많다. 카페 관리를 매일 하지 않음으로 그가 올린 글을 며칠 후에 읽는 경우도 있다. 거듭된 얘기지만, 카페는 내 글을 잊어버리지 않게 보관하는 창고로 쓰고 있어서 매일 들락거리지 않는다.
기차를 타고 바로 카페에 들어가 칸트가 올린 글을 싱아에 대한 얘기를 읽고 또 다른 글들은 읽었다. 칸트는 지리산을 엄청 자주 다니는데 그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짐작컨대 이번에 나온 장편소설도 분명 지리산을 무대로 하거나 지리산이 등장할 거라는 근거 없는 생각을 했다. 그가 지리산을 그렇게 다니는 이유는 분명 글감을 구하러 가는 것일 터라고 나는 여기고 있었다. 아무튼, 그날은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는 동안 칸트가 올린 글을 올린 시간상 역순으로 읽었다. 글을 읽는 동안 이제는 칸트를 만날 수가 있다는 설렘이 가슴에 잔잔하게 일었다.
칸트의 글을 읽으며 지겹지 않게 서울역에 도착하니 강부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사흘을 같이 있으려고 준비했는지 엄청 큰 배낭을 메고 또 큼직한 노트북 가방을 들고 나와 있었다. 이 자식은 예나 지금이나 필요 없는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걸 좋아한다. 미얀마에서 일박이일로 지방 출장을 보내면 여행용 캐리어를 준비하는 녀석이다.
-집을 나왔냐? 무슨 보따리가 그렇게 많아?
-사흘이면 이 정도는 되어야죠.
오랜만에 가는 서울역에는 변한 것이 역사 밖에 담배를 피우던 곳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대신 계단 아래 흡연구역을 따로 만들어 두었다. 강부장과 둘이서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내 계획을 다시 일러주고 동선을 정하라고 했다. 내가 메고 있는 작은 배낭에는 속옷과 양말, 그리고 수입업자를 만나면 보여줄 미얀마땅콩이 든 작은 플라스틱 병이 네 개나 들어 있다. 볶은 콩과 생콩, 그리고 볶은 땅콩 중에서도 탈피한 콩과 껍질이 붙어 있는 땅콩인데 중국 땅콩과 비교하고 맛을 보라고 미얀마에서 샘플로 삼으려고 일부러 가져온 것이다. 내일 새벽에 가락동 농산물시장의 경매를 보고 싶다고 하니 강부장은 새벽에 움직이려면 그 부근으로 가서 방을 잡자고 했다. 그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잠실이란다.
-그래. 잠실에 가서 누에가 되어 뽕잎이나 먹자.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며 잠실로 갔다. 퇴근시간이라 지하철은 어지간히 복잡했다. 도쿄에서 지하철을 타면 승객 칠 할이 책을 보고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면 승객 칠 할이 휴대폰을 본다는 말이 있는데 타보니 역시 그랬다. 거의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철을 타고 휴대폰을 보았으니까.
강부장은 지하철을 타자 서울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 몇 층인지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이 미친 자식이 누구를 바보로 아나? 63빌딩이 아니냐고 대꾸하자 제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 하나를 보여주며 이어폰을 내 귀에 꽂아주었다. 롯데월드타워에 관한 동영상이었다. 승객들 사이에 서서 동영상을 보니 놀라운 건축의 비밀이 숨어있었다. 한국의 건축 기술은 장난이 아니다. 그 고층건물에는 참으로 놀라운 과학적인 건축비법이 숨어 있었다. 이게 언제 생겼지? 그 동영상을 보고 휴대폰을 건네며 시간을 내서 여기도 한번 가보자고 했더니 강부장은 웃으며 이 전동차가 그 건물의 지하에 멈추고 우리가 내리게 되어 있다고 해서 놀라웠다. 건물지하에 지하철 역사를 만들 생각을 하다니.
우리가 내린 건물의 지하는 여느 지하철역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강부장이 말하지 않았다면 단순히 지하철 역사라고 여길 정도였다. 그 건물의 지하에 내려서 빠져나오며 강부장이 김이사를 들먹였다.
-김이사를 부를까요? 며칠 전에 서울에 돌아온 모양인데요.
-김이사? 요번에 미얀마에서 전화를 했더니 연락이 되지 않던데?
-중동에서 한 건을 하고 온 모양입니다. 리비아라고 했는지, 어디라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좀 큰 건이었던 모양이에요. 한방 쏘라고 하세요.
-그래? 불러서 같이 한잔하자. 김이사는 땅콩을 쏘아라에 대해서 좀 알 거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강부장이 전화를 했다. 통화내용으로 미루어 구미에서 내가 올라와서 얼굴을 보자고한다면서 잠실에 도착해서 모텔을 잡고 저녁을 먹을 것이니 잠실 쪽으로 출발하라고 했다.
김이사는 미얀마에서 만난 사람이다.
오지랖이 넓은 강부장의 소개로 만난 사람인데 강부장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다. 당시에는 내가 짓고 있던 주택이 완공된 게 없어 미얀마 현지인의 아파트를 빌려서 사무실 겸 숙소로 쓰고 있었는데 김이사도 같은 아파트 바로 위층의 빌려 쓰고 있어서 이웃으로 지내고 살며 거의 매일 저녁, 술을 같이 먹은 사이다.
당시에 김이사는 미얀마 북부지방 골재용으로 쓰는 자갈을 채취하는 회사에 크랏셔라고 불리는 대형 석재파쇄기를 납품하여 설치해주고 그 물건의 AS차원에서 머물고 있었다. 분해된 크랏셔를 조립하고 전기와 발전기를 설치해주고 일 년간 AS를 해주는 조건으로 가격이 백만 불이 훨씬 넘는다고 했다. 그 파쇄기는 발파한 원석을 중기로 퍼서 넣으면 하루 생산량이 천오백 톤에 가까운 대형이라고 했으며 그 기계를 배에서 내려서 그 석산까지 이동하는데 트레일러가 거의 스무 대가 동원되었으며 분해한 것을 조립해서 시험운전을 하는데 대형 크레인이 동원되고 소요시간은 한 달 이상이 걸렸다고 했다. 미얀마 남부지방에는 산이 없다. 하여 골재 중에서 자갈이 귀한데 북부지방의 석산에서 생산된 골재를 에이야와디 강을 따라서 배로 운송해서 쓰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그런 물건은 삼 년에 한 대만 납품하면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납품한 회사의 인근 석산현장에서 눈독을 들이며 흥정이 들어와서 가격을 조율 중이라고 했다. 계약만 성사되면 대박이 터지는 일이다. 허나 김이사는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미얀마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을 노리고 있다. 그가 취급하는 품목은 원석 파쇄기, 골재 선별기 등 대형장비인데 납품하는 가격으로 미루어 강부장처럼 새우를 잡는 칼이 아니라 고래를 잡는 큰손이다.
강부장과 역사를 빠져나와 우리가 빠져나온 건물을 보니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았다. 건물을 올려다보며 담배를 빼무니 강부장이 서울에서 길거리는 금연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횡단보도를 건너가서 한적한 인도를 걸으며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어디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사거리 횡단보도를 두 번 더 건너가 모텔을 먼저 잡아놓고 인근의 식당으로 들어가서 강부장이 김이사에게 전화를 했다. 김이사는 벌써 잠실인근에 도착했다는 전갈이었다. 강부장이 주인아주머니에게 번지를 물어서 일러주고 식당 상호를 말해주었는데 우리가 소주를 두어 잔 마셨을 때 김이사가 식당 유리문을 밀고 들어왔다.
김이사는 거의 이 년 만에 보는데 얼굴이 구리 빛으로 그을려 있었고 몸집은 더 늘어서 마치 소도둑놈같이 보였다.
강부장이 말한 리비아가 아니라 쿠웨이트에 골재 선별기를 납품하고 왔다는데 석 달이 걸렸다고 했다. 그런 사업에 대해 얘기를 하며 저녁을 먹으며 반주로 소주 세 병을 비웠다. 김이사는 차를 가져왔다면서 딱 한 잔만 마시고 거들지 않았다.
자리를 옮겨 잡아놓은 모텔 방으로 들어가서 땅콩을 쏘아라에 대해서 강부장이 얘기 보따리를 풀며 내가 서울에 온 목적을 말하고 혹시 농산물 수입상을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땅콩? 그거....... 아무래도 운임으로 미루어보나 운송기간으로 따지나 품질로 견주어보나 중국땅콩한테 못 이길 텐데?
김이사의 입에서 아주 실망스런 말이 나왔다.
제 동네 무당이 용한 줄을 모른다고, 전문가를 너무 멀리서 찾고 있었다. 김이사는 그 방면에 대해 박사나 다름없었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땅콩의 진공포장 방법이나 관세청의 검역에 대해서 손금 보듯이 바삭하게 알고 있었다. 처음으로 들여오는 땅콩은 검역이 까다로워 상하기 십상이라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이사의 말을 들으니 막연히 포대나 자루에 담아서 들여올 거라는 내 생각은 대대적인 수정을 요구했다.
-진공포장을 한다? 어떻게?
그렇더라도 온 김에 가락동 농산물시장의 경매를 내일 새벽에 볼 거라고 했더니 지금 이 시간부터 경매를 한다고 하며 자기 차가 있을 적에 돌아보자고 제의 했다. 새벽보다는 그게 수월할 것이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셋은 모텔을 나와 김이사의 차를 이용하여 가락동 농산물 시장에 갔었다. 십 분도 걸리지 않는 바로 인근이었다. 농산물시장은 불야성이었다. 지방에서 농산물을 싣고 올라온 화물차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 틈을 비집고 돌아보니 땅콩은 없었다. 배추 무 오이등속의 채소류와 사과 수박 방울토마토 등속의 과일류만 경매를 하고 있었다. 김이사가 이곳저곳을 묻더니 땅콩의 경매는 양재동 농산물센터에서 취급한다는 것이라며 소매에 가면 있을지도 모른다며 농산물센터의 건물 이층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 가니 소매로 파는 중국땅콩이 있었다.
어떻게 포장을 했는지 비닐포장인데 진공포장으로 정사각형을 만들었다. 볶은 땅콩인데 탈피는 하지 않은 것인데 3.75kg, 즉 일 관씩 정사각형으로 진공포장을 해서 열 개씩 한 박스를 만들어 들여온 것이다. 강부장은 그걸 보고 신기한 듯 휴대폰으로 사진으로 찍었다. 다른 데 가서 또 써먹겠지.
김이사의 말로는 가공식품이라 이렇게 포장하지 않으면 들여올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없었다. 미얀마에서 진공포장 기계를 들여놓고 포장을 해서 보낼 자신이 없었다. 내가 먼저 모텔로 돌아가 술이나 마시자고 했다.
셋은 차를 돌려 모텔로 돌아갔다.
더블침대가 있는 방이 아니라 온돌을 선택했기에 셋은 이불을 구석으로 밀쳐놓고 방바닥에 둘러앉았다. 내가 강부장에게 앞의 편의점에 가서 소주나 사오라고 했다. 그 시간에 다른 술집에 가기란 늦은 시간이고 또 그런 복잡한 곳에 가면 얘기를 할 수가 없어 모텔에서 술을 마시기로 한 것이다. 강부장이 나가서 소주를 한 아름 사오고 오징어 육포를 사왔다.
김이사는 나에게 한 컨테이너가 땅콩으로 따지면 몇 톤이 실릴 거냐고 물었다. 나는 대충 24톤으로 어림을 잡고 있었는데 김이사가 휴대폰을 계산기 삼아 용적을 계산하더니 16톤이 실린다고 했다. 정말 우리 동네 무당이 용한 줄 몰랐네? 소주를 마시며 많은 얘기를 했다. 땅콩 수입에 수익성을 조목조목 따져보니 차 떼고 포 떼고 나면 한 컨테이너를 들어와서 넘기더라도 미얀마 로칼 매니저의 한 달 월급정도가 겨우 남는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것도 매일 한 컨테이너씩 들여오면 양에 차겠지만 빨라도 석 달에 한 컨테이너다.
-참, 용하네. 답은 나왔습니다. 손들었습니다. 안 할래요. 남는 장사를 해야지. 겨우 그거보고 진공포장 기계와 박스를 맞추어 들여가면 배보다 배꼽이.......
그 말을 기화로 땅콩을 쏘아라는 기획은 탄알을 장전도 못해보고 내 머리 속에서 불발이 되어 파편이 산산이 흩어졌다. 잊어버리자. 주섬주섬 배낭을 열어 샘플로 가져온 땅콩을 꺼냈다. 그 땅콩으로 소주 안주를 하며 거의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쿠웨이트와 골재 선별기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무엇을 들여오면 되는가에 대해서 중구난방으로 자기의견을 피력했다. 결론은 나지 않았고 다만 땅콩수입은 안 하는 걸로 결론을 지었다. 밤도 어지간히 깊었고 술도 어지간히 취했다. 급하게 마신 강부장은 상당히 취했는지 종내에는 혀가 꼬여 말이 어눌해졌다. 김이사는 강부장이 취한 걸 보고 늦었다며 일어났고 우리는 술병을 윗목으로 밀치고 누웠다.
다음날은 새벽에 가락동 경매를 보러 갈 일도 없고 땅콩 수입업자를 만날 일도 없어 늦게까지 자도 무방했다. 내일은 하루를 뭐하고 보내지? 아이고, 물 건너 간 땅콩을 쏘아라여. 그렇게 중얼거리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머리맡에 둔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에 깨었다. 비몽사몽 발신인을 보니 단골업체 K건설의 상무였다. 공단에 섬유공장 철거할 게 있어 견적을 넣어야 하는데 오전에 같이 현장을 둘러보고 철거에 드는 장비 견적을 좀 빼달라는 것이었다. 비몽사몽 월요일에 하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오늘 중으로 견적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울이라는 소리는 하지 않고 아무래도 오전에는 곤란하고 오후에 연락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새벽인 줄 알았는데 이런! 아홉 시가 넘었다. 언제 벗었는지 꽉 쪼이는 삼각팬티만 사타구니에 걸치고 늘어져 자고 있는 강부장을 깨웠다.
-야! 늦었어. 나 내려가야 돼.
강부장을 깨워서 후딱 씻고 챙겨서 모텔을 빠져나와 부근의 콩나물국밥집에서 국밥을 먹었다, 속을 푸는데 그만이었다. 국밥을 먹으며 생각하니 칸트의 북 콘서트가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내려왔다가 다음날 다시 올라가기에는 무리다 싶었다. 콩나물국밥을 먹다가 칸트의 연락처를 찾아 메시지를 날렸다.
**지금 서울에 와서 잠실에 있음. 구미에 급한 일이 생겨 내려가야 함. 아무래도 내려갔다가 내일 다시 올라오기는 힘들 것. 죄송^* 북 콘서트 성황리에 잘 하시길 ^*
그렇게 문자 메시지를 날려놓고 국밥을 먹었다. 국밥을 거의 다 먹어갈 적에 칸트에게서 문자가 아닌 전화가 왔다. 첫마디에 섭섭하다는 거였다. 얼른 들어도 과장된 말인데 거듭 죄송하다는 말만 했다. 급한 일이라고 하니 마음 편하게 내려가시라고 하면서 웃었다. 다행이다.
국밥을 급하게 먹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출근시간이 지나서인지 지하철은 한산했지만 지하철이 왜 그리 더딘지. 서울역에 도착하여 담배피울 시간도 없이 출발 시간이 겨우 오 분이 남은 무궁화표를 끊을 수가 있었다.
-마누라한테 사흘 걸린다고 했는데 지금 들어가서 뭐라고 해요?
급하게 개찰구를 빠져 나오는데 뒤에서 강부장이 볼멘소리로 목덜미를 낚아챘다.
-돈 많은 과부를 낚아채서 인생역전을 만들려고 하룻밤 잤더니 느닷없이 생리를 시작해서 할 수없이 들어왔다고 해.
그렇게 큰소리로 던져놓고 플랫폼으로 뛰었다.
그렇게 내려와서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K건설 상무에게 연락을 해서 현장을 돌아보았다. 오래된 섬유공장인데 바로 옆에 붙은 전자회사가 매입을 해서 확장을 하는 건이었다. 몇 번을 돌아보고 견적을 넣었다.
K건설 상무의 말로는 일곱 개 업체가 붙었는데 우리가 최적의 견적이라 낙찰되었다고 했다. 하여, 어제부터 내 소유의 장비가 들어가서 철거작업을 하고 있다. 철거작업을 마무리 지으면 바로 증축공사에 들어갈 것이니 당분간 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땅콩을 쏘아라는 프로젝트는 총알 장전도 못하고 불발이 되어 산산이 흩어졌지만 마음이 편하고 홀가분하다.
또 시계를 본다. 오늘따라 시간이 더디다.
첫물 미나리와 삼겹살, 그리고 소주가 기다리고 있다. 마음이 푸근한데 칸트에게는 참 미안한 마음이 든다. 당장 책을 보고 싶다고 하기에는 염치가 없고 며칠 있다가 한 권을 보내 달라고 해야지 생각하며 노트북의 카페 대문을 꾸밀 사진을 훑어보았다.
땅콩이여~ 그대~ 나에게로~
나도 모르게 또 흥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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