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 02
<순교자 현양탑>
서울대교구는 교회사뿐 아니라 한국사의 중요한 장소인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가
쓰레기 처리장과 청소차 주차장, 노숙인 생활공간으로 사용되던 현실을 타개하고자
2011년 7월 24일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 중구청에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관광 자원화 사업'을 제안했다.
그 후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교회가 합심해
서소문 역사공원(지상)과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지하)을 조성해
2019년 5월 29일 준공식을 거행하고, 6월 1일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을 개관했다.
또, 박물관에 정하상 기념 소성당을 설치해 순례자를 위한 매일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교황청에서는 2018년 9월 14일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가 포함된
천주교 서울 순례길을 아시아 최초 국제 공식 순례지로 지정했다.
✝ 기해박해의 순교 성인 - 02
◆ 16.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1817∼1866)
<남 성인의 약전은 이연재 ’27. 3대 4명의 순교자가 묻힌 남종삼 성인 묘소‘에 게재.>
<남종삼 요한 성인>
◆ 20. 성 박후재 요한(朴厚載 1799~1839)
<박후재 요한 성인> <칼날을 돌에 갈아...>
박후재는 경기도 용인에서, 1801년에 순교한 박 라우렌티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순교 후 서울로 이사해, 어머니와 함께 물장사와 짚신장사로
가난한 생활을 했으나, 그는 마음이 대단히 곧았을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했고, 신자로서의 모든 본분을 열심히 지켰다.
36세 때 교우 처녀와 결혼했다.
1839년 5월, 박 요한은 아내를 아주머니 집으로 피신시키고
혼자 체포돼 포청에서 치도곤 40대를 맞는 등 가혹한 형벌을 당했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함께 갇힌 교우들을 격려하고
외교인 죄수들에게는 천주교의 바른 도리를 강론했다.
형조로 이송되어 4개월 동안 옥살이를 겪고
9월 3일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갔다.
희광이가 박 요한의 목을 여러 번 내리쳤으나 베어지지 않고
그의 몸이 무섭게 경련을 일으켰다고 한다.
당황한 희광이는 칼을 돌에 대고 갈아 날카롭게 하여
다시 내리치니 마침내 박 요한의 목이 떨어져
원하던 순교에 이를 수 있었다.
◆ 22. 성녀 원귀임 마리아(元貴任 1818∼1839)
<원귀임 마리아 성녀>
원귀임은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龍頭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다가 아홉 살 때부터는
서울에 사는 성실한 신자인 고모 원 루치아 집에서 교리를 배우고
삯바느질하며 착하고 순종적인 삶을 살았다.
16세 때에 동정허원을 하고 머리를 얹어 시집간 여자로 행세했다.
1839년 3월 29일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자 재빨리 피신했지만
길거리에서 원 마리아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들켜 체포됐다.
포청에서 배교를 강요당하자, “내 영혼을 이미 하느님께 맡긴 지 오래니
다시는 묻지 마십시오. 오직 죽을 뿐입니다." 하며 배교를 거부하고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았고
드디어 7월 20일 일곱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 23.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劉進吉 1791∼1839)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유대철 베드로 성인 부자> <천진암의 유진길 묘소>
유진길은 선조 때부터 당상 역관을 지내온 중인 계급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겼는데, 특히 철학과 종교 문제에 관심을 두고
10년 이상 불교와 도교를 깊이 연구했으나 진리를 못 찾고 방황하던 중,
훌륭한 양반집의 많은 학자가 천주교를 믿어서 처형을 당함에
즐거운 낯으로 죽는다는 말을 듣고, 이야말로 참된 종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천주교에 관한 책을 구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다가 우연히,
자기 집 장롱에 바른 헌 종이에 영혼, 각혼, 생혼이란 글자가 적힌 것을 보고
크게 놀라 앞뒤를 맞추어 보니 그것이 곧 “천주실의(天主實意)”라는 책이었다.
유진길은 정귀산이란 이가 천주교를 연구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찾아가 교리를 물어보자 그는 대답을 피하고 홍 암브로시우스를 소개했다.
유진길은 홍 암브로시우스를 만나 교리를 배우게 되었고,
바로 천주교에 입교, 모든 계명을 충실히 지켜나가기 시작했다.
유 아우구스티노는 얼마 뒤 정하상 바오로를 알게 되었다.
당시 정 바오로는 동료 교우들을 모아 선교사 영입 운동을 하고 있었다.
1824년 유진길은 동지사의 수석 역관으로, 정하상과 함께 북경에 갔을 때
구베아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고, 조선에 신부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뒤 유진길은 북경 교회와의 연락을 담당, 8차례 북경을 왕래하면서
정하상, 조신철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추진했다.
1825년에는 정하상, 이여진 등과 함께 로마 교황께 청원서를 올려
조선 교회의 딱한 사정을 알리고 하루빨리 신부를 보내 달라고 간청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1831년 9월 9일 자로 조선대목구가 신설되었고,
1833년에 중국인 유 파치피코(유방제 劉方濟. 본명은 여항덕 余恒德) 신부가,
뒤를 이어 모방, 샤스탕 신부 그리고 앵베르 주교가 입국할 수 있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17일 체포됐다.
포청에서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며 주리형과 줄톱질형을 가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고, 9월 22일 정하상과 함께 참수되었다.
순교 당시 그는 당상관으로서, 한국 천주교 순교자 중에서
벼슬을 지냈던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장남 유대철 베드로(劉大喆 1826-1839)도 포청에서 형벌을 받던 중
10월 31일 형리들이 감옥에서 몰래 목을 졸라 죽임으로써
우리나라에서 가장 어린 순교 성인의 영광을 차지했다.
◆ 26. 성녀 이매임 데레사(李梅任 1788∼1839)
<이매임 데레사 성녀> <허계임 막달레나 성녀>
경기도 봉천의 양반 집에서 태어난 이매임은 스무 살에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왔을 때 한 동네의 여교우로부터 성교회를 알고 입교했다.
식구들에게 열심히 권면하여 올케 허계임을 신자로 만들었고,
허계임 막달레나는 딸 이정희, 영희를 신앙의 길로 이끌었다.
이매임 데레사는 판공성사 때가 되면 올케와 함께 상경해 성사를 보곤 했다.
이 데레사는 조카 이영희가 동정 생활을 결심하여 서울로 피신하자
함께 따라가 살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을 이겨 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에 감동하여 순교를 결심했다.
그녀는 김성임, 김 루치아, 허 막달레나, 이 막달레나, 이 바르바라와 함께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하고 1839년 4월 11일 포청에 자수했으나
포청에서는 그들을 믿지 않으며, ‘배교하고 천주교 책을 바쳐라.’라고 유혹했다.
그녀들은 “저희가 자수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인데
그를 배반하라는 말씀입니까? 참된 교우는 천주를 위하여 살고
천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사형에 처한다면 즐겨 죽겠습니다.”라고 강변했다.
그들은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839년 7월 20일 소원을 이루었다.
◆ 42. 성녀 허계임 막달레나(許季任 1772∼1839)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허계임은 경기도 시흥군 동면 봉천리에 사는
이 씨와 결혼해 딸만 둘을 나았으나 후에 양자를 들였고
선 막달레나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선 막달레나는, 시어머니가 1772년 음력 11월 3일생이라고 밝혔다.
<103위 성인.>
<성지 홈페이지, 성지 목록에는 1773년생으로 기술.>
시누이 이매임 데레사에게서 천주교를 배우고 입교했다.
남편은 완고한 외인으로 천주교를 몹시 싫어하여 설득하지 못하고,
남편 몰래 신앙을 지키며 두 딸 정희와 영희를 열렬한 신자로 만들었다.
시누이, 두 딸과 함께 체포되어 1839년 7월과 9월에 그들을 먼저 주님께 보내고,
허 막달레나는 9월 26일에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치명했다.
9월 25일 "내일 네 어머니가 형장으로 나갈 것이다"라는 소식을 들은 아들은
그날 밤으로 급히 상경하여 어머니의 처형 광경을 직접 목격했는데
희광이가 첫 칼에 목이 떨어지지 않자, 다시 칼을 휘둘러 참수됐다고 말했다.
◆ 31. 성녀 이정희 바르바라(李貞喜 1799∼1839)
<이정희 바르바라 성녀> <3년 앉은뱅이 노릇한 이 바르바라> <이영희 막달레나 성녀>
허 막달레나의 맏딸 이정희는 신자가 된 뒤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며
동정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이 바르바라가 나이가 차자 아버지는 한 외교인 청년과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3년 동안 앉은뱅이 노릇을 하여
그 청년이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단념토록 했다.
후에,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어떤 교우 청년이 청혼하자
바르바라는 완고한 아버지 밑에서 동정을 지킬 수 없다면 차라리
신자와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그와 혼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2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서울 있는 고모 이매임의 집에 살았다.
이 바르바라는 결국 순교를 목적으로 포청에 자수하여
9월 3일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소망을 이루었다.
◆ 30.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李榮喜 1809∼1839)
이정희의 동생 영희는 어린 나이에 입교해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했다.
장성하여 아버지가 출가시키려고 하자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처럼 꾸미고
서울의 고모 집으로 도망쳐, 언니와 다른 여교우들과 함께 지냈다.
막달레나는 고모, 언니와 함께 실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았다.
자수한 뒤 주리를 틀리고 곤장을 맞으며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용감히 참아 신심을 지켰으며,
형조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언니에 앞선 7월 20일 처형되었다.
◆ 27. 성녀 이소사(조이) 아가타(李召史 1784∼1839)
<이조이 아가타 성녀> <최초의 순교 성인 이호영 베드로>
이소사는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17세 때 결혼했으나 3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친정으로 돌아와 살면서 어머니, 동생 이호영과 함께 입교했다.
현석문 가롤로는 ‘기해일기’에 “이 아가타의 살림은 곤궁했지만
얼굴에는 언제나 화평한 기색과 기쁜 웃음이 떠나지 아니하였으니
착하고 아름다운 언행을 모두 기록하기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썼다.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사망하자 동생을 따라 서울로 이사했고
1835년 2월(음 정월) 한강 변 무쇠막에서 동생 이호영 베드로와 함께 체포됐다.
<서울 마포구 신수동에 있던 마을로, 무쇠솥이나 농기구 등을 만들어 팔거나
나라에 바치는 공장이 많았던 데서 마을 이름이 무쇠막이 되었다.>
포청에서 견디기 힘든 형벌과 고문을 참아 냈고 형조로 이송되어
동생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집행이 연기되어 오랜 옥살이를 해야 했다.
고통스러운 옥중생활 속에서도, 한날한시에 순교하자고 동생을 격려하며
인내와 극기로 버티다가 동생이 옥사한 지 7개월 후인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여 남매 성인의 영예를 얻었다.
이호영 베드로(李鎬永 1802~1838. 11. 2.)는 누이와 함께 가장 먼저 체포되어
여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고, 103위 성인 중 최초로 순교한 인물이 되었다.
<조이(召史) : ‘조이’는 조선 시대 양민의 아내나 과부를 이르는 호칭으로,
한문으로 표기할 때는 召史(소사)라 쓰고 ‘조이’로 발음했다.
그러나 ‘조이’ ‘소사’가 혼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조선 초에는 어린 여자를
‘조이’로 불렀다고도 한다. ‘콩쥐 팥쥐’의 ‘쥐’도 ‘고양이와 쥐’의 ‘쥐’가 아니라,
‘조이’의 변형이라고 한다. - 네이버 지식백과 등>
◆ 29. 성녀 이영덕 막달레나(李榮德 1812∼1839)
<이영덕 막달레나 성녀>
외교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이영덕은 어려서 외할머니의 권면으로 신앙을 갖게 되었다.
1840년 1월에 당고개에서 순교한 이인덕 마리아의 언니이며, 어머니는 조 바르바라이다.
어려서부터 어른처럼 점잖고 성품이 매우 온화했으며, 외할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성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나 천주교를 몹시 꺼리던 아버지 때문에 교리를 따르는 일은 몰래 실행했다.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가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 틈 타
어머니와 두 딸은 성세성사를 받았고, 이를 안 아버지가 더욱 천주교를 미워하고
반대했기 때문에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이 막달레나가 혼기에 이르러 아버지가 외교인과의 혼인을 강요하자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있던 막달레나는 꾀병을 앓기도 하고,
혈서를 써 보이기까지 하면서 결혼을 안 하겠다고 버텼으나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해서 몇 달 후에는 혼인을 해야 할 급박한 상황이 되어,
앵베르 주교에게 가출을 허가해 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주교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 집에
숨어 살았다.
이를 안 주교는, 처음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으나, 조선 풍습에
가출했던 부녀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음을 알고,
세 모녀가 살 수 있도록 집 한 채를 마련해 주도록 주선했다.
막달레나는 주님께 감사하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동정으로 살았는데,
기해년 7월경에, 살던 집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주리를 틀리고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시달리는 등 옥중의 모든 고초를 당했다.
그러던 중 같은 옥에서 함께 배교의 유혹을 물리치던 어머니는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침내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바라던 순교의 복된 영광의 날이 다가오자,
동정녀 이 막달레나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순교했다.
<이 막달레나의 동생인 이인덕 마리아 동정 성녀의 약전은
이 연재 ’96. 9명의 성인, 1명의 복자가 순교한 당고개 성지’에 게재.>
◆ 32. 성녀 전경협 아가타(全敬俠 1787∼1839)
<전경협 아가타 성녀>
전경협은 서울의 외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친을 잃고 가난하게 살 때,
안형광이라는 궁녀가 궁중으로 데리고 들어가 함께 살았다.
이때 궁녀이던 박희순 루치아를 만나 그녀의 감화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러나 궁중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만큼 훌륭히 계명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
병을 핑계로, 편안하고 사치스러운 궁중 생활을 박차고 나와 박 루치아와 함께 살았다.
아가타는 성품이 점잖고, 강직하며 뛰어나게 영리하였으므로 교우들의 사랑을 받았다.
또 기도와 독서와 묵상과 덕행에 전심하며 상냥함과 겸손한 태도로써
많은 외교인들의 마음마저 감동을 줘 이들을 회두시켰다.
자주 병을 앓으면서도 불평하지 않았고, 궁중의 사치와 좋은 음식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1839년 4월 15일, 포졸들의 습격으로 박희순, 박 큰아기 등과 함께 체포되어
궁녀였다는 이유로 포청과 형조에서 더욱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여
살이 헤어져 떨어지고 뼈가 부러지며 피가 땅을 적시었으나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아
외교인들까지도 감탄했다고 한다.
전 아가타 동정녀는 5개월의 옥살이 끝에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 33. 성 전장운 요한(全長雲 1811∼1866)
<전장운 요한 성인> <전 성인과 최형 성인등이 성서를 인쇄>
한양 애고개에서 태어난 전장운은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의 인도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후에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짓는 한편
가죽 부대와 담뱃대 만드는 일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갔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돼 한 달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혹형과 고문을 참지 못했고,
굳지 못한 얕은 신앙 탓에 감언이설에 빠져 배교하고 풀려 나왔다.
전 요한은 뉘우치고 깊은 참회 속에서 지냈으나, 고해를 받아줄 사제가 남아 있지 않았다.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회개의 성사를 받은 뒤, 열심한 신앙생활로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혼인하여 3남매를 두었다.
1866년 초 베르뇌 주교(張敬一)는 전 요한에게 최형 베드로, 임치화 요셉과 함께
교회 서적을 출판하는 직무를 맡겼다.
박해가 시작되자, 베르뇌 주교가 체포됐고, 인쇄소 주인 임 요셉은 도피했다.
신자들이 그에게 피신을 권유했으나 전 요한은 “여기에는 교우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귀중한 물건들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 목판이 교회에 매우 유익하다고 믿기에
어떠한 불행이 닥치더라도 달게 받으며 여기를 지키렵니다.”라며 남아 있었다.
3월 1일 최형과 함께 체포돼 3월 9일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갔다.
공교롭게도 희광이는 전에 신자였고 잘 아는 사이인 고성철이란 사람이었다.
그가 “내 어찌 차마 자네 목을 벨 수 있겠소?” 하며 주저하자
“당신은 임금께 복종하고 나는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뿐인데 무엇을 꺼리는 거요?” 하고
오히려 망나니를 채근하여 그의 칼에 목이 땅에 떨어졌다.
◆ 39. 성 최형 베드로(1814∼1866)
<최형 성인의 약전은 이연재 ‘97. 열 분의 순교자가 묻혔던 용산 왜고개성지’‘에 게재.>
◆ 34.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丁情惠 1797∼1839)
<정하상 바오로 성인>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
정정혜는, 한국 천주교회 설립자 중 한 명으로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와 성녀 유조이 체칠리아 부부의 딸로
경기도 광주의 마재마을에서 태어났다.
복자 정철상 카롤루스와, 최초의 신학생인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오빠로 둔
우리나라의 대표적 가톨릭 가족이었다.
네 살 때 정약종 일가는 박해를 피해 광주를 떠나 서울로 피신했고,
정혜와 오빠 하상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온 가족이 체포돼, 아버지와 이복 오빠 정철상은 순교했으나
조정에서는 그들의 재산을 몰수한 후 유 체칠리아와 어린 정혜, 하상은 석방했다.
살아남았으나 생계가 막연했던 그들은 마재의 숙부 정약용의 집으로 갔지만
그곳에서 친척들의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몹시 궁핍하게 지냈다.
정 엘리사벳은 가난과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나갔고,
바느질과 길쌈으로, 장차 신자들의 일꾼이 될 오빠 정하상 바오로를 뒷바라지했다.
처음에는 천주교가 집안을 망쳐 놓았다 하여 적대시하던 몇몇 친척들도
그녀의 아름다운 모범과 덕에 감화되어 천주교에 입교하기도 했다.
박해가 심해지자, 혼자 상경하여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베이징과 연락하는 것을 돕던 하상이 내려와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충청도의 교우 마을에 정착, 오래간만에 일가가 다시 한 곳에서
함께 교리를 공부하고 극기하며 살았으나
이 지방에도 추포의 위험이 다가오자 그들은 다시 서울로 피신했다.
엘리사벳 가족은 앵베르 주교와 두 신부를 자기 집에 모시고
알뜰하게 보살펴 드렸으며,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다.
앵베르 주교는 “엘리사벳은 마치 교리 선생 같습니다.”라고 고마워하며
“참으로 여회장이 될만하다”라고 감탄했다.
세 식구는 1839년 7월 19일에 체포되었고, 엘리사벳은 1839년 12월 29일
여섯 명의 교우와 함께 순교하여 동정과 순교라는 이중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달레 신부는 ’한국교회사‘에서「역경이라는 학교에서 키워진 강인한 여인」이라고
기술했다.
◆ 35.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1795∼1839)
<정하상 바오로 성인, 유소사 체칠리아 성녀(柳召史 1761~1839. 11. 23.)의 약전은
이연재 ‘21. 정약용 5남 5녀의 생가터 마재성지’에 게재됨.>
◆ 36. 성 조신철 가롤로(趙信喆 1795∼1839)
<북경을 왕래하는 조 가롤로 성인> <최영이 바르바라 성녀>
조신철은 강원도 회양(淮陽. 현 미수복 강원특별자치도 회양군) 의 상민 집안 출신이다.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탕진하자 집을 떠나
절에 들어가 몇 해를 지냈고, 그 후 하산하여 이집 저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23세 때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의 마부가 되었다.
정직하고 용감했던 그는 사신의 종복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칭찬을 듣게 되었고,
여러 번 북경을 왕래하는 동안 모은 돈으로 아버지와 형제들을 먹여 살렸다.
30세쯤에 유진길, 정하상 등과 알게 되어, 북경에서 세례, 견진, 고해, 성체성사를 받았고,
북경 교회와 연락을 취하며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의 입국을 도왔다.
조 가롤로는 겸손과 인내와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생활하며 새 신자들을 도왔고,
아내를 권유하여 입교시켰으나 불행히도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조 카롤로는 열심한 신자와 재혼했는데 그 부인이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였다.
(최 성녀 약전은 이 연재 ‘96. 9명의 성인, 1명의 복자가 순교한 당고개 성지’에 게재.)
1839년 박해가 일어나자 처가로 피신했는데 6월 어느 날 외출한 사이에
처가를 습격한 포졸들이 가족들과 어린 젖먹이까지 잡아가자
포청으로 찾아가 그들의 가장이라고 자수했다.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았고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자의 영예에 올랐다.
1839년 봄 북경에서 귀국하던 어느 날 꿈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는데,
“금년에는 순교의 은혜를 네게 주노라”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셨다는 말이 전해진다.
◆ 38. 성 최창흡 베드로(崔昌洽 1787∼1839)
<최창흡 베드로 성인> <손소벽 막달레나 성녀>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창흡은 어려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으나
열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울의 총회장이던
형 최창현(崔昌顯. 복자)이 순교한 뒤 집안이 파산되어 교육을 못 받았고
몇 해 동안 신자들과의 교류가 없어져 외교인과 다름없이 냉담하게 지냈다.
30세경에 신유박해로 몰락한 집안인 서울 출신의 손소벽 막달레나와 결혼,
자녀 열한 명을 낳았으나 아홉 명은 어려서 죽었다.
<성녀 손소벽 약전은 이 연재 ‘96. 9명의 성인, 1명의 복자가 순교한 당고개 성지’에.>
1821년 콜레라가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최창흡은 부인과 함께 대세를 받고 신자의 본분을 철저히 지켜나가
선교사들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는 착실한 신자라는 평판을 듣게 되었다.
최 베드로는 지난날의 자기 신앙생활이 늘 마음을 무겁게 하여
순교만이 자신의 잘못을 보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어
순교하고자 하는 열렬한 원의를 가지고 있었다.
1839년 6월 친정으로 피신해 온 딸 최영이의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사위 조신철이 맡겨 둔 교회 서적과 성물 때문에 혹형을 받았으나 잘 참아 냈고
12월 29일, 부인보다 한 달 먼저,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 40. 성녀 한아기 바르바라(韓阿只 1792∼1839)
<한아기 바르바라 성녀>
강원도 광천(평창군 대화면)의 교우 집에서 태어난 한아기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세속의 일에 마음이 빠져
어머니의 모범과 권면을 무시하고 외교인과 혼인했다.
하루는 친정어머니가 걱정거리인 딸의 집에 왔다가 문 앞에서,
천주교 신자로서 알고 지내던 김업이 막달레나(성녀. 연재 ‘100’)를 만났다.
어머니는 김 막달레나에게 딸을 회두시켜달라고 부탁했고,
딸은 김업이의 권면으로 과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교리를 열심히 배웠으며
신앙인으로서의 본분을 훌륭히 실천하며 살았다.
한 바르바라는 30세 때 비극적으로 남편과 세 명의 자식을 잃고 친정에 돌아왔다.
불행 속에서 그녀는 더욱 믿음이 강해져서,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고
죽을 위험에 처한 이웃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836년 10월 김아기 아가타(성녀. 연재 ‘100’), 김업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형관에게 천주 십계를 강론하고
의연히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형 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한 뒤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았다.
앵베르 주교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4월 27일(음력) 새벽에 우리는 가까스로 시신들을 되찾아
일찍이 마련해 둔 묘지에 순교자들을 묻었다.
유럽식으로 좋은 옷을 입히고 값비싼 향수를 뿌리고 성유를 발라주고 싶었지만
그런 식의 처리는 가난한 신자들에게 부담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겨우 멍석으로 감쌌다.
나는 조선에 종교의 자유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으며, 그날이 오면,
이 시신들은 귀중한 유산이 될 것이다.”
◆ 41. 성녀 한영이 막달레나(韓榮伊 1784∼1839)
<한영이 막달레나 성녀> <권진이 아가타 성녀>
한영이는 외교인이자 가난한 시골 양반의 집에서 태어나,
혼기에 이르러 권영좌(權永佐) 진사의 후처로 들어가
딸 권진이(성녀. ‘96. 9명의 성인, 1명의 복자 ---당고개 성지’에 게재.)를 두었다.
권 진사는 당시 글씨로 유명한 학자였는데, 중년에 천주교를 믿었고,
죽기 전에 세례를 받으면서 가족들에게 천주교인으로 살라고 간절히 권유했다.
한영이 모녀는 입교해서 신자의 본분을 충실히 지키며 살았다.
한 막달레나는 살림이 너무나 어려워서 어느 신자 집에 몸을 의탁했다.
몇 해 후, 딸 권진이가 친구 이경이 아가타(성녀. ‘96. ---당고개 성지’에 게재.)와 함께
피신해 와서, 셋이 서로 격려하고 북돋우며 함께 순교의 길을 걷기를 원하게 되었다.
셋은 1839년 7월 17일 체포되었고 주리와 곤장의 형벌을 당했으나
불굴의 인내로 참아 내며 순교 의지만을 드러내므로 마침내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딸보다 한 달 앞선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막달레나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기도를 바치며 칼날을 받았다.
◆ 43. 성녀 현경련 베네딕타(玄敬連 1794∼1839)
<현경련 베네딕타 성녀>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현경련은 어려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 백서 사건에 얽혀 순교한
현계흠 플로로(玄啓欽 복자)의 딸이고 성 현석문 가롤로(연재 ‘99')의 누님이다.
부친 순교 후 늙은 모친, 어린 동생 석문과 자주 이사를 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17세 때, 한국교회 설립의 주역 중 한 명인 최창현 요한(崔昌顯 복자)의 아들과
혼인했으나 3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며, 정한 시간에 기도와 묵상과 독서를 했고,
성심으로 주님을 섬기고 집안이 화목해서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여회장직을 맡아 교리를 가르치고 입교 권면에 힘썼으며, 근심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병자들을 간호하며, 죽음을 앞둔 비신자 어린이들에게 대세를 주었다.
신부들의 순회 때는 신자들을 자기 집에 모이게 해서 성사를 받도록 했다.
1839년 6월에 동생과 함께 체포되어, 신부들의 피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로부터
온갖 혹형을 당했으나 모두 참아 내고,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처형되었다.
◆ 44. 성녀 홍금주 페르페투아(洪今珠 1804∼1839)
<홍금주 페르페투아 성녀>
서울 변두리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홍금주는 10세 때 입교했으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으므로 교리의 근본은 잘 모르고 있었다.
15세에 외교인에게 출가한 뒤 냉담해져서 외교인과 다름없이 지냈다.
젊어서 남편과 사별하게 되자 홍 페르페투아는 어린 아들 박호랑을 데리고
여기저기 교우 집을 돌아다니며 의탁하여 생계를 이어가다가 아들마저 잃었고
그 후 미나리골에 사는 성실한 교우 최 필립보의 행랑에 방 한 칸을 얻어 살면서
가장 천한 일을 맡아 하고 병약자들을 돌보았다.
홍 페르페투아는 최 필립보로부터 교리를 다시 배운 뒤 성사를 받았다.
그녀는 묵상과 첨례신공(瞻禮神功 – 축일 기도) 때면 언제나 눈물을 흘려서
같이 있던 사람들도 감격하여 신심을 더하게 되는 이들이 많았다.
1839년 4월 하순께 최 필립보의 동생 야고보 부부와 함께 잡혀갔다.
포청과 형조에서 가혹한 형벌을 받은 뒤 사형을 선고받았다.
옥살이 중 고문의 상처와 삼복더위 그리고 서너 차례의 염병에 고생했으나
조금이라도 나으면 다른 교우들의 상처를 닦아 주고 온갖 시중을 들어,
함께 갇힌 교우들은 그녀를 친 자매처럼 생각했다.
6개월의 옥살이 끝에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순교자의 반열에 들었다.
<서소문 순교자 박물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