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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꾸짖다
마가복음4:35-41 2022/11/27 구주강림절 제1주
4: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4: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4: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와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구주강림절이 오늘부터 시작이 됩니다.
2023년도 교회력의 시작
바로 오늘부터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배 후에는
2023년도 새 달력을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구주 강림절의 전례색은 보라색입니다.
보라
1)기다림
2)참회(사전적 의미): 죄를 깨닫고 용서를 비는 행위
하지만 구주 강림절의 참회는
죄를 깨닫고, 용서를 비는 사전적 의미보다는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는 복음적 의미가 더 큽니다.
바로 케노시스(비운다)의 참회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진정한 참회를 이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그렇게 예수님이 가장 낮은 삶의 자리 구유에 누이십니다)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니 앞으로 구주 강림을 기다리는 4주 동안
여러분들이 꼭 하셔야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금식입니다.
자기의 마음과 자기의 육체와 자기의 생각을 비우는
케노시스(비운다)의 금식입니다.
그렇게 해서 종의 형체
다시 말해 아기 예수님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모실 수 있는 공간을
첫째는 우리 마음에
둘째는 우리 육체에
셋째는 우리 생각에 마련해 두는 것이지요.
웨슬리 목사님이 사용한 방법인데,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일주일 두 번입니다.
월요일과 목요일 오후 3시까지 금식하고, 저녁 한 끼만 먹으면 됩니다.
어떻습니까?
해 볼만 하겠지요.
자 이제 오늘 본문으로 눈을 돌려 보겠습니다.
막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아주 짤막하게 한 절로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엄청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자
바람이 그치고, 풍랑이 아주 잔잔해졌기 때문입니다.
자, 한 번 물어 봅시다.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제가 다소 부정적으로 묻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현장에 있었던 제자들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자기들끼리 서로 수군거렸던 일이였기 때문입니다.
막4: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공)4:41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그렇다면 제자들마저 믿지 못하고 서로 수군거렸던 이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잠시 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 사역 중심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갈릴리였습니다.
막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처럼 예수님 사역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였습니다.
왜냐?
왜 갈릴리냐?
그것은 선지자 이사야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말합니다.
마4: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갈릴리)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사9:1,2)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그래서 소위 기적사화라고 불리는 5가지의 기적들이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 갈릴리에서 연속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➀막1:21-28
갈릴리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줍니다.
27절과 28절만 읽겠습니다.
여기서 예수라는 이름이 드디어 갈릴리 사람들에게 각인되지요.
막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1: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➁막1:29-31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줍니다.
➂막1:40-45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➃막2:1-12
중풍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➄막3:1-6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십니다.
이 모두가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 갈릴리에서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갈릴리는 더 이상 사망의 땅 저주의 땅이 아니라
생명의 땅 축복의 땅이 되겠지요.
그러자 예수님 신변에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째 아주 다양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유대와 예루살렘은 말할 것도 없고
국경너머에 있는 이두메 사람,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사람
그리고 두로와 시돈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따릅니다.
막3: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3: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앞서 설명 한 5가지의 기적사화)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3: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3: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두 번째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이때부터 바뀝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3장 11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어마어마한 호칭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더러운 귀신들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을 삐딱하게 보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하나는 예수님의 친족들이였고,
또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친족들, 고향 사람들의 반응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막3: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다음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구원 역사를 이렇게 비하합니다.
막3: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붙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그러니 이 소식을 접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가만있을 수 없겠지요?
그래서 예수의 형제들을 모두 데리고 아들을 찾아 나섭니다.
“얘야? 니들 큰 형이 미쳤단다. 갈릴리에서 이상한 짓을 한단다.”
그렇게 해서 물어물어 이른 곳이 갈릴리 바닷가였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알립니다.
막3: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그런데요.
진짜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씀들을 예수님이 하십니다.
막3: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34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제대로 미친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앞으로 열어 가실 새로운 세상 곧 하나님 나라에서는요?
능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형제가 아니고서는
예수님의 자매가 아니고서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기적들을
연속해서 베푸신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나의 형제자매로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나의 어머니로
나병환자와 중풍 병자와 손 마른 자를 나의 형제자매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질서
어떤 차별도, 어떤 경계도 없는 화목(샬롬)의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이었습니다.
막4: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여기서 말하는 저편은 5장 1절에 나오는 거라사인의 지방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마음은 탐탐치 않았습니다.
왜냐,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거라사인의 지방은 율법이 금하는 돼지 떼를 치는 동네였고
둘째 선지자 이사야가 언급한 동네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원치 않는 배를 띄우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거센 바람이 일더니 순식간에 파도가 배 안으로 들이친 것이지요.
막4: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배 안이 완전 아수라장이 됩니다.
결국 극치의 두려움과 공포감에 빠진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서지요.
그런데요?
그 와중에서도 예수님이 어떻게 하고 계셨는지 아십니까?
막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상상이 되시나요?
그래서 제자들이 급히 예수님을 깨우지요.
38절 후반부입니다.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만 살면 됐지’라는
오늘 우리의 이기적인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귀신들려 신음하는 사람들의 탄식을
흑암에 앉은 백성들의 탄식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열심히 기도한다고 하지만
항상 이 수준에만 머물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새한글)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걱정도 안 되세요?’
지금 제자들이 표현한 ‘우리’ 그 배 안에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계십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쫒고, 열병을 고쳐주고, 나병환자를 고쳐주고, 중풍 병자를 고쳐주고, 손 마른 자도 고쳐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형제로
우리를 자매로
우리를 어머니로 여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요.
그런데도 두려움이 찾아오자 제자들이 이런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문제는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해야 이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을까요?
첫째 바람을 꾸짖듯 우리의 요동치는 마음을 꾸짖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두 마디입니다.
막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잠잠히 그리고 고요히
신실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지켜보십시오.
둘째 순종하십시오.
꾸짖음에 거친 바람이 순종하고 억센 바다가 순종했던 것처럼
여러분의 요동치는 마음을 순종하는 믿음으로 바꾸십시오.
하나님의 꾸짖음(질정叱正)을 피하지 않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 축복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새 찬송가 302장 2절 가사입니다.
2.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 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번 헤아려 안 보나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어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그렇습니다.
이제 나만 살면(편하면) 된다는 그 안일함의 언덕을 떠나십시오.
그리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해
새로운 절기에는 더 큰 은혜의 바다로 나아가는 은총의 노를
마음껏 저여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