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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집(重峰集) 조헌(趙憲)생년1544년(중종 39)몰년1592년(선조 25)자여식(汝式)호후율(後栗), 도원(陶原), 중봉(重峯)본관배천(白川)시호문열(文烈)특기사항이이(李珥), 성혼(成渾), 이지함(李之菡)의 문인. 의병장(義兵將)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사(戰死)
重峯先生文集卷之三 / 疏 / 質正官回還後先上八條疏 甲戌十一月
선조 | 7 | 1574 | 갑술 | 萬曆 | 2 | 31 | 5월, 질정관으로 聖節使 朴希立을 따라 燕京에 가다. ○ 11월, 還朝하여 八條疏를 올리다. ○ 12월, 柳希春과 함께 교서관에서 「朱子大全」을 교정하다. |
臣憲謹再拜上言。臣頃於西行之時。借得四聲通解於黃州譯官。已知質正事二十條之意。至玉河館。不能出入。只令通事因人請質。則所釋之言。不外乎四聲通解。臣竊愧素餐而無補於國家。方以爲懼。道遇士人王之符。擧以質之。則略設三事而哂之曰。質正之來。只爲此事乎。若此數物。除是方術之士。乃能盡知。而必欲强聞。則在聖門爲玩物喪志。於吾儒爲慱學小人。臣切愧斯言。因思祖宗之朝所以必遣質正而不已者。豈非以華人之指爲小中華者。實以能明禮義。而國家之名館以慕華,太平者。必欲詳究夫明王聖帝大公至正之制。長治久安之術。以措一區之民於大平之域也。非爲外誇乎華人之譫視而設也。故寧勞馹路之殘卒。而冀聞斯今之善政。將大爲祛弊興化之本乎。顧以微臣。識短慮淺。才疎言拙。固知鄙俚之辭。難溷聖明之聽。而道見貢馬之死于永平者。猶東其首。問之通事則曰。每見吾地方之馬。死必東首云。夫馬不忘本。而臣不如馬。臣之所深恥也。故敢以耳日之所聞見而關於治道者。僭議其我國之所未盡美者。恭備用中之擇。伏願 聖明之留意焉。
聖廟配享之制
臣竊見嘉靖中。改題文宣王之號。爲至聖先師孔子之位。顔子以下。俱改去爵名。故廟額不曰大成殿。而曰先聖廟。位版長短。不敢揣摸矣。但孔子則朱漆而書以泥金。長疑一尺餘。廣二寸強。四聖以下則稍短。疑不滿尺。朱漆而書以墨字。從祀以下則又短。下不用趺。方刻木爲臺以安之。俱無櫝。臣伏覩今年五月所下位版尺寸考啓之敎。而想臣所見。則隆慶年間出來太學志所記尺數。定是周尺。而不爲布帛尺也明矣。且太學東西廡中。位各有爐。而我國則兼設一爐。此事恐當議改者也。故臣愚不諒麤拙。而爲圖于後。以冀聖明之照察焉。臣謹按文宣王之所以改稱孔子者。蓋以漢平帝時。王莾騁其奸謀。謬稱爲褒成宣尼公。唐之玄宗始諡爲文宣王。顔子以下。秩稱公侯伯。其封公封王者。於夫子所謂君君臣臣父父子子之道。則一切悖亂。而佯尊聖人。以欺天下。曾謂責家臣之詐。而易大夫之簀者。其肯安饗斯名于一刻乎。況自稱皇帝。而以其所以封其臣子者。强加以王。尤非所以尊聖人。故嘉靖十年。因太學士張孚敬之建言。一改千載之誤。而我朝久猶襲陋。恐當議改者也。蓋尊其人者。將以用其道也。世之人君。徒爲外貌之敬。以示學者。而不能躬行聖賢之言。故古今天下。治少而亂多。如魯定公用孔子爲司寇。夾谷之會。雖喜其却萊夷之功。而女樂蠱心。君難臣不易之言。不思其興邦。則不知其接淅出境。而魯以日削。齊宣王處孟子于賓師。易牛之心。暫信其保民之說。而功利蔽錮。與百姓同樂之言。疑迂於爲王。則授室饗弟子之言。不足以止其出書。而齊亦速亡。歷代之所謂尊聖賢者。誠出於魯定,齊 宣之下。而求治於魯定,齊 宣之上。不已難乎。此徒尊外貌之所以無效。而聖明之所當深戒者也。臣又按東西廡之列。林放,蘧瑷,公伯寮,秦冉,顔何,荀況,戴聖,劉向,何休,賈逵,鄭衆,馬融,盧植,鄭玄,服䖍,范寗,王肅,王弼,杜預,吳澄等不在其中。后蒼,王通,歐陽脩,胡瑗,楊時,陸九淵,薛瑄等皆與于列。蓋從祀之典。所以報聖門之有功。而示來學之趣向也。秦冉,顔何則未有所考矣。林放,蘧瑗。不是升堂之列。而鄭衆,盧植,鄭玄,服䖍,范寗。亦非純儒。故出于從祀。而放之好禮。瑗之寡過。則可爲人師。鄭衆諸人翼經之功。不可不紀。故各祀于其鄕。公伯寮身遊聖人之門。而當欲反害夫子之道。荀况謂性爲惡。而謂思,孟爲亂天下。戴聖身䧟贜吏。劉向喜談神仙。賈逵附會讖緯。馬融貪鄙附勢。爲梁冀草詔。以殺李固。何休解春秋。黜周王魯。王弼宗旨老荘。王肅佐司馬昭繤魏。杜預爲吏不廉。爲將不義。吳澄出處不正。而學又歸禪。是宜見擯于洙泗之列。不可表章乎多士者。而貞觀,元豐,正統之際。朝無眞儒。擇之不精。馬端臨固嘗有議。弘治諸臣亦多請出。而禮部阻格。議竟不行。世宗皇帝以大學士張孚敬之言。斷然改正。一洗前代之謬見。先聖所惡似是而非者。幾乎不能眩後生之耳目。而其在我朝。尙列于從祀。恐當議黜者也。后蒼始註禮書。而大小戴之禮學。賴以傳世。王通學近於正。而格言極有荀,揚道不到處。歐陽脩扶聖道闢異端之功。朱子稱其爲仁義之人。胡瑗修乎己治乎人之學。首洗隋,唐趨利之習。楊時唱道東南。獨承程氏之緖。而下傳羅,李。以及朱子。薛瑄奮乎絶學。篤志力行。迨其道成德立。進仕于朝。則高風大節。砥柱乎奔流。退而講學。則隻句微言。日星乎中天。臣竊觀呂枏所記薛文淸祠堂記。則其人學行之高。槪可想矣。故臣敢具雁于後以進。如或前頒讀書錄之中。未及載印。伏願以此還下于校書。命印而頒之。使一時學者咸得觀感。則以之從祀而人知景仰矣。○先生追註曰。是年▣月▣日▣傳于校書館。印出讀書錄。再竝令附印斯記于篇首。 所以弘治中附以楊時。嘉靖中益以歐陽,胡,薛。而我朝似當講究而從之者也。獨陸九淵之學。不事講問。而專務頓悟。當時朱子固憂其說之爲害。而流傳益逺。人惑愈甚。擧世靡然。胥歸禪學。如王守仁之敢爲橫議。詆謗朱子者。而尙請其從祀。則是必江西之人。習熟見聞。而筮仕者衆。力佑象山。以至上誤朝廷。下誤斯學。此說聞之王之符及太學生 如此之流。臣恐不可效尤而苟從也。王之符云。陽明效象山之禪學而僞者也。當其在家敎授生徒之時。其妻出外面罵曰。此是僞學。爾等效他甚麽。門徒卽日散去。天下皆知其學之僞。而頃有南人爲弟子者。多主朝論。敢進邪論。請以從祀。而竟未施行云云。 臣又見聖廟西北。又有啓聖廟。啓聖公孔氏在北。啓賢顔無繇,孔鯉在東。曾晳,孟孫氏在西。東廡有先儒程珦,蔡元定。西廡止有朱松。蓋學宮。所以明人倫也。顔子,曾子,子思在於廟内。偃然先享。而顔路,曾點,伯魚杳然居下。於常人亦有所不安。況聖賢乎。故熊禾,洪邁曾有別設一廟之議。而弘治中程敏政又嘗建白。至于世宗。乃作別廟。春秋釋奠。同時行事。所謂子雖齊聖。而不先父食者。至是無遺憾矣。臣愚竊念我國文廟之西。有地閒敞。若議立廟而春秋同祀。則庶乎倫全義安。而一國之爲父子者定矣。臣愚又因中朝從享之事而深有所感焉。蓋士習之趨。一視其上好之所在。而殿下頃於館學儒生諸賢從祀之疏。屢陳而不允。近臣經席之啓。亦不頷可。是實沮一世向善之心也。臣竊憫焉。
夫金宏弼肇倡道學。而有繼往開來之業。
趙光祖繼明斯道。而有拯世淑人之功。
李彦廸體道純篤。而有扶顚持危之力。
玆三人者。求之中朝。則許衡,薛瑄之外。鮮有倫比。而求之東方。則
薛聰,崔致遠,安裕之徒。未有及其見到處者。況如
李滉。集東儒之大成。而紹朱子之嫡統。進則引君當道之誠。懇懇乎章疏之間。退則因才設教之意。切切乎講論之際。善者聞言而景慕。惡者望風而自戢。當今之士。稍知尊君愛親。而有禮義廉恥者。皆薫其德而興起者也。但國家旣不能大用於生時。識者已歎其太平之難見。而又不肯崇奬於死後。不惟娼嫉放誕之軰旁觀竊喜。而昔之興起者。咸有沮喪之心。甚有登其門而湼迹于聲利者。不及其門者。將何所頼而爲善乎。嗚呼。從違之際。若不大關。而士習之邪正。已判于此。殿下其可謂重難而不之從乎。夫后蒼諸賢。雖非前代之所嘗祀。而世宗皇帝明知其賢。則從享而不惑。公伯寮諸人。雖是前代之所嘗祀。而世宗皇帝明知其不賢。則黜去而無疑。林放諸人。俱有一長之可取。則各祀于其鄕。而不没其善。其他近世諸賢如章懋,吳與弼,陳獻章,胡居仁,陳眞晟,蔡淸。各有功於斯文。則皇上命祀于其鄕。而不以先朝之所未定爲嫌。遼東城中。亦以王烈,李敏,張升,胡深,賀欽立。祀於書院。無不賜額降書。其所崇奬者。惟在於其人之學尊行高。而可以風勵乎後學者耳。略不拘攣於古今如此。况此
金宏弼四君子所當從祀之議。
朝無異言。士無異論。而尙此遲留者。謂斯人爲不賢乎。臣伏願殿下亟奬
四賢。列于從祀。不徒尊其人。而又必用其言。盡取其所嘗啓沃之設。而日陳于前。以資聖治。如
四賢之親達于冕旒。而又推其餘。使八方士子知所矜式。則庶乎褒崇嚮用。兩盡其義。而侍文王而興者。蔚起乎凡民矣。
師生相接之禮
臣聞國子祭酒。初赴任日及正朝冬至。諸生四拜于庭中。朔望。祭酒率其僚屬。與諸生拜聖 先行四拜禮。祭酒親上焚香。俯伏興。降又四拜。 之後。坐于彞倫堂。則諸生一跪兩揖于月臺上。常時止行一揖。而祭酒於拜於揖。皆坐椅自如。不如成均官員之降立。雖公侯伯及新進士之謁聖者。無不四拜于簷外。而祭酒司業亦坐椅自如。盖尊師道也。惟外邑學生之行正,至禮于守令教授也。亦行四拜。守令答兩拜以揖。而立受兩拜。守令教授。例以朔望率諸生謁聖。而坐于講堂。則廪膳生員及 諸生之中稍觧經義者。名爲廪膳生員。官給月科一石。俾教童蒙。如我國外方之閭學訓導,童蒙學長然。 諸生。以次就于月臺。而一跪兩揖訖。廪膳等進立于椅前。則守令將廪膳所教童蒙之書。讀過半月日課。同學者衆。故可以遍教于一朝。 後廪膳揖出。退于其家。則童蒙跪揖于廪膳。一如廪膳之跪揖于守令。正朝冬至。無不四拜。而廪膳答兩拜以揖。兩拜則立而受之。 常時則生徒齊立一揖。而教授,廪膳坐自如。除休日外。無有不講之朝。是以山海以西。垂髫而挾冊者甚多有之。閭巷之間。誦聲洋洋。雖至貧至賤之人。力辦鋃錢。童蒙之輩。月以一錢銀。行束脩之禮于廪膳。 必欲送子于學。其所以爲教者。雖非三代養正之方。而自少至長。拘束以禮貌。激礪以名教。使一世人人。莫不觀感而思奮。此中朝之所以多士濟濟。而用之於四方。不患不足者也。臣愚竊念我朝師儒之初坐講堂也。諸生止行再拜之禮。而正,至無拜賀之節。朔望無謁聖之官。在泮儒生。但於朔日拜廟。而師生同拜之儀。則寂寥乎無聞。宗親始冠者及新中生進文武科者。雖有謁聖之例。而無拜于大司成之䂓。童蒙幸有日講之徒。而類皆草草無序。㒒㒒過恭。而無排行揖讓之禮。外邑校官之受料者。皆徒費公廪。而不知有聖廟。學長之無料者。又何能責以禮教。是以名爲業儒。而得中科舉者。猶不識禮讓之爲何事。託身校籍。而不讀半行者。能知遜弟之風乎。其所以從幼抵老。蠢然無識。以至傷倫而敗紀者。雖彼師儒訓誨不力之過。而臣之愚意。竊恐上之所以爲教者。猶有所未至也。今若師生相接之禮。朔望謁聖之䂓。必令内外一依 中朝之制。然後乃能有所據依可行。而外學之長。須以費耗之積於無用者。給其月料。責其教督。雖初學千字者。莫不講揖。則庶乎人思讀書。士皆由禮。而有用之才。可得培養矣。
선조(수정실록) 7년 갑술(1574) 11월 1일(신미)
07-11-01[02] 질정관 조헌이 경사에서 돌아와 올린 시무에 절실한 8조의 상소문
질정관(質正官) 조헌(趙憲)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다. 조헌은 중국의 성대한 문물을 익히 살펴보고 그것을 동방에 시행해 볼 생각으로 우리 나라에 돌아와서는, 시무(時務)에 절실한 것 8조와 근본에 관계된 것 16조 등 상소문 두 장을 초하였다. 이는 모두 중국의 제도를 먼저 인용한 다음 우리 나라가 현재 시행하고 있는 제도를 언급하여 그 득실의 이유를 갖추 논하고, 고의(古義)와 절충하여 오늘날 시행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었다. 먼저 8조 소를 올리자, 상이 답하기를,
“천백 리 풍속은 서로 다른 것인데, 만약 풍기(風氣)와 습속이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고 억지로 본받아 행하려고 하면 끝내 소요만 일으킬 뿐 일이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이 때문에 조헌은 16조 소를 올리지 않고 말았다. 그 8조 소에,
“첫째, 성묘(聖廟)의 배향에 관한 일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가정(嘉靖) 때에 공자의 위패에 쓴 문선왕(文宣王)의 칭호를 ‘지성선사공자지위(至聖先師孔子之位)’라고 고쳐 썼으며, 안자(顔子) 이하는 모두 작명(爵名)을 떼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문묘의 액호(額號)도 ‘대성전(大成殿)’이라 하지 않고 ‘선성묘(先聖廟)’라고 하였습니다. 위판(位版)의 길고 짧음은 감히 자세히 헤아려 보지 못하였습니다마는, 공자는 붉은 바탕에 금니(金泥)로 썼는데 길이는 약 1자 남짓하고 폭은 2치 남짓했으며, 사성(四聖) 이하는 조금 짧아 1자가 조금 못되고 붉은 바탕에 먹으로 썼습니다. 종사(從祀) 이하는 더 짧고 부방(趺房)도 쓰지 않았으며 나무를 깎아서 대(臺)를 만들어 안치하여 놓았는데, 모두 독(櫝)이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금년 5월에 내리신 바 위판의 치수를 상고하여 아뢰라는 교지를 보고 생각건대, 신의 소견으로는 융경(隆慶) 연간에 나온 《태학지(太學志)》에 기록된 척수(尺數)는 주척(周尺)이지 포백척(布帛尺)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태학(太學)의 동ㆍ서무(東西廡)에는 위(位)마다 각각 향로가 있었는데 우리 나라는 향로를 하나로 겸설(兼設)하였으나, 이런 일은 마땅히 의논하여 고쳐야 할 것입니다.
신은 살펴보건대 문선왕(文宣王)을 공자로 고쳐 부른 내력은 이렇습니다. 한 평제(漢平帝) 때에 왕망(王莽)이 간계(奸計)를 부리기 위해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고 잘못되게 불렀으며, 당 현종(唐玄宗)이 처음으로 ‘문선왕’이라고 시(諡)를 붙였는데 안자 이하는 차례로 공(公)ㆍ후(侯)ㆍ백(伯)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왕(王)과 공(公)으로 봉한 것은 부자(夫子)의 이른바 ‘군군(君君)ㆍ신신(臣臣)ㆍ부부(父父)ㆍ자자(子子)’의 도에 있어서는 일체가 어긋나는 것으로서 성인을 거짓으로 높여 천하를 속이는 것입니다. 어찌 가신(家臣)을 둔 거짓을 꾸짖고 대부(大夫)가 앉는 자리라고 하여 바꾸도록 하신 분들이 그 이름을 일각인들 마음 편히 누리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자신은 황제라 자칭하고 자기의 신자(臣子)에게나 봉하는 왕의 칭호를 강제로 가하는 것은 더욱 성인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정(嘉靖) 10년에 태학사(太學士) 장부경(張孚敬)의 건의로 인하여 천 년 동안의 과오를 일시에 바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아직까지 그 잘못을 답습하고 있으니, 마땅히 논의하여 고쳐야 할 것입니다.
신은 또 살펴보건대, 동ㆍ서무의 서열(序列)에 임방(林放)ㆍ거원(遽瑗)ㆍ공백요(公佰寮)ㆍ진염(秦冉)ㆍ안하(顔何)ㆍ순황(荀況)ㆍ대성(戴聖)ㆍ유향(劉向)ㆍ하휴(何休)ㆍ가규(賈逵)ㆍ마융(馬融)ㆍ정중(鄭衆)ㆍ노식(盧植)ㆍ정현(鄭玄)ㆍ복건(服虔)ㆍ범영(范寧)ㆍ왕숙(王肅)ㆍ왕필(王弼)ㆍ두예(杜預)ㆍ오징(吳澄) 등은 그 가운데에 있지 않았고, 후창(后蒼)ㆍ왕통(王通)ㆍ구양수(歐陽脩)ㆍ호원(胡瑗)ㆍ양시(楊時)ㆍ육구연(陸九淵)ㆍ설선(薛瑄) 등은 그 열에 들어 있었습니다. 대체로 종사(從祀)의 전례(典禮)는 성문(聖門)에 공이 있는 것을 보답하고 후학(後學)의 추향을 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진염과 안하는 상고할 곳이 없고, 임방과 거원도 승당(升堂)의 서열은 못 되고, 정중ㆍ노식ㆍ정현ㆍ복건ㆍ범영 등도 순유(純儒)가 아니므로 종사에서 내보내었는데, 임방의 예를 좋아함과 거원의 허물이 적은 점은 남의 스승이 될 만하고 정중 등 여러 사람들의 경(經)을 주해(注解)한 공은 기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각기 그 지방에서 향사하고 있습니다.
공백요는 직접 성문(聖門)에 유학하였으나 도리어 부자의 도를 해치려 하였고, 순황은 인성(人性)이 악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사(子思)와 맹자가 천하를 어지럽혔다고 말하였고, 대성은 자신이 장리(贓吏)의 오명을 입었고, 유향은 신선(神仙)을 즐겨 말하였고, 가규는 참위설(讖緯說)을 견강 부회하였고, 마융은 탐비(貪鄙)하여 권세가에 붙어 양기(梁冀)를 위해 조서(詔書)를 초하여 이고(李固)를 죽였고, 하휴는 《춘추》를 주해하면서 주실(周室)을 내치고 노(魯)를 왕으로 했고, 왕필은 노장(老莊)의 사상을 받들었고, 왕숙은 사마소(司馬昭)를 도와 위(魏)를 찬탈하였고, 두예는 관리가 되어서는 청렴하지 않고 장수가 되어서는 의롭지 않았으며, 오징은 출처가 바르지 않은데다 학술 또한 선(禪)으로 기울었으니, 이들은 마땅히 수사(洙泗)의 서열에서 거절당하여 다사(多士)의 모범이 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관(貞觀)ㆍ원풍(元豊)ㆍ정통(正統) 연간에는 조정에 진유(眞儒)가 없어서 정밀하게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마단림(馬端臨)이 사실 일찍이 그것을 논의한 일이 있고 홍치(弘治) 제신(諸臣)들도 축출하기를 청한 자가 많았으나, 예부(禮部)의 저지로 그 논의는 끝내 행하여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종 황제(世宗皇帝)가 태학사 장부경(張孚敬)의 말로 인하여 과감히 개정하여 단번에 전대의 잘못된 견해를 씻어버림으로써 후생의 이목을 혼란하게 하지 않게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그들이 종사의 열에 끼어 있으니, 마땅히 논의하여 축출해야 할 것입니다.
후창(后蒼)은 《예서(禮書)》를 처음으로 주해하여 대ㆍ소대(大小戴)의 예학이 그에 힘입어 후세에 전해졌고, 왕통(王通)은 학술이 도(道)에 가까와 격언(格言)에 순황(荀況)이나 양웅(揚雄)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있고, 구양수(歐陽脩)는 성도(聖道)를 부지하고 이단을 배격한 공이 있어 주자(朱子)가 인의(仁義)로운 사람이라고 말하였고, 호원(胡瑗)은 제 몸을 닦은 뒤에 남을 다스리는 학문으로 맨 먼저 수당(隋唐)의 이(利)를 추구하는 풍조를 씻어버렸고, 양시(楊時)는 동남 지방에서 도를 제창하여 홀로 정씨(程氏)의 가르침을 받아서 나ㆍ이(羅李)에게 전함으로써 주자에게 미치게 하였고, 설선(薛瑄)은 도학이 끊겼을 때 떨치고 일어나 독실한 뜻으로 학문에 주력하였는데,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세워져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니 고풍 대절(高風大節)이 급류에 우뚝한 지주산(砥柱山)과 같았고, 물러나 강학(講學)하니 척구 미언(隻句微言)도 중천에 빛나는 일성(日星)과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홍치 때에 양시를 부묘(附廟)하고 가정(嘉靖) 때에 구양수ㆍ호원ㆍ설선을 추가하였던 것이니, 우리 나라에서도 마땅히 강구하여 이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육구연(陸丘淵)의 학술만은 강문(講問)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돈오(頓悟)를 힘써 그 당시에 주자가 참으로 그 설의 해독을 우려하였는데, 유전되어 시간이 오래되면 될수록 사람들이 더욱 심하게 빠져들어 온 세상이 휩쓸린 나머지 모두 선학(禪學)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감히 어긋난 논의를 주장하고 주자를 비방한 왕수인(王守仁)과 같은 자를 오히려 종사하자고 청하였는데, 이는 필시 강서(江西)의 사람들이 그 학설을 익히 보고 듣다가 조정에 벼슬한 자가 많아서 힘껏 육상산(陸象山)을 지지하여 위로는 조정을 그르치고 아래로는 사학(斯學)을 그르치게 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니, 이와 같은 사례는 그 잘못을 본받아 구차스레 따라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신은 또 보건대, 성묘(聖廟)의 서북쪽에 계성묘(啓聖廟)가 또 있었는데, 계성공(啓聖公) 공씨(孔氏)는 북쪽에 있고, 선현(先賢) 안무요(顔無繇)와 공이(孔鯉)는 동쪽에 있고, 증석(曾晳)과 맹손씨(孟孫氏)는 서쪽에 있었으며, 동무(東廡)에는 선유(先儒) 정향(程珦)과 채원정(蔡元定)이 있고, 서무(西廡)에는 주송(朱松)만 있었습니다. 대체로 학궁(學宮)은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안자ㆍ증자ㆍ자사는 묘(廟) 안에 있으면서 버젓이 먼저 흠향하는데, 안노(顔路)ㆍ증점(曾點)ㆍ백어(伯魚)는 아득히 밑에 있으니, 이는 보통 사람이라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성현의 마음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웅화(熊禾)와 홍매(洪邁)가 일찍이 한 묘를 따로 설치하자는 논의를 하였고, 홍치 때 정민정(程敏政)이 또 건백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명 세종(明世宗) 때에 이르러 비로소 별묘(別廟)를 지어 춘추 석전(春秋釋奠) 때 동시에 행사(行祀)하였으니, 이른바 ‘자식이 비록 성인이라도 아비보다 먼저 먹지 않는다.’는 의리가 이에 이르러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우리 나라도 문묘의 서쪽에 비어 있는 넓은 땅이 있으니, 만약 논의하여 별묘를 세워 춘추에 함께 행사한다면 인륜이 온전해지고 의리가 맞게 되어 한 나라의 부자 관계가 정립될 것입니다.
신은 또 중국 조정의 종향(從享)하는 일로 인하여 깊이 느낀 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사습(士習)의 추향은 오직 윗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좌우되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지난번에 관학 유생들이 제현을 종사하자는 계청을 여러 번 올렸는데도 윤허하지 않으셨고, 근신(近臣)이 경연에서 아뢴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참으로 한 시대의 선을 지향하는 마음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신은 삼가 가슴아프게 생각합니다.
대체로 김굉필(金宏弼)은 처음으로 도학을 제창하여 선성(先聖)을 잇고 후학을 연 업적이 있고, 조광조(趙光祖)는 사도(斯道)를 이어서 밝혀 세상을 건지고 사람을 선량하게 한 공로가 있고, 이언적(李彦迪)은 도(道)를 지니고 순독(純篤)하여 기울고 위태로운 세도를 부지한 공로가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중국에서 찾아본다면 허형(許衡)과 설선(薛瑄) 이외에는 견줄 만한 자가 없고, 우리 나라에서 찾아본다면 설총(薛聰)ㆍ최치원(崔致遠)ㆍ안유(安裕) 같은 이도 그 경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더구나 이황(李滉)은 동유(東儒)를 집대성하고 주자의 적통을 계승하여 조정에 나가서는 임금을 옳은 도리로 인도하는 정성이 소장(疏章)을 올릴 때에 간절히 나타나고, 초야에 물러나서는 후학을 각기 재능에 따라 가르치는 뜻이 강론할 때에 간절히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선한 자는 그 말을 듣고 경모(敬慕)하고 악한 자는 멀리서 그 풍모만 우러러 보아도 스스로 단속하였으니, 오늘날 선비들이 약간이나마 임금을 높이고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며 예의염치가 있게 된 것은 모두 그의 덕에 감화되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가 그 생존시 크게 쓰지 못하고 식자들이 태평 시대를 보기 어려움을 탄식하였는데, 사후(死後)에까지도 숭장(崇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현인을 시기하는 방탄(放誕)한 무리가 주위에서 보고 은근히 기뻐할 뿐만 아니라, 지난날 그 덕에 감화하여 일어났던 자들도 모두 실망하고 심지어는 직접 그 문하에서 배우고서도 성리(聲利)에 자취를 더럽힌 자가 있으니, 그 문하에 가지 않은 자야 장차 무엇을 믿고 선을 행하겠습니까. 아, 제현의 종사를 청하는 소청은 따르고 따르지 않는 일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하지만, 사습(士習)의 사정(邪正)은 이미 그것에서 판가름나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어찌 중난(重難)한 일이라고 하여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후창(后蒼) 등 제현(諸賢)은 전대(前代)에 종사하던 이들이 아닌데도 세종 황제가 어질다는 것을 분명히 알자 종향(從享)하며 의심하지 않았고, 공백요(公伯寮) 등 제인(諸人)은 전대에 일찍이 종사하던 이들이었지만 세종 황제가 어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자 출향(黜享)하는데 의심이 없었으며, 임방(林放) 등 제인이 모두 취할 만한 한 가지 장점이 있자 각각 그 고향에 제사지내게 하여 그 좋은 점이 민몰되지 않게 하였습니다. 기타 근세의 제현으로서 장무(章懋)ㆍ오여필(吳與弼)ㆍ진헌장(陳獻章)ㆍ호거인(胡居仁)ㆍ진진성(陳眞晟)ㆍ채청(蔡淸) 같은 이들이 각기 사문(斯文)에 공이 있자, 황상(皇上)이 명하여 그 고향에서 제사지내게 하고 선조(先朝)에서 정하지 않은 일이라고 하여 혐의하지 않았으며, 요동 성중(遼東城中)에도 관영(管寧)ㆍ왕열(王烈)ㆍ이민(李敏)ㆍ장승(張升)ㆍ호심(胡深)ㆍ하흠(賀欽)을 서원(書院)에 사당을 짓게 하여 사액(賜額)하고 아울러 서책을 다 내려주었습니다. 따라서 숭장(崇奬)하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학문이 이루어지고 행실이 높아서 후학을 일깨우고 격려할 만한가에 달려 있을 뿐, 그와 같이 조금도 시대의 고금(古今)에는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 김굉필 등 네 사람의 군자(君子)는 마땅히 종사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조정에서나 사류가 다 이론이 없는데도 이처럼 시일을 끌고 있으니, 과연 이 사람들이 어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사현(四賢)을 숭장하여 종사(從祀)의 서열에 넣으소서. 그리하여 그 사람을 존숭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 말을 채용하실 것이며, 그들이 일찍이 진달했던 말을 전부 취하여 매일 앞에다 놓고 성치(聖治)에 도움을 받으시기를 그 사현(四賢)이 임금 앞에서 친히 아뢰는 것처럼 하실 것이며, 또 그 나머지도 추장(推奬)하여 팔방의 사자(士子)로 하여금 모범을 삼게 하신다면, 선현을 포숭하고 후학을 권장하는 일이 두 가지가 다 진선 진미하게 되어 문왕(文王)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일어나는 자들이 일반 백성들 속에서 많이 나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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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집(靜菴集) 조광조(趙光祖)생년1482년(성종 13)몰년1519년(중종 14)자효직(孝直)호정암(靜菴)본관한양(漢陽)시호문정(文正)특기사항김굉필(金宏弼)의 문인
靜菴先生文集附錄卷之五 / 年譜 / [靜菴先生年譜]
神宗萬曆元年癸酉
建道峯書院於楊州
卽道峯山寧國寺舊基。先生少時。愛其泉石。往來棲息。立朝之後。亦乘公退。命駕遊焉。至是。牧使南彥經創始之。
二年甲戌
典籍趙憲上疏。請先生及金宏弼,李彥迪,李滉四賢。從祀文廟。疏見附錄
四年丙子
夏。建兩賢祠於煕川。
卽寒暄金先生編配時。先生受學之所也。監司金公繼輝。倡諸生營立。祀以兩先生焉。
九年辛巳
戶曹判書李珥。因筵對。啓請先生及李滉二賢。從祀文廟。啓見附錄
三十三年乙巳
建深谷書院於先生墓下
三十八年庚戌 光海君二年
八月。遣禮官。賜祭家廟。文見附錄 九月。從祀文廟。文見附錄
熹宗天啓元年辛酉
三年癸亥 仁祖大王元年
毅宗崇禎元年戊辰
二十三年庚寅 孝宗大王元年
二十九年丙申
建迷源書院於楊根
先生嘗與金公湜。遊迷源。愛其山水。約與同居。有手植檜焉。至是。多士議建書院。以祀先生及金公。○此外京鄕書院之建。厥數甚繁。如海州之紹賢。羅州之景賢。礪山之竹林。永興之興賢。其最著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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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집(南溪集) 박세채(朴世采)생년1631년(인조 9)몰년1695년(숙종 21)자화숙(和叔)호현석(玄石), 남계(南溪)본관반남(潘南)시호문순(文純)특기사항김상헌(金尙憲)의 문인. 소론(少論)의 영수
南溪先生朴文純公文正集卷第八十四 / 年譜 / 靜菴趙先生年譜
神宗萬曆元年癸酉建道峯書院於楊州。卽道峯山寧國寺舊基。先生少時愛其泉石。往來棲息。立朝之後。亦乘公退命駕遊焉。至是牧使南彥經創始之。
二年甲戌
典籍趙憲上疏請先生及金宏弼,李彥迪,李滉四 賢從祀文廟。疏見附錄
四年丙子
夏建丙賢祠於煕川。卽寒暄先生編配時。先生受學之所也。監司金繼輝倡諸生營立。祀以兩先生。
九年辛巳
戶曹判書李珥因筵對。啓請先生及李滉二賢從祀文廟。啓見附錄
三十三年乙巳
建深谷書院於先生墓下。
三十八年庚戌 光海君二年
八月遣禮官賜祭家廟。文見附錄 九月從祀文廟。 文見附錄
熹宗天啓元年辛酉○三年癸亥 仁祖大王元年
毅宗崇禎元年戊辰○二十三年庚寅 孝宗大王元年
二十九年丙申
建迷源書院於楊根。先生嘗與金公湜遊迷源。愛其山水。約與同居。有手植檜焉。至是多士議建書院。以祀先生及金公。○此外京鄕書院之建。厥數甚繁。如海州之紹賢。羅州之景賢。礪山之竹林。永興之興賢。其最著者也。餘不能悉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