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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함을 극복하라
2007년 10월 3일 / 삼일예배 / 마태복음 19:13-15
무슨 일이든 결과가 나오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조급함이 얼마나 큰 독이 되는지 알면서도 끝내 그걸 버리지 못합니다. 아주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좋으련만 그게 그리 어렵습니다. 조급해 보았자 소용이 없음을 잘 알면서도 조급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천하의 모든 일들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그의 방법대로 되어지는 것을 배우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조급함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그분의 뜻에 순종하려면 자신의 조급함을 이겨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어야 조급함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일들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도 서두르거나 불평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할지라도 감사하면서 주어진 일속에서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나아가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될 것입니다.
기다림이란 씨앗과 같습니다. 씨앗을 쪼개어 있을 지 모를 열매를 꺼내려는 어리석음 그 작은 씨앗 속에 담겨있는 무한함은 그저 가능성이라든가 내재성이라든가 하는 말로는 다 설명될 수 없는 경이로움이고 신비입니다. 씨앗을 사랑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나무와 더불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믿음생활의 최대의 적은 조급함입니다. 조급함은 주님의 성품이 아니요 정욕적이요, 세상적이요, 마귀적입니다. 조급한 자는 게으른 자요, 자기의 방법과 의로 가득한 자요, 넘어져도 일어날 수 없는 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이것이 증거로 나타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믿음은 조급함을 버리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많을수록 순종함으로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 광주에 사는 한 부부가 부산을 다녀오는 길에 남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휴게소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도로사정을 보니 조금만 늦으면 차가 막혀 고생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막히기 전에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에 잠깐 차를 마시고는 한시라도 빨리 집에 들어갈 생각으로 차를 몰고 휴게소를 빠져나왔습니다. 한 30킬로미터 정도 달렸는데 갑자기 초등학생인 딸이 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깜짝 놀라 다시 돌아가려고 하니 유턴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더 달려 인터체인지를 통해 빠져나와 아이를 태우지 못하고 나온 휴게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미 아이는 차에 치어 죽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뒤늦게 나와 보니 타고 온 차가 없어졌습니다. 엄마 아빠도 보이지 않습니다. 당황한 아이는 엄마 아빠를 찾아 고속도로까지 나왔다가 차에 치어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이 사건은 오늘 우리가 얼마나 조급한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를 잘 보여주는 한 단면입니다.
인터넷도 빨라야지 느리면 외면당합니다. 비행기, 기차, 자동차 모든 것이 점점 더 빠른 것이 개발되고 빠른 것이 인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속도지상주의는 무서운 함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보다 더 빨리 성장하고 성공해야만 되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빨리 빨리’를 외치며 달려왔습니다. 밥도 빨리 먹고 더 많이 일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일도 더 빨리 많은 분량을 해 치워야만 경쟁에서 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부실공사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빠른 성공을 추구하다보니 대박 열풍에 휘말려 사기도 잘 당합니다. 차근차근 기초를 다지며 제대로 올라가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게 여겨지고 바보처럼 생각됩니다. 정상적인 비정상적으로 취급되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 조급한 사람들안에는 불평이 가득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늘 조급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가나안 땅에 빨리 들어가야 하는데 자꾸만 장애물들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습니다. 홍해바다가 나타나고, 험한 길이 나타나고, 먹을 양식과 마실 물도 떨어지고, 그런데도 하나님은 빠른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빙빙 돌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과연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늘 불평하고 원망의 말을 쏟아내었던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왕으로 기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고난이 따라다녔습니다. 사울왕의 시기와 질투를 받습니다. 사울을 피해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배신자도 만났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왕위에 오를 별 징후가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참고 인내하며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기도하며 잠잠히 참고 기다렸더니 결국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조급하면 불평하고 화를 잘 내게 됩니다. 작은 일에도 노를 발하곤 합니다. 여유가 조금만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일을 불필요하게 화를 내고 손해를 많이 봅니다. 결국 우리 인격의 미성숙만 드러내고, 손해만 보게 될 뿐입니다. 조급하여 그렇게 불평하고 화를 내다보면 웃음과 기쁨이 사라집니다. 사단은 조급함을 심어 우리의 감정을 메마르게 만들고 황폐한 삶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으면 불평과 원망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조급함의 유혹이 올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잠잠히 참고 기다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화를 내며 불평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느긋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다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소원이 이루지고 기도가 응답될 줄 믿습니다.
마 19:13-15 / 그 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얹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늘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거기에서 떠나셨다.
■ 한 나그네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빈 길마를 멘 소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같이 가는 길이면 타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소에 올라 탄 나그네는 참 잘된 일이라고 흡족해 했습니다. 한동안 가다 보니 기왕이면 걷느니 보다 달리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발뒤꿈치로 소 배때기를 마구 차 달리게 했습니다. 마냥 채찍질을 하다가 미친 듯 뛰어가는 소 길마에서 떨어져 나가 팔 다리 부러진 병신이 되고 맙니다. 이 전통 우화(寓話)는 매사에 맹목적으로 서두르는 우리 한국인의 심성(心性)을 실감나게 풍자하고 있다고 봅니다.
외국의 공항에는 가만히 있으면 운반되는 컨베이어 시설이 돼 있습니다. 그 컨베이어 위에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은 예외없이 코리언이라는 게 상식이 돼 있다고 들었습니다. 빨리 가서 별 볼일도 없는데 무의식중에 서두르고 봅니다. 엘리베이터가 도달하면 문은 저절로 열리게 돼 있습니다. 한데 도달하기가 바쁘게 문을 열리게 하는 DOOR버튼을 누르는 것이 한국 사람과 서양인의 다른 차이라고 지적한 외국인이 있었습니다. 버튼을 누르면 문이 더 빨리 열리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지만 비록 1-2초 빨리 열린다 하더라도 집에 불이 나고 있지 않은 이상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혹시 달음질을 빨리 하고 쇠뿔을 단김에 빼는 것은 좋을지 몰라도 공부도 빨리 하고, 밥도 빨리 먹으라는 나라는 이 세상에서 우리나라뿐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의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이 서양 사람들의 평균 만찬(저녁식사) 시간을 비교해 놓았는데, 스페인과 이탈리아 사람이 3시간 반, 프랑스 사람들이 3시간, 미국 사람들이 2시간 내외라 하였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15분이 상식이고 보면 이들에 비해 10배 내지 20배를 빨리 먹는 편입니다.
교통안전진흥공단이 조사 발표한 바를 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자동차 1만 대 당 교통사고 건수는 1,417건으로 세계 제일이요, 스페인의 20배, 프랑스의 16배, 미국의 11배에 이르고 있는 걸 보면 식사 속도의 대비 배율(對比 倍率)과 너무 흡사함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밥을 빨리 먹게 하는 심성과 차를 빨리 몰게 하는 심성이 동일(同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이렇다 할 목적 없이 괜히 소를 빨리 몰다가 소의 등에서 나뒹굴어 팔 다리를 분질러 놓길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빨리 먹은 콩밥 똥 눌 때 보자 한다"
조급함이 우리 민족의 본성과도 같다고 하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조급하게된 것은 근대화 되면서 형성된 기질이라고 믿습니다. 급속한 사회 변화에서 서두르고 빨리 빨리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사람들을 바쁘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내 말 속에 ‘빨리’라는 단어를 얼마나 자주 사용되는 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냥 해도 될 말은 반드시 ‘빨리’라는 단어를 첨부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조급하게 서두르는 습관은 우리 사회의 불안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빨리 서둘러 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지게 되는 일상에 젖어 있다보면 ‘빨리 빨리’ 병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들고 맙니다.
앞으로의 사회는 더욱 기다릴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 지 모릅니다. 벌써 ‘빛의 속도’라는 말이 익숙하게 사용됩니다. 광속(光速)의 통신을 말합니다. 며칠씩 기다려 무엇을 성취하는 시대가 가고 온라인 시대가 도래한지 벌써 오래입니다. 즉시 주고받는 쌍방향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터넷은 지구를 손바닥만하게 좁혀 놓았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기다릴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광속을 즐기되 조급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간의 관계는 기다림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광속의 시대가 된다하여도 어린아이가 1달 만에 태어나게 된다거나 12개월 만에 성인이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속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믿음은 약속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하나님도 사람을 기다림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사람은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따릅니다. 여러분에게 아브라함과 같은 어두운 영혼의 밤을 주시는 것은 이 기다림의 원리를 배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조급함을 극복하고 기다림의 원리를 체득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성장을 위하여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첫째 구원의 원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갖는 원리에 따라 구원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의 원리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린이에게서 순수함 등과 같은 도덕적 은유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아이에게도 죄악에 뿌리가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비유에서 연약하고 유치함과 성장하는 미래를 보십니다. 어린아이는 연약하고 유치하고 단순하지만 그들이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장차 자라나서 성숙하여진다는 긍정적인 미래의 희망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가 자라나듯이 그렇게 이루어져갑니다. 처음에는 유치하고 보잘 것 없으며 연약하여 양육되고 보호되어야 하지만 우리가 알게 모르게 자라납니다. 마침내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됩니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은 깊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다 자랄 때까지는 기나긴 시간이 걸립니다. 아이가 자랄 때 가지는 부모의 긴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구원은 오래 참음으로 기다리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오래 참음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이 오면 조급함이 생기고 쉬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은 여러분을 오래 참도록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프로그램임을 기억하십시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본토 아비집을 떠나라 했을 때 고향을 떠나 그 수많은 고생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때문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도망쳐온 이집트로 80된 나이에 히브리 백성을 구하겠다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사울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될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기회가 있었으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날을 기다렸기에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조급하여 자신의 힘을 통하여 왕이 되었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십시오. 그들이 수천 년을 유랑민으로 떠돌면서도 민족적 동질성을 잃지 않고 2차 대전 직후에 단일 민족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수천 년을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하루처럼 여기고 기다릴 줄 아는 신앙 때문입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이 오거든 오래 참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2. 성공하기 위하여 실망하지 않는다.
믿음의 사람은 수많은 실패를 겪지만 실망하지 않습니다. 실망이라는 말은 목적이나 의욕을 잃어버린 것을 뜻합니다. 결과는 방황입니다. 좌절은 역시 목적이나 의욕이 꺾인 것을 뜻합니다. 모두 방황하고 다시 일어서는 힘이나 의욕을 갖지 않습니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얼마나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으셨습니까? 그래도 살 수 있는 것은 생명을 포기하지 않은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무엇을 말씀하시려 하셨을까요? 매우 다양한 주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 30-100배의 결실을 맺기 위하여 열심히 씨를 뿌리자라든가, 옥토의 마음을 가져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여러 상황으로 나열한 부정적 환경을 주목합니다. 씨를 뿌린 것은 옥토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시 엉겅퀴가 있는 곳에도 뿌려졌고, 돌짝밭에도 뿌려졌으며 길가에도 뿌려졌습니다. 이 악조건의 상황에서 씨를 뿌렸지만 열매를 얻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이는 희망 없음이요 실패와 좌절입니다.
예수 믿어 100% 성공하는 법 없습니다. 때론 돌짝밭도 만납니다. 가시엉겅퀴도 만납니다. 길가에 버려진 체험도 합니다.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하면 안 됩니다. 포기해야 할 것은 자신의 능력과 자기 의지만 믿으려는 불신앙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계속 씨를 뿌려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옥토에서가 아니라 척박한 황무지에서입니다. 우리의 일에 실패할 확률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러나 옥토를 기다리는 믿음이 있으면 성공합니다.
여러분에게 어둔 밤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은 실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따라가는 법을 배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기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너무 쉽게 교회를 실망하지 마십시오. 너무 쉽게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때를 기다리십시오. 뿌린 씨는 싹을 내고 열매를 맺게 할 것입니다.
3. 조급함을 극복하려면 불신앙에 사로잡히지 말라
조급한 마음은 불신앙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조급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요셉도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어떤 일을 만나도 무슨 상황에 처해도 초조해하지 않았습니다. 여유를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어디에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상황에 놓여도 하나님은 반드시 꿈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조급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늘 조급합니다. 조급함을 따라가면 마귀에게 끌려갑니다. 하나님은 차근차근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에 종종 워싱턴D. C. 의 뉴욕 에비뉴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그 교회에 조셉이라는 목사님이 있었는데 어떤 기회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펴놓은 성경을 옆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낡은 성경에 여러 번 손으로 짚어서 특별히 손자국이 많이 나고 눈물자국이 나있는 성경 한 페이지를 눈여겨 볼 수 있었답니다. 그것은 시 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수없이 읽고 명상했다는 흔적을 링컨의 성경에서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실 때까지, 또 나는 은혜 베푸심을 받을 수 있는 그 수준에까지 도달하도록 기다리겠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의 뜻을 알고 충분히 이해하고 나면 나의 기다림은 아주 쉽게 됩니다. 저 앞에 있는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그의 그 거룩하신 계획 속에 오늘의 내가 있고, 나의 사건이 있다는 믿음으로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인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목적과 계획에 따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평안합니다. 조급하여 안달을 부리거나 방황하지 않습니다. 어두운 영혼의 밤이 오면 침착하게 주님의 은총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기다리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소망은 기다리는 사람의 것입니다.
▶ 거북이가 장수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이랍니다. 성급한 짐승일수록 수명이 짧다고 합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애굽의 궁궐에서 고급교육을 받고 하나님께 쓰임받고자 동족에게 나아갔지만 성급함으로 실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40년 광야훈련을 통해서 온유한 사람으로 다듬어졌고 히브리민족을 출애굽시키는 큰 과업을 성공적으로 감당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조급함을 다루시려고 인내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차근차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성실하게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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