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정철염 가타리나(1814〜1846)
o 김대건 신부 댁 복사
o 1814년 경기도 수원의 천민 교우 집안에서 출생
o 1846년 우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
정철염(鄭鐵銳) 가타리나는 일명 ‘덕 아 라고도 불리었는데 , 수원의 가 난하고 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경기도 영평(永平, 현 포천시 영중 면)에 사는 양반 김 씨의 종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천주 교리를 배우기 시작한 시기는 만 열일곱이 되던 해로,131》그녀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 람은 천주교 신자였던 주인 김 씨의 모친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32》
본래 천성이 온순하고 순박한 데다가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가타리 나였지만, 종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제약을 받아야 했을 뿐 만 아니라 시련까지 겪어야만 하였다. 특히 주인 김 씨는 전통에 얽매어 있던 비신자로, 그녀에게도 자주 미신 행위에 참석할 것을 강요하곤 하 였다. 특히 어느 해 동짓날에는 그녀가 제사 참여를 거부하자, 그녀의 두 팔을 등 뒤로 묶고, 등과 팔 사이에 굵은 몽둥이를 끼워 거기에 맷돌 을 달아놓은 뒤 예식이 끝날 때까지 장작더미에 앉아 있도록 강요하였 다. 또 예식을 끝내고서는 그녀가 제사에 참여한다고 약속할 때까지 그 치지 않고 매질을 하도록 했으며,그녀가 기절한 뒤에야 이를 멈추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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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일성록』헌종 12년(1846), 윤5월 26일.
132)나중에 가타리나를 서울로 피신시켜 준 사람이 주인 김 씨의 모친이었다 (『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81,김 프란치스코 증언).
133)『순교자 약전』,24쪽. 가타리나를 괴롭히던 주인이 과부였다는 증언도 있 다(『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9, 김 가타리나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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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가타리나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주인 김 씨는 자주 그녀에게 매질을 하였고,그럴 때마다 그녀의 부모는 피투성이가 된 딸을 데려와 간호하는 일밖에는 달리 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주인 김 씨는 그녀를 첩으로 삼으려는 욕심까지 드러내곤 하였다. 그때 천주교 신자였던 주인 김 씨의 모친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는 가타리나를 집안에서 빼내 서울로 피신시켜 주었다.134 135>
서울로 올라온 가타리나는 주동(鑄洞,현 중구 주자동)에 있는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회장의 집에서 살다가 화개동(현 종로구 화동) 김임이 (데레사)의 집으로 가서 생활하였고,김임이 • 이간난(아가타) 등과 어울 려 교리를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44년 겨울(음력) 김대건(안 드레아) 부제가 일시 귀국하여 돌우물골(현 중구 소공동의 석정동)에 거처를 정하자, 김임이를 따라 그 집으로 들어가 함께 생활하면서 김 신부 가 체포되기 전까지 봉사하였다.
당시 가타리나는 이전 주인에게서 맞았던 매질의 후유증으로 몸이 불 편한 상태였으므로 어렵고 힘든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열심히 기도 와 묵상을 하는 등 수계생활만은 아주 독실하였다. 또 이 무렵에 그녀는 오랫동안 홀아비로 지내온 현석문(가롤로) 회장과 깊은 관계에 있었다 고 한다.135》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뒤 , 현석문 회장은 돌우물골 집을 지키 고 있던 가타리나와 김임이를 새로 매입한 사포서동(현 종로구 수송동) 의 김 조 이 집 으 로 피 신 시 켰 다 . 그 러나 그들의 종적을 캐던 포교들이 그 곳까지 들이닥쳐 모두를 체포하였으니, 그때가 1846년 7월 15일(윤5월22일)이었다.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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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김 프란치스코의 증언. 가타리나가 제사와 결혼을 강요하는 주인과 부모 몰래 서울로 도망한 것으로 나오는 기록도 있다(『순교자 약전』, 25쪽) .
135)『일성록』헌종 12년 윤5월 26일 :『기해 • 병오 재판록』,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 및 김 가타리나의 증언 :『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59, 한 바울라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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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리나와 동료들은 우포도청137)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가타리나는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주뢰와 곤장 등 갖은 혹 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약해지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신앙을 굳건히 지켰으며, 옥에 갇혀서는 인내와 애덕과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조정의 명에 따라 동료들과 함께 포도청 에서 교수 형에 처해졌으니, 그때가 1846년 9월 20일(음력 8월 1일)로, 그녀의 나 이 32세였다.138>
순교 후 포도청에서는 가타리나와 동료들의 시신을 시구문 즉 광희문 밖에 버렸다. 이에 몇몇 교우들이 소식을 듣고는 그곳으로 가서 가타리 나의 시신과 김임이의 시신을 찾아 하나의 광중에 묻었다고 한다.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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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일성록』헌종 12년 5월 22 • 23일 :『기해 • 병오 재판록』, 김 프란치스 코의 증언 및 한 바울라의 증언. 가타리나와 동료들이 체포된 날짜를 음력 윤5월 16일(양력 7월 9일)로 증언한 기록도 있다(『기해 • 병오 재판록』 회차 12, 이 이사벨라의 증언).
137)『일성록』헌종 12년 8월 1일 :『기해 • 병오 재판록』, 김 프란치스코의 증 언 . 반 면 에 가 타 리 나 와 동 료 들 이 좌 포 도 청 에 갇 혔 다 고 증 언 한 기록도 있 다(『기해 • 병오 재판록』, 김 가타리나의 증언).
138)『일성록』헌종 12년 윤5월 26일. 가타리나의 나이를 만 29세로 기록한 경우도 있다(『순교자 약전』, 25쪽 :〈페레을 주교의 보고서〉, 927쪽).
139) 『일성록』헌종 12년 7월 29일, 8월 1일 :『기해 • 병오 재판록』, 김 가타 리나의 증언 및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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