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원운동과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용어 이해 환원운동과 그리스도의 교회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환원운동’의 역사와 의미와 특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환원운동은 여러 선구자들이 각기 다른 지역에서 시작했고, 처음부터 중앙집권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통일되거나 일관된 명칭이 없었다. ‘환원’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반이며, 이는 알렉산더 캠벨이 발행한 ‘크리스천 뱁티스트’에 연속 기고한 ‘옛 제도의 환원’이란 표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주제는 신약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교회의 제도(예배, 조직, 예식)는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진리이기에 그 간의 교회 역사를 통하여 변질되고 왜곡된 것들을 바로잡아 성경의 가르침과 명령에 따른 교회의 원형을 회복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환원운동’ 대신 ‘스톤-캠벨 운동’이란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는 ‘환원운동’의 범위와 그로 인해 파생된 다양한 흐름을 대표적인 두 인물의 영향력 속에 결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환원운동’이란 용어는 그 역사적 정체성을 가리키는 탐구의 영역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 교회’ 사이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신약교회의 회복보다는 통합과 일치를 더 강조하는 이들은 ‘환원’이란 용어를 부담스러워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교회(제자들)’는 ‘환원운동’이란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조금 더 포괄적인 용어인 ‘운동들,’ 더 나아가, ‘스톤-캠벨 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환원운동의 정신 그러면, 환원운동을 특징지을 수 있는 핵심적인 주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교회일치의 당위성과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기에, 교회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나뉠 수 없는 것처럼 교회의 분열은 불가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성경 안에서 일치의 근거를 찾아야 하며, 신조는 의견에 불과하다. 교단의 조직, 신조나 교리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교회의 분열을 당연시하고 있고, 가시적 교회의 일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환원운동의 선구자들은 인위적 연합운동을 통해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한계가 있는, 교회일치의 방법을 신약교회 회복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제시했다. 그들은 교파적 명칭을 포기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수용할 수 있는 성경적인 명칭 즉, ‘그리스도의 교회’와 같은 보편적인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구자들은 그러한 정신을 공유하기 위하여 여러 슬로건이 사용하였는데,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우리도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도 침묵한다,” “지상에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의도적으로, 구조적으로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고, 유일한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본질에는 일치를, 의견에는 자유를, 모든 일은 사랑으로,” “성경적인 방법으로 성경이 제시하는 일을 하고, 성경이 제시하는 명칭을 사용하라” 등이 있다.
환원운동과 교회일치 성경적인 교회의 회복에 대한 초기의 시도는 중세 시대 말기, 가톨릭교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과 그 추종자들은 교회일치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못했고, 그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교회분열의 근거인 신조(교리)와 교파주의를 탄생시켰다.
반면, 환원운동의 선구자들은 교회일치의 중요성과 당위성 및 그 방법을 강력하고 분명하게 제시했다. 초기 환원운동의 문서들인, 발톤 스톤의 ‘스프링필드장로회 최후 유언과 증언’ (1804)과 토머스 캠벨의 ‘워싱턴그리스도인협회의 선언과 제언’ (1809)은 동일하게 교회의 일치를 호소하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 환원운동사에 있어서 스톤을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캠벨을 추종하는 제자들의 연합 (1832)은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환원운동의 확장과 갈등 하나가 된 환원운동은 1832년부터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1832년에는 22,000명이던 교인 수가 1906년에는 1,142,359명이 되었다. 환원운동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성장했던 것은 스톤과 캠벨의 영향력 아래에, ‘크리스천 메신저’, ‘밀레니얼 하빈저’와 같은 저널을 통하여 환원 정신을 확산하고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66년 캠벨이 사망한 후에도 여러 저널과 편집인들은 환원운동의 교회들의 일치와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70년에서 1900년 사이에 가장 영향력 있는 편집인은 이삭 에레트와 데이비드 립스콤이었다. 이들은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허용하지 않은 가르침이나 요소들을 거부함으로써 교회일치를 지키고자 했다. 그런데 이러한 환원운동의 경로에서 이탈하는 이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때 알렉산더 캠벨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존 토마스는 침례와 부활, 병역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하여 캠벨과 결별했다. 벤저민 윌슨도 1863년 종말론에 대한 견해 차이로 제자들을 떠났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1921년 ‘하나님의 교회’를 세웠다. 1849년에는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전국대회가 열렸는데, 캠벨은 이러한 행사로 인하여 환원운동에 분열이 나타날 것을 우려했다. 이어서 ‘해외사역자협회’와 ‘그리스도인 여성전도협회’ 등의 조직이 속속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조직구성은 환원운동 내 모든 교회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 아니었기에 또 다른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전도의 필요성에 대한 이견은 없었지만, 많은 교회는 이러한 조직이 결국 지역교회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훼손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남북전쟁을 겪으면서 서로를 향한 적대감이 증폭되었다. 전국적인 조직을 강화하고 그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는 이들과 지역교회의 독립성을 지키려고 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도 점점 더 커졌다.
환원운동의 분열을 야기한 두 번째 원인은 예배에서의 악기 사용 여부였다. 1852년 켄터키주 미드웨이에 있는 한 교회에서 한 교인이 토요일 저녁, 찬송연습 때에 사용하려고 집에서 사용하던 멜로디언을 가져왔는데, 의도와는 달리 주일 예배시간에도 반주용으로 사용하게 된다. 장로 중 하나가 악기 사용을 반대했지만, 일부 교인들은 멜로디언 사용을 옹호하기 시작했고, 교회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남북전쟁 이후 도시에 있는 부유한 교회들을 중심으로 악기 사용이 급증했고, 결국 전국적으로 많은 교회가 악기 도입으로 인하여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독립 환원운동 내에서 악기 사용과 선교 활동에 대한 견해 차이는 가장 눈에 띄는 분열의 원인이었지만 성경해석에 대한 접근방식의 차이라고 하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경우, 신약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관행은 허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19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교회의 회복(환원)보다 교회의 연합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교회의 연합을 강조하는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리스도인 교회’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했다. 교회의 환원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명칭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1906년 미국 종교인구조사에서는 이미 환원운동 내의 교회들이 더 이상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 인구조사국은 ‘가스펠 어드보게이트(복음의 옹호자)’의 편집인이었던 데이비드 립스콤에게 확인한 결과를 기초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별개의 그룹으로 통계를 산출했다. 1906년 시행한 미국 종교 센서스에 의하면, 당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8,293개의 교회와 982,701명의 교인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2,649개의 교회와 159,658명의 교인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독특성 ‘그리스도의 제자들’ 교회는 주로 도시와 미국 북부지역에 위치해 있는 반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로 지방과 남부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제자들은 대학 교육을 받은 성직자를 선호했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전문적인 성직자 안수와 신학교육을 거부했다. 제자들은 크고 화려한 교회 건물을 짓는 경향이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단순하고 검소한 형태의 건물을 선호했으며 화려하고 비싼 옷을 입는 것도 비판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연합조직이나 교단조직이 없었다. 지역교회들은 느슨한 형제 관계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고, 의도적으로 지역교회의 상위기관이나 중앙본부, 협회와 같은 조직구조를 만들지 않았다. 따라서 협력 사역이 필요할 때에는 최대한 지역교회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진행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상위기관이나 본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관성과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약교회의 회복이라고 하는 공동의 목표를 진지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공식적인 결의나 규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건물에는 십자가가 없다. 건물의 성역화를 경계하여 각 교회가 공감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개별적인 조사에 의하면 20세기를 관통하면서 비교적 안정된 수적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1926년에는 433,714명, 1936년에는 558,000명, 1946년에는 682,000명, 1965년에는 835,000명, 1994년에는 1,250,000명으로 신도 수를 추산하였으며, 현재는 13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환원운동과 그리스도의 교회 사이에는 긴밀한 역사적, 신학적 연속성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는 환원운동이라는 역사적 전통과 단절하고,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당위성이 존재한다. 만일 오늘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19세기 미국에서 시작된 환원운동의 결과라고 단순히 인정하고, 그 전통 안에 갇혀버린다면, 그것은 분열과 교권의 시대에 신약교회의 원형을 회복하고자 했던 환원운동의 생명력을 우리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실제로,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19세기 초에 시작된 새로운 형태의 교회로 간주하지 않는다. 환원운동가들의 정신과 선구적인 활동을 존중하지만, 그것을 신격화하고 그 유산에 갇힌다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역사의 일부를 장식할 수 있을지언정 그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비교적 풍부한 역사적 경험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와는 분명 그 상황과 여건이 다르다. 굳이 200여 년 환원운동의 역사라는 거울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습을 투영해본다면 우리는 아직도 세속주의와 교파주의가 넘실거리는 바다 위에 위태롭게 떠 있는 작은 조각배와 같다.
미국 전체 인구와 교인 수와 비교하여 환원운동과 관련된 이들이 수천 명도 되지 않았던 1800년대 초와 같은 현재 한국의 상황, 다양한 믿음과 의견이 혼재하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도 1832년 1월 1일의 렉싱턴 연합집회와 같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우리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스도인 교회,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정신적 후예들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교회의 일치를 진리 안에서 지켜낼 수 있을까? 우리는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역사는 성공과 실패의 예를 보여주면서 거울로 삼으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반복하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갇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