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2:16~17, 3:1~7
한 번의 쉼 없이 달려온 한해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얇은 유리 길을 걸어가는 그런 한해의 시간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루하루 모든 것이 저에게는 위기였고, 모든 것이 처음 겪는 아픔과 괴로움이었고, 처음 경험하는 불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함 속에 여호와가 내게 은총을 베푸시고, 돕고 위로하심으로 점점 강권하게 하여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지나온 모든 시간을 뒤돌아보면서 그저 하나님의 사랑의 감사하고, 은총의 감사하고, 돌보심과 위로해 주심에 감사하고, 주신 것에 감사하고, 안주신 것에 감사드렸습니다. 또 저의 기도보다 우리 어머님의 기도가 더 센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신지 이천만원 안주셔서 엄청 서운하고 힘들었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니 감사밖에 없더라고요. 이것이 올 한해를 사역하면서 하나님께 성탄절 이후로 기도한 내용과 마음입니다.
올해 하나님께서 제게 10월부터 이 말씀을 주시면서 이렇게 기도하라 하신 세 가지 중 한 가지 말씀을 함께 나누고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다윗의 이 기도의 간구에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저에게도, 주향기교회 모든 교우들에게도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불멸의 이순신의 영화를 참 여러 번 봤습니다. 어머님께서 보시면서 아이고 나뿐 일본 놈들 하시면서 우시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이 영화를 자주 보는 이유는 현실에 닥쳐있는 문제를 보는 작은 차이의 대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그 차이가 지금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게 만들었듯이, 점점 불가능하게만 보여 지는 시대적 흐름에서 주 향기의 가치가 어떻게 하면 더욱 찐해질 수 있을까? 거기서 찾은 것은 우직하게 한길을 흔들림 없이 한발 한발 내딛는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을 배웁니다.
신앙의 근본을 인권으로, 배려와 변화라는 것으로 포장하여 흔들고, 융합시켜 혼탁과 어지러움을 조장하는 삭군 목사들과 삭군 성도가 많은 이 시대의 흐름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완성하고, 참여하기 위해서 어떤 작은 것을 지키고, 내어주지 말아야 할까요? 오직 예수입니다. 초대교회는 이것을 내어주지 않기 위해 수많은 신앙인들이 목숨을 잃어가면서까지 지켜냈습니다. 시대가 밖이었다고 변해야 한다고요. 그럴 듯한 말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경배드림과 예배는 타협할 것도 아니고, 변해야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같이 끝까지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오직 예수, 오직 천국 이어야합니다.
그런데 그때 선진들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삶을 살까? 돈을 더 벌 수 있을까? 잘 될 수 있을까? 힘을 가질 수 있을까에 집중하지 않습니까? 나의 에덴동산을 만들기 위해서 혈안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에덴동산은 같은 생활은 오직 예수 일 때 하나님께서 완성해주시고, 이룩해 주시고, 허락하심으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열심에 오직 예수의 옷을 입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희생에 오직예수를 믿는 믿음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도전에 오직 예수님처럼 기도를 채우시기 바랍니다. 이런 작은 차이가 여러분이 그토록 소망하는 것이 현실이 되게 하여 주시거든요. 오직 예수는 하나님이 이루시게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완벽한 것입니다.
작은 차이가 세상을 바꾸듯, 작은 차이가 하나님이 아버지로 임하시느냐, 하나님으로 임하여 심판을 받느냐가 결정되죠. 그러므로 항상 깨어서 이 작은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도들이 되길바랍니다.
에덴동산은 천지 창조에서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인 동시에, 사람에게 가장 완벽한 “사랑의 보금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를 배치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생활 중심에도 언제나 생명나무이신 예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계약으로 볼 수 있는 선악과나무가 있습니다. 우리들 생활에 작은 차이가 에덴을 확장하느냐, 에덴이 내게서 물러가느냐가 결정되기에 항상 우리들의 결론은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에덴은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제외하곤 모든 것을 임의로(원하는 대로) 먹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기본적인 계획은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왕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면 하나님의 완벽한 그 창조의 축복이 내게 넘치게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것은 오늘 본물을 살펴보면 아주 미세한 작은 차이의 마음에서 시작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와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의 작은 차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명령 <에덴동산에서 지켜야하는 생활의 규칙>
2: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3장에 뱀의 질문에 하와의 대답은 만지지도 말라를(추가했고), 죽을까 하노라(작은 변형을 시켰죠)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라는 뱀의 유혹의 말 후에 보게 되는 선악과나무의 열매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것은 하와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예수를 영접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타오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 눈에 들어온 이유는 “하와가 허락했기 때문”이죠. 여기서 아주 굉장한 것을 깨달아야하는데요. 죄는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절대 우리 마음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사람은 죄의 종이 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세상에 예수님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소유하는 하나님의 자녀, 즉 초기 아담의 때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여전히 작은 변화쯤이야 문제되지 않아 라고 말합니다. 예배 한 번쯤이야, 한 잔의 술 쯤이야(이건 방탕(노아)한 것이라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욕(말하는 것), 상스러운 이야기, 음담패설 등등 이것쯤이야. 점보는 것쯤이야! 재미로 하는 건데. = 타로, 점, 사주팔자, 손 없는 날(화가 없는 날), 쯤이야 하는 등등의 것들,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의 생활에서 벗어나는 모든 쯤이야 이 작은 차이가 여러분에게 주어진 에덴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살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에덴이 파괴됨을 잊은 채 그 재미를 쫓아가는 자의 마지막은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시는 예수님을 접하게 됨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에덴에서 사느냐, 파괴된 곳에서 사느냐는 아주 작은 차이에서 결론이 나거든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저는 그것을 한국에 복음을 가지고 오셔서 사역을 하시면서 기도하셨던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기도문에서 그 작은 변화를 전하고 싶습니다.
“‘걸을 수만 있다면 나는 더 큰 복을 바라지 않겠습니다’라는 기도를 지금 누군가는 하고 있습니다.
또 ‘설 수만 있다면 나는 더 큰 복을 바라지 않겠습니다’라는 기도를 지금 누군가는 하고 있습니다.
또 ‘들을 수만 있다면 나는 더 큰 복을 바라지 않겠습니다’라는 기도를 지금 누군가는 하고 있습니다.
또 ‘말할 수만 있다면 나는 더 큰 복을 바라지 않겠습니다’라는 기도를 지금 누군가는 하고 있습니다.
또 ‘볼 수만 있다면 나는 더 큰 복을 바라지 않겠습니다’라는 기도를 지금 누군가는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살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라는 기도를 지금 누군가는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 놀랍게도 그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고 있는 소원들을 저는 지금 다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고 있는 기적들도 지금 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자가 아니어도,
빼어난 외모가 아니어도,
지혜롭지 못해도,
오늘의 제 삶에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고,
순간순간마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깨달으며 살겠습니다.”
하나님을 설레게 하는 기도문 아닌가요. 이런 생각의 작은 변화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우리들의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눈을 두는 작은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좀 더 가까이 하는 작은 변화가 우리 모두를 이끌어가길 소원합니다.
2024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나면 우리들은 신년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이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시겠지만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허락하여 주지 않으시면, 함께 예배드리는 우리들은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한해 마지막 예배를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2025년도에는 이런 작은 변화가 예수께 쏠림이 되는 주향기교회 교우들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없는 것을 짜증내지 말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안 된 것을 불평하지 말고, 된 일들에 감사하며, 잃은 것을 원망하지 말고, 남은 것에 감사합시다.
물질적인 것만 감사하지 말고, 영적인 축복을 헤아려 감사하며, 일시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감사합시다.
행복이 넘칠 때도 오직 예수, 슬픔이 넘칠 때도 오직 예수, 근심이 넘쳐 괴로움이 중첩될 때도 오직 예수, 내가 잘 나거나, 못나도 내게는 언제나 오직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미래는 이렇게 변할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항상, 언제나 내 안에 오직 예수가 풍성해지기 위해서 골로새서 4장 2절의 말씀처럼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 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 실천하는 작은 변화가 저와 여러분을 깨워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의 장중에 살아가게 하는 오직 예수 안에 거하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