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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51)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남강 수계) ③ 진주 (2)
2020년 11월 06일 (월요일) [독보(獨步)]▶ 백파 출행
*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 서남쪽에서 ‘남강’ 합류(남덕유산, 뱀사골 발원 / 경호강-진양호 경유)
진 주(晉州)
촉석루삼장사기실비(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
삼장사(三壯士)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軍)·관(官)·민(民)은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원이 전사했다. 제2차 진주성전투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내어놓고 싸우다 장렬하게 죽었다. 왜군은 잔인했다. 그들은 진주성을 점령하고 나서도 조선의 의기(義氣)에 주눅이 들어 당초 예정한 호남 진출을 하지 못했다. 진주성 내 촉석루로 가는 길목에 촉석루 중 삼장사 기실비(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라고 쓰인 비석이 서 있다. 이 비문은 중재 김황이 지은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를 지키던 삼장사(三壯士)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촉석삼장사기실비(矗石三壯士記實碑) 비문(碑文)
「선조 임진 오월에 문충공 김성일(金誠一)은 영남 초유사로 진양성에 다달아 충의공 대소헌 조종도와 정의공 송암 이노와 더불어 촉석루에 오르다.
슬퍼라. 때는 왜적이 짓밟은 강토에 선지피가 낭자하니 벼슬아치는 달아나고 백성은 흩어지다. 성안은 비어 괴괴하고 강물만 예대로 도도히 흐르는데 멀리 조국의 산하를 바라보니 오직 슬프고 분함에 마음 저려 조공과 이공은 초유사 김 공의 손을 잡고 삶이 차라리 욕되도다 강물에 몸을 던져 한을 씻자 하였으나 학봉은 짐짓 잠시의 괴롬을 잊을 뿐 한은 천추에 씻지 못하리니 오직 한 번뿐인 장부의 죽음을 어이 허술히 하리.
여기 푸른 물굽이 상기 뜻있어 흐르거늘 남은 목숨은 더욱 원수 앞에 질기리니. 이 유서 있는 터전을 지켜 나라에 갚으리라. 분연히 맹서하여 술 한잔 높이 들고 시(詩) 한 수, 「矗石樓一絶」(촉석루 일절)을 읊었다.
矗石樓中三壯士 촉석루상삼장사 촉석루 마루 위에 앉은 세 삼장사,
一杯笑指長江水 일배소지장강수 한 잔 술 비장한 웃음으로 남강물에 맹세하네.
長江之水流滔滔 장강지수유도도 남강물 쉬지 않고 도도히 흘러가듯,
波不渴兮魂不死 파줄갈혜혼불사 저 강물이 마르지 않은 한 우리의 넋도 죽지 않으리」
* 이 시(詩)는 뒤에 순찰사로 부임한 오공숙이 현판에 새겨 높이 달으니 이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어 후인들이 일컬어 ‘촉석루 삼장사’라 하였다. 세 분의 자세한 내력은 각기 그 문집과 사승에 남았으니 여기 다만 이 한 가지 사실만을 돌에 옮겨 촉석루 곁에 세우고 지나는 나그네로 하여금 발을 멈추게 하니 이는 지금을 거슬러 삼백예순아홉 해인 임진년의 일이니라. 최재호 새기고 허민 씀.
임진왜란 중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김성일(金誠一, 1538년 ~ 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의성이요,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이다. 시호는 문충공.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주리론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다. 1590년 일본에 통신사 부사로 갔다와서 일본이 침략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여 임진왜란 발발 이후 큰 비판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초유사(招諭使)로에 임명되어 경상우도관찰사 겸 순찰사를 역임하면서 관군과 의병군을 조직적으로 도모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특히 의령의 의병장 곽재우, 고령의 의병장 김면 등과 연대하여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1593년 제2차 전투 중 진주성에서 병사하였다.
[전란 초기] — 김성일은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도 일대가 일본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사태 수습을 목적으로 다시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었다. 퇴계 이황의 학문적 적통을 이어받은 수제자로서 왕실의 권력이나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백성을 위한 직언을 하기로 유명하여 경상도의 흩어진 민심을 모으기에는 가장 적합하다는 류성룡 등의 천거에 의해 선조의 사형 명령이 철회되고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된 것이다.
이후 즉시 경상도로 내려가 격문(檄文)을 지어 흩어진 백성을 불러 모으는 한편, 이미 어지러워진 군율을 바로 세우는 데에 몰두한다.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의령의 곽재우(郭再祐), 고령의 김면(金沔), 합천의 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들을 의병장으로 삼아 서로 협동하게 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의 행정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각지를 순행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등 격문을 뿌리고 군량으로 쓸 양곡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경상감사 김수(金睟)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고 조정에서 곽재우를 처벌하려는 기색이 있자, 양자를 화해시켜 이를 원만히 수습하기도 하였다.
[진주성 전투와 사망] — 김성일은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김시민 장군은 당시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서, 진주 목사와 산에 숨어 있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의 명으로 목사직을 대리하여 진주성을 지키게 되었다.
김시민은 당시 곡창지대였던 호남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왜군이 반드시 경상도에서 호남으로 넘어가기 위해 진주성을 침략할 것임을 내다보고 진주성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한편 관군과 의병이 함께 진주성을 지키도록 해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1차 진주성 전투)을 진두지휘했다. 이후 학봉 김성일은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병사했다. 병사하는 순간까지도 나라의 운명과 붕당의 폐단으로 인해 왜란에 대비를 못한 것과 거기에 자신이 상당 부분 기여한 것에 대한 후회를 거듭하였다고 한다.
사후, 김성일은 1604년(선조 34) 선무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되었다. 그에 따라 1592년 이조참판 겸 동지에 추증되었던 아버지 김진은 다시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의금부지사에 가증되었다. 1606년(선조 38)에는 학봉 본인에게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에 추증되었다.
1607년(선조 39)에는 안동의 임하현에 그를 모신 임천향사가 세워졌다. 임천향사는 1618년(광해군 10) 사액을 받고 임천서원(臨川書院)으로 승격되었으며, 그를 모신 사당은 존현사(尊賢祠)라는 현판을 받았다. 1676년(숙종 2)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에 가증되고, 1679년(숙종 5) 문충(文忠)의 증시가 추서되었다. 1619년(광해군 11) 묘비석이 세워졌으며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찬하였다. 1664년(현종 5)에는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비문을 지었다.
안동의 학봉종택(鶴峰宗宅)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는 ‘학봉종택(鶴峰宗宅)’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특히 학봉 문중에서는 학봉이 남긴 "3년 동안 금부도사가 찾아오지 않으면 선비 집안이 아니다."라는 말을 가훈으로 여겨 왕에게 직언을 하는 문중으로 영남 유림의 중심 문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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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論介)
흔히 논개(論介)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장을 끌어안고 함께 진주 남강에 투신하여 전공을 세운 ‘의로운 기녀’[義妓]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 그 직후 바로 기록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출신과 삶, 그녀가 죽인 왜장의 이름 등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논개의 순국 사실은 임난 직후에는 민간에서만 전해지다가 1620년경에 가서야 마침내 문헌으로 기록되었다. 그녀에 대해 처음으로 기록한 문헌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이다. 유몽인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미처 그 의로운 죽음이 기록되지 못하고 신분상의 문제로 나라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한 논개에게 측은함을 느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자신의 문집에 실었다.
"논개(論介)는 진주 관기(官妓)였다. 계사년(癸巳年)에 김천일(金千溢)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를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마침내 성은 함락되고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이때,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矗石樓)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서 있었으니, 아래는 만 길 낭떠러지였다. 사람의 혼이라도 삼킬 듯 파도가 넘실거렸다.
왜병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왜장 하나가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논개는 요염한 웃음을 흘리면서 왜장을 맞았다. 왜장의 손이 그녀의 몸을 잡자, 논개는 힘껏 왜장을 끌어안는가 싶더니 마침내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둘은 모두 죽고 말았다.
임진란을 당하여 관기의 경우, 왜놈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이가 어찌 논개 한 사람에 그치겠는가? 이름도 없이 죽어 간 여인들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 관기라 하여 왜적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목숨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정렬(貞烈)이라 칭할 수 없으니 어찌하랴. 그러나 그런 도랑물 같은 신세로서도 또한 성화(聖火)할 수 있는 정신이 있었으니, 나라를 등지고 왜적에게 몸을 바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을 충(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유몽인은 나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논개의 공이 안타까워 이런 글을 썼지만 이로 인해 논개는 오랫동안 그녀의 삶 자체가 묻힌 채 진주의 관기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논개(論介), 기녀(妓女)가 아니라 최경회의 부실(副室)
근 2세기 간 기생으로 알려졌던 논개는 그간 그 자취를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로 19세기 들어서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중 논개가 2차 진주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한 최경회(崔慶會, 1532~1593)의 부실이었다는 의견이 가장 유력하다.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최경회의 삶을 기리는 『일휴당실기』에 논개로 추정되는 인물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공의 부실(副室)이 공이 죽던 날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고 부른다. 부실(副室)이란 정실(正室) 부인이 아닌 첩을 뜻한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최경회의 첩이었던 여인을 조사하게 되었고 이는 『호남절의록』, 『호남상강』, 『동감강목』 등에서 고증과 민간에 떠도는 구전까지 포함하여 기록하면서 대략 논개라는 인물의 가계와 일생이 재구성되게 되었다. — 최경회의 첩을 논개라고 상정하고 보면 그녀의 삶과 가계는 대개 이러하였다.
논개의 성은 주 씨이며 전라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훈장을 하던 주달문(朱達文), 어머니는 밀양 박 씨이다. 나름 양반가의 딸이었던 것이다. 논개가 5세 되던 해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딸과 자신의 생계를 시동생 주달무에게 의탁한다. 주달무는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논개를 마을부자이던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팔아먹고 달아났다.
딸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논개의 어머니는 친정으로 도망을 갔다. 돈을 낸 김풍헌은 논개 모녀를 관아에 고발하였고 이들의 재판을 맡은 것이 당시 장수 현감이던 최경회였다. 최경회는 논개 모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 무죄 방면했으며 모녀가 살 길이 막연하자 관아에서 잔심부름하며 살게 하였다.
최경회는 해주 최 씨로 전라도 능주 사람이었다. 양응정, 기대승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67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장성한 논개는 최경회의 부실으로 들어갔고 이윽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장이 된 최경회를 뒷바라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차 진주성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쌓아 경상도우병사가 된 최경회를 따라 진주로 가게 되었다.
당시 전황에서 진주성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진 성이었다. 진주는 왜병들이 많이 주둔해있던 경상도의 주요성일 뿐만 아니라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넘어가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었다. 진주성은 일본입장에서는 꼭 차지하고 싶은 성이었고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내어주면 안 되는 성이었다. 1592년 10월 왜군의 1차 진주성 공격은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을 중심으로 관군과 민간인, 의병들까지 합세해 이를 물리쳤다. 이를 진주대첩이라고 부른다.
조선에 들어와 매 전투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왜군으로서는 진주에서의 패배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고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을 확보하기 위해 집요하게 진주성 공략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1593년 7월 조선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일본군을 동원한 10만 병력과 800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함안, 반성, 의령을 차례로 점령하고 진주성 공격에 다시 나섰다.
이때 조선의 중앙정부는 명나라 군이 진주성을 지키는 원병을 보내주지 않기로 하자, 진주를 포기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1차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의병들과 민간인들은 다시 한번 똘똘 뭉쳐 왜군의 공격을 막았다. 전투는 7일간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 많은 지휘관들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진주성은 7월 29일 왜군의 거대한 병력이 휩쓸고 들어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던 날 논개의 남자였던 최경회는 김천일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논개의 장렬한 동반투신
진주성에 진입한 일본군은 보복이라도 하듯이 성안의 민간인과 살아 있는 동물을 모두 학살하고 주변을 약탈했다. 그리고 왜장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남강 변 촉석루에서 술판을 벌였다.
이때 논개는 관기들 틈에 끼어들었다. 논개는 술에 취한 왜장 중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내어 남강의 바위 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를 안고 그대로 강물에 투신하였다. 논개가 왜장을 안고 투신할 때 팔이 풀어지지 않도록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었다고 전한다.
이 가락지는 남강을 가로지르는 진주교 교각상부에 논개 충절의 상징물로서 만들어져 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에게 더럽힘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자결한 여인들은 많았지만 논개와 같이 한목숨을 던져 먼저 간 성민들의 원수를 갚은 의로운 기개를 가진 장한 여인은 우리역사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논개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왜장을 죽인 후, 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거기에다가 왜군도 7일간의 전투 동안 진주성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에 큰 손실을 보아 진주에 계속 점령할 힘이 모자랐다. 그들은 어렵게 진주성을 차지했지만 병력손실이 커, 주변 지역 약탈에 그쳤을 뿐 전라도 지역으로 진격하지도 못했고, 조선군이 거점을 부산 방향으로 옮겨가자 이를 막아내느라 서둘러 진주에서 떠났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논개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 하나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그녀의 신분이 번듯한 가문의 아녀자가 아니고 기생이라고 전해지면서 의도적으로 무시당하고 외면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의 일반 백성들은 그녀를 기억하고 자발적으로 기리고 있었다. 논개가 기생이었든 아니었든, 그녀가 죽인 왜장이 왜군의 병력에 손실을 줄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아닌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위정자의 역사기록이 그녀를 외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민간에 살아남아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논개의 죽음이 전쟁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던 일반 백성들에게 전쟁의 극복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약하고 미천한 위치에 있던 한 여인의 결연한 행동으로, 임진왜란 시기 백성들은 위안과 위로 속에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 [네이버] 논개 [論介]-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의로운 여인 (인물한국사, 김정미, 장선환)
논개와 함께 물에 빠져 죽은 왜장의 존재
그렇다면 논개가 물에 함께 빠져 죽은 왜장은 누구일까?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그 장수가 게야무라 로쿠스케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농민 출신으로 카토 키요마사에게 발탁되어 사무라이가 된 자로서 사무라이가 된 후 이름을 기다 마고베(木田孫兵衛)로 바꾸었다. 그는 카토 키요마사의 중요한 부장 중 한 명으로 임진왜란 때 철포 부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그를 소재로 한 가부키가 있을 정도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인데 조선으로 건너왔다가 함경도에서 죽었다고도 전해지고 일본으로 돌아가 62세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게야무라 로쿠스케에 대한 기록이 가토 키유마사의 함경도 진출 후에도 계속 나오다가 2차 진주성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기록 후, 그의 이름이 기록에서 사라지는 점, 일본에 있는 그의 무덤이 가부키의 소재가 된 이후 조성되었다는 점, 그의 죽음에 대한 한 이야기로 조선에서 한 여성의 복수로 죽었다는 것이 있어 논개가 함께 죽은 왜장은 게야무라 로쿠스케 일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하여 20세기 들어와 일본의 어느 건축가가 자신의 땅에서 발견한 게야무라 로쿠스케에 관한 비석에 근거하여 논개의 영정을 모셔가 함께 전시하는 어이없는 일을 벌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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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남강유등축제(南江油燈祝祭)
진주의 개천예술제(開天藝術祭)와 함께 개최되는 테마 축제이다. 1592년 진주대첩 당시 진주 남강에 유등(油燈)을 띄워, 남강을 건너려던 왜군을 저지한 전술을 사용했는데, 이것에서 유래된 축제이다. 개천예술제의 부속 행사로 개최되다가 2002년부터 본격적인 테마 축제로 발전되기 시작하여,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년 연속으로 문화관광부 선정 최우수 축제로 선정되었고, 2011년에는 국가대표축제로 선정되었다.
진주 논개제(論介祭) ― 논개축제의 검무(劍舞)
진주 논개제(晉州論介祭)는 매년 5월에 개최되며, 의기 논개의 아름다움과 그 애국심을 기리고 있으며, 의암에서 왜장과 함께 빠져죽은 충절의 넋을 기리고 있다.
진주비빔밥 ― 육회를 얹은 진주비빔밥
진주 먹거리의 명물(名物)로 ‘진주비빔밥’이 있고 ‘진주냉면’이 있다. 진주비빔밥은 임진왜란 중 진주성에서 전투를 할 때, 한 마리 소를 잡아도 모든 군졸과 백성이 골고루 다함께 먹도록 하기 위해 만든 데서 유래된 음식이 육회비빔밥이었다고 한다. 소고기는 그릇마다 골고루 고명으로 올리고 뼈는 국물을 우려내어 선짓국을 만들어 먹었다는 것이다. 장군은 물론 관군·의병·백성이 한마음이 되어 전투에 임하는 것이었다. 진주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이렇게 음식을 통해 하나로 단결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진주비빔밥은 전주비빔밥, 해주비빔밥과 함께 조선의 3대 비빔밥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도 ‘진주육회비빔밥’은 진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칠보화반이라고도 하며, 둥근 놋그릇을 이용하여, 하얀 밥, 다섯 가지 나물이 어우러져서 7가지 색상의 꽃 모양의 비빔밥을 만드는데 이것이 진주비빔밥이다. 무쇠 솥에 장작불로 밥을 짓고, 나물을 무친 다음, 육회를 가늘게 썰어서 참기름을 더한다. 국으로는 선짓국을 만들고, 바지락을 이용해 보탕국을 만든다. 놋그릇에 육수로 지은 밥을 담고, 나물로 꽃 모양으로 장식을 하고 푸른 해초를 얹는다. 보탕국과 선짓국으로 함께 상을 차린 것이 바로 진주비빔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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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3대 성씨
진주 강씨(晉州 姜氏)
원시조는 중국 고대 염제 신농씨 강석년(姜石年)이요 비조는 중국 제나라를 세운 강여상(姜呂尙)이요, 우리나라의 시조는 고구려시대 장군 강이식(姜以式) 공이다.
[진주 강씨의 기원] ― 시조는 고구려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1]를 역임한 강이식(姜以式) 장군이다. 강이식 공은 중국의 강태공의 자손인 천수 강씨(天水姜氏)의 지파인 광동 강씨(廣東姜氏)의 일족이다. 이는 중국 광동 강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강이식(姜以式)은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 수 문제가 침략의 야욕을 품고 무례한 국서(國書)를 고구려에 보내오자, "이러한 오만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써 대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영양왕이 이에 수긍하고 전쟁할 것을 명하자, 이듬해 병마원수(兵馬元帥)가 되어 정병 5만 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그는 대병력을 이끌고 요서(遼西)에서 수나라 요서총관 위충(韋沖)과 교전한 뒤, 임유관(臨谕關)으로 거짓 후퇴하였다가 다시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수나라 수군총관 주나후(周羅喉)의 30만 수군을 크게 격파하고 개선하였다.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사(史)』에 따르면, 묘(墓)는 만주(滿洲) 심양현(瀋陽縣) 봉길선 원수림 역 앞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라는 큰 비석이 있었다고 하나, 중국 문화혁명 때 소멸되고, 현재는 돌조각과 거북좌대만 묘역에 남아 있다고 한다. ― 현재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鳳山祠)에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있다.
강씨가 진주(晋州)에 세거한 것은 고구려 멸망 이후 당 황제가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 실시한 과거에서 강진(姜縉)이 장원급제한 후 태중대부 판내의령 (太中大夫判內議令)을 역임하다가 진양후(晋陽候)에 봉해진 이후이다. 이때부터 진주 강씨(晋州姜氏)의 본관을 진주(晉州)로 하게 되었다.
강씨 족보에 따르면, 강이식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는 그들의 조상이 그 유명한 강태공(姜太公)이다. 강태공은 중국 주(周)나라 건국에 절대적인 공을 세운 인물로, 그 공으로 지금의 산동성 지역의 봉토를 받아 제(齊)나라를 건국하였다. 춘추시기에 이르러 그의 자손인 제환공 '강소백'은 춘추시대 최초의 패왕(覇王)이 되어 중국 천하를 호령하였다. 그 후 제나라는 강태공의 자손들로 이어져 32대 800여 년 간 이어졌다.
진주 강씨 문중은 중국의 강태공 후손들과 더불어 매년 9월 12일 중국 산동성 치박시 임치구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제사를 축제화 하여 '제나라 문화축제'라고 하는데 거대한 강태공상(像) 앞에 모여서 각종 제나라 의상, 음악, 제나라 전통가무 공연, 강태공에 대한 제사 등이 진행되며, 이 곳에는 강씨는 물론 강씨에서 갈라진 성씨인 중국의 고(高), 노(盧), 여(呂), 정(丁), 구(丘), 최(崔)씨 등이 매년 단골로 참석한다. (강태공에서 갈라진 중국성씨가 무려 102개나 된다고 한다.)
또한, 강태공 뿐만 아니라 강태공에서 더 거슬러 올라갈 경우 그 최고 정점에 중국 염제 신농씨(炎帝神農氏)까지 나온다. 염제신농씨는 중국 고대 삼황(三皇)중에 한분 이며, 지금으로부터 5200년전 중국 섬서성 기산현을 흐르는 강인 강수(姜水)에서 자라서 지명인 강(姜)을 성씨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염제 신농씨의 성은 강(姜)이고 이름은 석년(石年)이라 했다 한다. 염제신농씨가 중국에 염제국을 건국하고 그의 후손들 (강유망, 강괴, 강승, 강명, 강리 등)이 총 8대 520년간 이어져 강씨들이 중국을 통치하였다. 즉, 진주 강씨(姜氏)는 황족(皇族)이다. 그 외 강씨와 강씨에서 갈라져 나간 성씨들이 세운 황제국과 여러 제후국들(제나라, 여국, 허국, 기국, 장국, 북제, 북주, 베트남 쩐왕조, 딘왕조 등)을 다 합하면 진주 강씨는 황족 뿐만 아니라 가히 왕족(王族)이라 할 수 있으며,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온 명문거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진주 강씨(晉州 姜氏) 집성촌] — 경상남도 남해군, 진주시, 경상북도 안동시, 영주시, 전라남도 나주시, 전라북도 순창군, 남원시, 김제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서귀포시, 평안북도 정주시, 함경남도 북청군 등 전국적으로 분포해 있는데, 2015년 기준 인구 1,161,326명으로 국내 6위 성씨(姓氏)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주 강씨(晋州姜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진주 하씨(晋州河氏)
진주 하씨의 시조는 고려 현종 때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된 하공진(河拱辰) 공이다. 그런데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이 1451년(문종 1) 처음으로 족보를 내면서 그 서문에 ‘세계(世系)가 전함이 없고 『고려사(高麗史)』에 홀로 하시랑 공진이 있어 듣기에 기쁘나 동원(同源)이면서 분파가 확실치 않다.’고 한 것과 같이 진주 하씨의 세계(世系)는 계통이 뚜렷하지 않은 3파로 갈라져 있다. 하공진을 시조로 하는 시랑공파(侍郞公派), 고려 정종 때 사직(司直)을 지낸 하진(河珍)을 시조로 하는 사직공파(司直公派), 고려 때 주부(主簿)를 지낸 하성(河成)을 시조로 하는 단계공파(丹溪公派)가 그것이다.
본관을 진주로 한 연유는 시조인 하공진(河拱辰) 공이 진주(晉) 태생이며, 11세손인 조선조 하륜(河崙)이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추봉되었고, 하진(사직공파)의 9세손 하즙이 진천부원군(州晉川府院君)에, 10세손 하윤원이 진산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하즙은 산청의 남사리 원정매를 심은 분이다.
[진주 하씨(晋州河氏) 세거지] — 하공진 공의 후손은 대곡면 단목리, 수곡면 사곡리, 금곡면 검암리 운문과 수곡면 효자리에 세거하며, 하진의 후손은 명석면 관지리, 옥종면 안계리에서 대대로 살고 있다. 단목, 사곡, 운문, 관지, 안계는 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하씨들의 집성촌이다.
[진주 하씨 묘역] — 송정 하수일의 7대조부터 후손들의 묘는 수곡산에 있고, 하위보의 후손들은 단목에 세장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하천서의 후손들은 운문에 세장되어 있다.
[진주 하씨의 인물] — 시조 하공진은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막고자 외교를 펴다가 돌아오지 못하였고, 하륜(1347~1416)은 영의정으로 태종을 도와 조선의 문물을 정비하였으며, 경재 하연(1376~1453)도 3대의 임금을 섬기며 영의정으로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각재 하항(1538~1590)과 영무성 하응도(1540~1610)는 남명 조식의 제자로 학문의 성취가 있었고 송정 하수일(1553~1612)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을 역임하였으며 겸재 하홍도는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 진주하씨(晋州河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진주 정씨(晋州鄭氏)
진주 정씨의 본고장인 경남 진주에서는 강(姜)·하(河)·정 3성(姓)을 3대 성으로 치고 있지만, 그 가운데 진주 정씨에는 '진주8정(八鄭)'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서로 시조와 계통을 달리하는 8파가 있다.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1명을 포함하여 문과 급제자 59명을 배출하였다. 대표적 인물로는 조선 단종 때 우의정에 올랐다가 계유정난으로 사사(賜死)된 정분(鄭苯)을 들 수 있으며, 이밖에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낸 우복 정경세(鄭經世), 임진왜란 때 순사(殉死)한 정사제(鄭思悌), 세종에서 세조 대에 걸쳐 충청도관찰사와 중추원지사를 지내고 서예로 이름 높았던 정척(鄭陟), 척의 아들로 성종 때 효행과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정성근(鄭誠謹), 숙종 때 문신 정필달(鄭必達) 둥이 있다.
청계서원(淸溪書院)
이곳은 고려병부상서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진양부원군 은열공 관정 정신열 선생과 고려 공민왕 13년(1364, 갑진년) 때 전객령 판부사를 지낸 진양공 문충공 퇴헌 정천익(鄭天益) 공을 모신 곳이다. 정천익 선생은 1364년 봄 사위 문익점(文益漸)에 원나라에서 가져온 목화 씨앗을 심어, 그 중 오직 한 알을 크게 살려 번연(蕃衍)시키고, 씨아와 물레 그리고 베틀을 창제하여 온 백성들에게 따뜻한 솜옷을 입힌 분이다.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것은 사위 문익점이지만 재배에 성공한 것은 정천익 공이다.
조선조 순조 33년 영·호남 유림들이 퇴헌 정천익(鄭天益) 공에 대한 보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진주의 서쪽 대평면 마동 남강변에 청계서원(淸溪書院)을 세웠더니, 예조에서 해마다 춘추로 생패와 향촉을 보내와 봉사하던 중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61년 후손들이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안 이곳에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경덕사(敬德祠)와 정교당을 건립하고 봉남서당이라는 이름으로 그 맥을 이어오다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정부의 지원과 문중의 정성을 모아 숭은사(崇恩祠)와 진사청을 재건하고 청계서원으로 복원하여 매년 음력 3월 15일 두 사당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진주 정씨의 세거지] — 지수면 금곡과 진성면 중촌에 세거하는 정씨는 공대공파이고, 이반성면 발산리 외동과 금곡면 인담에 세거하는 정씨는 충장공 정분의 후손이며, 수곡면 원당에는 부사공파가 살고 있다. 금산면 사동은 지후공파의 세거지이고, 진성면 이천에는 은렬공파의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진주 정씨의 묘역] — 은렬공은 명석면 용산리에 충장공은 도동에 있으며 후손들은 금곡면 인담리에 입향하여 여러 대의 산소가 있다. 진성면 중촌리에는 동산파의 세장지가 있으며, 사봉면 봉곡리에는 삼계 정밀과 자손들의 묘역이 있다. [진주 정씨(晋州鄭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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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출신, LG그룹 창업주 구인회(具仁會)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승산마을'
진주 남강 유역은 부자(富者)들이 많이 나는 지역이다. 특히 남강 정암(鼎巖)나루 ‘솥바위’를 중심으로 한 3대 부자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다. 의령(宜靈)의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 함안(咸安)의 효성그룹 창업자 ‘조홍제’ 회장 그리고 진주(晉州)의 LG그룹 창업자 ‘구인회’ 회장이 그들이다.
구인회 회장은 1928년 진주 중앙시장에서 ‘구인회포목점’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이병철 회장은 1936년 ‘마산합동정미소’, 1938년 대구 서문시장에서 ‘삼성상회’로 사업을 시작했으며, 조홍제 회장은 1948년 ‘삼성물산공사’, 1957년 ‘효성물산’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그 후 대를 이어 지금의 대기업을 이루었다.
LG그룹 창업자 구인회(具仁會, 1907~1969)) 회장은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승산마을에서 태어났다.
범(汎) LG가인 LS 구태회·구평회·구두회 명예회장 등도 진주시 지수면 출신이다. GS그룹 명예회장인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과 아버지 고 허준구 LG그룹 전 부회장 역시 지수면이 본적이다. 구 씨 일가와 사돈이기도 한 허 씨 일가는 허만정 창업회장 때부터 3대에 걸쳐 동업하다 2004년 GS그룹으로 분리됐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도 지수면을 거쳤다. 1910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이병철 회장은 진주 허 씨 가문의 허순구씨와 혼인한 둘째 누나 이분시 씨를 따라 지수면에 있는 누나 집에서 살면서 지수보통학교(현 옛 지수초등학교)를 다녔다.
효성그룹 고 조홍제 창업회장(1906년 태생)도 생가는 경남 함안이지만 지수보통학교를 다녔다. 창업회장 세 사람이 모두 비슷한 시기 같은 동네에서 알고 지낸 것이다.
구인회 회장과 이병철 회장은 3살 차이지만 구 회장이 1921년부터 3년여, 이 회장이 1922년부터 6개월여 간 지수보통학교에 다니면서 한 교실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조홍제 회장도 구인회 회장과 어린 시절 친교가 있었고 중앙고보 동창이기도 하다.
지수초등학교에는 '재벌송(財閥松)'이라고 불리는 소나무가 있다. 구인회 회장과 이병철 회장이 1922년 한그루씩 심은 소나무가 언제부턴가 뿌리가 합쳐져 지금은 한 그루처럼 보이는 소나무다. 지수초는 2009년 폐교돼 인근 송정초와 통합됐지만, 폐교된 학교 터에 이 소나무는 그대로 있다.
김해 허씨, 지신정(止愼亭) 허준, 효주(曉州) 허만정
승산마을은 김해 허씨(金海許氏)의 세거지로 입향조는 허만정(許萬正)의 11대조 ‘허문손’으로 1,400년대 길지 명당을 찾아 승산마을에 입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능성 구씨(陵城具氏) 입향조는 구인회(具仁會) 7대조인 ‘구반’으로 결혼하여 처갓집 동네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능성(綾城)은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능주면(綾州面)의 옛 지명이다.
15세가 중반에 허문손(許文孫)이 지수에 입향한 이래로 허씨들은 500여 년 동안 천석꾼으로 이어져 왔다고 전해진다. 구한말 허씨 중에 가장 부자가 1만석을 하던 지신정(止愼亭) 허준(許駿, 1844-1932)이었다. 만석꾼 부자였지만 멈출 줄을 알고(止), 삼가는 것(愼)으로 좌우명을 삼았던 인물이다. 아호 지신정(止愼亭)은 ‘지지’(知止)와 ‘신독’(愼獨)으로 항상 자기를 경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택이 '지신고가'이고 별당의 이름이 ‘지신정’이다. 허씨 부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고 살았다. 특히 지신정 허준(許駿)은 경주 최부자, 의령의 천석꾼 백산 안희제와 함께 공동 출자하여 만주 독립운동의 돈줄이었던 ‘백산상회’를 설립하였다.
효주(曉州) 허만정(許萬正, 1897년~1952년)은 1897년 경상남도진양군 하봉면 승산리(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서 만석꾼 아버지 지신정(止愼亭) 허준(許駿)과 어머니 함안 조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허만정은 무과 급제 후 평안도병마절도사와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연당(蓮堂) 허동립(許東岦)의 11대손이며, 그 아버지 허준은 송시열의 후손인 송병선 과 의병장 최익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91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1902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거쳐 1904년 비서원승(秘書院丞)을 지냈다. 허만정은 1920년에는 700마지기의 논밭을 지수면 내 빈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김해 허씨와 능성 구씨의 혼맥과 동업, ‘락희화학’
김해 허씨는 지신정(止愼亭) ‘허준(許駿, 1844-1932)’과 차남 효주(曉州) ‘허만정(許萬正, 1897년~1952년)’ 대에 이르러 부(富)를 가장 많이 축척하였다. 그런데 이 허씨 부자(富者)는 일제 때 독립군 자금을 대고 주민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주었으며 교육 사업에도 공헌하였다. 지신정의 아들이 효주(曉洲) 허만정(許萬正)이고, 해방 직후에 허만정은 구인회와 합자하여 LG의 전신인 ‘락희’(樂喜·Lucky)를 창업하였다. 허만정은 아들 8형제를 두었다. 허만정의 3남 허준구(許準九, 1923~2002)의 아들이 현재 GS그룹 회장인 허창수(許昌秀)이다.
1947년 같은 마을 출신 구인회와 함께 LG그룹 전신인 ‘락희화학공업’을 창업하였다. 또 장남인 허정구에게는 이병철과 함께 삼성물산 경영에 참여시켜 삼성그룹의 공동창업주가 되게 하였고, 3남인 허준구는 구인회에게 보내 LG그룹 경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52년 한국전쟁 중 별세했다. ―
능성 구씨는 조선 중기 이후에 번성한 가문으로, 16대 인조의 외가(인헌왕후의 친정) 집안으로 조부 ‘구연호’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지내는 등 지속적으로 벼슬을 지내왔다. 구인회(具仁會)가 사업을 한다고 하자 허만정은 3남 허준구(許準九)를 참여시키면서 허씨는 재물이 성하니, 경영(經營)은 학문이 발달한 구씨에게 맡기라고 당부하였다.
구인회(具仁會, 1907~1969) 회장은 본관이 능성(陵城)이요, 호는 연암(蓮庵)이다. 진주시 지수보통학교를 2학년에 편입하고 3학년에 중퇴하여 서울의 중앙보통고등학교를 수료하였는데, ‘삼성 이병철 회장’과 동문이다. 구인회 회장은 1921년 이웃집 허을수 여사와 혼인하여 6남 4녀를 두었다. 구씨와 허씨 집안은 양대에 걸쳐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이며 이들의 동업관계는 1947년 LG그룹 모태인 ‘락희화학(樂喜化學)’ 창립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효주 허만정은 조카사위인 구인회의 인물됨을 알고 3남 허준구를 공동창업에 참여시키는데, 구씨 65%, 허씨 35%로 알려져 있다. 2005년 LG그룹과 GS그룹으로 분리되어, ‘LG그룹’은 구자경―구본무―구광모 회장으로 승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2020년 공정자산 137조, 재계 순위 4위로 승승장구 하고 있으며, GS그룹은 허창수 회장으로 승계되어 2020년 공정자산 67조, 재계 순위 8위로 두 그룹은 대한민국 경제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대기업의 아름다운 분리 ; LG그룹과 GS그룹
혼인(婚姻)으로 맺어진 구씨와 허씨의 동업은 1947년 그 출발부터 남다른 인간적인 믿음으로 시작되었고, 두 집안의 인재들이 한마음으로 합심경영을 이루어 LG라는 세계굴지의 대기업을 이루었다. 그리고 2005년 그 동안의 신의(信義)와 상호 공적(功績)을 존중하면서 LG그룹과 GS그룹으로 원만하게 분리하였다. 이후에도 양 그룹은 변함없는 우호의 저력을 발휘하여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 중심의 기업 경영’, ‘사회적 기여를 지향하는 기업 경영’으로 모든 국민들에게 신망을 받는 기업이 되었다.
사실 동업(同業)이란 참으로 쉽지 않는 일이다. 대부분 동업은 절친(切親)의 친구나 아주 가까운 집안이 협업을 시작하지만 거의 아름답지 못하는 결말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쳇말로 사람 잃고 돈 잃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구씨와 허씨 양 집안의 기업 경영과 인간적인 관계는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 춘추시대에 *포숙아(鮑叔兒)가 관중(管仲)을 신뢰하고 그 능력을 믿었던 것과 같이, 그 근본적인 바탕은 인간적인 의리·믿음·존중의 코드가 아니었을까. ― * 관중과 포숙아의 이야기는 사마천 「사기열전」에 나온다.
진주시 하류의 남강(南江) 유역
진주교 이하의 남강은, 진주종합경기장 앞에서, 낙남정맥 고성의 대곡산-천왕산-연화산 북쪽에서 발원한 ‘영천강’이 유입되고, 진성(면)에서 ‘반상천’, 지수(면)에서 ‘지수천’이 북류(北流)하여 남강에 흘러든다. 그리고 이후 남강은 강남의 함안과 강북의 의령의 경계를 이루며 동북쪽으로 흘러가 낙동강에 유입되는 것이다. 그런데 진성면의 반상천 상류에는 ‘경상남도 수목원’이 있다.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부자(富者)마을
그리고 ‘지수천’이 흐르는 지수면 승산리는 LG그룹 창업자 ‘구인회 생가’, ‘허만정-허준구 생가’, ‘옛 지수초등학교’가 있는 마을이다. 지수면은 진주시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방어산(532m)-괘방산(451m) 산줄기를 경계로 함안군 군북면과 접하고 있으며 서쪽과 북쪽에는 남강이 흐르고 있는 지역이다.
승산마을은 예로부터 부자마을로 소문난 곳이다. 지수(智水)는 경상우도에서 수백년 동안 부자 동네로 소문난 곳이다. 왜정 때까지만 하더라도 지수에는 덩실한 기와집이 150여채 가량 있었다. 현재도 50여채의 기와집이 고색창연하게 남아 있다. 600년 전통을 가지고 있는 부자마을은 김해 허씨와 능성 구씨가 300년 이상 살아온 유서 깊은 마을로 거부들을 배출한 곳이다. 이른바 부자의 기(氣)가 흐르는 마을로 이름이 나 있다.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에는 고(故) 구인회 LG 창업회장, 고 구태회 LS 창업회장, 동업 관계였던 고 허만정 GS 창업회장의 생가가 모여있다. 구인회 창업회장의 장남으로 LG(락희화학·금성사)를 글로벌 그룹으로 키운 구자경 명예회장도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리고 야구해설가 허구연 생가도 있다.
‘승산마을’은 조선 초기에는 숭어산리, 조선 후기에는 용봉리(龍鳳里)라고 불렸다고 한다. 풍수지리가들에 의하면, 이 마을은 봉황(鳳凰)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봉황은 신성한 동물로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를 않고 대나무 열매만을 먹는다. 지금도 마을 뒷산에는 대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지수초등학교 인근에는 오동나무 군락지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은 봉황과 관련이 있는 형국으로, 둥지 모양으로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이라고 하며, 그래서 이곳은 귀한 인물이 태어나는 대명당이라고 한다.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이란 봉환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을 뜻하며,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은 날아다니는 봉황이 둥지로 돌아오는 형상을 뜻한다.
옛 지수초등학교
승산마을에 있는, 지금은 폐교한 ‘옛 지수초등학교’는 LG그룹 창업자 연암 구인회 회장(1907~1969), 삼성그룹 창업자 호암 이병철 회장(1920~1987), 효성그룹 창업자 만우 조홍제 회장(1906~1984), LS그룹 창업주 구태회 회장, LG의 2대 구자경 회장, 삼양통상 허정구 회장, GS그룹 허준구 회장, 승산그룹 허완구 회장 등 대한민국 경제계의 수많은 거물들이 꿈을 키웠던 학교로 명성을 갖고 있다. 구인회 회장과 이병철 회장 그리고 조홍제 회장은 이 학교 제1회 졸업생이다.
옛 지수초등학교는 옛 송정초등학교와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지수면 압사리로 이전하였지만, ‘옛 지수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외형은 여전히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학교 본관 건물을 물론, 2002년 LG 구자경(具滋景) 회장이 기증한 학교체육관 ‘상남관’도 그대로 남아 있다. 상남은 구자경 회장의 호이다. 교정에 고 연암 구인회 회장 불망탑(故蓮庵具仁會不忘塔)도 있다. 진주에는 ‘연암공과대학교’도 구자경 회장의 LG그룹에서 설립한 대학이다.
옛 지수초등학교 교정에는 일명 ‘부자소나무’로 불리는 명물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학교 건물 2층 높이만큼 우람하게 자란 소나무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삼성 이병철, 금성 구인회, 효성 조홍제가 학교 옆 바위틈에 자라고 있는 소담스러운 소나무를 개교(1921년 5월 9일) 이듬해 함께 옮겨 심고 가꾸었다고 전해진다. 태풍으로 나무 일부가 부러졌을 때 LG그룹에서 소나무 전문원예사를 파견하여 돌볼 만큼 각별한 나무이다.
지금까지 학교시설을 유지하고 보수하던 옛 지수초등학교는 2021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변신을 하고 있다. 2019년 진주시와 중소기업진흥공단이 체결한 「기업가 정신교육센터 건립 운영에 관한 업무협약」에 따라 학교 건물 외관은 최대한 보존하되 내면의 개·보수를 거쳐 ‘기업인 정신교육의 장’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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