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 밴쿠버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밤 늦게 와싱톤-덜레스 공항에 도착하여 꺼 놓았던 휴대 전화를 켰습니다. 켜자 마자 음성 메시지가 떴는데, 그 동안 위암으로 투병하시던 지인께서 오후 5시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임종 전에 뵙고 싶었는데, 하루를 안 기다려 주시고 가셨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또 다른 부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52세의 열정적인 분이었습니다. 저에게도 3년 후배가 되기 때문에 대학교 시절에 보았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수염이 많아서 항상 아래턱이 검어 보였고, 늘 웃으며, 무엇이든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직업에도 충실했지만 주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지역으로 청년들을 이끌고 다니며 봉사 활동에 열심을 냈습니다. 그러던 중 며칠 전에 중국 심양에서 뺑소니 차에 치어 중상을 입었고, 국내로 호송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지난 화요일 끝내 우리곁을 떠났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제 아내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지인들이 충격 속에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배들에게 사랑 받고 후배들에게 존경 받는 선한 사람이였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열정적으로 일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아직도 손길이 필요한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교인들을 남겨 두고 너무도 갑작스럽게 떠났습니다. 홀로 남겨진 친구에게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아내에게 위로가 될까 싶어 말했습니다. "그 친구는 워낙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남들의 두 배는 살았다고 볼 수 있어!" 그 말에 아내는 수긍합니다. 물론, 그 말로 그의 이른 죽음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위로가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대부분은 최후의 말인 유언을 남긴다. 미리 준비된 것일 수도 있고, 아무런 의미 없는 단어의 나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최후의 말에는 대개 그 사람의 삶이 녹아 있다는 점이다.
안중근의 유언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아침, 사형집행에 앞서 수인복을 벗고 고향에서 보내 온 흰색 두루마기와 검은색 바지의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여순감옥 사형실에서 구리하라 형무소장이 사형집행문을 낭독하고 안 의사에게 최후의 유언을 물었다.
안 의사는, "아무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인이 서로 일치 협력하여 동양 평화에 이바지 하기 바란다"면서 나와 함께 "동양 평화 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런 제안이 통할리 없었다. 안 의사가 혼자 "동양 평화 만세"를 외쳤는지는 알 수 없다. 형리들은 안중근을 저지하고 그대로 교수형을 감행했다.
감옥 밖에 와있던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이 유해 인도를 요구했으나 감옥소 측은 가족들의 절규를 무시하고 안 의사의 유해를 감옥 뒤의 수인 묘지에 몰래 묻었다. 안 의사의 유해가 조선인의 손에 넘어갈 경우 안 의사의 묘소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다.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안중근 의사
앞서 안 의사는 감옥으로 면회를 온 두 동생 정근과 공근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내가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으로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동안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 원장 등 뜻있는 분들이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광복 70년이 넘은 오늘까지 유해가 뭍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 헤이그사건 이후 ‘정미7조약’을 강요하고 고종을 퇴위시키는 등 일본정부를 대표해 한국침략을 진두지휘하다 안중근에 의해 사살당한 ‘침략의 원흉’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농민 출신에서 수상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에도막부 말기 이토는 존황양이론(尊皇攘夷論)에 경도되어 친막부적 국학자를 암살하거나 영국공사관에 방화하는 등 테러리스트로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정치적으로 성장한 데는 주선가(周旋家, 협상가)로서의 기질이 크게 작용했다. 한국침략과 관련해 회유와 협박을 통해 강경한 방식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찍이 1863년 22세 때 영국으로 가 서양학문을 습득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미국으로 파견되어 화폐제도, 은행제도를 조사해 귀국 후 일본의 금융제도를 정비했으며, 1882년에는 정부 최고지도자의 지위에 있으면서 입헌제도조사를 위해 직접 유럽에 장기간 체류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근대국가체제 수립을 위한 풍부한 서양 지식을 흡수했고 그 지식을 자산으로 삼아 다른 관료들을 압도하며 지도자의 위치를 굳혀나갔다. 특히 영어실력이 뛰어나 많은 해외서적을 섭렵했을 뿐 아니라 해외신문과 잡지를 구독하며 국제정세도 민첩하게 파악했다고 한다. 이토는 40년 가까이 일본정부의 핵심에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쌓았다. 이토는 뛰어난 식견과 정치력으로 일본의 근대국가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일본의 국익을 최우선의 가치관으로 삼고 주변 약소국에 피해를 강요한 국가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1963년부터 1984년도까지 일본 1000엔권 지폐 도안 인물로 선정됐다. 1000엔권 인물 도안은 1984년 이후 한국 및 중국과 경제교류가 늘어나면서 이 두 나라를 의식해 나쓰에 소세키로 변경하하여 2004년까지 발행하였다.
김구의 유언
선생의 얼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우리의 귓전을 울리고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 생활을 풍족하게 할 만하면 되고 우리의 강역은 남의 침략으로부터 막을만하면 족하다. 오직 내가 한없이 원하는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1948년 4월 22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김구 선생(위 사진 오른쪽)이 김일성과 함께 회의장으로 걸어가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우드로윌슨센터] 김구는 “소련, 북한군을 남진에 써먹을 것”이라며 전쟁 가능성을 예견하였다. [출처: 중앙일보]
김구 선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첫째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에는 적을 미워하고 살벌한 마음을 가졌었으나 적이 물러간 지금 우리는 증오의 투쟁심을 버리고 화합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는 이기적 개인주의 사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지금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고 있지만 제 배를 채우기 위한 자유가 아니요, 제 이웃 제 국민을 잘살게 하기 위해 필요한 자유이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이다.
셋째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끝없는 계급투쟁을 낳아서 국토에 피가 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또 민족의 행복은 개인의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니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다.”
김구 선생은 또한 우리끼리 집안싸움을 하지 말자고 권고하였다. “집안이 불화하면 집안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나라가 망한다. 동포 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선생은 끝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위와 같은 나라가 된다면 얼마나 좋은가. 자손을 위해 이러한 나라를 남기고 가면 얼마나 좋은가.” 출처 : 코리안 스피릿
이승만의 유언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은 대부분 불행한 말년(末年)을 맞았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재임 기간 1948.7~1960.4) 대통령(재임 기간 1948.7~1960.4)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이후 귀국했다. 이 전 대통령은 공산정권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고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씨를 뿌린 공을 세웠지만 1960년 4·19 혁명으로 독재자란 비난을 들으며 권좌에서 물러났다. 곧바로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1965년 7월 19일 90세로 서거했다. 그의 유해는 타계 나흘 만인 7월 23일 미군 공군수송기에 실려 귀향했다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하며 아들 이인수씨를 통해 우리 국민에게 유언을 남겼다.
"굳세게 서서 자유를 지켜라. 일치단결해서 어서 남북을 통일하도록 우리 국민에게 바라고 소원한다."
1904년 한성감옥에 투옥된 이승만(29세, 왼쪽에서 3번째)은 옥중학교를 운영하며, 한글과 성경, 영어와 한문, 세계사 등을 가르쳤다. 나라를 빼앗긴 이승만의 인생 역정이 오직 독립을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음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가 1945년 해방을 맞아 대한민국 건국을 이루고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던 과정을 보면 마치 드골의 집권과정과 아주 유사하다. 그러나 그것이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변명하기 위한 구실일 수는 없다. 장기집권과 부정부패에 만연된 그의 집권 말기가 이승만이 국민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는 업보였다. 그리고 그는 겸허하게 국민들의 함성과 민주주의 요구를 받아 들이고 스스로 건국한 나라를 버리고 떠났었다. 이제는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기리는 동상을 광화문광장에 혹은 인천공항을 이승만공항으로 바꿔 줄만큼 대한민국 위상이 높아졌지 않았는가?
이승만의 3대 예언
윤보선 대통령(1960.8~1962.3)
윤보선 대통령은 명목상 국가원수를 지냈다. 4·19 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이 내각제였기 때문에 실권은 장면 총리에게 있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물러난 뒤 1963년 5대 대선과 1967년 6대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와 잇달아 맞붙었지만 모두 패했다. 윤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 반(反)유신 운동과 관련해 3차례에 걸쳐 사법처리의 대상이 됨으로써 최초로 법정에 선 대통령이란 기록을 남겼다. 1990년 93세로 타계했다
―1990년 윤보선은 93세로 돌아가시기 전, 독재자(박정희)가 누워있는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걸 반대했다는데? 그래서 가족장을 치렀나?
"그건 아니다. 아버지는 내게 '죽고 난 뒤까지 나라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며 가족장 유언을 남겼다. 당시 총무처 장관이 찾아와 '국장은 아니더라도 정부장(政府葬)을 허락하면 준비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고인의 뜻이 아니다'라고 했다. 다음 날 우리 집안 어른과 다시 찾아왔지만 가족장으로 치렀다. 아버지는 살면서 한 번도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빼앗긴 재산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1963.12~1979.10)은 '시해(弑害)'라는 기록을 남겼다. 보릿고개를 없앴고 근대화와 경제성장 달성이란 업적을 남겼지만 독재자란 비난도 받았다. 18년 장기집권 끝에 1979년 10월 26일 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쓰러졌다. 박 전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 여사도 1974년 8월 15일 재일동포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타계했다.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승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자네들은 괜찮나”였다. 오후 7시40분 청와대 인근 궁정동 중앙정보부장 안가(安家)에서 박 대통령은 김재규가 쏜 배신의 총탄을 맞았다.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혈을 좌우의 두 젊은 여인이 손으로 막았다. 박 대통령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는 자신을 위해 울부짖는 여인들의 안전을 물었다. 18년5개월 박정희의 혁명 일생은 ‘장도영이 날 쐈어’라는 배신의 분노로 시작해 ‘자네들은 괜찮나’는 안부의 언어로 마침표를 찍었다.[출처: 중앙일보]
박정희 마지막 육성 “자네들 괜찮나”
최규하 대통령(1979.12~1980.8)은 총리로 재직하다 박 전 대통령의 유고로 인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고 같은 해 12월 6일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이나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이 빚어지는 과정에서 통치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결국 1980년 8월 16일 신군부의 압력으로 하야(下野), 역대 최단기 대통령이 됐다. 최 전 대통령은 1989년 국회 광주특위에서 신군부 등장과 관련한 증언을 거부하다 국회 모독죄로 기소됐고, 1996년 '12·12 및 5·18 사건' 항소심 공판에 강제 구인되기도 했지만 아무런 증언을 하지 않았다. 2006년 10월 8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화 시대를 연 '양김(兩金)'인 김영삼 전 대통령(1993.2~1998.2)과 김대중 전 대통령(1998.2~2003.2)은 재임 말기 나란히 자신의 아들이 구속되는 수난을 겪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는 1997년 한보 비리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데 이어 2004년에는 조동만 전 한솔 부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임기 말인 2002년 차남 홍
업씨와 삼남 홍걸씨가 기업체로부터 청탁과 함께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되는 처지에 놓였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두 아들이 한달 간격으로 잇따라 구속되자 대국민 사과를 했다.
퇴임 이후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IMF 금융위기를 막지 못했다는 비난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북 비밀송금 사건으로 특별검사의 소환 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JP, 저승에서 만날 YS “씰~데 없는 소리”에 뭐라 답할지..
(좌)고(故) 김종필 전 국무총리,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우) [사진=뉴스핌DB]
"내가 죽으면 집사람과 같이 누울 묘소를 고향 부여에 미리 만들어놨다. 묘비명도 만들었다. 내 인생철학은 '사무사(思無邪)'다. 허튼 생각은 일절 안 한다. 욕심 부리지 않는다.“
“젊어선 잘 몰랐는데 이제 졸수(卒壽·90세)를 넘기니 알겠다. 돌이켜보면 내가 뭘 남겨놨단 말인가. 한탄 밖에 안 나온다. 그것도 묘비에 써놨다. 내가 죽어 묻히거든, 나중에 시간 있을 때 산책 하러 한번 와봐라. 그럼 '이 사람이 여기서 이렇게 한탄하면서 누워있구나' 할 거다."
당시 인터뷰를 했던 기자가 ‘뭐가 그렇게 후회 되십니까’라고 묻자, JP는 막힘 없이 심사를 털어놨다. “조금 더 자유롭고, 조금 더 민주적으로 자기 희망대로 살 수 있는 기반이 국민을 위해 다져졌으면 해서 혁명도 하고 했는데, 미흡하니까 아쉽다. 미안하고 그런 감정이다. 더 잘 했었으면 하지만, 내 능력껏 한 것이니까.”
기자가 다시 물었다. “뭘 더 했으면 더 잘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JP는 “정치는 결과다. 국민이 지금보다 더 윤택하고 자유롭고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세상을 굳혔으면 더 잘했다고 했겠지만 미흡하기 짝이 없다”고 답했다.
JP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초심을 품고 과거 정치인들로부터 다시금 지혜를 배울 때”라고 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과오로부터 냉철함을 배우고, 해리 트루먼에게서 시대의 지도자상을 깨닫기를 바라며, 존 F 케네디에게서 불꽃같은 열정과, 윈스턴 처질의 위대한 봉사의 의미를 새기고, 샤를르 드 골에게서 애국의 길을 들여다보라고 했다.끝으로 우리 역사의 슬픔을 담고 있는 인물, 영친왕을 통해 우리 사회의 ‘거짓 슬픔’에 대해 경계도 당부했다.
젊은 시절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부인 박영옥 여사의 모습. 생전 김 전 총리는 두번의 국무총리 역임으로 국립현충원에 묻힐 수 있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누워있는 양지 바른 고향 땅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 김 전 총리는 생전 유언에 따라 국립현충원이 아닌 고향 부여에 묻히게 된다. [사진=뉴스핌DB]2018-06-23 23 별세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은 서거 직전 가족들과 눈짓으로 의사소통하며 마지막 ''유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통령의 주치의 중 한 사람인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의 장준 교수(호흡기내과)는 18일 오후 브리핑에서 "운명하시기 한 두 시간 전까지 의식이 있었고, 이 때 눈빛으로 가족들과 의사소통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진정제 때문에 깊은 수면 상태에서 치료받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거 전 의식을 회복했으며, 가족들의 물음에 눈의 깜빡임으로 긍정과 부정의 답을 대신하며 의사소통을 했다는 것. 장준 교수는 "말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었다"며 "의식을 갖고 눈짓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의료진이 아니라도 판별할 수 있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김 전 대통령이 가족들에게 마지막 남긴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는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를 찾아온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이) 2013년에 입원하셔서 사실 말씀을 잘 하진 못했는데 붓글씨로 '통합'과 '화합'이라고 썼었다"며 "필담 식으로 그땐 글씨를 좀 쓰셨는데, 평소에 안 쓰시던 '통합'과 '화합'을 쓰셨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현철씨는 "평소에 안 쓰시던 건데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라고 물었지만 김 전 대통령은 쓴 글을 가리키며 "우리가 필요한 것"이라고 짧게 언급했다고 전했다
그 이후 김 대통령은 말도 못하고 글씨를 쓸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일체의 소통을 할 수 없었다. 김 전 대통령이 남긴 '통합'과 '화합'이 마지막 유언이 된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
‘바보 놈현’으로 불리던 노무현 대통령. 그의 탈권위적 행보는 한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명사들은 죽고 나서도 유명세를 치른다. 死後(사후)에도 종종 그들의 유언은 논란거리가 된다. 盧武鉉(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난 5월 23일 자신의 사저 부근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직전 자신의 컴퓨터에 편지 형식의 遺書(유서)를 남겼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그러나 이 유서는 자필이 아닌 워드로 작성됐다는 점과 평소의 필치와 다르다는 점 등으로 한동안 타살 의혹, 조작 의혹을 받기도 했다.
노무현과 노회찬 2009년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9일 <PBC>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부인인 권양숙씨가 박연차 태광실업 대표에게 돈을 받았다고 고백한 것에 대해 “(고백에도 불구하고)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며 “참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노 대표는 “영부인이 돈이 부족했다는 것도 납득이 안 가고, 꼭 돈이 필요했으면 은행에서 당당하게 빌리고 이자까지 냈어야 하는 게 아닌가”라며 “정당에서 이자 없이 또는 아주 낮은 이자로 돈을 빌리는 것도 불법정치자금 혹은 후원금과 관련된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문제가 되는 상황인데 (박연차 회장에게 돈을 빌렸다는 것은)납득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노 대표는 또한 “(노 전 대통령이)공직자 재산등록을 한 내용을 보면 채무가 있다고 보여지지 않는데, (노 전 대통령)진술이 사실이라면 재산 등록할 때부터 허위로 한 게 아닌가”라며 “돈을 빌린 시점이 불법대선자금 수사가 막 종료되었을 때로,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엄중한 수사를 하고 본인은 변칙적이고 불법적인 방식으로 돈 관리를 했다면 그야말로 이중적인 처신”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이렇게까지 왔다면 최소한 대통령을 지내신 분으로서 이 시점에서 더 이상의 의혹이 남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며 “(노 전 대통령이)검찰 수사에 응하겠다고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사과문을 보면 법정에서 변호사가 변호하듯이 진술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그제 세상을 떠난 정의당 노회찬 의원은 유서에서 드루킹 측으로부터 지난 총선 직전 4000만원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이렇게 자책했다. 그가 받은 혐의는 정치자금법 위반이었다. 이 법은 엄격하다. 고인의 빈소를 조문한 국회의원들도 "합법 후원금만으로 선거를 치르는 후보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그 법은 정의당과 노 의원 지지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던 법이다. 어제 아침 '촌철살인'이란 말이 난데없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 인기 검색어 1위에 떠올랐다. 노 의원 부고(訃告)를 다룬 신문기사들이 그에 대한 인물평에서 한결같이 이 말을 썼기 때문이다. 그는 대중이 듣고 싶은 말, 특히 권력형 부패를 예리한 비유로 비판하는 데 남달랐다. 그런 그가 최근 특검에서 불법 자금 수수 혐의가 포착된 이후 "돈 받은 일이 없다"고 부인해왔다. '정의'를 외쳤던 그로선 이 말을 뒤집고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누구보다 가책을 느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 정치인은 "노회찬은 염치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고 했다. 출처 : 뉴스 조선
“노무현을 잃은 것과 똑같은 이유로 노회찬을 잃었다”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
“오늘도 어떤 사람이 그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는 사람들에 의해 집단적 모욕과 조롱을 당하고 있다. 내일도 모레도, 누군가는 조리돌림의 대상이 되어 온갖 악담과 저주를 들을 것”이라며 “단 한 가지만 자기 뜻과 맞지 않아도 적으로 규정하고 악랄하게 공격하는 게 한국 문화가 돼 버렸습니다. 욕을 하더라도, 여백은 남겨 두어야 한다”
드골 대통령
“나의 장례식은 콜롱베에서 가족과 마을 주민만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 주고, 정부관료들과 정치인들은 참석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의 묘비에는 내가 지녔던 직책은 기록하지 말고 단지 내 이름과 출생연도와 사망연도만 기록해 주기 바란다.” 어쩌면 이렇게 간단명료하고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유언을 확실하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드골이 사망 하기 18년 전이었다니 그의 죽음을 맞이하려는 마음자세와 구차스러운 형식 그리고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허례허식을 미리 차단하려는 의지가 한 눈에 보인다.
이 유언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그를 국가유공자를 모시는 팡테옹 묘지를 포기하고 그의 평생 삶의 고향인 콜롱베 그것도 공동묘지의 한 구석에 그곳 공동묘지의 다른 누구와도 차이가 없이 조촐한 묘지를 조성해 주었다고 한다.
묘비에는 그의 유언대로 “샤를르 드골 1890-1970 그 아래에, 이본느 드골 1900-1979”만 써 있다고 한다. 유언을 남긴 사람이나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순수하고 거짓 없는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 진다. 단순 명쾌한 그들의 죽음에 대한 자세가 부럽다. 정치계를 개혁하려는 국민투표의 부결을 받아 들여 곧장 퇴임하고 콜롱베에서 생을 마감한 프랑스의 영웅 드골을 기리려는 파리의 ‘드골 공항’이 그를 잊지 않게 해준다.
앞으로 대통령들이 불행하게 말년을 맞이하는 없도록 바라면서 어느 분의 글을 소개합니다
역대 대통령 취임 연설에는 전임자 비난과 울분·원망 잦아… 애써 칭송하고 감싼 美와 대조 기나긴 역사에서 대통령은 짧은 단막극의 임시 배역일 뿐… 前정권 비난에만 매달려서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 발생 후 3년여 만에 취임했다. 실업자들은 거리로 흘러넘쳤다. 전임 후버 대통령의 무능은 누구도 변호할 수 없었다. 거덜난 나라를 물려받은 루스벨트는 취임식에서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시선을 모은 뒤 몇 분 동안 전임자의 실패를 비판해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취임사 첫마디는 "존경하는 후버 대통령"이었다. 그는 후버의 공화당 정권을 조금도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도 미국은 감사해야 할 것이 많다"고 감싸고 나왔다. 같은 해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올랐다. 히틀러나 루스벨트나 처참한 경제를 유산으로 받았다. 두 사람은 똑같이 재정 지출을 늘려 인프라를 건설했고 중화학공업을 일으켰다. 둘은 그렇게 장기 집권하며 국민을 대공황 수렁에서 구해낸 영웅이 됐다.
하지만 앞선 정권을 대하는 태도는 극명하게 달랐다. 히틀러는 취임사에서 이전 정권의 부패와 타락을 집중 공격했다. 히틀러는 연설 때마다 전임자들을 비난해 박수를 받았다. 그가 유대인을 처형하고 반대파를 숙청한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루스벨트는 인디언과 흑인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히틀러처럼 거대한 스타디움에서 군중을 선동하기보다는 벽난로 옆 라디오 연설로 국민과 조곤조곤 대화하는 쪽을 선택했다. 두 지도자가 12년 뒤 자기 나라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미국 대통령들을 연구한 김봉중 교수(전남대)의 책을 읽다가 문득 우리 대통령들의 취임사가 궁금해졌다. 역시 취임사에는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었다. 열두 대통령마다 자신이 '새 시대' '새 국가' '새 역사'를 열었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삼천만 남녀가 새로운 백성을 이룸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로' 했다고 했고, 윤보선 대통령은 자신을 '제2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라고 했다. 대한민국과는 다른 공화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라는 말인가. 박정희 대통령은 "단군 성조(聖祖)가 천혜(天惠)의 이 강토 위에 국기(國基)를 닦으신 지 반만년"을 들고 나오더니 "연면히 이어온 역사와 전통 위에… 우람한 새 공화국의 아침이 밝았다"고 했다. 5000년 만의 새 공화국 출범이라는 뜻인가. '임시 관리 정부'를 자칭했던 최규하 대통령에 이어 등단한 전두환 대통령 역시 '구(舊)헌법, 구(舊)정부 등의 구시대적 논리로부터 결별한' 새 공화국 출범을 비장한 어투로 선포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 시대',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도 바로 앞 정권과 차별화하려는 표현이었다.
전임자의 업적을 칭송한 사례가 딱 하나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정권을 물려준 친구에게 존칭어까지 써가며 '평화적 정부 이양의 역사적 선례를 세우신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반대로 "이승만 전 대통령의 국가적 손실을 초래한 식민지 외교(윤보선)"라며 직설적으로 비난하거나 "(IMF 외환 위기에 대해)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금할 수 없다. 이러한 파탄의 책임은 마땅히 밝혀져야 한다(김대중)"고 원망한 사례가 적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은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면서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 청산을 선언하기도 했다.
윤보선·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의 건국 업적을,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의 공업화 업적을 평가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 때는 '차떼기 헌금'으로 통하던 정치권과 재계 간의 불법 정치자금 관행이 정리됐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 화해, 외환 위기 극복을 말하면서도 전임자 이름 석 자 한번 불러주지 않았다. 미국의 대통령들처럼 취임 연설 때 링컨, 루스벨트, 조지 워싱턴 등 전임자들을 칭송하는 풍경은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우리 대통령들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면 기나긴 역사에서 자신은 짧은 단막극의 임시 배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깡그리 잊는 듯하다. 그래서 새 공화국의 주인공으로서 새 역사를 쓰게 됐다는 착각 에 빠져 앞선 정권들을 지우고 청소하는 일에만 열중하는가 보다. 노무현 정권 때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 남북 정상회담 성사 과정에서 오갔던 자금 거래를 수사했고, 이명박 정권은 노무현 대통령을 부패 혐의로 수사하다 결국 자살로 몰고 갔다.
박근혜 정권이라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자원 외교 비리를 수사하는가 하면 포스코와 농협을 몇 달씩 샅샅이 뒤졌다. 4대강 사업에도 칼을 휘두르더니 가뭄이 닥치자 슬그머니 물러섰다. 이번엔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강해지자 청와대가 자기들 공을 강조하기 위해 "역대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고 꼬집고 나왔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 해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을 내뱉은 꼴이다. 우리 대통령들은 언제까지 전임자에게 책임을 떠넘길 것인가. 조선일보에서
첫댓글 화무십일홍이라 지고나니 아시움만 맴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