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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가 되기 싫은 한 인간의 이야기(복낙원으로 가는 길)
존 밀턴이 실낙원과 복낙원을 썼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으니 그 내용을 알지 못하지만, 필자는 내세에 치우친 종교적 낙원보다는 현세에서의 낙원을 먼저 고민해야 하는 실용적 입장에서, 공정한 사회를 낙원으로 규정한다. 공정(公正)은 상대가 존재함으로서 생겨난다.
태초의 인간인 아담은 에덴동산(낙원)에서 혼자서 살았다고 한다. 혼자 사는 세상에는 공정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선과 악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선악을 구별하였다면, 존재가 곧 선이고 존재의 소멸이 악이었다. 그건 본능일 뿐 선악이 아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존재에 불리하다고 그를 돕는 배필이 지어졌났다. 하와가 지어졌다는 사실은 인류 최초로 공동체가 출범했다는 것이고, 비로소 나 아닌 남을 배려해야 하는 의무가 이 땅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이후 그들의 자손인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고, 복수의 인간들에 의한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공정과 불공정이란 개념이 인간의 뇌(영혼)를 본격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인 최초의 살인도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이고 가인의 제사는 받아 들이지 아니한 불공정에 불만을 품은 질투심에서 빚어진 것이다.)
존재에 유리함은 다수(공동체)를 살리는 일로 외연이 확대되어 선(善)이 되었고, 존재에 불리함은 구성원 모두의 존재에 불리함으로 외연이 확대되어 “공공의 적”으로 비난 받으며 악(惡)으로 규정되었지만, 태초부터 지금까지 공동체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존재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 타인을 자기의 종(노예)으로 삼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의 이기적인 행위를 미화(찬양)하는 이념을 만들고, 그 이념으로 사람을 뭉치게 하여, 다른 공동체(이민족)를 파괴하고 약탈하는 짓을 저질렀고, 그런 자를 영웅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그로서 폭력이 인류 출현 이후 오늘 날 까지 인간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폭력(무력)이 지배하는 인간세상의 한심한 모순을 성찰한 현자들이 나타나서, 윤리와 도덕과 종교가 만들어졌고, 인간의 집단이 커져서 국가라는 거대한 공동체가 등장하자, 학교가 세워져서 겸손과 사랑을 호소하는 윤리. 도덕교육이 강화되었고, 다른 일면으로는 공정할 것을 강제하는 법률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법을 영어로 rule(자) 이라고 하는 것도, 도량형의 통일이 곧 공정이라는 의미인데, 고래로 부터 저울(공정)을 속이면 엄히 처벌했다. 인류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대조직인 국가 간의 전쟁과 약탈, 환경파괴는 끊임없이 지속되어 인류를 멸망시키는 지경까지 몰고 갔으며, 오늘날은 국제법 까지 등장하고 있지만, 국가 간의 침략과 약탈은 지금도 자행되고 있다.
인류의 등장 이래로 존재했던, 세상의 법이란 법은 모두 공정한 사회를 구현하려고 만들어 낸 것이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법이 있어도, 결코 불공정의 꿈을 버리지 못하였다. 불공정으로서 얻는 열매가 선악과 처럼 너무나도 매혹적이고 달콤한 때문이었다.
힘(권력)이 있으면 자신만은 예외가 되었고,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인간의 "권력에의 의지"가 자기만은 예외가 되고싶은 바로 거기서 태어 났고, 그래서 권력과 불공정이 짝짓기 하는, 초불공정 사회가 코로나 바이러스 변종처럼 태어나기도 하였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불공정한 야합일수록 공정의 분칠을 진하게 칠해 왔고, 역설적으로 그 분칠이 "공정사회 구현"의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김영란법”이 탄생하게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미투”가 성적인 문제를 넘어서, 사회 부조리에 대한 “내부 고발 장려와 고발자 보호”의 정신운동으로 까지 확산되었다. 거기에 더하여서, 불공정행위가 들켰을 때 잃게 될 고통의 크기가 불공정으로서 얻는 이익의 달콤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처벌하는, 부정이득 몰수. 추징의 법까지 만들어져서 개인의 욕망이 불공정과 유착하는 짓을 응징하기 시작했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정신을 살려야 한다는 가치관이 인간사회의 불변의 진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를 파괴하고 나만이 행복해지는 세상은 이 땅 어디에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단 한명이라도 더 행복해지는,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이 주어지는 세상이, 바로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에덴동산(낙원)이자 사랑이 충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이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게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우리의 의심(불신)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우리 모두가 심판관이 되어서, 큰 소리로 “당신 위법이야!” “ 당신 그런 짓 하지마!" "당신아웃!” 를 손가락으로 적시하고 외치면서(인간은 자기를 지적하여 말하지 않으면 남들이 모르는 줄 알기 때문에 반드시 "너!"라고 지적해서 말해야 한다.), 낙원을 지키기 위해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촛불 명예시민혁명의 정신이자 공동체를 사랑하는 참여정신인 것이다. 불공정한 사회분위기가 만연되어 있으면 인간은 공공연히 내 놓고 위법을 저지른다. 그리고 수많은 불공정 자들이 자기가 누리고 있는 불공정한 사회를 지속시키려고 궤변을 만들어 낸다. 그런 정신문화 의식을 쇄신하는 것이 개혁이고 혁명이고 거듭남이고 사랑이다.
필자는 사랑이란 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그렇게 단순하고 쉬운 개념이 아니라, 이런 이치를 아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그 길에 한 걸음이라도 동참하는 공정으로 가는 길이 복낙원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한다.
"당신! 끼어들기 하지 마세요!"
"당신! 쓰레기 함부로 버리지 마세요!“
"당신! 위법이야!"
이런 외침이 진짜로 인류를 사랑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인간사회는 한순간도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공동체에서 사랑이 없어지면 인간은 인간을 향한 늑대가 되고 만다.
오래 전에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쓴 <세상을 넓고 할일은 많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피난 시절 방천시장인가에서 신문배달을 했는데, 부지런한 학생이 아무리 일찍 일어나 신문을 팔아도, 신문을 주고 돈을 받으니 거스름돈을 거슬러 주는 일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뒤 늦게 쫒아 온 아이들에게 신문고객을 빼앗겼던가 보았다. 그래서 아예 신문부터 쫙 뿌리고 수금은 나중에 하였더니 시장을 독점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는데, 당시에는 그 꾀에 탄복을 하였지만 지금은 그건 본받을 만한 사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세상에 나눠주는 일과 내가 내 먹을 만큼 만 벌고 다른 사람에게도 돈을 벌 기회를 주는 일을 두고서 어느 게 더 선인가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노동 시간을 절약한 사상은 본 받아야 하고, 시장을 독점한 사상은 본받지 말아야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할 수 있다. 헤르만 헷세도 남는 시간을 유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유언처럼 남긴 바가 있으니 이는 나만의 생각만은 아닌 성 싶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하는 말(2)
존경하는 인간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이름 지은 코로나 바이러스 19(COVID-19)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하는 말(1)을 쓴 이후로 다시 (2)를 전합니다. 내가 인간과 인간들 사이의 접촉을 통해서 전파된다는 것을 알고 인간들은 나를 감시한다고 인간들 끼리 누가 누구와 접촉하는지를 찾아내는 위치 추적 앱을 만들어 내었다고 합니다. 대단한 순발력입니다만 나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살아남아야한다는 일에 모두들 정신이 팔려 있으니 이게 장래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류와 교감의 자유성을 얼마나 구속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두려움도 지니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16,17>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16 그가 모든 자, 즉 작은 자나 큰 자, 부자나 가난한 자, 자유자나 종이나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숫자를 지닌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거나 팔 수 없게 하더라.
18 지혜가 여기에 있으니 지각이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숫자를 헤아려 보라. 그것은 한 사람의 숫자이니, 그의 숫자는 육백육십육이니라.』
계시록에 나오는 “표”를 두고 바코드라고 해설하는 종교인들의 설교가 있는데 그럴듯한 해설입니다만 사실 계시록은 모두가 상징입니다. 상징은 해석하는 사람 자기 마음대로가 정답이니 오늘의 시대가 계시록의 예언이 맞아 떨어지는 시대라고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계시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라고 하지만, 인간은 자기가 예언하는(꿈꾸는) 그대로의 인간으로 형성된다는 게 인간의 타고난 속성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고 주어진 시간 안에서 그 꿈을 창조해 나갑니다. 창조적 본능 그건 인간의 인간다움을 확인해 주는 원초적인 삶의 에너지 입니다. 창조를 통해서 기쁨을 얻고 보람을 누림으로 창조에 몰두합니다. 창조에 몰두하는 인간은 창조의 아이디어를 자연에 대한 관찰과 체험과 독서, 다른 인간과의 정보의 교류를 통해서 얻어 냅니다. 서구 사회는 성서가 기초로 된 사회이며 주야로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기도 하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서구인들은 성서에서 살아갈 꾀를 유추해내는데 익숙하게 됩니다. 그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이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에 의지하여 오래 전부터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는 꿈을 꾸어왔고 일일 생활권을 만들기 위한 교통수단을 개발하고 통신수단을 개발하고 결국에는 인공위성과 인터넷과 스마트 폰으로 세계를 하나로 묶는데 성공했습니다. 지금 인간이 만든 전자정보기술은 가공할 수준에 와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초월한 시대에 와 있습니다. 인간 이세돌이 인공지능과 바둑을 두어서 연전연패한 것이 이 사실을 입증합니다. 결국 인간은 계시록에 기술 된 그대로 자신들이 만든 “표”를 자신들의 손이나 머리에 심으려들게 될 것입니다.
인간 여러분!
인공지능은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이 인간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역으로 통제에 들지 않는 인간들을 아예 배제하기 위해서) 만든 것일 뿐이고 신이나 코로나 바이러스가 도입하라고 명령해서 만든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666“ ”짐승의 숫자"라는 말의 의미는 인간이 부호화된 체계에 갇히는 순간 자기감정 발현의 주체적인 위치를 상실하고 누군가로 부터 통제를 받아 감정 표현을 못하게 되는 짐승의 위치로 추락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 누군가"는 이미 “빅브라더”라는 말로 인간들 사회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빅브라더에 의해 인체에다 숫자나 기호를 바코드처럼 심으려는 시도는 이미 여러 군데서 일어나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게 동물의 몸에 부착하는 생태연구를 위한 위치 추적장치 입니다. 이게 진화된 게 성폭행범의 재발 방지나 코로나 격리자 무단이탈 방지목적으로 채우는 전자팔찌나 전자발찌 입니다. 이 기술이 계속 진보되어 인체에 무해하고 생체 에너지에 의해 작동되는 전자 칩을 인간의 피부 내에 심게 되면 인간은 지구상 어디에도 자신을 숨길 곳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인공지능의 기술은 어디까지 진화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 감정 표현의 자유성이 뿌리째 말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여러분!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는 어둠이 필요합니다. 몸도 영혼도 쉬어야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에너지가 충전되는 때문이지요. 어둠 속에서 쉬는 동안 은밀한 자기만의 쾌락을 누릴 권리도 인간의 자유권에 속합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폭력을 예방 한다고 인간들은 더 큰 폭력을 숨기고 있는 감시통제시스템으로 자신을 몰아넣고 있습니다. 정보를 사용하려고 처처에서 정보이용 동의서를 작성하게 합니다. 신용카드는 개인의 생활정보를 고스란히 노출 시킵니다. 무슨 식당을 자주가고 무슨 음식을 좋아하며 주로 어느 동네 어느 가계를 다니며 무슨 물품을 얼마나 사는지, 아침에 쓰는지 저녁에 쓰는지 다 노출 됩니다. 위치추적 앱은 누구와 밥을 먹는지 누구와 어디로 이동하며 무엇을 하는지 다 들여다 볼 수 있게 됩니다. 그걸 들여다보는 눈동자가 있다면 "인간들의 홀딱 벗은 모습"을 보며 킬킬거리고 웃겠지요.
인간 여러분!
666의 칩을 인체에 심으면 주민등록증이 필요 없고 운전면허증도 인감증명서도 B/C카드도 필요 없어 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서 666의 칩을 조종하는 조직이 만들어 질 것입니다. 그리되면 인간은 은밀하게 사랑도 나누지 못하는 돼지우리에 갇힌 짐승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생방송인 줄도 모르고 불평불만을 말했다가 날 것으로 생중개가 된 방송사고 같이 인간 내면의 솔직한 감정 표현이 불가능해지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 여러분!
조직이 만들어지면 조직은 늘 인간을 구속하고 통제하려 듭니다. 구속과 통제는 인간이 태초부터 누렸던 자유를 제한합니다. 자유를 제한하려는 인간조직의 모든 그릇된 행위에 대해서 "그건 잘못이야!"라고 외쳐야 합니다. “자유에의 의지!” “방하착!” 다 같은 말입니다. 인간은 굶을 자유도 있고, 혼자서 스스로를 자위할 자유도 있고, 내가 싫은 사랑을 거부할 자유도 있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사회에서 "자유"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공공의 이익과 공공의 질서, 또는 민주화라는 말로 포장되어 다수결로 결정된 "정의 같지도 않은 정의"에 의해 기본적으로 보장 되어야 마땅한 개인의 자유 조차도 무참하게 파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또 다시 세상을 선과 악으로 분별하는 무지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선악은 관념의 산물이지 진리(참)가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사망에 이른다는 이야기를 상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실로 이해하는 인식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인간은 영원히 죽음(무지몽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게 인류가 지고 가는 근본적인 원죄(무지한 죄)입니다.
왜? 인간들은 동료인 인간을 선이라는 이름으로 속박하고 통제하려고 듭니까? 선과 악은 누가 개념 짓고 판단합니까? 신이 판단한다고, 법이 판단한다고 외치지만 신과 법을 대리한 누군가가 판단하겠지요. 그 판단은 늘 완전무오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게 맞습니까? 신을 믿는 방법이 틀렸다고 처벌하는 법을 만들면 인간의 일상은 늘 종교재판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누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으며 법이 늘 정의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불변의 진리는 선악이 아니라 " 인간은 생명이고 본디 자유롭게 창조되었다"는 유일한 사실 그 하나뿐입니다. 얼마 전에 북한의 김정은이 잠적하였을 때 세계인들의 궁금증이 코로나에 걸린 게 아닌가하는 의심을 증폭시켜갈 때 미국의 트럼프가 이런 소리를 하더군요. “김정은, 어떤 상황인지 알지만 말할 수 없다” 빅브라더인 나는 다 알고 있다는 소리처럼 들리더군요.
인간 여러분!
아무리 코로나가 무섭더라도 사생활의 자유, 은밀함의 자유에 대한 가치를 포기하면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 갈 수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생활을 터트려서 재미 보려는 언론이나 정치가들도 이제 그만 이 땅에서 나와 함께 떠나 주시길 바랍니다. 자유권적인 기본권은 생명이 생명으로 존재하기 위한 삶의 초석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