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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묵상글 ( 연중 제5주일. - 하루면 넉넉하다. 등 )
* 06 : 55, 이수철 신부님 묵상글 추가.
** 07 : 50, 김찬선 신부님 묵상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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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연중 제5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루면 넉넉하다>
하루면 넉넉하다
오롯이 기도하고
기쁘게 찾아가고
반갑게 맞이하고
해맑게 어울리고
기꺼이 내어주고
따뜻이 품어주고
마음껏 사랑하고
하루면 넉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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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연중 제5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픔이 괴로움이 되지 않고, 괴로움이 불행이 되지 않도록
** 05:55 현재
‘작은형제회 – 나눔방 – 말씀 나눔’에 02.04. 03:23 , 제목만 게시됨
** 위는 삭제되고,
아래와 같이 제목이 바뀌어 게시되였으나 내용은 올라오지 아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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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레오나르도 2024.02.04 07:36
연중 제5주일-아픔이 고통이 되지 않고, 고통이 불행이 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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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공동체 매체에 아래와 같이 게시되였음
연중 제5주일-아픔이 괴로움이 되지 않고, 괴로움이 불행이 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셨다.”
고통과 불행
오늘 연중 제5주일은 고통과 불행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통은 곧 불행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아갑니다.
불교는 고통과 불행은 다 자업자득 곧 자기 업보이기에
누가 어떻게 구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업보를 끊어 소멸해야 하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업보를 쌓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하고,
고집멸도의 길을 알아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조금 더 풀어 얘기하면 온갖 욕심과 집착이 고통의 원인임을 깨달아
고통에서 벗어나고 열반에 도달하는 길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불교의 이런 가르침은 자기 아닌 누구에게 고통의 탓이나 원인을 돌리거나
고통을 누구에게 의지하여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탁월합니다.
사실 고통이란 자업자득인 면이 큽니다.
고통이란 우리말로 풀이하면 괴로움과 아픔인데
아픔/통증은 아픔일 뿐 아직 괴로움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행무상하고 제법무아하며 일체개고의 이치를 인정하지 않고,
‘왜 고통이?’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왜 내게만 고통이?’라고 거부의식을 가지는 순간 아픔은 괴로움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니까 온갖 질병이 육체적인 아픔과 통증이라면
고통과 괴로움은 마음 곧 심리적인 통증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래서 일체유심조 곧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임을 깨닫고
그러니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도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깨달으면
아픔이 괴로움으로 발전하고 고통이 불행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가르침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괴롭지 않고 불행하지 않는 길을 제시할 뿐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여기서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생은 무상하다는 것은 그리스도교도 가르치고
그러니 이 세상에선 영원을 찾지 말고 저세상에서 영원을 찾으라고,
이 세상과 저세상에서 모두 행복을 주실 하느님 안에서 만족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대 데레사도 이렇게 기도하지요.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리고 이 하느님은 네 고통과 행복은 네가 해결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고통에 나 몰라라 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말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고 똑같은 고통을 당하시며,
당신 상처로 우리 상처를 낫게 하시는 분이시고,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 온갖 병고에 시달리는 이를 찾아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육신과 마음의 병만 고쳐주시는 분이 아니고,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까지 고쳐주시는 분이시며,
이 치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구원이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치유가 목적이 아니고 언제나 구원이 목적입니다.
사실 치유가 목적이라면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치유해주셨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 친히 말씀하셨듯
나병 환자가 많았어도 나아만만 치유해주셨고,
과부가 많았어도 사렙다 마을의 과부만 구해주셨습니다.
아무튼 주님을 믿는 우리는 아픔이 괴로움이 되고 괴로움이 불행이 되는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괴로움을 통해 구원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여러분 가정안에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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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연중 제5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과 관련하여 고통과 기도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제 1독서에서 욥의 고통은 인간 고통의 본질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고통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 고통에 담겨진 하느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시며 당신과 일치하시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인식함으로써 고통을 견뎌내다보면 인내를 낳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굳건해 집니다.
우리는 기쁘게 받아들인 그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분은 고통속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열어주며 이 길을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십자가 고통의 신비로 이끄십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함께 할 때 그 고통은 더 이상 고통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을 때에는 고통이 매우 적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기심에 의해 야기된 고통으로부터 분노와 원망, 자기연민, 신랄함, 절망에 의해 야기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통을 받아도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주 행복한 사람으로서 참되고 완전한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안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세상의 조류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감내하는 성 치쁘리아노가 얘기한 일상의 순교를 사는 것입니다. 특히 세상의 고통받는 이들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고통의 본질을 바라보게 될 때 기도하게 됩니다.
무엇보다고 기도는 은총입니다. 그 은총은 시작이요 수단 방법이며 마침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말이 많을 때가 아니라 ‘나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정말 괴롭습니다 왜 이렇게도 침묵하고 계십니까?’ 하고 하느님께 호소할 때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그리워 하는 갈망이 마음안에 있게 될 때 기도는 시작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 자체가 훌륭한 기도입니다. 기도는 마음을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고 단순하고 순수하고 솔직하게 합니다. 우리의 문제와 상처를 해결하기 위한 참된 치료법은 기도라는 것을 성인들의 기도체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항구히 기도할 때 우리 생활은 점차 순수해져가고 거룩해지며 올바르게 되며 생활에 영적 리듬이 생깁니다. 기도의 가장 큰 기적은 기도하는 영혼의 마음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차적으로 하느님께 향해지면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많은 인내를 필요 합니다. 기도는 한 영혼이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로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하나의 의무이면서 신앙의 본질이며 사랑의 행위이며 복음의 증거입니다.
바로 이런 기도 체험을 통해서 자신의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다른 이의 고통을 사랑으로 함께 할 때 그곳에 참된 복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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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거룩한 성체 속에 나타난 지극히 성스러운 얼굴
뤼뇽군도(인도양 -1902년)
많은 어른들은 처음에는 아무런 진기한 일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잠시 동안 성체께 조배드리자 그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이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기적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중앙제대 가까이로 몰려들었다. 또한 특별한 것은 그리스도의 이 현현을 성광의 뒷쪽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성광의 전후좌우에서 사람들은 이 구세주의 얼굴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전등불을 끄고, 또 촛불도 꺼서 성당 안이 더욱 더 어두워질수록 그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은 보다 더 찬연히 빛이 났다.
시장(市長)도 두 딸과 함께 성당에 와서 이 기적을 목격하였다. 심지어 이 기적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하여 확대경을 가지고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대 주위만을 크게 볼 수 있었을 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오히려 눈으로 그냥 보는 것보다 더 잘 보이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것은 호기심에서 몰려온 섬 원주민들까지도 예외없이 그 기적의 현현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단지 성당에 들어 서기만하면 제대에 모셔진 주 하느님의 모습이 이미 그들에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대략 만 명 정도가 주 예수를 경배하는 축제일에 성 안드레아스 성당에 왔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서명으로써 이 사건의 진실성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 기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톨릭에 대해 커다란 공감을 갖도록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결사대는,
“그 모든 것은 전적으로 교회가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불만을 갖고 있는 성직자들의 책략이다”라는 말을 퍼뜨림으로써 이런 좋은 영향을 깨뜨리려고 하였다.
오후 2시경 성광에서 이상한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빛을 발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대신 또 다른 기적의 현현이 나타났다. 성체 한가운데에서 성체의 위아래로 2-3cm 가량씩 더 솟아나온 고귀한 십자가가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성당이 길어서 뒷좌석에 었던 눈병에 걸린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제단 위에 있는 어떤 것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오늘은 이 십자고상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성 안드레아스 성당의 이러한 성체의 현현은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고 사람들이 감사의 조배를 드리기 위하여 탄툼 에르고(Tantum ergo) 를 불렀을 때 사라졌다.
라콤 신부의 증언 이외에도 직접 목격한 다른 증인들의 수많은 증명서들이었으며, 그 증언은 모두 일치하였다. 또한 이 가운데는 비신자들도 성체의 기적을 입증한 경우가 여러 차례 있다.(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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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연중 제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
연중 5 주일입니다.
<제1 독서>에서, 욥은 기도를 통해 인생의 허무함 속에서도 “기억해주십시오.”(욥 7,7)하며, 하느님께 희망을 둡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오늘 <복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의 전달자로서,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1고린 9,19), “모든 사람의 모든 것이 되었음”(1고린 9,22)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 선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해 줍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기도생활’과 ‘활동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활동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활동’과 ‘치유구마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셋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를 우리는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과 ‘봉사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다 담고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시고, 몰려든 많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섬기는 장면입니다. 곧 ‘섬김의 봉사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한 구절에만 주의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
이는 손을 잡자 열이 내려가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치유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켜지자 치유가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악습이나 결함이 고쳐져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잡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잡아주시니 우리가 고쳐진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치유 받으면 믿을 것처럼 여기지만, 믿음이 치유를 불러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유보다 먼저 앞서는 치유를 가져오는 ‘믿음’입니다.
<둘째 장면>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에 당신 삶의 중심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토록, 당신의 삶은 아버지 성부와의 친교와 유대 안에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사제직’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지상 삶의 두 가지 차원, 기도와 활동의 삶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결코 ‘기도 없는 활동’이나, ‘활동 없는 기도’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곧 ‘기도는 활동이 되어야 하고 활동은 기도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활동에 앞서 먼저 기도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기도가 곧 활동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복음 선포”를 위해 다른 이웃 고을들로 찾아가시는 장면입니다. 곧 ‘선포와 증거의 예언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 곁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마르 16,15).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이 사명을 우리의 사명으로 받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곧 그것은 ‘먼저 하느님과의 유대와 친교를 앞세우는 기도의 삶’이요, ‘선포된 복음을 영접하고 그를 선포하고 증거 하는 삶’이요, ‘형제와 이웃에게 봉사하는 섬기는 삶’입니다. 이러한 사명의 삶은 당신의 사랑과 구원의 표시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 은총, 이 사랑을 입고서 이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그 일을 하도록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주님!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당신 뜻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이 제 삶이 되게 하소서!
제 뼈 속에 갇힌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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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연중 제5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복음 선포의 소명을 인식해야 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살리고자 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병에 시달리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셨는데 ‘고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원어‘테라퓨오(therapeuo)’는 ‘존중하다. 사랑하다. 돌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히 병을 고쳐주셨다는 것보다는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으로 존중해 주고 사랑해 주고 돌봐줬다는 의미입니다(홍승모). 몸이 약해지면 마음까지도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또한 병이 깊거나 길어지면, 신앙마저 흔들리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라고 한탄과 원망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 주님께서 사랑으로 함께 아파하시면서 이겨내길 바라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열병은 우리말로 홧병, 울화병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을 당해서 가슴에 응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정신 불안과 소화불량,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쓰리고 울렁거리는 등 여러 반응이 다양하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여성 암 환자 85%가 화병이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음에 쌓인 것을 풀지 못하면, 비우지 못하면 정신적 장애는 물론 육체적인 장애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응어리를 풀어야 합니다. 먼저 주님 안에서 용서와 화해를 이뤄야 가벼워집니다.
사실 모두가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더 많이 지배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자기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것이 생각처럼 보상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열병을 앓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남한테 더 많은 사랑을 받으려고 하고, 남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엄격한 환경에서 늘 통제받고 자기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남을 지배하고 과시하려는 모습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앓고 있는 열병입니다.
이 병의 치료를 위해서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명의이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능력을 지니신 주님,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으시고 섬기러 오신 예수님,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면서도 못 박는 원수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겉모양을 다스리지 않고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근원을 치유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면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남 탓을 멈추고 내가 변합니다.
열병이 인간을 괴롭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병에서 구원에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에 시달리며 고생하는 이들, 귀찮고 짐스럽게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겨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인근 마을로 널리 퍼졌습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만하거나 인기에 연연해하지 않으시고 이른 새벽 홀로 외딴곳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조금 잘 나가면 자신이 무슨 큰 능력이 있는 양 으스대기 쉽습니다. 자신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능력의 원천인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공을 돌리고 오직 그분께 의지하십니다. 파견받은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하신 행동이 외딴곳을 찾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외딴곳으로 가서 한참 기도하고 계실 때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께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7).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인정해 주고 알아주는 추종자들 곁에 머물길 좋아합니다. 요즘도 우리는 패권 정치니, 팬덤 정치니 하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물론 팬덤은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것들에 연연해하지 않으시고 다른 곳으로 떠나십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 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9).
예수님 삶의 중심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바로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께 있었기 때문에 인기나 유명세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길을 떠나 복음 선포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것은 명성이 아니라 자신이 이루어야 할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 즉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아직 캄캄할 때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신 까닭입니다. 기도함으로써 하느님과 하나가 되셨고,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뜻에 맞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항상 일깨우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삶이 곧 우리의 삶이기를 기도해야 하고 또 행함으로써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우리 안에 간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행했듯이 우리도 이런저런 일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곳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알고 일어서서 모두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가신 기적을 보여 주시기 전에도 산 위에 올라가 기도하셨고(마르6,46), 수난을 앞두고 게쎄마니에서 공포와 번민에 싸여서 간절히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습니다(마르14,32-39).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 사도로 삼을 때에도 먼저 산에 들어가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루카6,12). 기도는 우리를 안주하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가게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16. 19.22). 그야말로 바오로는 예수님의 삶을 사셨습니다. 바오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스스로 종이 되고, 약한 사람이 되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이 또한 기도하며 자신의 소명을 확인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기도하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가운데 앞길을 예수님의 길로 가꿀 수 있길 희망합니다. 멈칫거리지 않고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당당히 걸어야 합니다. 쉬고 있는 동료를 찾고, 주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주님을 알릴 수 있는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스승님이 평생 아끼던 책 한 권이 있었습니다. 스승님은 어려움을 대면할 때마다 방문을 꼭 걸어 잠근 채 그 책을 읽곤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책의 내용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제일 먼저 그 책을 꺼내 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책엔 이렇게 단 한 줄만 씌어 있었습니다. “껍데기와 알맹이를 구별하라” 주님 앞에서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껍데기인지 알맹이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알맹이를 만드는 한 주간 되시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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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연중 제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19년 8월 21일에 서울에서 뉴욕으로 왔습니다. 교구에서 저를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로 파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5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뉴욕에서 지내면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소셜넘버(SSN)를 받고, 운전면허증을 땄습니다. 말 그대로 따는 것입니다. 뉴욕은 한국에서의 운전면허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필기, 실기 시험을 보아야 합니다. 은행 계좌를 열면서 뉴욕에서의 첫 출발은 순조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전임 신부님의 열정적인 홍보 덕분에 신문사의 재정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2020년을 준비하면서 야심차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볼리비아에 ‘봉사활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LA에 있는 여행사 대표와도 일정을 조율하였습니다. 2달에 걸친 신문홍보 일정을 만들었습니다. 사순특강과 신문홍보를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버지니아, LA, 밴쿠버를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LA에는 한인성당이 많기에 세 성당에서 홍보 및 강의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꿈에 부풀게 2020년을 시작하였습니다. 장밋빛 인생이 제게도 시작되는 것 같았습니다. 뮤지컬도 보고, 박물관도 가고, 센트럴파크도 걸었습니다. 뉴욕이 저를 환영하는 것 같았고, 저도 뉴요커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욥은 이렇게 자신의 신세를 이야기합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하느님께 충실했고, 가족을 사랑했고, 이웃에게 기꺼이 나누었던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시련은 스나미처럼 밀려왔습니다. 재산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리고, 건강까지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누가 보아도 하느님께 버림받은 사람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음에 감사드렸다면, 나쁜 것을 주실지라도 감사드립니다.” 부푼 꿈을 안고 2020년을 시작한 제게도 시련이 스나미처럼 밀려왔습니다. 중국에서 시작한 코로나의 스나미입니다. 2020년 2월 한국은 코로나가 열병처럼 퍼져나갔습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미국에 있는 저를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발 없는 코로나는 1달이 못 되서 뉴욕으로 건너왔습니다. 2020년 3월 13일 미국은 사회가 문을 닫았습니다.(Lockdown) 박해의 시기에도 계속되었던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신문홍보와 사순특강도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그해 9월 10일 어머니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멀리 뉴욕에서 어머니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며 기도해야 했습니다.
교황님은 3월 27일 사순 제4주일 금요일 저녁, 코로나19 대유행의 시기에 특별 기도를 주례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홀로,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도록 인류를 초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구원자이신 주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낼 수 없도록, 우리가 치유되고 그분의 품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황님의 기도를 보면서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듯이,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코로나의 스나미도 지나가리라 믿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지만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개발, 발전, 성장, 자본’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인류가 잠시 멈추어 있는 동안 공기는 깨끗해졌고, 더불어 사는 생명은 풍부해졌고, 자연은 회복되었습니다. 일상의 소중함과 일상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가족과 친구와 차 한 잔 마시면서 대화하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었습니다. 동료사제들과 함께 하면서 코로나의 스나미를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신문홍보를 할 수 없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브루클린 한인성당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2020년 8월에 브루클린 한인성당에서 주일미사를 해 줄 수 있는지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브루클린 한인성당 공동체와 함께한 시간들은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커다란 선물이었습니다. 제가 뉴욕에서 5년 동안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브루클린 한인성당 공동체의 기도와 사랑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감사드립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미사를 끝으로 댈러스 한인성당으로 갑니다. 어디에 있더라도 브루클린 한인성당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해서 행복했습니다. 사랑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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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연중 제5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이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십니다. 사위가 돈도 버리고 집도 버리고 젊은 걸인을 따라 다는다는 소문 때문에 몸져 누었는지, 심한 병에 시달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어나서 시중을 들었다는 말에서 몸과 마음 모두 기쁨속에 있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하게 됩니다.
밤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한 여인을 고쳐 주었는데 이제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듭니다. 여러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는 기도하십니다. 아무리 바빠도 힘든 일이 있어도 주님은 기도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은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기도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내는것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 후 떠나가십니다. 다른 이들을 찾아 나서십니다. 한사람에서 여러 사람을 그리 다른 이들을 위해,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은 퍼져 나갑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 또한 퍼져 나갑니다.
주님은 하느님을 전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면 그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이 얼마나 좋은지 말하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모습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건내 준 사랑이 점점 퍼져나가는 것.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마지막 말에서 예수님의 사명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다는 그 말씀, 사랑을 전하기 위해,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알리기 위해 내가 왔다는 그 말씀에서 예수님의 사명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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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의식
제게는 매일 아침 행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커다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제게는 소중한 의식입니다.
잠에서 깨면 성호를 긋습니다.
그리고 잠시 앉아 잠에서 덜 깬 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마지막으로 오른손으로 다른 쪽 어깨를 세 번 두드립니다.
제가 저에게 해주는 무언의 ‘화이팅’입니다.
아침기도와 샤워를 하기 전 하는 저의 작은 ‘의식’입니다.
하루라는 커다란 시간 안에 작은 시간이지만 이 시간은 저를 희망 가득하게 만들고 힘차게 만듭니다.
누구나 이런 의식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없다면 작은 의식 한 가지를 만들어 보세요.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작은 의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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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연중 제5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한 남자가 약속 장소를 향해 서둘러 운전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의 차가 거의 거북이 수준입니다. 경적을 울리고 헤드라이트를 깜빡여도 속도를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자제력을 잃고 화를 내려는 순간, 차 뒤에 부착된 작은 스티커가 눈에 띄었습니다.
‘장애인 운전자입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이 문구를 보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고 조급함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화냈던 것이 미안했고, 그래서 오히려 그 차의 운전자를 보호해 주고 싶어졌습니다. 이제는 약속 시간에 조금 늦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이었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각자 나름의 이유가 담긴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고 말입니다. 앞선 이야기의 남자도 가까이 다가선 다음에야 뒤에 붙인 스티커를 볼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다가가야 그 마음의 스티커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전에 운전 면허를 취득한 뒤, 동창 신부 차로 운전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창 신부는 운전 전에 꼭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서 무언가를 가지고 왔습니다. A4용지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글씨 ‘왕초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종이를 눈에 잘 띄는 청색 테이프로 돌려 붙였습니다. 창피하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하니, 그래야 다른 운전자들이 배려해 준다는 것입니다. 초보운전인 줄 모르고 “왜 저렇게 운전하는 거야?”라며 화를 낸다면, 그를 죄짓게 하는 것이 아닐지 싶어서 창피해도 붙이고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한다고 화낼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마음의 스티커를 봐야 하고, 동시에 나의 감정 스티커를 상대에게 보이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함께 사는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찾아가셔서 손을 잡아 일으키니 열이 가십니다. 사위가 가족을 돌보지 않고 밖으로만 돌고 있으니, 화병이 날 만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바로 장모의 마음을 보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다른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 역시 예수님 앞으로 나옵니다. 그들 마음을 보시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즉, 병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이렇게 전하셨습니다. 마음을 보고 함께하면서 기쁜 소식이 선포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에 기쁜 소식을 알려야 합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요. 복음 선포만이 주님의 마음을 보고 주님과 함께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와 같이 우리 역시 복음에 동참해야 합니다.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의 마음에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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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나는 성공하는 것보다 쓰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존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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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연중 제5주일. 키엣 대주교님.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
오늘은 복음을 통해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반드시 말씀을 통해 전달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읽고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삶의 한 부분입니다. 복음은 반드시 말씀을 통해 전파되어야하며 주님의 제자인 우리는 말씀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사랑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말은 행동으로 실천될 때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지만 오늘은 직접 그녀의 손을 잡아주기 위해 그 곳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병이 나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과 존경의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악마에게 구속된 영혼은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악마의 구속과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금기와 미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세상의 구속에서 벗어나야 인간 존엄의 가치를 지닐수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닐 때만이 가치있는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바로 그 예입니다. 병마에서 벗어난 후 그녀는 곧바로 주님의 종이 되어 주님을 섬겼습니다.
선교는 복음의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야 합니다.
기도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하시기 위해 외딴 곳으로 가셨습니다. 새벽 조용한 시간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언제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자들 역시 길을 떠나기 전에, 선교를 하기 전에 주님의 힘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의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공의 원천은 바로 기도입니다. 성경을 읽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여야만이 설득력있는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자비의 삶을 스스로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있을 때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가 있을 때 세상의 가치가 되는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 전파의 길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희를 참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봅시다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루에 한 일들을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2.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한 복음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생각해 보십시오.
3. 말은 실천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는 과연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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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연중 제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02.04 06:44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찬미의 전사, 복음의 전사, 기도의 전사-
우리나이로 저보다 13세 많은 89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결같은 열정적인 사목자로의 청년같은 모습은 늘 신선한 감격입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늘 맨먼저 열어보는 교황님 홈페이지입니다. 교황님에게 참 놀라운 것은 사적인 시간이 없이 늘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적인 시간이라는 것이며 날마다 찾는 모든 이들에게 참 적절한 삶의 지침이 될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매달리고, 그의 백성들을 섬겨라.”
교황님을 방문한 스페인의 마드리드 교구 신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진리의 연인들이 되고 변화에 마음을 열라.”
역시 교황님을 만난 이탈리아 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새벽 카톡을 열어보니 수도원에 피정왔다가 갑작스런 대모의 죽음으로 장례미사차 돌아간 자매로부터 받은 메시지도 새로운 감동이었습니다. 특히 수녀님이 그 자매에게 주었다는 위로의 글이 저에게도 위로가 되었습니다.
“신부님, 선종하신 대모님, 하늘나라 가는 길 많은 교우분들과 잘 바래다 드리고 왔습니다. 슬퍼하고 있을 때 수녀님께서 보내주신 말씀이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죽음은 하느님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께는 죽음이 없으니까요.
잠이 저녁에서 아침으로 건너감이듯,
죽음은 우리의 시간에서
하느님의 영원으로 옮아가는 건너감이지요.
희망으로, 사랑으로, 믿음으로,
영원까지 함께 가자 하시는 주님 손 꼭 잡고,
오늘도 빛과 생명을 활짝 피우는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걷는 인생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가톨릭 평화신문’(2024.1.4.21쪽 하단부) 두 기사 내용도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1월24일 서품 받은 살레시오회 세 사제와 한 부제의 사진이 있었고, 바로 그 옆에는 1월28일 향년 43세로 선종한 서울 대교구의 젊은 사제의 사진과 더불어 1월31일 명동대성당에서의 장례미사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참으로 가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저절로 솟아나는 물음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때때로 떠오르는 물음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루하루가 하느님 주시는 참 좋은 선물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살아온 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부터 살 날입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이들의 과거를 불문에 붙이실뿐 결코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오직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의 삶을 주목하십니다. 그러니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을,
불행이 아닌 행복을,
어둠이 아닌 빛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빛이신,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이요 행복이신 주님을 결연히 선택하는 것입니다. 무지와 허무, 절망의 어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의 샘이신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요 주님을 본받아 주님의 전사로서 삶의 현장에서 영적전투에 최선을 다해 영적승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이 아니라 전사란 말마디가 적절하고 좋아 전사란 말마디를 씁니다.
오늘 제1독서 욥기의 분위기가 칠흑같은 절망의 어둠입니다. 희망이 빛살이 보이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때로 이런 극한 상황을 겪기도 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욥의 실감나는 적나라한 넋두리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날들을 나누어 받았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가는 구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욥같은 현실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꿈과 희망이 사라진곳이 지옥입니다. 이런 절망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자발적 결연한 선택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바로 화답송 시편을, 제1독서의 바오로를, 복음의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시편 저자처럼 찬미의 전사로, 예수님과 바오로처럼 복음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이보다 좋은 선택은 없습니다. 바로 무지와 허무, 절망에 대한 유일한 답입니다.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쳐주신다. 우리 하느님을 찬송하니 좋기도 하여라. 마땅한 찬미를 드리니 즐겁기도 하여라.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니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이 없네.”
화답송 시편은 얼마나 좋습니까?
시편의 하느님 찬미의 찬란한 빛이 지옥의 어둠을 환히 밝힙니다. 그러니 욥의 절망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찬미의 희망과 기쁨을 선택해 찬미의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처럼 불퇴전의 ‘복음의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으로 무지와 허무, 절망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은 얼마나 멋집니까! 욥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아무리 주님이 못마땅하고 불만족스러워도 욥을 선택하지 마시고 참으로 멋진 주님의 용사 바오로를 선택하세요.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의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그러니 욥이 아니라 복음의 전사, 바오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처럼 복음의 전사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복음의 무엇입니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 자체가 복음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생명을 주는 복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복음,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복음,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는 복음, 신망애의 삶을 살게하는 복음, 진선미의 삶을 살게 하는 복음입니다.
얼마나 좋은 복음입니까! 새삼 예수님 자체가 참 복음임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의 삶을 삽니까? 바로 오늘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하루 삶을 압축 요약합니다. 얼마나 영적전투치열한 예수님 하루하루의 삶인지요! 지칠줄 모르는 예수님의 열정이 놀랍습니다.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쳐주시고 이어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는 장면이 너무 생생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장면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고 우리 안의 마귀를 쫓아내실 분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모두인 예수님뿐입니다. 복음 선포에 저절로 따라 오는 치유이적이요 구마이적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따라 복음 선포에 충실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영육의 치유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희망을 잃고, 생기를 잃고 빛을 잃고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지요. 병든 이들도 많고 온갖 종류의 마귀들에 사로잡힌 이들도 많습니다. 참으로 영적건강한 이들을 찾아보기 힘든 현실입니다.
답은 복음선포뿐입니다. 참으로 복음을 사랑하고 받아들여 모두가 불퇴전의 복음의 전사, 주님의 전사, 빛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 선포의 원천은, 분별력의 지혜의 원천은, 이런 복음 선포자로서의 사명감을 확인할 수 있는 원천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삶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외딴곳에서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기도의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와 함께 바치는 찬미기도와 더불어 외딴곳에서의 개인 관상기도도 필수입니다. 참으로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를 이뤘던 예수님의 밤기도였습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외딴곳에서의 깊은 관상기도를 통해 영육을 충전시키고 사명감을 새롭게 확인한후, 다시 홀가분하게 성과에 집착하거나 “모두 스승님을 찾는다”는 말에 현혹되지 않고, 자유롭게 복음 선포에 여정에 오른 예수님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에서 얼마나 복음 선포의 사명감에 충일한 예수님의 삶인지 잘 드러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십니다. 복음 선포와 더불어 영육의 치유요 자유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4년 올해를 기도의 해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 시편 저자처럼 찬미의 전사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예수님처럼 복음선포의 전사가, 복음의 전사가, 기도의 전사가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외딴곳 성전에서 거행되는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육의 건강과 더불어 당신의 일당백의 주님의 영적전사, 찬미의 전사, 복음의 전사, 기도의 전사로 만들어 주시고 우리 모두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마태8.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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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연중 제5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사람들은 계속 찾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더는 그들의 원위를 채워주시려고
그곳에 머물지 않으시고
다른 고을로 떠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은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들은 치유 기적과 구마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적을
언제까지나 갖고 싶었습니다.
이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즉 치유와 구마를 원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들을 통해서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려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 어려움이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해결하기에는
우리의 힘이 너무 미약하다는 것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도움과 은총을 청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주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기다림이 필요한데
그 기다릴 수 있는 힘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희망의 마음이 줍니다.
즉 우리는 직접적으로 치유나 구마의 기적을
일으킬 수 없지만
그것을 청하고 기다릴 수 있는
희망의 기적은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시려고 하신다는
것에서 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어려움이 해결되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해 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즉 하느님을
우리의 청을 들어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해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문제 해결이 급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희망이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다면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한 발 더 내어 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 이름은 위로와 희망입니다.
그 위로와 희망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힘이 될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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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 미사
http://www.ofmkorea.org/ofmhomily/544540
김명겸요한 2024.02.03 08:40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찾아오십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혼자 만나러 가시는 것이 걱정되는지
형제들이 같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아보고
며칠의 여행길을 거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만나리라고 생각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이야기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께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에게 부탁을 하고 기다리신 다음
듣게 되신 답은
한편으로는 예상 밖의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만나러 바로 나오시거나
적어도 기다려달라고 말이 나올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그 다음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전하고 싶은 것은
이번 일에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내용을
전하는 것이기에
그것에만 충실합니다.
우리는 오늘 마리아 신심 미사를 드리고 있기에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성모님의 관점에서
이 복음을 다시 한 번 읽으려고 합니다.
밖에 서 계시던 성모님은
그 대답을 듣고 어떻게 행동하셨을까요?
그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율법은 여성을 그리 존중하지는 않지만
어머니라는 관점에서는
아버지와 동등한 권리를 줍니다.
부모의 협력으로만 출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버지에게 효도하라고 말하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말합니다.
성모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께 잘 하시는
분이었을 것입니다.
즉 성모님을 모른채 하기 위해서
어머니와 관계를 끊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이
곧바로 이해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란 무엇인지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주어진 하느님의 뜻도 있지만
성모님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지
찾기 시작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과 물리적으로 가까이 혹은 멀리 계셔도
예수님의 공생활에 함께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은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입니다.
아니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무엇인가 명확하다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이
또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럼에도 순간 순간 떠오르는 고민들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서 정해두셨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 뜻을 찾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 생활의 목표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복음환호송이 노래하듯
우리를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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