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2
7) 스튜어스 왕가(1603 –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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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랑스
1> 로마령 갈리아(BC50년 경 – 486)
기독교가 전파되고,
프랑크 족(게르만 족)이 침범하여 왕조 건설
2> 메로빙거 왕조(481 – 751)
511년 – 파리를 수도로 정했다.
732년 – 이슬람 세력과 전쟁 – 참패하다.
3> 카롤링거 왕조(751 – 987)
피핀이 권력을 장악하고, 아들 샤를마뉴가 통치(771)를 시작하다.
샤를마뉴가 남쪽의 이슬람 세력을 견제하면서 서유럽의 황제가 되다.(800)
843년 – 메루룅 조약으로 국토가 3분할 – 프랑스, 독일, 이태리의 기초가 되다.
4> 카페 왕조(987 – 1328)
987년에 위그 카페가 나라를 세우고,
1095년 – 제 1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
1214년 – 영국의 존왕으로부터 많은 땅을 회복
존 왕은 영국에서 마그타 카르타에 서명(민주화의 첫 발걸음이라
고 한다.)
프랑스 왕은 교황청을 아비뇽에 세우다(아비뇽 유수 시절)(1309 – 1377)
5> 발루아 왕조(1328 – 1589)
필립 6세가 발루아 앙조를 세우고
1377년 – 영국과 100년 전쟁을 시작하다.
* 1348년 – 흑사병 유행 – 인구가 감소하다.
* 1431년 – 잔 다르크 화형에 처하다.
1453년 – 카스티용 전투의 승리로 100년 전쟁 끝내다.
**근대의 시작은 국가의 탄생에서 시작한다.
1) 국가 체제 — 제정, 군사국가의 탄생—중앙집권화가 일어나다.
2) 군사
(1) 봉건 중무장 기병 --> 화학무기로 무장한 보병(총검을 장착한 화승총)
(2) 용병 간에, 기독교의 파벌 간에 --> 싸움이 많았다.
==> 이런 원인으로 100년 간 전쟁이 지속했다.
(3) 상비군을 확장했다.
프랑스의 경우 100년 전쟁 종결시 1만 5천이던 군이 18세기 초는
60만으로 확대되었다.
(4) 귀족은 군사기능(기시로서)을 잃고, 왕의 보호를 받았다.
파편화된 세력(봉건영주, 도시국가) --> 소멸되어 갔다.
(->1477년 프랑스와 보르고뉴 전쟁으로 보르고뉴 소멸)
국가도 덩치를 키워야 살아남기 때문에 작은 나라를 합병했다.
4) 160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체로 세력 간의 배치가 끝나고, 전쟁이 줄어든다.
5) 군사력의 유지가 필요했다. --징세
중앙집권제는 전문 관료조직(군사 전문가..징세 전문가 등)이 필요했다.
전문 관료조직과 엘리트 집단과는 달랐다.
6) 이태리 전쟁(1494 – 1559)
1483년 샤를 8세가 등극 — 조카 루이 12세가 잇다.
백년전쟁으로 기사들이 전사로 몰락하자 왕권신장이 있었다.
이태리 내전에 군대를 파견함으로 이태리 전쟁을 시작해서 – 승리가 많았다.
1525년에 프랑수아 1세(1494-1547)가 포로가 됨으로 별 소득없이 끝내고
1) 이태리 르네상스 수용(레오나르드를 파리로 데려간다.)
2)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1517)
3) 이태리 전쟁 참여 — 실패로 본다.(포로가 됨으로)
이 시기의 미술 양식에 매너리즘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 잠시 훑어 보고 넘어갑시다.
***매너리즘(Habitual Behavior)
사전적 의미?
항상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취함으로써 신선미와 독창성을 잃는 일입니다
매너리즘의 영어 표현을 보면 habitual behavior 로 표현을 하는데, '습관적인 행동'이란 뜻입니다. 흥미가 떨어지다보니 이전에 했던 그대로로 하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매너리즘의 유래?
사실 매너리즘의 용어는 17세기에 미술사에서 쓰이기 시작했는데, 16세기 당시의 미술 양식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서 바로크 시대 사이에 나타났던 미술 양식인데, 독창적인 것이 아닌 따라하기, 모방, 아류 등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매너리즘(Mannerism, Mnierismo)의 시대(복습)
우리가 이탈리아 르네상스라고 이야기할 때 대체로 종교개혁 이전의 이탈리아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탈리아 르네상스라고 이야기했을 때, 13세기의 초기 르네상스부터 16세기 매너리즘까지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이탈리아는 그 당시까지 누려오던 어떤 주도권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예술 작품들의 성격, 또는 양식의 변화가 정치경제적 환경의 변화에 전적인 영향을 받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예외적인 경우가 예술의 역사 속에서 빈번하기 때문에 함부로 주장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이탈리아가 정지적 주도권을 잃자, 미술 등의 예술에도 영향을 받았다.)
매너리즘 시기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 당시 유럽의 격변을 이해해야만 한다. 초기 르네상스와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눈에 보이는 세계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면 매너리즘은 이 확신과 자신감에서 후퇴하고 도피하는 양식이며 이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매너리즘 속에는 마키아벨리(Machiavelli, 1469~1527), 에라스무스(Erasmus, 1469~1536), 세르반테스(Cervantes, 1547~1616), 라블레(Rabelais, 1483~1553), 셰익스피어(Shakespeare, 1564~1616)가 포함된다. 어쩌면 폰토르모(Pontormo, 1494~1557), 파르미지아노(Parmigianino, 1503~1540),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 브론지노(Bronzino, 1503~1572), 첼리니(Cellini, 1500~1571) 등과 같은 매너리즘 예술가들을 이해하기 위해 최초의 근대 소설이라고 일컫어지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Don Quixote)나 셰익스피어의 햄릿(Hamlet)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될 듯 싶다.
매너리즘 양식의 정신적 배경
아마 역사 속에서 매너리즘적 태도를 드러낸 시기가 있다면 로마 말기와 20세기 이후의 현대일 것이다. 아마 로마의 위대한 황제들 중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학문을 좋아했으며 플라톤을 존경하였던 이 황제는 황제가 되고 난 다음의 인생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였다. 그에게는 분명 어떤 정치 철학이나 로마 제국의 미래에 대한 구상이 있었을 지 모르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살았던 세계는 그의 그런 이상을 받아줄 수 없었다. 즉 이상과 현실의 분열이 극명하게 드러났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16세기, 진지하고 성실하며 때로 그 현명함으로 명성을 떨쳤던 이들은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절망하고 슬퍼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학자이면서 그가 남긴 <우신예찬>(愚神禮讚, Encomium Moriae)은 전형적인 매너리즘 작품에 속한다. 그는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 개혁 속에서 그 개혁이 가지고 있는 어떤 광신적 태도와 그것이 가져올 비극에 대해서 예리하게 지적하고 이에 대해 응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현실은 너무 거대해서 현자의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에라스무스마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명성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던 예술가들은 어떠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