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불허의 불연속적인 삶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보이는 것만 알아가고 믿으려는 속성이 있다. 그러면 자연 현상은 어떻게 믿는가? 거시 세계의 현상은 가설에 대한 실험을 통한 검증으로 정립된 원리나 법칙으로 믿는다. 그러나 미시 세계의 현상은 쉽사리 설명할 수는 없으나 그로 말미암아 나타내는 실재의 형상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
보이는 것 너머의 형상이나 존재를 인식하고 깨닫는 게 믿음이다. 우리가 오감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형이하학적인 것은 쉽사리 믿는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인 정신세계나 철학적인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철학에서 파생된 것이 신학이며 종교의 교리이다. 또 여러 경전의 말씀이다. 옛날에는 무조건 믿으라고 했지만, 오늘날은 이성으로 비판·비평하고 믿으라고 한다.
과학에서는 과학자가 실험을 통해서 그 대상을 밝히지만, 믿음의 대상인 존재는 볼 수 없는 것을 믿게 하려는 한 방법이 성사(聖事)이다. 실재를 표징이나 상징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다. 하늘의 신 즉 하느님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하느님 자신이 인간이 되시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 자신이었다. 그래서 예수가 하느님의 원성사(原聖事)인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 그분의 자녀가 되는 성사가 세례성사이다.
그리스도교 전례 예식이 성사로써 행해지고 있다. 경신례(미사)는 제사의 한 형식이며 기도이다. 여기에서 신부는 하느님(예수님)의 대리자로 제사의 제주로 제대에서 의식을 행하는 대리자이다. 제대는 하느님(예수님)께서 현현하시고 현존하시는 상징성이 있다. 거기에 따르는 미사예물이나 도구는 성사에 준(準)하는 ‘준성사’이다.
성금요일 예수께서 돌아가셨다. 제사의 주인인 제주께서 돌아가셨으니 그날은 미사(제사)가 없다. 우리는 하루의 시작이 아침이지만, 저네들은 해 질 무렵이다. 따라서 부활절도 우리처럼 아침(일요일)부터가 아니라 전날 밤부터이다. 즉 부활 전야 밤 미사(토요일)가 예수 부활 첫 미사이다. 이런 예식의 흐름이 성사에 의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자신의 부활로 여기며 초대교회 때부터 함께 기뻐하며 음식을 나누었다. 오늘날에도 그런 날에는 교우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풍습이다.
구원은 믿음의 각자 몫이며 자유의지로 선택한다. 내가 열심히 믿는다고 해서 가족이 함께 구원되는 것이 아니다. 미사 경전에도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에서 그 문구가 ‘모든 이’가 ‘많은 이’로 바뀌었다. 구원의 대상이 모든 이에서 많은 이라고 한다.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는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해서 언제 무슨 일이 나에게 올지 알 수 없다. 그게 순리적으로 연속적이라면 끊고 맺는 게 마음대로 하겠지만, 예측불허로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불연속적인 삶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일 목숨을 거두어갈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