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22
9월23일[피에트랄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연중 제2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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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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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jcCO68yqHU?si=9cG4cT6vCCJ1rLmt
(의정부교구 나인구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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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열정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불순물들을 태워버리는 불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인이 되기 위해 강한 자기 통제력은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도한 열정이 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정 역시 성덕의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열정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전환된 것이어야 합니다. 영적 열정 안에는 성덕으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영적 열정 안에는 악습과 편견을 물리치기 위한 강력한 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정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불순물들을 태워버리는 불꽃이기도 합니다. 성인들은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열정,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욕구들과 에너지들을 더 가치 있는 곳에 사용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아주 특별한 성인이 한분 계십니다. 피에트릴치나(Pietrelcina: Pietra-돌-이란 단어의 애칭, '작은 돌'이란 의미)의 비오 신부님입니다. 사람들은 이분을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말마디 그대로 쓸모없는 돌밭 투성이뿐인 가난하고 척박한 농촌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1903년 카푸친 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로 서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추종하고자 노력했던 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깜짝 놀랄 일이 그에게 발생했습니다.
1918년에 그는 예수님처럼 오상을 받게 됩니다. 놀랍게도 상흔은 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오상으로 인해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으며,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자 교회 당국에서는 그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1923년부터 그는 공적 성무 활동이 정지되어 작은 수도원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오상을 받으신 후 매일 흘렸던 혈액의 양은 대략 찻잔으로 하나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질문했습니다. “신부님, 얼마나 아프세요?” “보십시오. 굵고 네모 난 못을 손에 대고 망치로 힘껏 때려 박은 다음에 그 못을 뺑 돌려보십시오. 꼭 그만큼 아파요.”
그는 오상을 자신의 몸에 간직한 그 50년 동안 골고타 언덕 위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을 똑같이 느꼈습니다. 오상으로 인한 영광과 기쁨도 컸겠지만 오상으로 인해 그분이 매일 받았던 고통은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오상을 통해 매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생생하게 묵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성화의 길로 이끌고자 했던 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비오 신부님은 종종 사람들에게 큰 영적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고해자 각자를 다르게 다루었습니다.
때로 고백성사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 그저 호기심에 한번 찾아온 사람들, 중요한 죄를 고의적으로 빠트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거칠고 엄한 어조로 꾸짖으셨습니다. 때로 고백소에서 내쫒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뉘우치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다정하게 팔을 펼쳐 사랑스런 아들을 맞이하듯이 인사했습니다. 고해가 끝난 후에도 이런 말로 작별인사를 건넸습니다. “잘 가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대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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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단 한 가지>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생긴 지 막 3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학교 운동장 한 가운데 산소가 하나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묘지 위에 세워진 학교였는데 그 산소 주인만이 학교가 제시한 금액에 협의를 해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이장하여 깎아서 운동장을 만들었는데 단 하나의 산소만이 운동장 위에 불뚝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주위를 돌며 공을 찼고 가끔은 산소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열 받아서 산소를 차기도 하고 누군지도 모르는 그 자손들을 욕하기도 하였습니다.
돈이 좋기야 좋지만 조상의 묘자리를 빌미로 과연 그렇게 몇 년 동안 방치해 두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항상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 높이 있는 산소는 평상시에도 잘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풀이 우거질 것인데 항상 짧게 잘려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그 높은 곳에 올라가 산소를 정돈하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몰래 와서 묘를 잘 단장하는 것이 조상이 기뻐하는 일일까요?
사실 그들의 노력은 조상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상이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봉사하면 기뻐하실 것이다, 봉헌을 많이 하면 기뻐하실 것이다, 기도를 많이 하면 기뻐하실 것이다, 선교를 하면 기뻐하실 것이다 등 많은 일들을 하느님께 해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 과연 필요한 것일까요? 하느님은 돌로도 아브라함을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닌 이상에는 무슨 일을 하던지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바오로는 땅에서 씨앗이 죽어야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부활의 원리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첫째 아담에게서 나온 땅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은 하늘에서 난 분이기에 하늘에 계신 분과 닮으려면 땅에서 난 자신을 죽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자신들을 죽이고 그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들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 교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 각 개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례 받을 때의 우리 자신이 완전하게 죽지 않으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해야 했던 일은 오직 죽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래야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는 땅의 인간을 묻어 하늘의 인간으로 조금씩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것이 삶의 의미란 뜻입니다.
애벌레의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자기가 죽어서 고치가 되어 다시 나비로 태어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시간을 주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흙으로 된 육체적인 우리 자신을 죽여 그리스도를 닮은 영적인 나로 새로 태어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모든 노력들은 결국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 또한 새로 태어나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습니다.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합니다. 미리 공부도 하고 옷도 마련하고 신발도 편한 것을 삽니다.
미리 걷는 연습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리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 가장 황당한 경우는 여권을 가져오지 않았을 때일 것입니다.
저는 유학할 때 그런 경험이 있어서 가야 할 곳을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라도 꼭 필요한 한 가지만을 먼저 챙깁니다. 나머지는 면세점이나 그 나라에 가서 다 살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꼭 챙겨야 하는 그 단 한 가지는 바로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입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모든 노력들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매일 자아를 죽이고 그분을 나의 참 주인으로 삼고 살아갑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 죽지 않고서는 절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음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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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저는 사제가 된 후에 몇 가지를 배웠습니다. 스키, 스킨 스쿠버, 피아노입니다. 모두 정식으로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깨 너머로 배우고, 혼자서 배우고, 시간나면 배우고 그랬습니다. 그래서인지 시간은 오래 되었지만 모두가 발전이 없었습니다. 스키는 91년에 배웠으니 32년이 되었습니다. 스킨 스쿠버는 95년에 배웠으니 28년이 되었습니다. 피아노도 2009년에 배웠으니 14년이 되었습니다. 스키는 아직도 겨우 내려오는 수준입니다. 스킨 스쿠버는 기록이 중요한데 기록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피아노는 겨우 건반을 만지는 수준입니다. 제가 이렇게 시작은 했지만 결실을 제대로 맺지 못하는 것은 기초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의욕은 있지만 제대로 연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창 중에는 시작하면 끝을 보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스키를 배우면 강사 자격증을 딸 때까지 배웁니다. 기타를 배울 때도 노래만 들으면 반주할 수 있을 만큼 배웁니다. 스킨 스쿠버도 강사 자격증을 받았습니다. 저와 같이 시작했지만 동창 신부님이 다른 것은 기초부터 배우는 것이고, 아낌없이 비용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았지만 몇 번 주일미사에 참례하다가 그만 포기합니다. 세상에 좋은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의지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기 위해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수영을 하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듯이, 세례를 받아 신앙생활을 하려면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면 포기합니다. 본당 신부님의 사목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포기하기도 합니다. 단체에서 친하게 지내던 이웃과 의견 충돌이 생긴 뒤로 포기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했는데 시련과 고난이 사라지지 않아서 포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결실을 맺기도 합니다. 사람을 믿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믿습니다. 본당의 피정과 교육은 빠짐없이 참석합니다. 어떤 단체든지 가입하면 단체를 발전시킵니다. 교리신학원에 등록해서 교리교사 자격증도 얻습니다. 같은 날 세례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생활의 모습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결실을 맺는 방법을 이야기 합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는 사람,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마저 대주는 사람,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내 주는 사람, 조롱하고 멸시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들이 좋은 결실을 맺는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미친 짓일 수 있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가는 부활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고 합니다. 공동체에는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봉사의 씨를, 어떤 분은 나눔의 씨를, 어떤 분은 희생의 씨를, 어떤 분은 사랑의 씨를 뿌렸습니다. 공동체에는 그 씨들을 키우고 관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목회, 구역장, 반장, 레지오 단원, 각 단체의 봉사자들입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랑의 정원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거름을 줄 때, 우리가 나눔의 물을 줄 때, 공동체는 풍성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시련의 바람이 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비가 내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갈등과 아픔의 시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가장 큰 계명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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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8,4-15: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5절) 나가 땅에 씨를 뿌린다. 씨가 땅에 떨어지면 주님의 섭리에 따라 싹이 돋고 자라나 많은 열매를 맺는다. 말씀은 우리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 행실로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마태 13,8)의 열매를 맺는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의 뜻을 물었을 때, 제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하시며 비유를 설명해 주셨다. 우리도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실천하려 노력하면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신다. 그 신비는 믿음과 행실을 통하여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길에 떨어진”(12절) 씨앗은 악마가 쉽게 채간다. 땅이 굳어있기 때문에 씨가 심어지지 않는다. 마음이 굳어있고 고집스러운 사람들은 거룩한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더러운 마귀에게 어울리는 짓밟힌 길바닥과 같이 되고 만다. 뿌리를 내릴 수 없게 된 그 씨앗은 악마가 곧 채가고 만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서,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다.”(13절) 성당에 나와서는 신자처럼 행동하지만, 교회를 나오자마자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잊고 예전의 습관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이다. 더구나 박해가 일어나고, 진리의 원수들이 교회를 공격할 때는 싸움에 나서기보다 도망치고 마는 사람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14절) 말씀의 씨앗이 제대로 자리 잡고 싹을 틔운 것도 있다. 그러나 세상 걱정과 재물과 쾌락이 그것의 숨을 막아 쓸데없는 부분만 웃자라 말라버리는 현상이다. 세상일에 대한 걱정과 부자 되려는 욕망은 말씀의 씨앗을 숨 막혀 죽게 하는 가시덤불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제 기름지고 잘 가꾸어진 땅에서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좋은 땅에서는 백 배의 결실이라는 것으로 보아 그 땅은 기름진 땅임을 알 수 있다. 돌과 가시덤불과 해로운 모든 것을 없앤 마음이라는 밭에 떨어진 말씀은 뿌리를 깊이 내리고, 건강한 싹이 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나는 이 네 부류 중에 어디에 속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제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나의 삶이 열매를 맺지 못하였더라도, 지금부터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면서,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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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흔히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라고 불리지만, 이 비유의 초점은 사실 씨를 뿌리는 사람보다는 뿌려진 씨와 그 땅에 있습니다. 씨는 ‘하느님 말씀’이기에, 농부가 씨를 뿌리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모습(루카 8,1 참조)을 떠오르게 합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씨가 뿌려지는 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에 나오는 네 유형의 땅이 당신 말씀을 듣는 네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몸소 설명하여 주십니다.
‘길’에 비유되는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믿음에 이르지는 못하여 구원에서 멀어지는 이들입니다. 악한 세력이 그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바위’에 비유되는 둘째 부류는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그 믿음의 뿌리가 깊지 않아 결국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시련이 오면 그들은 믿음을 버리고 예수님을 떠납니다. ‘가시덤불’에 비유되는 셋째 부류도 말씀을 새겨듣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살이의 여러 걱정, 그리고 재물과 쾌락이라는 유혹 때문에 복음의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비유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처럼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런 이들 안에 깊게 뿌리를 내려 풍성한 결실(‘백 배의 열매’)을 거두게 됩니다.
네 유형의 땅 가운데, 무려 셋이 실패하고 오로지 하나만 성공을 거둔다는 것은, ‘좋은 땅’이 되기가 그리 녹록지 않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3,24). 열매를 맺기까지 시련도 찾아오고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로 열매를 맺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 모두를 견뎌 낼 힘을 겸손하게 청합시다. 씨를 뿌리시는 분께서는 청하는 이의 땅에 기꺼이 거름도 내주실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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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어떻게 열리는지 보여 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루카 복음 8장 5절)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씨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씨를 뿌리러 나간 사람"에게서 이 세상에 강생하신 성자 예수님이 보입니다. 이는 인류를 위한 첫번째 오심입니다.
"악마, 시련,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 신앙 여정에서 우리에게 가장 크게 위협이 되는 걸림돌들입니다. "길"에 떨어진 씨는 "악마"가 앗아가 버리고, "바위"에 떨어진 씨는 "시련"의 때가 닥치면 말라버립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으로 숨이 막혀 버리지요.
사람의 아들이 정성껏 하느님 말씀을 뿌리시지만, 75%의 씨들은 열매를 내지 못하고 스러져 버립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장 15절)
좋은 땅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이들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말씀에 머물러 말씀과 하나되고, 실제 삶에서 말씀을 적용해 실천하는 이들이지요. 말씀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그들을 통해 말씀이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니, 땅이 아무리 척박하고 냉랭해도 결국에는 그냥 스러져버린 씨앗의 수량과 비교할 수 없을만치 엄청난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셈법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자의 두 번째 오심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티모테오 1서 6장 14절)
우리가 걷고 있는 인생 여정에 "악마와 시련과 걱정과 재물과 쾌락"이라는 복병이 도처에 널려 있는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결정적인 구원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내내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살아가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사도는, 우리에게 말씀의 씨를 뿌려 주신 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그분을 맞이하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권고합니다. 이 계명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지요.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티모테오 1서 6장 16절)
사실 주님은, 죄로 기울어져 있는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 무한한 거리를 좁히려 해도 우리 쪽에서 그분께 올라갈 수 없으니, 그분께서 육을 취해 내려오신 거지요. 그리고 거기에 더해 그분은 우리와 온전히 하나로 일치하시고자 말씀으로 현존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주님의 날까지 그분께 맞갖는 영혼으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진 것도 적고 많이 배우지 못했고 그럴싸한 신분도 아닌 변두리 인생이어도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이들은 행복합니다."(복음 환호송)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고, 그리로 이르는 길은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코스지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을 환대하여 머물다 보면 결국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미소하고 부족한 우리에게까지도 열릴 것입니다.
말씀을 품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착하고 성실한 말씀의 종이 되어 나날이 더 행복해지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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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신비’는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자체이시며, 당신 스스로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신 분이시고, 그 신비를 몸소 지니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예수님께 달렸으나,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길에 떨어진 경우처럼,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가 버려 올바로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위에 떨어진 말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짧은 인생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상황과 마주하며 울고 웃고, 때로는 낙담하고, 때로는 희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좋은 토양을 가지고자 마음의 밭을 잘 가꾼다면,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밝게 빛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간직하고 신앙의 항구함을 간직하는 방법을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과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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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사도 바오로는 교우들이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며 해야 할 삶이 자세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티모테오 1서 6장 14절)
박해의 바람이 일어 언제 생명이 끝날지를 모르던 매일의 생활에서 교우들의 희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며 사는 삶의 모습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세가지는 씨가 떨어진 땅이었는데, 길바닥, 바위, 그리고 가시덤불이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루카 복음 8장 5절-7절)
그리고 좋은 땅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루카 복음 8장 8절)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이 스승님께 이 비유의 말씀을 묻습니다. 주님께서 길가에 떨어진 씨는 말씀은 듣기는 하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으로 설명하십니다.
바위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뿌리가 없어서 시련이 닥쳐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인생의 걱정, 재물과 쾌락에 빠져서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얼핏보기에는 사람이 길바닥, 바위, 가시덤불, 좋은 땅으로 결정된 것 같지만 사실, 한 사람이 때로는 길바닥, 바위, 가시덤불의 상태가 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해 각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며 또 어떻게 성실하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각자가 어떻게 상황을 마련하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저 마다 씨앗과 밭이라는 것을 갖고 있습니다. 딱딱한 길바닥과 변화시킬 수없는 것 같은 바위와 이런저런 옴짝달싹도 못하는 처지의 환경이 될 수 있겠지만 자신이 길바닥을 갈아서 부드러운 땅으로, 바위를 골라내고 덤불은 쳐 내서 결국 씨가 잘 자랄 수 있는 땅을 가꿀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공평한 시간을 받았고 생활 할 조건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의 결정 없이 정해진 환경과 장애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없애고 좋은 땅으로 가꿀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성실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있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참고 끝까지 견디는 인내를 갖고,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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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땅을 갈아엎어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땅은 다 좋은 땅입니다. 모래땅에서는 땅콩이 잘 자라고 진흙땅에선 미나리가 자라고 습한 땅에서는 버섯이 잘 자랍니다. 기름진 땅에는 콩이나 고추가 잘 자랍니다. 각기 주어진 땅에서 알맞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도 관리하지 않을 때 못 쓰는 땅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밭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는 수고와 땀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내 마음의 밭은 선합니다. 좋은 밭입니다. 이 좋은 땅이 어느새 길바닥으로, 바위로, 가시덤불로, 방치되지는 않는지 살펴야 하고 그 땅을 결코, 몹쓸 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땅은 다 좋은 땅이 분명한데 관리를 하지 못해 폐허가 된다면 그 책임은 관리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씨의 운명은 그 씨가 떨어진 땅에 의해 좌우됩니다. 혹시라도 씨앗이 싹트지 못하고, 자라지 못할 땅이라면 지금 갈아엎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피조물 중의 으뜸이요,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습니다.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큰 은총을 주더라도 받는 사람이 잘 관리하지 않으면 곧 잃어버리게 됩니다. 많은 경우 자기가 잃어버리고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 갔다고 생각합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주가 주어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루카 8,15)을 두고 하는 말이니만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함으로써 우리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길바닥이라는, 바위라는, 가시덤불이라는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워 말고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한 발 내딛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 하느님의 숨을 받은 우리는 모두가 좋은 밭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분께서 책임져 주시는데 왜, 주저하고 좋은 밭을 묵혀 두려고 하십니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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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뒤로 미루는 것을 습관처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이렇게 미루는 것은 게을러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일상 삶을 보면 그리 게을러 보이지 않습니다. 계속 무엇인가를 하는 것 같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미루고만 있을 뿐입니다.
기도의 일상화가 잘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일미사에 참석한 뒤에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인답게 사시겠다고 다짐하십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하는데, 기도만큼 잘되지 않게 되고 계속해서 뒤로 미루십니다. 그 이유를 묻자, “제가 게을러서요.”라고 답하십니다.
정말로 게을러서 그런 것일까요? 우리 뇌는 장기적인 성취와 성장보다는 단기적인 기분 회복과 감정조절을 우선시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편하고 쉬운 것, 순간의 만족을 주는 것에 먼저 집중하고, 평상시에 잘 하지 않았던 익숙하지 않은 것은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게을러서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아직 신앙생활이 자기 몸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운동도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너무나도 힘듭니다. 몸의 이곳저곳이 아파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익숙하게 되면 단기적인 기분 회복과 감정조절이 이 운동에서 나옵니다. 이제는 운동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들게 됩니다.
기도와 묵상 등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조금만 더 익숙한 시간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나한테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내가 게을러서 그렇다는 것은 모두 그만큼 주님께 맞춰서 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주님께 익숙해지는 삶을 살아야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참 행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좋은 땅이 되어 좋은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아마 농사를 짓는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좋은 땅을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식물을 잘 키워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유기물도 풍부하고 미생물도 풍부한 땅을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그냥 길에다가 씨를 뿌리지 않고, 바위에다가 씨를 뿌리지 않으며 또 가시덤불과 같은 잡초가 무성한 곳에도 씨를 뿌리지 않습니다.
좋은 땅으로 표현되는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계속해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묵상 등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삶 자체가 되어 익숙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런 노력으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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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은 홀로 자라시지 않는다네>
루카 8,4-15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그때에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홀로 자라시지 않는다네>
하느님의 말씀은
홀로 자라시지
않는다네
악마의 헛된 속삭임을
힘껏 물리치는
나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은
더디더라도 쉼 없이
자라신다네
하느님의 말씀은
홀로 자라시지
않는다네
믿음을 앗으려는 시련에도
깊이 뿌리내리는
나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은
더디더라도 쉼 없이
자라신다네
하느님의 말씀은
홀로 자라시지
않는다네
홀로 살려는 온갖 탐욕을
한껏 떨쳐내는
나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은
더디더라도 쉼 없이
자라신다네
하느님의 말씀은
홀로 자라시지
않는다네
바르고 착한 마음에
말씀 고이 간직한
나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은
마침내 반드시
열매 맺으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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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루카8,5)
<오상(五傷)!>
오늘 복음(루카8,4-15)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씨가 뿌려지는 곳'은 '마음의 밭'입니다.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8,12)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8,13)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8,14)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8,15)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 마음의 밭은 어디에 해당되는가?
혹시라도 좋은 땅의 모습이 아니라면,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 좋은 땅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겸손한 자세로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면서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오늘은 21세기 위대한 성인으로 알려진 '오상의 신부님이신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비오 신부님은 카푸친 작은 형제회 소속 사제로서, 그의 사부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오상(五傷), 곧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받으신 분입니다. 그것도 196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50년 동안(1918-1968).
오상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합일인 완덕의 모습'입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끝까지 회개의 삶을 산 표징이며,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진 모습'입니다.
함께 노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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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_IxAzzWh3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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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 15)
냉철한 신앙의
검증이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신앙인들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화려한 자태나
외적인
미모가 아니라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랑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는
이유도
신앙인들이
삶다운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간절하신
뜻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끊임없이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는 정녕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새로움은 언제나
산고(産苦)의
고통을 동반합니다.
자존심과 고집
거짓과 분열이
아닌 솔직한
양심으로
돌아서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첫마음입니다.
무수히 노력하고
기도하는 인격적인
요소가 좋은 열매를
맺는 은총이 됩니다.
복음을 통한
자기혁신이
올바른 신인인의
열매입니다.
허황된
우상(偶像)으로부터의
해방이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반전(反轉)의
계기가 됩니다.
변화를 통한
성장과 발전이
우리를 살게하는
좋은 땅
좋은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셨던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입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의 속성처럼
물방울이 바위를
뚫습니다.
좋은 뜻을 품고
기도하지 않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멀리 바라보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순박함과 우직함
인내와 성실성이
반가운 소식을
알립니다.
치열하게
마음의 밭을
일구셨던
성인들의 삶을
가슴에 품는
새아침입니다.
더 기쁘고
더 귀하게
맞이하는
오늘입니다.
하느님 생명을
받아 세상에
태어난 우리들이
좋은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인내와 열매
양심과 첫마음은
가장 소중한
신앙인들의
가치이며
약속입니다.
소중한 약속을
잊지 않는
복음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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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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