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도화지

[동원]

인생이라는 도화지

 

지인 중에 미술 선생이 있다.

그는 학생들에게

도화지를 한 장만 준다.

아이들에게는 앞면과 뒷면,

오직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신중하게 그림을 그려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오래전 책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다.

아이들에게 지우개 없이 그림
을 그리라고 하는

미술 선생의 이야기였다.

그는 아이들이 실수하거나
자신의 의도에서 조금 벗어났다는

이유로 자꾸만 그림을 지워 버리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끝까지 붙들어

하나를 완성하길 바랐다.
 
두 선생의

태도는 인생을 떠올리게 한다.

인생은 한 번뿐이라 매 순간
신중해야 하고 지나간

시간은 지울 수도,

다시 그릴 수도 없다.
 
어린 시절 나에게 종이 한 장의

소중함을 알려 준 것은

현명한 미술소중함을 알려 준 것은

현명한 미술
선생님이 아닌 가난이었다.

미술 수업이 있는

날이면 스케치북에 남은
종이가 몇 장인지 셌다.

선을 조금이라도 비뚤게

그리면 지우개로 살
살 문질렀다.

물감을 잘못 칠하면

어떻게든 창의력을 발휘해 실수를
수습했다.
 
그런 나와 달리 반 친구들은

그림을 그리다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종이를 뜯어 버렸다.

나도 아이들처럼

새하얀 종이에 처음부터
다시 그리고 싶었다.
 
친구들이 쓰는 잠자리 상표가

그려진 지우개도 부러웠다.

그 지우개는
유난히 말랑말랑했다.

연필 자국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지울 수 있었고
세게 문질러도 종이가

찢어지는 일이 드물었다.

다만 너무 말랑한 나
머지 사용할 때 마다

지우개 똥이 잔뜩 생겼다.
 
한때 지우개 똥을 뭉쳐 무언가를

만드는 놀이가 유행한 적 있다.

오로지 그 놀이만을 위해 몇몇 아이는

빈 종이에 지우개를 문질렀다.

나는갖지도 못하는 걸 마구 써 버리는

아이들의 모습에 기분이 묘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가난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든 새하얀 종이에 새롭게

그릴 수 있었다면,

내가 사용하는 지우개가
몇 번지우면 종이를 찢는 딱딱한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껴지는 순간마다

내 인생을 종이처럼 구겨서 버리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느 날 신이 나타나 내게 지우개와

한 장을 건넨다고 상상해본다.

지우개는 과거를 지울 수 있고,

원하는 인생을 그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지만

결국 생각지 못한 어려움을 마주한다.

여러번 기회가 주어진다

한들, 완벽한 삶은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아직 채우지 않은 인생의 여백을
어떻게 칠해 나갈지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

이것이한 번뿐인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 아닐까


책은 잘못 쓰면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은
다시 쓸 수도, 남이 대신 써 줄 수도 없다.

_ 모리스 마테를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