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1일(목)
* 시작 기도
주님...
주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택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복입니다.
이 복을 받은 우리는 마땅히 주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송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엡 1:3-6).
그러나 나는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나의 뜻과 영광을 위하여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온갖 죄를 먹되 양식처럼 먹고 마셨습니다.
이런 나는 죄인 중에 괴수요 죽기에 합당한 자입니다.
주님의 공의가 나를 심판하셨고 그 심판을 통하여 복음을 깨닫게 되었음이 내게 은혜입니다.
무덤과 같은 고난의 자리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무력함의 자리로 이끄신 거기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그 생명으로 살기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육신으로 점철된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렇게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이 하루도 살아내기 원합니다.
육신적으로 온전한 자가 되어 내 뜻대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존재감이 미미할지라도 우리 주님만 따라가는 절대의존형 자녀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58:1-11
제목 : 그의 발을 악인(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씻으리로다.
1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2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
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 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6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7 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8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9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
10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11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 나의 묵상
본시는 시편에 나오는 저주시 세 편(58, 109, 137편) 중에서 첫 번째의 시로 다윗이 지은 시이다.
저작 시기가 언제인지는 표제어에 나오지 않으므로 그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다윗으로서는 도저히 불의한 재판관들을 응징할 수 없는 때, 예를 들면 사울의 치하에서 도피 생활을 할 때나 압살롬의 반역으로 마하나임에 망명정부를 세웠을 때 등 재판관들이 의인의 고난을 묵과하고 악인의 행악을 방조하는 것을 보며 지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본시는 마땅히 공의를 행해야 할 재판관이 도리어 불법을 조장하고 행악을 임삼는 것에 대하여 고발하고 저주하며 하나님의 공의의 응징을 간구하고 있다.
1-5절, 다윗이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하여 격분에 찬 어조로 불의한 재판관들을 고발하고 정죄하는 내용이다.
1절에서는 통치자들과 인자들이라는 호칭이 두 번 나온다.
하지만 원문에서는 인자 곧 히브리어 ‘빼네 아담’ 한 번만 나온다.
여기서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지만 신약의 복음서에 나오는 인자(the Son of God)이라는 정관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나라의 중요한 책임을 맡아 다스리며 재판을 담당하였던 관리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 통치자들이나 재판관들이 마땅히 공의를 실현하는 자들로 서야 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행태를 보며 다윗은 가슴을 치며 질타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다윗이 왕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대놓고 직접 질타할 수 없기에 그들의 심판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이다.
너희 재판관들은 공의를 행하고 올바른 판결을 해야 함에도 잠잠하며 침묵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부가의문문을 사용하여 그들에게 질문을 한다.
당신들은 겉으로 폭력을 휘두르며 속으로는 불의를 꾸미고 있구나.
악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잘못된 길로 간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그릇된 길로 가면서 거짓을 말한다.
그들이 내뿜는 독은 마치 뱀의 독과 같으며 듣지 못하는 독사와 같다.
그들은 주인의 피리 소리에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아무리 아름답게 연주를 해도 듣지 않는구나.
6-8절, 하나님을 향하여 불의한 재판관들에 대한 응징을 간구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스스로 그들을 심판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 호소하며 심판을 내어 맡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속에 있는 이빨을 부러뜨려 주세요.
하나님이 저 사자들의 어금니를 뽑아 주세요.
흘러가 버리는 물처럼 그들을 사라지게 해주세요.
부러진 화살처럼 꺾어주세요.
그들이 움직일 때, 몸이 녹아 없어지는 달팽이 같게 해주세요.
해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는 갓난아기 같게 해주세요.
9-11절,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신속한 심판의 확실성을 선언하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이 푸르거나 말랐거나 상관없이 그들을 없애버릴 것입니다.
가마를 뜨겁게 덥히기도 전에 없애버릴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이 되갚음 당하는 것을 볼 때에 기뻐할 것이며 악한 사람들의 피로 그들의 발을 씻을 때에 즐거워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때에 다 같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상이 있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분명히 계십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길 때든지 아니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쫓길 때든지 돌아가는 정세를 살피며 권력자들의 악한 행태와 하나님을 맞서는 편에 서 있는 그들을 보면서 참담함을 금치 못해 하였다.
공의를 따라 판단하고 말해야 할 책임을 진 자들이 어려움 당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이다.
특히 사울이 다윗을 박해하던 때만 보아도 분명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울의 처사가 공정하지 못한 처사이며 잘못된 것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 하나 사울에게 충심으로 진언을 하는 자들이 없다.
그들은 모두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울의 폭정을 보면서도 감히 그에게 진언을 하지 못한 것은 사울의 칼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다윗이 사울에 대하여서나 반란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에 대하여 보복을 하고자 직접 나서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엔게디 굴에 숨어 있을 때, 사울을 단칼에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음에도 그를 죽이지 않았다.
사실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고 옆에 있던 신하가 죽일 수 있는 기회라고 했음에도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 그를 살려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옷자락 벤 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찔리기도 하였다.
그는 감히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내 마음대로 죽일 수 없다는 강한 신념이 있었다.
무엇보다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믿었던 것이다.
(신 32:35)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 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그는 그런 악한 일을 행하는 이들을 하나님께 고발할 뿐이다(6-8절).
무엇보다 그는 이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분명히 계심을 고백한다.
(11절)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과연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에 따라 택하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하여 그들이 어긋난 길로 갈 때 심판하신다.
이 심판은 진멸의 심판이 아니라 징계의 심판이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다.
만약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는 택함 받은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유익(영생)을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징계가 당시에는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후에는 그 연단을 통하여 의와 평강의 열매(영생)를 맺게 된다.
(히 12:10-11)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하나님 아버지는 이 땅에서 반드시 악을 행한 자들을 심판하신다.
그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하는데 악인이 흘린 피에 그 발을 씻기 때문이다(10절).
이 세상에 죄 없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나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다.
그런데 그런 죄인들이 자기 스스로 그 죄를 씻어낼 자 역시 단 한 사람도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기로 작정하신 것이다(벧전 1:20).
물론 그렇게 육신을 입고 오신 아들을 믿기만 하면 구원 곧 영생을 얻게 된다.
하지만 아담의 죄로 인하여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고전 15:22).
여기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죽은 자들은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 곧 선악과를 먹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대명제 앞에 살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창세전 택하신 자들을 너무나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들을 살리기 위하여 당신의 친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의 죽음은 대속적 죽음이다.
그가 죽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자들이 다 삶 곧 생명을 얻게 되었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생명)을 얻으리라.
이와 같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죄인 예수 그리스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나와 같은 죄인이 그 흘리신 피에 나를 씻으면 죄를 씻음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자임을 내가 알고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그러하기에 나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다만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에게 주시는 징계의 심판을 받을 뿐이다.
그 징계는 나를 죽이기 위한 진멸이 아님을 나는 안다.
그래서 오늘도 내게 주신 그 무덤 안에 아멘으로 들어간다.
그 무덤은 나 혼자만의 무덤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시는 무덤이다.
그렇게 십자가와 무덤에 주님과 함께 연합할 때 그 자리에 영원한 생명이 임한다.
그리고 날마다 나의 옛 사람을 못 박고 주님이 주신 생명의 양식을 먹으며 살아간다.
거기에 우리 주님의 얼굴에 비친 아버지의 영광이 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죄인 중에 괴수인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죄를 알지도 못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지시고 죄인이 되셨습니다.
이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지은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입니다.
날 위하여 의인으로써 죄인이 되어 주시고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 앞에 나는 그저 두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입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주님이 주시는 그 심판 곧 징계의 심판을 받을 뿐입니다.
무덤을 통하여 아들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 고백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복음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할 수 있고 알 수 있으며 살아가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