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호탄 인근 백양나무 가로수가 있는 풍경 ⓒ 들찔레 |
곤륜산맥 가까운 지역이면서 바람이 많고 건조한 타림분지의 남부지역은 우루무치나 쿠차에 비해 훨씬 위구르다운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전체 인구 중 위구르인의 비율이 아직도 96% 이상이며 따라서 위구르어를 크게 쓰고 아래에 작은 글씨로 한자를 병기한 간판을 자주 보게 된다. 호탄 시내로 들어가는 외곽지역에는 곳곳에 장이 서고 사람들이 분주히 모이고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슬람의 색채가 한 겹 더 입혀진 분위기가 역력하다.
호탄은 도시를 중심으로 두 강, 백옥하(白玉河)와 흑옥하(黑玉河)가 동, 서로 나뉘어 흐르는데 도시 입구 백옥하에서 옥을 캐는 사람들을 대면함으로서 비로소 호탄에 왔음을 인식하게 된다. 호탄은 옥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호탄은 ´양 우리´라는 뜻을 가진 말로 명나라 때 정해진 지명이며 원래는 우기 혹은 화기로 불렸는데 이는 티베트어로 ´옥이 나는 곳´이라는 뜻이다. 호탄의 옥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가난한 사람들이 평생을 살면서 일확천금의 꿈을 쫓는 이유도 늘 옥과 연관이 있다. 겨울이 지나고 곤륜산맥의 빙하나 만년설이 녹아 물이 흐르면 그 물길을 따라 흘러내려 온 옥을 줍기 위하여 사람들은 우연의 행운을 기다리며 일년 내내 강가로 나간다. 더러는 큰 옥을 주워 횡재를 하는가 하면 대개는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들은 대대로 그렇게 꿈을 좇기를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 |
▲ 옥을 줍는 사람들 I ⓒ 들찔레 |
호탄 사람들이 옥을 줍는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상상 이상 큰 의미가 있다. 큰 횡재를 하는 꿈을 버리지 못하겠지만 강에 나온 사람들은 옥을 주워 생계를 꾸려 나가는데 대개는 최소한의 생활비를 버는데 간혹은 하루에 200∼300위안(한화 3만원-4만원)을 버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중국 변방의 경제로 볼 때 옥 1kg에 대개 중국 돈 10만 위안(한화 약 1500만원) 이상인 것을 보면 호탄 사람들에게 사시사철 목숨을 걸고 옥을 채집하러 나가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중 가장 최고로 치는 옥이 양지옥(羊脂玉)이라 하여 양의 기름을 닮은 우윳빛의 매끈한 옥을 최고로 치는데 비싼 것은 1000만 위안이 넘는다고 한다. 1995년 8월에는 곤륜산맥 북쪽에서 1.5톤의 서계에서 가장 큰 옥돌을 캐냈다. 북경 올림픽에서 뒷면에 둥근 고리모양의 옥을 붙인 메달을 수여하는 것을 보았을 것인데 이에 사용된 옥도 모두 호탄의 것이다.
옥에 대한 중국인들의 사랑과 소유욕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중국인들의 옥에 대한 가치를 다른 나라 어느 곳보다도 높게 치는 이유로 가격이 비싸게 매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옥의 거래도 중국인이거나 화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런 배경에는 옥에는 보이지 않는 높은 가치가 있다고 믿는 중국인의 인식이 존재한다. 한족 문화권에서 옥의 속성은 고매함 , 순결함, 아름다움, 영구함이라 믿고 있다. 또한 후한 때의 허신(許愼)이라는 사람이 쓴 ´살문해자설´에서 옥은 인(仁), 진(眞), 지(智), 의(義), 공정(公正), 다섯가지 덕을 가지고 있는 보석으로 기술하고 있다.
![]() |
▲ 옥을 줍는 사람들 II ⓒ 들찔레 |
옥을 줍는 방법은 단순하다. 가족끼리 횡대로 서서 손을 잡고 맨발로 물속을 걸으며 옥의 부드러운 감촉을 발바닥에 느껴 주어내는 방법이 가장 고전적인 것이며 돈이 있는 사람들은 포클레인 등 기계를 동원하여 강바닥을 파서 자갈 속에 숨어있는 옥을 가려낸다. 혹은 한사람이 하루 종일 혼자 강을 헤집고 다니는 풍경도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렇게 노천에서 건져 올린 옥을 노옥이라고 한다. 강 옆으로는 주운 옥을 거래하기 위해 늘 사람들이 모이고 분주한 장이 선다. 이 장은 그들에게 늘 꿈꾸는 장일 것이다.
또한 호탄은 온대성 건조기후로 도시의 동, 서로 백옥하와 흑옥하가 흘러 땅이 비옥하다. 이 두 강은 일명 녹옥하(綠玉河)라 불리는 호탄강에 합류되어 사막 가운데의 타림강으로 흘러든다. 강의 발달은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되어 지금까지 위구르족의 중심도시 중 하나로 남게 한 원인이다. 이런 비옥한 땅에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아온 연유로 기원 전 1세기에 이미 불교가 유입되었고 호탄국이나 구살단나국 혹은 우기국으로 불리던 왕조가 흥망성쇠를 반복하다 11세기에 이르러 이슬람화 되었다.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호탄은 ´옥의 고향´이라는 별칭 외에 ´비단의 고향´, ´카펫의 서울´, ´과실의 고향´이라는 별칭들도 얻게 되었다.
![]() |
▲ 호탄 시내 풍경 하나 ⓒ 들찔레 |
특히 ´비단의 고향´이라 불리는 호탄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실크로드 상에서 동서 교역의 중심이라는 얘기의 반증이다. 민풍에서 호탄으로 오는 중간, 옛 호탄국의 영토였던 처러라는 작은 지역에는 단단윌리크(Dandan Oylik) 유적이 있다. 이 유적에서 스타인에 의해 발굴된 견왕녀도(絹王女圖)는 원래 한족에 의해 독점되던 비단이 이곳 위구르족 지역이 중간다리 역할을 하여 서역으로 가게 되었음을 입증하게 되었다.
이미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는 ´중국의 공주가 누에고치를 모자 속에 몰래 숨겨 호탄으로 출가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적고 있다. 이때를 대개는 후한시대 즉, 3세기를 넘지 않은 때로 본다. 이렇게 위구르족에 전해진 비단의 기술은 6세기 중엽 네스토리우스파라는 사제가 인도북부에서 누에고치를 지팡이에 숨겨 로마로 반출함으로서 서양에도 비로소 양잠기술이 전파되었다. 실크로드라는 이름이 어떤 이유로 붙게 되었던 이곳 호탄지방은 양잠기술이 서양으로 넘어가게 된 바로 그곳인 것이다.
호탄의 왕이 비단을 얻기 위해 딸을 한족에게 정략결혼을 시키고 딸로 하여금 누에고치를 갖고 오게 하여 비단을 얻었다는 전설은 아버지인 호탄의 왕이나 딸인 공주가 쫓았던 꿈은 중국황실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민족에 대한 문명의 혜택이었다는 말이다. 또한 인도로 전파된 누에고치와 양잠기술을 서양으로 옮겨간 사람들도 그들의 가족과 민족에게 좀 더 따뜻하고 풍요로움을 선사하기 위한 꿈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말의 문익점이 목화씨를 몰래 들여온 것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 |
▲ 마이리크와트 고성 I ⓒ 들찔레 |
오후의 햇살이 중간쯤에 걸린 시간 마이리크와트고성을 향했다. 시내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의 고성 가는 길은 백옥강을 따라 길이 없는 황무지를 따라 간다. 인근 어디에도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지역 강 한쪽에 조그마한 백양나무 숲이 보이고 그 숲 속에 들어서니 사람소리로 소란하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온 것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더욱이 생각보다 큰 동네의 어귀엔 동네의 모든 나귀들이 다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적은 보수이지만 돈을 받고 우리를 성터로 태우고 갈 요량인 것이다.
같은 동네 사람들일 테지만 서로 먼저 태우려고 자기네들끼리 은근히 경쟁하는 모습이 눈에 성가실 정도다. 결국 뒤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 사람을 태우지 못한 아낙들 몇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아무렇게나 뛰어다니며 우리에게 ´볼펜을 달라´, ´돈을 달라´, 목에 묶고 있는 ´손수건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아이들은 우리가 고성을 떠나올 때까지 먼지를 일으키며 따라다녔다.
![]() |
▲ 우리를 고성으로 안내해 준 당나귀와 동네사람들 ⓒ 들찔레 |
고대왕국의 성터를 놀이터 삼아 자라고 어른이 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이 이렇게 누구에게나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하나라도 뺏듯이 얻기를 바라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는 순박하던 시골에 기찻길이 나고 신작로가 나면 동네의 인심이 나빠지듯이 외부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나기 전 까지는 순박했을 사람들이 다른 개화된 문명의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빚게 되는 부작용이다.
지난 해 내가 찾아갔던 파미르고원 너머 파키스탄의 오아시스 훈자에서 아이들이 ´원 페니(one penny)´ 하며 따라다니던 기억이 나는데 이곳의 아이들이 더 집요하다. 손을 내미는 아이들은 그들의 옛 영화가 전설처럼 남아있는 이곳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기에는 너무 세상이 각박한 것을 먼저 알아버린 것일 터이다.
![]() |
▲ 마이리크와트 고성 II ⓒ 들찔레 |
마이리크와트 고성은 1500년 전 건설된 고대 호탄왕국의 성으로 추정하고 있는 곳이나 성의 이름도 그곳 동네의 지명을 붙여 부르는 정도로 역사적인 사실이 베일에 가려 있는 곳이다.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 발굴 된 뒤 지금까지 제대로 된 발굴을 하지 않고 있다. 성터라고 해봐야 여기 저기 조형물처럼 남아있는 흙무더기 같은 성벽의 흔적들뿐이다. 하기야 빈터로 남아 황량한 들판에 선 내가 무엇 하나 제대로 남은 것이 없음을 봄으로써 상상의 성을 쌓아볼 수 있겠으나 박제된 역사는 한 줄 바람으로만 지날 뿐 아무것도 나에게 가르쳐주지를 않는다.
이곳 동네의 아이들이 떠나는 우리를 쫓아 뛴다. 내가 저 아이들에게 뭐라 한마디 가르쳐 줄 것도 손에 쥐고 있어 그냥 웃으며 던져줄 선물 하나도 없는데 먼지가 구름처럼 날리는 차창 뒤로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오고 있다. 내가 쫓아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이 나이 들어 이런 오지로 다니는 원천이 되었다면 오지 깊숙한 곳에서 소수민족으로 살면서 차츰 어른이 될 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꿈은 무엇일까? 저 아이들은 어떤 꿈을 향해 저렇게 뛰고 있는 것일까?
![]() |
▲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던 아이들 ⓒ 들찔레 |
호탄 시내에서 10여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요트간(約特干) 유적을 보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선 시간은 우리나라로 치면 늦여름 오후 대여섯 시 쯤이다. 시골에서는 하루 일과를 마친 농부가 집으로 돌아와 삽자루를 놓고 얼굴과 팔다리를 씻은 물로 먼지가 일었던 마당에 뿌리고 해넘이를 앞둔 햇살이 금빛을 띠며 안온함을 일깨우는 행복한 시간이다.
요트간 유적지 입구의 포도나무 넝쿨이 터널을 이룬 길 위에서 어느 집 굴뚝 위로 연기가 솟는 것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 엘라메 마을의 포도넝쿨 터널이 총 연장 1,400km이라는데 이는 호탄에서 민풍에 이르는 사막공로의 약 3배에 해당하는 길이다.
이 마을을 지나 볼 수 있는 요트간 유적은 기원전 60년 경 한나라에 복속된 유티안(yutian) 왕국의 수도였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불교유적이 많다. 3-8세기까지 번영을 누렸던 옛 왕국은 인도의 불교와 관련된 불상, 불경, 동전, 서적 등이 출토되었고 페르시아나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유적들도 발굴 되었다고 한다. 인근 니야 문명의 원류를 만든 사람들이 서양인이었음을 감안할 때 기독교와 관련된 동전이나 십자가가 발견된 것은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또한 AD 2-3세기경의 간다라 유물이 발견된다는 것은 이미 당시에 인도와의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고대 이집트의 신인 이시리스와 아피스를 결합하여 그리스신과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 한 세라피스신의 형상을 한 조각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세라피스 신은 BC 4세기에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04~30) 시기에 새롭게 탄생되었으며, 이집트인과 그리스인이 함께 숭배하였다. 이것이 어떻게 AD 2-3세기경에 호탄으로 흘러들어왔는지는 참 불가사의 하다 해야 할 것이다.
![]() |
▲ 요트간 유적지 입구의 포도넝쿨 길 ⓒ 들찔레 |
다만 비단이 이곳을 통해 서양으로 전해졌듯이 동, 서 교역이 활발했다는 증거로 남은 이 유적을 섣불리 파헤치지 않는 것은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발굴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중국당국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파키스탄에서 보았던 시르캅 유적이나 터키의 트로이에서 보았듯이 오랜 세월을 두고 같은 자리의 주인이 바뀌고 바뀌면서 층층이 쌓인 유적들을 제대로 조사하고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점을 중국당국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 이곳에 그 먼 나라의 문명들이 전해졌는지 모르지만 이곳까지 전해지리라 모르고 유적을 만든 여러 지역의 당시 사람들, 그것들을 이곳까지 전해준 사람들, 다른 지방과 나라들에서 전해진 유물들을 보고 쓰며 새로운 유물과 문명을 만든 사람들 모두는 뭔가 꿈을 쫓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세월을 뛰어넘어 교감을 가능하게 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호탄에서 꿈을 쫓았던 사람들 중에 더러는 약탈자도 있었다. 근대 신강 지역에서 이곳 유물들을 약탈한 최초의 서양인, 그런 목적 달성을 위해 최초로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했던 스웨덴의 지리학자 스벤헤딘은 이곳 호탄 인근의 단단윌릭 유적지를 발견한 사람이기도 했다. 고고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지식도 없었지만 무계획적으로 도전한 티베트로 캐러벤이 실패로 돌아가고 우연히 전설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막 가운데는 1,001개의 도시들이 사막에 묻혀있으며 귀신들이 출몰하는데 어떤 이는 그곳에서 낙타 가득 보물을 싣고 왔다는 것이다.
그의 허영심과 내적 충동은 그를 한 겨울 사막 가운데의 단단윌릭 유적지로 이끌었고 나중에 그 유적을 자신의 저서 ‘아시아의 사막들을 지나서’에서는 ‘사막의 폼페이´라고 명명했다. 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권력핵심부의 사람들이 던지는 유혹에 빠져 나중에는 세계 1, 2차 대전을 벌인 독일을 옹호하고 일본의 군국주의를 숭배하여 조국의 국민들로부터도 배척당한 그가 진정 쫓은 꿈은 무엇이었을까?
![]() |
▲ 호탄 단결광장의 남쪽 탑 ⓒ 들찔레 |
다시 호탄 시내로 돌아온 우리는 시내중심가 호텔 바로 앞의 단결광장(團結廣場)을 산책했다. 러시아나 중국의 도시 한가운데는 아직도 사회주의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광장들이 꼭 있다. 그중 신강위구르자치구의 도시에 있는 광장들은 대개 중국과 그곳 소수민족들이 단결하고 융합해야한다는 메시지를 숨기고 있으며 은근히 원래 주인인 소수민족들에게 위압감과 더불어 한족과의 일체화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호탄의 단결광장도 예외는 아니다.
광장 남, 북 끝에 두 개 의 탑이 있고 그 사이에는 대형 전광판을 놓아 북경올림픽 중계가 한창이다. 드문드문 광장을 걷거나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은 있지만 정작 올림픽 중계를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가까운 남쪽 탑의 한 면에는 오성출동방이중국(五星出東方利中國)이라는 글씨가 붉은 바탕에 예서체로 큼지막하게 적혀있다. ‘다섯 개의 별들이 동쪽에서 떠오르면 중국에 길하다’는 뜻이다. 이 글에는 새삼스럽게도 중화사상의 본질이 숨어 있다. 이 글귀는 1995년 니야문명의 유적에서 발견된 길이 18.5cm, 폭 12cm의 어깨 덮개에 새겨진 것으로 더불어 다섯 개의 별을 포함한 상징들도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이런 유물은 당시 중국의 힘이 이곳까지 미쳤으며 당시부터 이 곳 위구르족이 사는 곳과 중국이 둘이 아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은근히 위구르족이 중국에 동화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 개의 별은 금성, 목성, 수성, 화성과 토성으로 당대 점성학에서 많이 나타나던 상징이다. 아마도 중국 영토내의 소수민족들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지는 다섯 개의 별이 일목요연하게 동쪽에 구슬을 꿴 것처럼 일렬로 늘어서는 현상을 보일 때 중국이 번성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곳 유적에서 나온 오성의 해석을 알게되면서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에 그려진 다섯 개의 별이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 |
▲ 호탄 단결광장의 북쪽 탑 ⓒ 들찔레 |
북쪽 탑은 더 거대한데 탑 위에 얹힌 조형물은 모택동과 늙고 야윈 할아버지가 정답게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다. 할아버지는 실제 이곳에 살았던 유아자(柳&20122子), 위구르어의 이름은 ‘쿠얼빤 투루무’라는 사람이다. 1883년 인근 우전에서 태어난 가난한 소작농이었던 이 사람은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된 후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받아 형편이 나아지자 그 은혜가 모두 모택동으로부터 나왔다고 믿고 1년 넘게 걸려 당나귀를 타고 북경으로 가서 모택동을 만나고 온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당시 모든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고 위구르족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 최고의 통치자와 시골 소작농의 만남은 중국공산당의 정당성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최고의 이벤트가 된 것이다. 유아자 할아버지가 사막을 지나고 평원을 지나 모택동을 찾아간 연유는 단지 소박한 꿈이었던 호구지책을 해결하게 되었다는 것에 비롯한다. 배운 것 없는 그가 굳이 모택동을 만난 것은 그가 쫓던 꿈을 이루어준 은인에 대한 감사를 표하러 간 것이다. 그는 또 그렇게 꿈을 쫓은 사람이다.
2003년 이곳에 건립된 이 탑에는 유아자가 모택동에게 바친 시와 당시 모택동이 이 노인에게 준 ‘완계사(浣溪沙)라는 한시가 한자와 위구르어로 각자되어 있다.
![]() |
▲ 팔뚝에 시계를 그려놓은 아이, 끝까지 나를 향해 달렸다 ⓒ 들찔레 |
호탄의 밤은 길다. 늦은 밤부터 아침까지 쉴 새 없이 부는 바람과 인근 공사장에서 밤새 공사하는 소리가 피로한 몸을 쉬게 하지 않는다. 내가 쫓고 있는 꿈은 무엇이기에 이곳 까지 와서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는가? 가만 생각해보면 청승스럽기까지 하다. 설핏 잠이 들어 꿈을 꾼다. 마이리크와트 고성이 보이고 아이들이 나를 쫓아 달린다.
그 중 한 아이의 팔뚝에 그려진 시계가 눈에 띈다. 어릴 때 내가 곧잘 손목에 그려 놓고는 했던 바로 그 시계다. 움직이지 않는 시계이지만 내 귀에는 시계소리가 들린다. 헉헉거리며 나에게로 뛰어드는 아이는 시계바늘처럼 자라서 갑자기 어른이 되어 있다. 어른이 되고서도 뜀박질은 멈추지 않는다. 백양나무 가로수가 바람에 흔들리고 움직이는 잎새 뒷면에 햇살이 꽂히자 잎은 비로소 반짝거리며 춤을 춘다. 시계소리처럼 저 아이가 쫓는 꿈이 어른이 되어서도 이루어진 것 같지 않아 마음이 바쁘다.
언젠가부터 나도 뛰고 있다. 아무리 뛰어도 저만치 보이는 언덕길에 다다르지 않는다. 내가 지칠 때 쯤 아이가 나를 힐긋 보고 웃으며 나를 앞지르기 시작한다. 곧이어 나는 꿈에서 깨어난다.
![]() |
▲ 황사먼지 가득한 바람이 분 호탄의 아침 ⓒ 들찔레 |
아침 눈을 떠서 바라본 단결광장은 황사먼지로 앞을 잘 분간할 수 없다. 내 사는 일도 앞을 잘 분간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갑갑한 느낌이 든다. 이곳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다는 광장에는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고 먼지를 피하며 종종걸음을 치고 나도 호탄을 벗어나고 있다. 바람에 백양나무가 가지채로 흔들리고 차창 뒤로는 황사 속의 도시 하나가 정을 떼려는 듯 이내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앞으로 보이는 길도 시야가 흐리기는 마찬가지다. 이어서 가는 카슈가르와 파미르 고원에서 내가 쫓는 꿈의 실체가 무엇인지 결국 알지 못한다고 하여도 꿈속의 그 아이처럼 그냥 뛰어가 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