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수필>
나는 확실히 촌놈인 모양이라.
권다품(영철)
시골 텃밭에 엄나무를 한 백 포기를 심은 지가 한 30년은 돼가는 것 같다.
이제 나무가 오래 되고 썩어서 삼사십 그루가 남았다.
그 엄나무 아래에다 어머니께서 산나물 씨앗들을 뿌려 놓고, 틈나는대로 호미로 풀을 뽑고 다듬어서 흙이 콩고물처럼 보드러웠다.
봄이 되면 그 밭에 산나물들이 많이 올라온다.
아내는 산나물이 맛있단다.
봄이면 산나물이 너무 맛있다며 시골로 올라와 산나물을 뜯어서 무쳐먹으며 시어머니의 고마움을 말하곤 했다.
"돈 주고도 이런 나물 못 사먹는다. 어데 가서 요래 맛있는 나물 먹겠노? 우리는 시골에 이런 텃밭이라도 있고, 또, 어머님이 요래 맬가이 풀을 뽑아 넣으이끼네, 요래 맛있는 나물 먹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요런 나물 못 먹는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연세가 드시고, 일을 하시다가 허리를 다치시는 바람에 부산 우리 집으로 내려 오셨다.
학원을 경영하면서 어머니 병간호를 하다보니, 고향인데도 몇 년간 시골로 올라올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올라와 보니, 집 마당에도 완던 풀밭이고, 풀 한 포기 없이 콩고물처럼 보드랍던 그 밭에도 어른 키보다 훨씬 크고 굵은 억새풀 밭으로 변해 버렸다.
학원을 정리한 후라 크게 할 일이 없던 때라, 곡괭이와 삽으로 억새뿌리 두어 구더기를 캐내 보니, 뻣뻣해서 찔리니까 아픈 뿌리가 30cm 이상 이리 저리 엉겨서 두어 구덩이만에에 내가 지쳐 버린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나니까 다음부터는 엄두가 안 난다.
몇 년을 방치해뒀다.
온 밭이 억새밭으로 변해 버렸다.
또, 군데 군데 딸기나무들도 자라고, 심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온 밭에 헛개나무도 자란다.
가시가 많은 찔레나무들까지 자라서, 밭이 아니라 사람이 들어가지도 못할 정도로 완전 산처럼 변해 버렸다.
"엄나무밭 저거 우째 좀 해 봐라. 인자 못 들어가서 나물도 못 뜯어 먹겠다. 그 맛있는 나물을 ...."
"하기는 해야 될 낀데, 너무 우거져서 힘이 들어서 인자 엄두가 안 난다."
"그러마 저 아까운 나물 버릴 끼가? 우째 좀 해 봐라. 너무 아깝다 아이가? 또, 자기가 안 하마 누가 하노?"
동네 사람들도 다 입을 댄다.
그래도 엄두가 안 나서 몇 년을 방치해 두고 있었다.
가깝게 지내는 집안 형님 한 분이 답답 했는지 "우리 벌초 기계 가지고 가서 확 치뿌라." 한다.
엄두가 안 나긴 했지만 겨우 겨우 큰 마음을 먹고 시작을 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시작을 하고 나니까 생각보다 빨리 끝이 난다.
밭이 훤하고, 내 속이 다 시원하다.
올 해는 아내가 가시밭 속을 파고 들면서 가시에 머리가 엉키고, 또, 찔리고 긁키지 않고, 나물 뜯어먹기가 편할 것 같다.
일을 하면서 '내가 나이가 더 들고, 또, 죽고나면 이 밭 풀들을 누가 쳐낼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긴, 시골에서 자라면서 시골 일을 조금이라도 해 본 나도 이렇게 힘들고 하기 싫은데, 도시에서만 자란 내 아들내미들은 엄두나 날까 싶다.
젊은 사람들은 차라리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지, 이런 고생을 해가며 산나물을 먹으려 하지 않을 것 같다.
또, 그 맛을 알아서 먹고 싶다고 해도, '돈만 있으면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사 먹으면 되고, 또, 산지에다가 직접 주문하면 집에까지 바로 배달해 주는데...'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 나물들은 확실히 우리 시골밭의 그 나물 맛이 아니었다.
바로 산아래라 산과 다름없는 밭에서 나는 나물들이라 맛이 확실히 다르다.
벌써 나물의 향부터 다르다.
그 나물을 삶아서 참기름 싸~악 둘러서 조물조물 묻혀서 먹으면 정말 맛있다.
나는 우리 집에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들이 와서, 나물들을 먹으면서, 마당에다가 솥뚜껑을 얹어놓고 돼지고기 삼겹살을 도톰하게 잘라와서 치지지 구워먹을 때 기분이 참 좋다.
내 어릴 때 기억으로는, 가을 추수가 끝나고 나면 시골에서는 집에서 절구통에다 찧어서 인절미를 곧잘 해 먹었다.
나는 "이거 또 집안 할배들하고, 할매들 하고, 아재들 집에 좀 갖다주야 되는 거 아이가?" 하면, 우리 어머니께서는 "여게 또 싱거분 동네가서 구장질 할 넘 나왔거마는...." 하시며 가족들 모두 웃곤 했다.
아버지도 어린 놈이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 싶으셨는지, 쟁반에다 담아서 집안 할아버지나 할머니들 집에는 갖다 드리고, 집안 아재들은 우리 집으로 오시라고 해서 나눠 먹곤 했다.
또, 우리 아버지는 가끔 무안 장에 내려가셨다가 해그름쯤 되면 큰 가오리를 사서 무안에서 집까지 걸어 오신다.
어머니는 큰 다라이에 미나리나 무를 썰어넣고 그 가오리 회를 묻혀서, 마당에다가 멍석을 깔고 집안 어른들이나 아재 아지매들을 오시라고 해서 나눠 먹곤 하셨다.
아버지는 "음식을 나눠 먹을 줄 모르면, 그 자식들도 그렇니라. 옛날부터 어른들은 음식 끝에 인심난다 카니라. 음식 저거 식구들끼리 몰래먹으면, 그 집에 사람 발길 끊어지고, 자석들도 크게 안 풀리니라." 하시며, 나눠먹기를 가르치신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런 말을 들으면서 컸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 집에 사람들이 와서 왁자하게 같이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이 참 좋다.
다행히 내 아내도 어깨 아프다 손목 아프다 하면서도 그런 음식들을 해서 나누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과시한다고 없는 돈을 빌려서 값비싼 음식을 대접하고 그러지는 않는다.
그냥 우리가 맛있다 싶은 음식이 있으면, 가까운 사람에게도 같이 먹자고 하고 싶은 정도다.
또 봄이다.
지난 주에 냉이 맛을 보고, 하도 맛있어서 또 냉이를 캤다.
토욜 날 올라 오면 또 맛있는 겉절이와 찌짐 맛을 볼 수 있겠다.
날씨가 조금 더 따뜻해지는 완전한 봄이 되면, 마당은 벚꽃 천지로 변하고, 그 벚꽃 아래 돌로 된 식탁에서 산나물도 먹고 오가피순 엄나무순도 먹겠다.
진짜 맛있을 것 같다.
나는 봄이 되면 '사람 사는 거 짜달시리 별 거 있을까? 이렇게 사람들 모여서, 맛있는 거 나눠 먹으면서, 막걸리도 살짝 한 잔 씩 마시며 천박하지 않은 싱거운 소리도 한 마디씩 하고...' 이런 것이 정말 좋다.
어릴 때 보고 컸던 울 아부지 울 엄마 사셨던 그 방식이 참 좋다 싶은 거 보이끼네, 나는 확실히 촌놈인 모양이라.
나는 요래 살아도, 짜달시리 부끄러운 줄도 모르겠더라꼬.
와 부끄럽겠노?
나는 이래 사는 기 좋더라꼬.
2025년 3월 8일 오전 9시 08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