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지김치 / 박기영
어머니 첫 제사 오던 해 여름이었다.
마흔 넘은 홀아비가 혼자 여섯 살 되는 사내아이 키우는 것 안쓰러운 주인집 노파는 그해 첫 정구지김치 사기그릇에 담아 문간방 댓돌 위에 올려놓았다.
양철 지붕도 뜨거운 햇살에 밤마다 가쁜 숨 토하던 방안, 마른버짐 번진 얼굴에 여름감기 떨어질 날이 없던 아이는 난생 처음 보는 정구지김치 정신없이 퍼 먹었다.
다음 날 홀아비는 노파에게 정구지김치 담는 법을 듣고 시장에 나가 통멸치를 사다 끓인 뒤 종이에 거르지도 않은 채 김치를 만들어 냄비에 담았다.
호롱불이 심지 길게 돋우던 밤, 사내아이는 자꾸만 잔가시가 혓바닥 찌르는 김치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김치기 달아 달아, 하면서 뻘겋게 핏물이 든 입술을 오물거리고.
통멸치 뼈째 정구지 버무린 사내의 손은 심장처럼 붉게 부풀어 홀아비 혼자 사는 밤을 아슬아슬하게 지켰다.
- 시집『맹산식당 옻순비빔밥』(모악, 2016)
* 사전엔 부추가 표준어로 올라와 있지만 남쪽 지방에서는 정구지라는 말이 익숙하다. 정구지 어원도 정확하지 않지만 정월부처 구월까지 먹는 채소 혹은 정력을 길게 이어가게 하는 채소라는 말이 그럴듯하다. 더러 게으름뱅이풀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하도 잘 자라서 공을 들이지 않더라도 수확할 수 있기에 그렇다는 말도 있고, 정력에 좋아서 일은 안 하고 욕정만 풀려고 한다는 데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이래저래 정력에 좋은 건 분명한가 보다
이 시는 정구지김치 맛에 반한 “여름감기 떨어질 날이 없던” 여섯 살 아이를 위해 “마흔 넘은 홀아비”가 정구지김치를 손수 담가 주는 이야기다.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위해 아버지가 “눈 속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김종길, ‘성탄제’)처럼 부정을 환기하는 시이긴 하지만, 이 시는 그리움의 정서에 그치지 않고 “심장처럼 붉게 부풀어” 오른 아버지의 손과 혼자 사는 아슬아슬한 밤의 기억을 떠올림으로써 그 무렵 혼자된 아버지의 삶까지 이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박기영 시인의 이번 시집은 거의가 음식에 대한 이야기다. 포수 출신으로 한때 낭림산맥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아버지와 관련된 음식도 적잖다. “몇 개의 봉우리 몇 개의 골짜기 넘다 밤이면 산 바위 밑에 잠자리 잡고 육포에 소금 넣고 탕 끓여서 언 몸을 녹이는 거야”(‘육포탕’)에서 보듯 산신령(호랑이)을 잡기 위한 산행에서는 육포탕이 요긴한 줄 알게 되고, “온몸이 바스러진 콩물과/ 꿩고기 덩어리가 간수에 엉겨 붙어야/ 씹을 때마다 하늘의 뼈 씹히는 소리를 냈다”(‘꿩두부’)는 데서 지금은 재현하기 어려운 음식을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시집을 통해 여러 음식을 달게 먹으니 된장찌개 실력이 날로 늘어가는 아버지도 생각난다. 돼지국밥이라도 한번 사야겠다. 정구지와 마늘과 고추가 있는 점심을. (이동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