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1) 마르틴 루터의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하여 (1520)’
*마르틴 루터(1483 – 1546)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다. 신앙의 자유이다.
기독교는 오직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이 의롭다고 생각했다.
자유는 신앙의 영혼이자 핵심이 되었다.
--> 이 주장이 16세기 종교 개혁의 핵심이다.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종교적 행위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눈에
보이는 종교적 행위 (신체적 행위)가 유행했다. 대표적 사례가
‘면죄부 판매’ 이다.
--> 신앙과 행위의 문제가 대두했다.
===> 카톨릭과 개신교가 분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신적 자유는 --> 정치적 자유로 확산하였다.==>(자유는 농노
해방으로 얻는 자유로 해석하면서)농민 반란이 일어났다.(1526)
읽기의 자유 — 라틴어 성경을 지방어로 번역했다.(1534년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
*트리엔느 공의회(1545-63)
로마 카톨릭이 종교개혁에서 방어하기 위하여 트리엔느 공의회를 열었다.
(트리엔느는 이태리 북부의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에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출현에 대한 반종교개혁 대책이었다.
프로테스탄트를 이단으로 정의하고, 정치적, 군사적으로 대응함으로 유럽에
엄청난 폭력의 홍수를 일으켰다.
공의회는 성경의 경전, 성전, 원죄, 의학, 구원, 성사, 미사, 성인 존경 등 광범위한 영역을 모두 다루었고,
문화, 예술 분야에도 규칙을 만들어서 반종교 개혁 부분을 통제했다.
(대표적인 것을 보면 나체상의 금지, 주제를 선택하고, 주제를 정확히
묘사해야 하며, 이교적이고, 세속적인 요소는 배제했다.)
공의회의 결과로, 가톨릭 교회의 전례와 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만들었다.
미술에서는 카톨릭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위엄, 장엄, 경이, 열광, 감동,
충격 등으 공통점을 가진다.
실제로는 금빛과 대리석, 치장벽토, 흩날리는 의상, 공중에 떠다니는 인물
(신비감의 표현이다.) 등등은 바로크 미술의 특징을 이룬다.
바로크 미술을 유럽에 퍼트리는데는 예수회가 큰 역할을 한다.(영웅주의,
신비주의는 예수회와도 맞아떨어졌다.)
===> 이러한 분위기는 절대왕정이 태어나는 토양이 된다.
다음 공의회는 300년이 지난 1869년에 바티칸 공의회 이다.
2) 프랑스 종교전쟁-위그노 전쟁 (1562 – 1598)
프랑스에는 개신교가 널리 퍼지고 있었고, 프랑스 왕실은 카톨릭을 옹호하면서 마찰이 일어나고, 종교전쟁이 일어났다.
섭정이 된 카트리는 데 메디치는
1562년 파리 근교의 비시에서 신교도 예배소를 습격하여 74명이 죽고 100여명이 부상했다.
개신교는 상업 종사의 부르주아지가, 카톨릭은 보수 세력의 귀족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면서 폭력을 사용했다.
사회의 전체 분위기는 신-구의 화해였다. 이때 프랑수아스 1세의 아들 앙리 2세는 왕비를 메디치 가의 카트리느를 맞았다.(카트리느 드 메디치) 카트리느는 프랑스 전역의 개신교도 3만 ~ 7만을 학살했다.(이 사건으로 지금도 프랑스 인은 카트리느를 ‘그*’ 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상복을 입었다고 한다.)
신-구 교 간의 죽이고, 죽이는 일이 이어지면서
신교도인 앙리 4세가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종교 자유를 허용하는 ‘낭트 칙령’을 발표했다.
종교전쟁도 끝이 났다.
낭트 칙령 -- 1598
(* 앙리 4세의 부인이 루벤스 그림으로 유명한 마리 드 메디치 이다. 이 여자도 권력을 탐하여 역사 소설에 소재가 되는 짓을 많이 했다. )
프랑스 왕위를 보면 프랑소아즈 1세의 아들이 앙리2세이다
앙리 2세의 왕비가 카타린느 드 메디치이고, 이 사이에 샤를 9세가 태어났다.
*프랑소아즈 1세 – 앙리 2세 –샤를 9세 – 앙리3세 – 앙리4세로 이어진다.
앙리 4세는 부르봉 왕가를 열었다.
*앙리 4세(1553년 ~ 1610년)
부르봉 왕가 최초의 왕이다. 위그노들의 수장이다. 1589년 프랑스 왕위에 오른 뒤에는 믿음의 자유를 부여하는 낭트 칙령을 1598년에 반포하여 내전을 종식시킨 뒤 프랑스의 발전을 이끌었다.
정부가 50명이 넘는 오입쟁이라고 한다.(별명이 팔팔한 오입쟁이)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세례 받았으나, 어머니 호아나의 영향으로 개신교로 개종했다. 그들의 수뇌가 된 뒤 프랑스의 내전을 이끌었다.
1572년 8월 18일 프랑스 국왕 샤를 9세의 누이동생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결혼하였다.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왕비가 메디치 가의 카트린느였다. 카트리느는 열열한 카톨릭주의자 이다.
(족보로 따지면 카트린느는 앙리4세의 장모이다. 샤를9세와 앙리3세는 처남이다.)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사건이 터지면서 신, 구교의 내전은 심해졌다. 현재 사학자들은 개신교 세력의 우두머리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과 로마 가톨릭교회 세력의 중심인 왕의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 기즈 공작 사이의 분쟁이 불씨가 되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콜리니는 학살이 시작됨과 동시에 기즈 공작의 수하들에 의해 살해당했으나 한번 폭발한 가톨릭교도들의 감정은 가라앉지 않았고, 왕실은 이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내전은 더욱 더 격화했다.
앙리 4세는 현 왕실 가문의 후손이나, 혈통으로는 촌 수가 멀었다. 앙리 3세가 후손 없이 죽자(암살) 앙리 4세가 왕위에 올랐다.
* 샤를 9세- 앙리 3세(샤를 9세의 동생이다. 카톨릭 수도사에게 암살) - 앙리 4세가 왕이 되다.
신,구교 간의 갈등이 더욱 심해지자, 앙리 4세가 카콜릭으로 개종하면서, 낭트 칙령을 발표했다.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면서 내전이 끝 났다. 낭트 칙령은 위그노의 불만을 잠재우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로서 경제 성장을 가져왔다. 앙리4세가 ‘나는 하나님이 허락한다면 일요일에 모든 프랑스인이 닭고기를 먹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것이 현실에서 거의 이루어져다고 했다.(이런 걸 보면 정치는 백성의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이다. 이념이 아니다.)
* 앙리 4세는 처음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앙리2세와 카트린느의 딸이다.) 결혼했으나 이 결혼은 지극히 불행했을 뿐 아니라 자식도 없었다.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에게 자녀를 기대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앙리 4세는 정부이자 이미 자신과의 사이에서 세 아이를 낳은 가브리엘 데스트레를 새 왕비로 삼고 싶어했다. 그러나 1599년 가브리엘 데스트레가 급사하고 말았다. 앙리 4세는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1599년에 이혼하고 1600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대공가의 딸인 마리 드 메디시스와 재혼하였다.
마리 드 메디치와의 결혼 생활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의 결혼 생활처럼 불행했지만 마리 드 메디치는 결혼 1년 만에 훗날 루이 13세가 되는 아들을 비롯해 여러 자식들을 낳아 후계자의 생산이라는 의무를 완수했다.
*1610년 5월 14일, 앙리 4세는 가톨릭 광신도 프랑수아 라바이약(François Ravaillac)이 휘두른 칼에 두차례나 찔려 죽고말았다.[15][16] 앙리 4세가 타고가던 마차가 파리 시가지에서 교통혼잡으로 정체되어 멈추어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낭트칙령으로 위그노에게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 게 결정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원한을 사게되었다. 이후 그는 무려 17차례나 암살 위기를 겪어야 했다. 그때마다 예수회의 관련성이 끊임 없이 거론되었다. 특히 1594년 예수회 콜레주 학생 장 샤스텔의 암살 기도 후 예수회는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범인은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단독범행임을 고수했고 거열형을 당해 비참하게 죽었다. 그의 시신은 다시 화형에 처해졌다. 앙리 4세는 프랑스 생드니 대성당 바실리카에 안장되었다. 그가 죽고 장남 루이 13세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국정은 강력한 가톨릭 옹호자였던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의 섭정이 있었다.
루이 13세가 친정체제가 되면서 가톨릭교회 추기경 리슐리외의 손으로 넘어갔다.
마리안느는 귀족 세력과 루이13세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화가 루벤스의 집에서 죽었다.
(리술리외가 재상이었던 루이 13세 왕궁이 삼총사의 배경이다.)
*리술리외는 왕실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비밀기관을 두었고,
삼총사는 비밀기관(비밀 경호원)의 일원이다.
그리고 루이 14세대에 이르러 가톨릭교회의 숙원대로 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 칙령은 철회되고, 개신교인들을 가혹하게 박해하게 된다.
앙리4세의 자녀들
루이 13세
엘리자베드 드 부르봉 — 스페인 펠리페 4세 왕비
크리스틴 마리 -- 사보이 공국 공작과 결혼
니콜라 앙리 -- 요절
가스통 도를레안 공작
앙리에타 마리 -- 영국 찰스 1세 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