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23
9월24일[연중 제25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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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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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i8ywIPyRhQ?si=7-_fkn0MlaKp28oJ
(백종원 마르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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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늦게라도>
우리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루 이틀 하고 끝낼 그 무엇이 아니라, 평생토록 지속되어야 할 긴 여행길, 즉 여정(旅程)입니다.
여행하다보면 힘겨운 오르막길이나 만만치 않은 돌밭길도 만나지만, 때로 평탄한 지름길이나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길’도 만납니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순간, 뜨거운 사막도 거치지만, 때로 가슴이 확 트이는 천국같은 초원도 만납니다. 활활 타오르는 꽃같은 젊음의 순간이 있는가 하면,
급격히 쇠락하는 노년의 순간도 맞이합니다.
주님 뜻에 맞갖은 정직하고 충실한 길만을 걸어가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때로 그릇된 길로 접어 들어 갖은 방황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아주 늦게야 주님을 만나는 인생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대체로 의기소침해하며 이렇게 하소연 합니다. ‘주님도 무심하시지. 왜 이토록 늦게야 당신을 만나게 하시는가? 이토록 늦은 나이에 이런 방향 전환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포도밭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오전 6시에 온 일꾼들에게도 하루 일당 10만원을 지불해주시지만, 오후 세시뿐만 아니라 오후 5시에 일하러온 지각생 일꾼들에게도 똑같이 일당 10만원을 손에 쥐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관건은 늦게라도 주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늦게라도 그분의 포도밭을 향해 초스피드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감지덕지하게도 똑같은 일당을 주시는 주님께 백번 천번 감사드리며, 비록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주님 보시기에 멋지고 아름답게 계획하고 장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노화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하게 됩니다. 각 가정에서는 급격히 늘어난 수명이 마냥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실감합니다.
수도회·수녀회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거의 모든 수도회·수녀회들이 회원들의 노령화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분주합니다.
노년기에 직면해야 하는 도전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잘 예측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삶의 기쁨이나 희망은 급격히 감소되어가는 반면, 고통과 외로움, 슬픔과 번뇌는 점점 커져감을 실감합니다. 몸도 예전같지 않아 이런 저런 질병에 시달립니다.
인생의 무대에서 물러나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회의감에 사로잡힙니다. 하루하루 뭔가가 내 안에서 소멸되어간다는 느낌에 우울감도 커져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란 존재의 사라짐,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네 삶과 신앙생활 전체를 흔들어놓습니다. 생각할수록 헛되고 허무한 것이 우리네 인생이란 것을 파악하고 실망하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이승의 삶을 얼마나 불꽃같이 살았으면, 얼마나 원없이 달릴 곳을 다 달렸으면, 이런 고백까지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살든지 즉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곧 이득입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 편이 훨씬 낫습니다.”(필리피서 1장 20~23절)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한 인간 존재가 어떻게 이런 고백을 서슴치 않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이 지상에서부터 이미 그리스도를 온 몸과 마음으로 체험했고, 그분 안에 온전히 머물렀기에 그런 용감한 고백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바오로 사도처럼 나이들어갈수록 점점 지상의 것을 줄이고 천상적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지상에서부터 천상을 만끽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오로 사도처럼 용감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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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OPkOd3vUh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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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갚을 수도 없고, 갚았다고 믿어서도 안 되는 한 데나리온의 가치>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서 우리가 어떻게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그 비결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비유 말씀은 포도밭 일꾼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주인은 한 데나리온으로 약속하고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다섯 시에도 일꾼들을 불러 모읍니다. 다섯 시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는 하루 종일 일한 일꾼들이 자신들은 더 많이 받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도 한 데나리온밖에 받지 못하자 투덜댑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는 가장 낮은 종이 되어 이웃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입니다.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오늘 하루 종일 일한 종들처럼 자신들이 주인에게 더 해 주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 데나리온’의 가치입니다.
우리가 받는 한 데나리온은 지옥이 가지 않고 천국에 이르게 만드는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일만 탈렌트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일만 탈렌트로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일만 탈렌트의 가치는 예수님의 피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가죽옷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자신을 그리스도라 할 수 없고 그러면 주님 앞에 나설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많은 것을 드린다고 착각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체 성혈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태양이 우리에게 주는 빛에 감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처지가 연꽃의 씨에 불과함을 알면 됩니다. 연꽃 씨는 물 밑 진흙 속에 묻혀있습니다. 그것이 스스로 자신을 깨고 나올 힘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태양의 따사로움이 그 씨앗에 전달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안다면 아름다운 꽃을 피웠을 때 연꽃이 어떻게 태양에게 더 많은 것을 준다고 착각할 수 있을까요?
배우 박철민 씨가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자식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때 한없이 오열하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왜 슬플까요? 더는 어머니가 자신이 보답해드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어 안타까운 게 아닐까요? 그는 어머니의 음식을 맛보고도 눈물을 흘립니다. 이미 저세상에 계신 어머니의 은혜에 더는 보답해드릴 수 없다는 것이 슬픈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교만한 일꾼들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한 데나리온보다 더 일을 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한 데나리온의 값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갚을 수 없는 가치입니다. 우리를 하느님 자녀라 믿게 해 준 하느님 피의 값입니다.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 데나리온이 없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지옥에 다녀오게 된 것이 자신을 가장 많이 변화시켰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마땅히 가야 할 지옥에서 건져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다만 한 명이라도 지옥에 가지 않게 하도록 수천 번 죽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하루 종일 일해도 언제나 그 한 데나리온에 보답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것을 겸손함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은혜에 다 갚을 수도 없지만, 이미 다 갚았다고 믿으면 더 큰 일입니다. 제가 신학교 때 들은 말 중에 “사제가 되려고 하지 마라!”였습니다. 사제가 되고 나면 더는 할 게 없어서 이제 누리려고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술이나, 여자, 돈이나 비싼 차, 돈 많이 드는 운동이나 여행 등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내심 ‘내가 사제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제로 불러주신 분께 감사하기 위해 성인 사제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라만차의 기사에서 돈키호테를 쫓아다니는 산초란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아무 이익도 없지만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알돈자가 그에게 왜 얻는 것도 없는데 그런 이상한 노인을 쫓아다니냐고 할 때 산초는 노래합니다.
우리도 우리가 받은 한 데나리온 때문에, 곧 우리가 받은 정체성 때문에 그 피에 대해 한없이 기뻐하며 영원히 찬미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좋으니까, 그냥 좋으니까. 나의 털을 몽땅 뽑는대도 괜찮아. 묻지 말아요. 이유가 뭔지. 그런 건 눈을 씻고 잘 봐도 없다오. 발가락을 썰어서 꼬치구일 한데도 꼬집고 할퀴고 물리고 뜯겨도 하늘에 외치리. 나는 주인님이 그냥 좋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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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교황청 성직자 성 장관인 유흥식 추기경님의 소개로 삼성전자는 바티칸 광장에 전광판을 세우기로 했다고 합니다. 20년 전에 일본의 파나소닉에서 전광판을 설치했는데 많이 낡았습니다. 유흥식 추기경님은 삼성전자의 이재용 회장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전광판 이야기를 하였고, 삼성전자는 기꺼이 바티칸 광장에 전광판을 설치하고, 음향 시설도 설치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전광판 설치가 끝나면 삼성전자의 임원들이 교황님을 알현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전광판과 음향 시설 설치는 많은 비용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삼성전자가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광고효과’가 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매년 바티칸에는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합니다. 교황청에서 주관하는 행사가 전 세계에 중계 될 때도 삼성전자의 전광판은 자연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바티칸 광장에 전광판을 세우려는 회사는 많을 것입니다. 그만큼 광고효과가 크기 때문입니다. 바티칸에 설치되는 전광판은 교황청에게 도움이 되지만 삼성전자에게도 영광이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물은 정화와 회개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군중은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물었을 때 세례자 요한은 ‘가진 것을 나눠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세리들은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물었을 때 세례자 요한은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군인들은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물었을 때 세례자 요한은 ‘아무에게도 강탈하거나 갈취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찾아서 요르단 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청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의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정화와 회계의 상징이었던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죄의 사함을 받는 성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물이 거룩해 졌습니다.
오늘은 교회가 정한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이주민과 난민은 정든 고향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꿈과 희망을 찾아 떠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이주민과 난민을 차별하지 않고 가족처럼 맞이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주민과 난민을 박해하지 말고 환대하여라. 너희도 한 때는 이집트에서 이주민과 난민으로 살지 않았느냐?” 제가 살고 있는 미국은 이주민과 난민이 세운 나라입니다. 가뭄과 굶주림을 피해 유럽에서 사람들이 이주민으로 왔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마음에 담고 아프리카에서 노예가 들어왔습니다.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아시아에서 사람들이 이주민으로 왔습니다.
저 역시도 교구의 명을 받들어 이주민으로 왔습니다. 이주민과 난민은 거추장스러운 짐이 아닙니다. 이주민과 난민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교황이 된 후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람페투사’입니다. 람페투사는 아프리카의 난민들이 유럽으로 들어오는 관문입니다. 교황님의 방문이 있은 후에 유럽은 난민들에게 더 많은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 재능이 아닙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학벌과 혈연이 아닙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재산과 업적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그것만으로도 대접을 받고, 풍족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과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자캐오의 나눔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셈법은 우리의 셈법과 다릅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강하다는 사람은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며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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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0,1-16: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과 거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분은 항상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시고 무한히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는 은총은 그분의 사랑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적인 가치판단과 행동이 완전히 다른 분이심을 전해주고 있다. 주인은 이른 아침, 그리고 아홉 시에 일꾼을 구하고 그들에게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였다. 그리고는 정오와 오후 세 시쯤에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그와 같이하고 있다.(1-7절) 이렇게 온종일 일꾼을 부른 것은 일이 급해서였겠지만, 일하는 시간은 완전히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막판에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12절) 사람도 있다.
날이 저물었을 때 주인은 관리인을 시켜 맨 나중에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품삯을 한 데나리온씩 주게 한다. 그래서 온종일 일한 사람들은 계약한 것보다 더 받으리라 기대를 하지만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되어 실망함과 동시에 불평을 털어놓는다(8-12절). 그러나 주인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그 불평을 일축한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3.15절) 주인의 행동은 계약상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다. 그 주인의 선한 마음은 더 많이 일한 사람들에게 질투심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의 선성이 차별을 초래한다면 그것 역시 불의의 한 형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주인의 의로움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즉 하느님의 행위는 우리 인간의 예측을 벗어나고 완전히 무상적이며 모든 장벽을 없애시고 요구보다는 항상 무엇인가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이다. 온종일 일한 사람들도 사실은 주인의 초대에 의한 것이며, 그들이 더 많이 일했다면 그 자체가 은총이며 자비 때문이기에 그 원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예수께서는 당시 사회에서 배척받고 소외당했던 사람들을 받아들이셨다. 반면에 사회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제쳐놓으신 것 같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반발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베풀어지기를 원하시는 분으로 그리하여 어느 때라도 모든 사람이 당신의 포도원에 들어오도록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며 당신 자신을 변호하신다. 그러나 마지막에 오는 사람들에 대한 대우 때문에, 먼저 온 사람들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단지 그들의 특권의식을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되찾은 작은 아들에게 큰 배려를 하지만, 이 때문에 큰아들에 대한 사랑을 감소시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시간에 온 사람들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을 말하며, 무엇인가 더 보상을 받고자 하는 먼저 온 사람들은 유다인들을 말한다. 하느님은 구원받을 사람들을 구별하거나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그분 앞에서 특권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마지막 자리에 두실 것이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16절). 어떤 면에서는 유다인들에게는 위협이 되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모든 것이 무상이다.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 것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나 공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부르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중요한 것은 일이나 봉사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랑과 신뢰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수고에 대한 어떤 보상을 요구하는 처지에 있게 된다면, 우리는 자녀가 아니라, 고용된 일꾼의 신분이 되고 만다. 이것이야말로 율법의 멍에를 지고 만다.
사도 바오로도 자신의 영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의 포도원에 늦게 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구원이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로마 9,16)라는 것을 체험한 사람이다.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를 사도로 불러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될 때, 즉 주님의 사랑에 완전히 잠길 수 있을 때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 바오로는 여기서 더 형제들에게 더 유익한 존재가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주는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무상적 사랑이 바오로 사도에게 형제들을 위하여 온전히 자신을 바치도록 강력히 부추기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사람들도 특별한 상급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오직 하느님만이 주시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가 상급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자녀의 삶은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온전히 자신을 투신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보상이나 특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와 형제들을 위해 살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우심을 기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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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쁨과 감사>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마태 20,8-12)
이 이야기를,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을 기준으로 해서, 즉 순서를 반대로 바꿔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맨 먼저 온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나중에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덜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놀라고 기뻐하면서, ‘맨 나중에 온 저희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저 사람들과 똑같이 대우해 주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면 포도밭 주인은 무슨 대답을 하게 될까? 아무 대답도 없이 흐뭇한 표정으로 웃기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의 심정에,
즉 그들의 ‘기쁨과 감사’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 이야기를 묵상하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에 더 합당할 것 같습니다.
‘기쁨과 감사’,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자세입니다. ‘내가’ 특별히 잘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나는’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인데, 성인 성녀들에게 주신 은총과 똑같은 은총을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누구나 놀라게 될 것이고, 기뻐할 것이고, 하느님께 감사드릴 것입니다.
그 심정을 시편 저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마리아의 노래’에 표현되어 있는 성모님의 심정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ㄴ-48ㄱ)
시편 8편과 ‘마리아의 노래’를 보면, ‘기쁨과 감사’의 바탕에 ‘겸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다.”라는 진정한 겸손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큰 은총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생깁니다. 그리고 ‘겸손, 기쁨, 감사’는 ‘사랑’과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도.>
그렇게 기쁨과 감사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남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기쁜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이 생기면 함께 슬퍼하고, 아픈 일이 생기면 함께 아파할 것입니다. “나는 특별한 존재다.”라는 교만에서는 기쁨과 감사가 생기지 않습니다. 기쁨과 감사는 없이, 특별대우를 요구하는 더 큰 교만에 빠지게 되고, 남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 금방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울 왕이 몰락하게 된 첫 번째 원인은 부하 다윗에 대한 시기심이었습니다.(1사무 18,9) 백성들이 다윗의 승전을 찬양할 때 사울이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함께 기뻐했다면, 그래서 다윗을 계속 충성스러운 부하로 남게 했다면, 이스라엘 역사는 크게 달랐을 것입니다.
‘미르얌’과 ‘아론’의 이야기도 연상됩니다.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미르얌과 아론은 모세가 아내로 맞아들인 그 에티오피아 여자 때문에 모세를 비방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주님께서 이 말을 들으셨다. 그런데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민수 12,1-3)
민수기 저자가 모세의 겸손을 특별히 강조한 것은
그 세 사람의 갈등의 원인이 모세 쪽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미르얌과 아론 쪽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아마도 미르얌과 아론은 자기들이 긴 세월 동안 노예처럼 살면서 고생할 때, 막내 동생인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로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았던 모세가 어느 날 갑자기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서 나타난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것이 몹시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미르얌과 아론의 심정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 나오 ‘맨 먼저 온 이들’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고생만 했고 모세는 별로 고생도 안 했는데, 하느님께서는 왜, 모세는 특별대우 하시면서 지도자로 임명하시고, 우리는 모세의 조력자로 삼으셨을까?” <사실 모세 자신이 스스로 지도자로 나선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로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지도자로 뽑히는 것을 한사코 사양했었습니다.(탈출 4,10.13)>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특별한 점이 무엇인지는 말씀하시지 않고, 당신이 특별히 모세를 뽑으셨다는 말씀만 하시면서 미르얌과 아론에게 진노하셨습니다.(민수 12,5-9)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어떤 특별한 점이 모세에게 있었겠지만, 어떻든 가장 특별한 점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셔서 뽑으신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말장난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당신의 권한과 자비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남이 받은 은총과 은사에 대해서 우리가 시기와 질투를 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과 자비를 거스르는 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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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찾으러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선 주인은 일할 사람들을 발견하자 한 데나리온으로 품삯을 합의하고는 그들을 포도밭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주인은 일꾼이 모자랐는지 계속해서 사람들을 찾으러 다닙니다. 아마도 수확철이었나 봅니다. 오전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심지어 저녁때가 가까운 다섯 시에도, 주인은 만나는 사람마다 정당한 품삯을 약속하며 자기 포도밭으로 보냅니다. 이제 해가 지고 주인은 관리인을 시켜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려 합니다. 그런데 품삯을 주는 순서가 일꾼들을 불러 모은 순서와는 정반대로 진행됩니다. 오후 다섯 시부터 한 시간가량 일한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모습을 본 나머지 일꾼들은 그보다 더 받으려니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세 시간, 여섯 시간, 아홉 시간, 심지어 이른 아침부터 열두 시간을 꼬박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어집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포도밭 주인이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꾼들을 찾아 헤매듯, 하느님께서도 당신 나라의 구원을 선사할 사람들을 끊임없이 모으러 다니십니다. 그러한 부르심에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하고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 모두는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이 구원은 어떤 차등을 두지 않으며 모든 이에게 똑같습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구원 방식이 사람의 상식을 뛰어넘는데도, 우리가 우리의 상식 수준에만 머무르려 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제1독서). 노동 시간에 맞게 보수를 지급하지 않는다며 항의하는 일꾼들처럼, 오랜 기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자신이 이제 갓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과 똑같은 취급을 받는 것을 혹시 불편해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우리는 모두 ‘한 데나리온’이라는 구원을 약속받았고, 그것이 신앙생활의 기간에 따라 두 데나리온이나 이분의 일 데나리온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구원으로 충분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시기하기보다는, 우리가 모두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오히려 감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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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 김기수 바오로 신부님]
<“나를 사려면 얼마가 필요할까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
오늘 비유 말씀의 앞뒤로 나오는 말씀입니다. 일한 시간은 차이가 있었지만, 받게 되는 품삯을 똑같이 나누어줌으로써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됩니다. 하느님의 후한 마음에 대한 복음임을 알고 있지만, 일한 만큼 주셔도 불만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던 와중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늘 나라는 … 일꾼들을 사려고 …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 20,1) 일꾼을 산다는 표현이 특별하게 보였습니다. 일한 시간과 한 데나리온만 가지고 저울질을 하며 복음의 의미를 살피던 와중, 일꾼을 산다는 사실이 추가되며 복음을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일꾼을 산다면 얼마 정도면 될까요? 만일 누군가가 나를 돈 주고 사겠다고 말하면 얼마를 부르실 수 있으실까요? ‘내가 말한 만큼의 돈을 줄 수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마음껏 값을 부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저 사람이 정말 나를 사게 된다면, 나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 그대로 저 사람이 주인이 되고 나는 일꾼이 될 터이니 말입니다. 많은 돈을 받은 대신 그 사람의 일꾼이 되면, 어떻게 나를 부려 먹을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를 주고 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포도밭 주인은 일꾼들에게 봉급을 준다고 합니다. 이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값을 충분히 치렀지만, 일한 것에 대해서는 봉급을 준다고 합니다. 한 사람에 대해 치른 값을 생각해 보면, 굳이 주지 않아도 되는 품삯이라 얼마가 되어도 큰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이 불평을 표현합니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과 똑같이 대우를 받은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밭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15) ‘내 것’, 그리고 ‘후함’이라는 표현이 이런 의미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복음을 읽으면서, 우리가 주님의 생각에 가까이갈 수는 있지만,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과 자비’라는 단어로 표현하지만, 이 표현으로 하느님이 담길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분의 깊은 뜻에 가까워지길 청하며 복음말씀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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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정비오 비오 신부님]
<하늘나라는 첫째도 꼴찌도 없는 모두가 평등한 곳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에 비유하시며,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 안에서 꼴찌 같은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났고 많은 것을 가졌다 해도 죽음 앞에서는 꼴찌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첫째라면 죽음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양 남을 무시하고 차별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즉 텃세를 부리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변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면 경계하고 혹시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들이 오후 늦게 일한 사람들과 똑같은 임금을 받게 되자 불평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물론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불공평하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인간적인 면이 아닌 하느님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가족과 이웃에 더 큰 이익이 된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의 손해로 이익을 본 적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도 다른 사람들의 희생과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 예언서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라고 전합니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이들을 똑같이 사랑하시고 또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안에서부터 혼자만 잘 살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모든 이가 더불어 잘 살고, 꼴찌가 첫째가 되더라도 혹은 첫째가 꼴찌가 되더라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갈망하는 하늘나라는 첫째도 꼴찌도 없는 모두가 평등한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모두를 평등하게 여기며 살아갑시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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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은 마음을 보신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거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대가를 바란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에도 언제나 후하게 주십니다. 그 사랑에 한발 다가갈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남을 동정하는 마음을 인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또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 인정미 넘치는 사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야박하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몰인정한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은데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것으로 마음에 화를 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위한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모순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정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른 아침, 9시,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일꾼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그 일꾼들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하고 물으니 “아무도 우리를 사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하셨습니다. 여기서 일용직 노동자들의 딱한 처지를 배려하는 포도밭 주인의 호의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포도밭 주인입니다.
때가 되어“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을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찍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약속과 다른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곧 실망하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이것이 인간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니고 품삯이 깎인 것도 아닌데 다른 이들이 받은 축복을 시기하고 질투까지 한 것입니다. 상대적 박탈감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 시간에 일해서 당당하게 그만큼을 벌었다고 한다면 그는 남에게 손을 벌려 동정을 받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에 처한 사람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내가 도와주지 못한 것을 주인이 헤아려 줬으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정의보다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결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평불만도 습관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할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은총이라고 합니다. 은총은 무상으로 주는 선물입니다.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을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정말,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성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가 아니라‘어떻게’가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을 담아서 하기 바랍니다. 활동 내역의 크고 작음보다는 그 안에 사랑을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볼 때 세상에 큰 업적을 남긴 것 같아도 주님 앞에서는 가장 초라한 일꾼일 수 있고, 우리 눈에 가장 보잘것없는 일을 한 것 같아도 주님 앞에는 가장 큰 일을 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될 사람이 있습니다.
천국의 심판 때에 하느님 보시기에 첫째가 되길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두가 하늘에 초대받았음을 잊지 않고 매사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공으로 부름을 받지 않고 최선으로 부름 받았습니다.(성 마더 데레사)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가 있는데 1) 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2) 못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는 것이며 3) 내가 거기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남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도 있는데 1)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2) 나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미안하고 3)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 성인들의 통공과 가족, 이웃들의 희생과 기도로 온 것이기에 미안하답니다.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요, 은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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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과거가 없으면 자아가 없지만, 미래가 없으면 정체성이 없다.”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사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자아가 형성되어 갑니다. 그리고 미래는 현재에 초점과 방향을 제시하는 삶의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과거를 계속 연연하는 시간으로, 미래를 걱정하는 시간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통해 자아가 형성되었으니 감사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여 하고, 마찬가지로 미래를 통해 내 삶의 길잡이를 알게 되었으니 기쁘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미래에 신경 써야 합니다.
예를 들어, 100만 원을 벌었습니다. 현재가 중요하다면서 지금 놀고먹는데 100만 원을 다 써 버리는 것이 옳을까요? 아마 지금의 ‘나’는 놀고먹는 그 자체를 좋아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년 여행 경비로 저축해 두면 미래의 ‘나’가 좋아하게 됩니다. 물론 항상 좋아할 미래의 ‘나’만을 염두에 두며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즉,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 지혜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많은 이가 미래에 열심히 하겠다면서 뒤로 미룹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에는 지금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내 모습을 통해 미래의 ‘나’가 과연 좋아할까요? 혹시 그때 제대로 하지 못했음에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요?
지금의 ‘나’도 중요하지만, 다가올 미래의 ‘나’도 중요합니다. 미래의 ‘나’도 진짜 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행동이 과연 미래의 ‘나’를 위한 현명한 선택일까요? 혹시 미래의 ‘나’를 내가 아닌 타인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 선한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부터 일한 사람, 심지어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 모두 똑같이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루 일한 양이 다르면 차등을 두는 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선한 포도밭 주인은 똑같이 줍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라고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생각이 주님의 생각인 것처럼 여깁니다. 주님께서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곧바로 응답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에 부름을 받은 그 순간에 응답한 것 자체가 중요했습니다. 만약 이 부르심을 거부하면 어떨까요? 나중에 받을 보상도 없습니다.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하면 그만입니다. 그 이후에는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지만 응답하지 않으면, 미래의 ‘나’가 받을 보상이 있을 리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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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 나라>
마태오 20,1-16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하늘 나라>
벗이여
어서 오시게나
우리 집은
늘 열려 있으니
일찍 온 벗
늦게 온 벗
너나 할 거 없이
마음껏 즐기시게나
늦게 온 벗
나무라지 말고
일찍 온 벗
부러워하지 말고
일찍 온 벗은
더 오래 즐겼으니
그것만으로도
좋지 않은가
늦게 온 벗은
그나마 즐겼으니
그래도
좋지 않은가
길든 짧든
함께 즐길 수 있음에
서로에게
기쁨과 감사 나누고
초조하고 지친
마음으로
우리 집밖
어딘가 헤매며
아직 오지 못한
그리운 벗
애타는 마음으로
함께 찾아 나서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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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사랑, 예수님 마음 닮기>
- “주님 사랑, 주님 시야 지니기, 하늘나라의 실현” -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시편145,17)
2014년 안식년중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참 많이 사용한 강론 주제가 삶의 여정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이라는 것이요, 회개의 여정, 믿음의 여정, 순종의 여정 등 끝이 없이 적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 왜관 수도원 서울 봉헌회 세 번째 강의는 희망의 여정이었고 우리 믿는 이들은 예외없이 희망의 순례자라는 신원임을 강조했습니다.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해보면, 일년사계로 압축해 보면, 우리 믿는 이들의 현재의 시점이 그대로 확인된다는 것이며, 이를 확인할 때 하루하루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도 피정하시는 분들에게 제시해봤더닌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지만, 대부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오후 3-4시쯤,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가을쯤의 시점에 있음을 인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예나 이제나 절실하게 와닿는 물음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날마다 묻는 이가 수도자라 했습니다. 참으로 믿는 자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수시로 자문하며 삶을 재정비하고 날마다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이에 대한 답을 줍니다.
하느님 사랑은 예수님 마음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그러니,
첫째 우선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보적입니다. 제2독서 필리비서를 통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래서 어느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삶과 죽음,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참으로 마음에 와닿는 고백입니다. 얼마나 그리스도 예수님과 깊은 일치의 사랑 관계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어 우리 모두 역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한결같이 사랑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물음을 자주 환기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때때로 즐겨 바치는 주님께 사랑의 고백기도도 생각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둘째, 주님의 시야를 지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갈 때 날로 자아초월의 삶이요 그 이해 지평도, 내적 시야도 날로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을 때, 우리 하느님께 돌아올 때 그분께서는 우리를 너그러이 용서하시며 우리는 그분의 시야에 참여하게 됩니다.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옳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있다.”
참으로 주님과 사랑의 일치가 깊어질 때 은총처럼 선사되는, 날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내외적, 영적 시야요 지평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주님의 자비로운 처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셋째, 주님의 꿈은 하늘나라의 실현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하늘 나라 꿈의 실현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밭임자가 상징하는 바, 원대한 하늘 나라의 꿈을 지니신 하느님이요 예수님이십니다. 밭임자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우리의 좁은 시야를 참으로 확장케 하는 충격적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늘 나라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그대로 어느 정치지도자의 비전과 일치합니다. 억강부약, 대동세상, 기본사회의 비전입니다. 누구나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주님의 참으로 자비로운 처신입니다. 예수님의 정의와 공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다릅니다. 오전 일찍 온자와 오후 늦게 온 이에 대한 똑같은 급료의 지급을 인간적 잣대의 정의나 상식으로 적용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늘 나라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구원의 문임을 입증합니다. 바로 아침 일찍 왔다 오후 늦게 도착한 이에 대한 예수님의 후한 처사를 이해 못하는 자, 참으로 사고의 전환이, 회개가 절실합니다. 오후 늦게서야 일자리를 찾아 한데나리온 받은 자에게 많은 식솔이 딸렸다면 그의 보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바로 이 편협한 사람은 우리 모두의 보편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다음 말씀에 대한 이분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서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지가 첫째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하느님의 권한에 월권하지 말고 네 분수에 자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시야를 지닐 것을 촉구하는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기본권리를 누리며 살 때 비로소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배워야할 바 주님의 이런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을 이해하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들이 하늘 나라에서 언제나 첫째의 삶을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요즘 널리 회자되며 서서히 실행되고 있는 기본소득제의 원조임을 봅니다. 이런 취지로 생긴 기본소득당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정신과 그대로 일치되는 민생정치에 중점을 주는 하늘 나라 실현에 일조하는 정당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 마음을 통해 온전히 드러납니다.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 하늘 나라의 실현이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 넑고 깊은 내적 시야를 지고 살고 싶습니까?
주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저절로 우리의 시야와 지평도 날로 확장되어 주님의 시야를, 이해 지평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하느님을, 예수님을 상징하는 포도밭 주인처럼 억강부약, 대동세상, 기본사회의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을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이 이런 하늘 나라의 꿈이 현실화 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 145,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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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20,16)
<깨어 있자!>
오늘 복음(마태20,1-16)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고용하는 말씀'과 '일꾼들에게 품삯을 내주는 말씀'으로 구분됩니다.
포도밭 주인은 이른 아침과 오전 아홉 시와 낮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와 다섯 시에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약속한 일당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일꾼들을 불러 그들에게 약속한 품삯을 내줍니다. 그런데 맨 먼저 뽑혀 일한 일꾼들이 주인에게 투덜거립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하시는군요."(20,12)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시기하는 것이오?"(20,13-15)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가 우리에게 이런 묵상거리를 줍니다.
첫째는, 오후 5시에도 고용된 일꾼들을 보면서,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일이 급박하다는 것, 곧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묵상'입니다.
둘째는, 오후 5시에 고용된 일꾼들은 남들이 고용하기를 꺼려했던 일꾼들이며, 이들을 고용했다는 것은 '모두에게 구원의 문이 열려 있고, 특히 이 땅에 거주하고 있는 많은 이주민들과 난민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생각하게 하는 묵상'입니다.
셋째는, 투덜거림 안에 드러나 있듯이, '하느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다는 묵상'입니다.
이 묵상 안에서, 오늘도 첫째가 될 수 있도록, 깨어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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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aG8KzED7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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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 16)
공평한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소중한 하루를
살게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저마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포도밭의 노동이
모든 삶의
기쁨이길
바라십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
우리는 노동을
합니다.
기쁘고
행복한 사람은
긍정적인 감정을
주님과 함께
공유하고 삶을
의미있는 것으로
수용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한계가 없습니다.
물질적 욕망에는
제동장치가
없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측은히 바라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소중하고
평등합니다.
평등하지 않기에
평등을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첫째도 없고
꼴찌도 없습니다.
모든 순간이
회개의 순간이며
감사의 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포도밭의 노동은
주님과의 새로운
만남입니다.
새로운 만남은
기존의
방식으로는
이어질 수
없습니다.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기쁨입니다.
길고 짧은
시간이
한 자리에
다 모여듭니다.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누어 마시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며
하느님의
포도밭입니다.
하늘 나라의
깨끗하고
맑은 소식은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일 복음에서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늘 함께 계시는
하느님 조차
제 멋대로
판단하며
우리의 욕심만
있지 않았는지를
진심으로
회개하는 주일입니다.
일하게 하시고
살게 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온 삶으로
감사드립니다.
첫째도 꼴찌도
모두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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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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