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바벨론 멸망의 말씀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제 안의 바벨론의 교만을 보게 하시고 그것을 무너뜨리실 때에
그 중심에 있는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택한 백성에게 풍성히 베푸시는 은혜에 감격할 뿐입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2. 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3.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들이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
4. 내가 허물이 없으나 그들이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 주소서
5. 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니 일어나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 (셀라)
6. 그들이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7. 그들의 입으로는 악을 토하며 그들의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
8.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며 모든 나라들을 조롱하시리이다
9.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10.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
11. 그들을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그들을 흩으시고 낮추소서
12. 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 그들이 말하는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13.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어지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 (셀라)
14. 그들에게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15.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16.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17.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본문 주해)
시편 59편의 배경은 삼상19:10~12절이다.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사울이 전령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매 그가 피하여 도망하니라”(삼상19:10~12)
이 시는 원수로 인한 간구(1~5절과 10~13절), 원수로 인한 탄식(6~7절과 14~15절), 하나님을 신뢰하는 내용(8~9절과 16~17절)이 두 번 반복된다.
1~5절 : 다윗은 이제 시작된 이 도망자의 삶에서 낚아채서 건져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또 다른 표현은 높이 들어달라는 표현이다. 이는 높은 곳에 숨겨서 원수들이 찾을 수 없도록 보호해 주시는 산성과 요새를 의미한다.
자신의 죄나 잘못이 아니라 순전히 사울의 질투 때문에 벌어진 이 일을 다윗은 ‘내가 허물이 없는데 그들이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한다’고 표현한다.
“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깨어나셔서 모든 나라를 차별 없이 심판하시고, 사악한 꾀를 꾸미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5절, 새번역)
6~7절 : “그들은 저녁만 되면 돌아와서, 개처럼 짖어 대면서, 성 안을 이리저리 쏘다닙니다.
그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입술에는 칼을 물고서 "흥, 누가 들으랴!" 하고 말합니다.”(새번역)
성경에서 개란 가장 경멸스러운 자들에 대한 표현이다.
밤이면 그들은 다시 돌아와 마치 들개처럼 으르렁대며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이다.
그들의 입에서 칼과 같은 말들이 나오며, 그들은 그것을 누가 듣겠느냐고 한다.
8~9절 :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비웃으시며, 뭇 민족을 조롱하실 것입니다.
나의 힘이신 주님, 주님은, 내가 피할 요새이시니, 내가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들을 비웃으시고 모든 나라를 조롱하신다.
세상의 왕들과 관원들이 일어나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여 그 매여있는 것을 끊어버리자고 할 때 하늘에 계신 이가 그들을 비웃으시면서 왕을 세우신다고 하는 시편 2편의 내용과 비슷하다.
다윗은 대적을 이길 수 없기에 주를 바라본다.
이렇게 원수를 하나님께서 두시는 이유는 그 원수들의 힘으로 핍박당할 때 주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10~13절 :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앞에 가실 것이며 나를 비방하는 자들이 망하는 것을 보여 주시고 나를 만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나의 방패시여, 그들을 죽이지는 마소서. 그렇게 하시면 우리 백성이 잊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주의 힘으로 그들을 흩어지게 하시고 넘어뜨려 주소서.
그들은 입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들은 말로 죄를 짓습니다. 그들이 으스대다가 스스로 잡히게 해 주소서. 그들은 저주와 거짓말을 내뱉습니다.
주의 분노로 그들을 태우십시오. 그들을 아주 없애 버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야곱 민족을 다스린다는 사실이 세상 끝까지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쉬운 성경)
악인들의 힘으로 인하여 주를 바라보니 주께서 그 인자하심으로 영접하여 주신다. 그리고 원수들이 심판받는 것을 보게 하실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원수들을 죽이지 말라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심판하여 죽여 버리면 하나님의 백성이 잊을까 한다는 것이다. 악인이 급속하게 멸망해서 쉽게 망각 되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하나님의 진노가 천천히 이루어져 오고 오는 세대가 기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이다.
그러나 결국은 주의 능력으로 그들을 낮추시고 그들의 죄와 저주와 거짓말과 교만함을 심판하셔서 소멸하여 주시기를 구한다.
14~15절 : “그들은 저녁만 되면 돌아와서, 개처럼 짖어 대면서, 성 안을 이리저리 쏘다닙니다.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배를 채우지 못하면, 밤새도록 으르렁거립니다.”(새번역)
세상에서 악인은 육신의 배부름을 가진 자들이다. 이러한 악인은 궁극적으로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는 자들, 성밖에 쫓겨난 자들을 가리킨다.
16~17절 : “그러나 나는 나의 힘 되신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내가 재난을 당할 때에, 주님은 나의 요새,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에, 아침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노래하렵니다.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할 요새,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분."”(새번역)
구원받은 자의 노래이다. 구원은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의 힘과 주의 인자함을 높이 찬송한다.
주의 인자함이란 주님의 언약을 따른 사랑이다. 그래서 주님이 환난 날에 피난처가 되신다. 영원한 환난은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 길은 오직 영원한 피난처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나의 묵상)
하나님께서 내 앞에 어려움(원수, 대적자, 상황)을 두심은 주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일이 잘 되거나 평안할 때도 주님을 바라본다고는 하지만 그 강도와 깊이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최근에 더욱 실감했다.
그러니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괴로운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통해 안전한 요새이며 피난처인 주님께로 달려가게 된다.
‘고난을 통해 믿음이 깊어진다’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믿음이 좀 작더라도 괜찮으니 삶의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적이 있었다.
나 스스로 ‘믿음이 작아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교만한 것이었다. 예수님을 믿어 최소한의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 어느 정도 내 뜻대로 살아보겠다는 마음이 깔린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 자기 백성이 죄의 세력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주님 죽으신 그 십자가에 함께 죽자고, 십자가의 승리를 함께 누리자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껏 땅에 붙은 마음으로 살아온 자가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세상 힘을 의지하거나, 세상에 타협함으로 그 어려움을 피하고자 한다. 그것이 쉽지, 십자가에 탐심을 못 박고, 자존심을 못 박고, 자기의 못 박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어려움은 고난의 상황 또는 자기를 힘들게 하는 원수가 아니라, 바로 십자가에 연합되는 일 자체가 고난인 것이다.
어제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뱀이 도망치다가 바위 구멍으로 들어가며 그 꼬리를 잡고 당겨도 쉽게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비늘이 딱 밀착되어 고정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당기는 그 힘이 어마어마할 때는 그 비늘 껍데기가 홀랑 벗겨지면서 쑥 나온다는 것이다.(정말 그런지 나는 모르겠다~^^)
말씀을 들으면서 그 뱀이 예수님의 손길을 피해 다니는 나 자신이고, 나는 주님의 그 힘 때문에 껍질이 벗겨지는 아픔을 겪으면서 주님의 십자가에 연합되는 자임을 생각했다.
탐심을 빼면 남은 마음이 없다고 할 만큼 탐심이 가득한 자가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지만, 조금만 자존심을 건드리면 불같이 분노하는 자가 그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 자기의로 남에게 인정받는 것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자가 그 자기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일은 이 세상에 착붙하여 살아가게 하는 뱀의 마음을 버리는 일이다.
그러니 믿음이 작아도 괜찮다고 했던 말과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또 주님 앞에 얼마나 죄송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주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얻도록 무한한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 풍성한 은혜는 십자가가 아니면 누릴 수 없다.
다윗이 10여 년을 도망자 신세로 다닐 때, 그 억울함과 분노와 곤고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자신의 요새요, 피난처라고 고백한다. 다윗이 한결같은 믿음으로, 아니 그 믿음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다윗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어려움을 통해 보여주시는 주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히 여겨주심의 은혜라는 것이 이제 조금 이해가 된다.
내게도 주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히 여겨주시는 은혜가 끝이 없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십자가로 더욱 가까이 인도하시고, 내게 십자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날마다 더해 주시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원수의 손이, 입이, 걸음이 닿지 못하는 가장 안전한 요새, 다윗이 그렇게 외치며 갈망하던 피난처이기 때문이다.
(묵상 기도)
주님,
다윗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영이
제게도 동일하게 임하니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세상과 원수들이 그렇게 으르렁대도
가장 안전한 요새요 피난처인 십자가에 연합되니 그들이 어쩌지 못합니다.
저는 그곳에서 죄의 세력이 어떻게 소멸되는지 구경만 할 것입니다.
제게 베푸신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의 선물이 십자가입니다.
이것을 쉬지 않고 전하게 하시고
함께 전하고 기뻐하는 주의 백성들이 많아지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