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내 영혼을 해치려고 숨어서 기다립니다. 내 범죄 때문도 아니고 내 죄악 때문도 아닙니다. 힘 있는 사람들이 나를 해치려고 모였습니다. 내가 잘못한 일이 없는데 그들은 나를 보고 벼르고 있습니다. 주여, 일어나 나를 도우시고 보살펴 주소서!"(시59:3~4)
피해망상이나 자기 합리화에 빠져 타인을 적대시하거나 악마화 하는 경우도 많지만, 오늘 본문은 억울하기 이를데 없는 중에 드리는 구원의 기도다. 59편의 부제는 '사울왕이 사람을 보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부른 노래'다. 교회를 설렁설렁 다녔어도 한번쯤은 들어봤을법한 사울왕과 청년 다윗의 히스토리는, 사울왕이 장차 왕이 될 다윗을 죽이려고 반복 시도하는 플롯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윗의 인생 전체를 보자면 그도 연약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사울왕에 대해 다윗은 잘못이 없었다. 다윗이 사울의 왕위를 빼앗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사울왕의 잘못으로 하나님이 사울의 왕권을 폐하셨다. 그리고 왕좌를 다윗에게 물려주시기로 작정했다. 문제는 그 폐위일이 너무 빨랐다는 것이다. 아직 사울이 왕위에 있을 때이고 심지어 왕권이 흔들리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리셨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리셔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며,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섰을 때 사울이 그의 겉옷 자락을 붙잡으니, 옷이 찢어졌다. 사무엘이 그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왕국을 왕에게서 찢어 내어 그것을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습니다."(삼상15:26~28/바른성경)
다윗이 자신의 유능을 뻐기거나 교만했던 것도 아니다. 백성들이 다윗을 칭송하니 사울왕의 마음에 시기심이 일어났다. 그래서 자기가 어여뻐해 장수로 불렀던 다윗을 이제는 죽이기로 획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춤추는 여자들이 화답하며 말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구나." 하였으므로,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매우 화를 내며 속으로 말하기를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을 돌리니, 그가 얻을 것이 왕국 외에 더 무엇이 있겠는가." 하고, 그 날 이후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기 시작하였다."(삼상18:7~9/바른성경)
사람의 마음이 이렇구나 싶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 빼앗기고 싶지 않은 불안과 욕심이 미움과 분노를 부르고 상대를 향하는 칼날이 된다. 다윗이 무슨 말실수를 한 것도 없다. 그럼에도 결국 그렇게 됐다. 이게 되돌릴 수 있는 일이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다윗이 어떻게 했으면 사울의 시기와 미움을 받지 않았을까? 적당히 무능했으면 그리 됐을 것도 같다. 사울왕을 위해,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싸웠고 다행히 그 결과가 좋았던 다윗은 성실과 유능을 이유로 시기와 질투와 살해위협을 받았다.
사울왕은 그런 다윗이 자기 자리를 위협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게 사실인 것이 맞기도 하고. 그렇다고 다윗이 무능과 유능의 그 어딘가를 적당히 고르며 살 수 있었을까? 다윗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모든 상황을 주시하며 엎드려 때를 기다리는, 느리고 오래보고 서서히 움직이며 반드시 먹어치우고야 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다윗은 순간을 영원처럼 성실히 살며 노래하던 사람이다. 더욱이 가장 맑고 활기롭다는 청년기. 당하는 수 밖엔, 견디는 수 밖엔 없구나 싶다.
이런 일을 겪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어딜가나 같고 누구라도 같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심지어 나라고 사울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있나? 그렇지 않다. 나보다 유능하고 사랑스럽고 친절하며 성실한 사람이 나타나, 내가 하던 일을 대신하며(도우며) 주위 사람의 칭송을 받는다면 나 역시 시기과 질투의 불이 창자 끝부터 솟구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신앙이 있다는 자가 버릇처럼 자신은 다윗에 대입하고 상대는 사울왕같은 존재로 정의해 버리는 거야말로 인지부조화,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너나할 것 없이 다윗 뿐 아니라 사울의 자리에 설 때도 많으리란 걸 알아야지.
오늘 본문의 아름다운 기도, 구원을 바라는 절실하고 정결한 기도. 이 기도를 드린 다윗은 30여년 후 자기 부하장수를 실제로 죽이는 일을 자행하게 된다. 사울은 그토록 자기의 충성된 부하를 죽이고 싶어했지만 실패했는데, 다윗은 매우 손쉽게 성공했다. 여기서 사울과 다윗의 최후가 달랐던 이유나 신앙적 관점, 회개에 대한 태도 등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설교나 묵상은 많고도 많을테니까. 다만 나는 다윗이나 사울이나 성정상 별 다를 게 없는 인생들이었음을 쓰고 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은 같다. 전도서는 말한다. 완벽한 의인도 없고 완벽한 악인도 없다고.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전7:20)
전도서 히브리 원문은 인간 혹은 인생을 '헤벨'이라는 단어로 반복해 표현한다. 헤벨은 먼지, 안개와 같이 찰나를 지나는, 순간의 존재로서 인간을 묘사해 사용되고 있다. 잠깐이라는 것이다 잠깐. 그게 헤벨이다. 사울같은 악인도 노아같은 의인도 모두 잠깐 있다가 사라지고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지은 것들과 소유한 것들, 재능으로 받은 것들마저도 찰나의 시간 세상에 머물다 잊혀져 갈 것이다. 우리의 모든 아웅다웅한 것들이 거시적으로 보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나를 죽이려고 에워싼 것들은 사울왕의 전령들이 아니다. 나를 미워하고 시기질투하는 어떤 것들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은 다윗의 생애를 통해 드러났다. 진실로 나를 죽이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것들이다. 어느날 잠에서 깨 쳐다 본 여인에게 음욕을 품고, 그 이후 다윗의 왕국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윗은 끝까지 주님 곁에 있었다. 비록 왕국은 둘로 갈라졌을지라도, 다윗의 명성은 이전만 못하게 되었을지라도, 다윗의 존재는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아... 그렇다면, 내 밖에 있는 것들 뿐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어떤 것들도 나를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즉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윗의 삶도 그것을 증거한다!
갑작스런 깨달음에 눈물과 함께 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느낀다. 안도하고 안심하게 된다. 나를 버리지 않으실, 그 사랑을 오늘도 다시 느끼게 된다. 성구의 앞부분은 사라지고, 뒷부분만 남아 마음을 울린다. 내가 무고하든 아니든 그건 중요치 않다. 누가 나를 에워싸는지도 중요치 않다. 다만 내가 언제나 구할 기도가 있을 뿐이다. 주여, 일어나 나를 도우시고 보살펴 주소서! 내 안에서 혹은 내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로부터, 당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들에게서 저를 지키시고 보살펴 주소서.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