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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12 23:40:42
[속보 특종] 열린당 金希宣 의원 아버지 김일련은 만주국 특무경찰「간부」였다 김일련의「독립운동 탄압 기록」이 유하현 공안국에 있다! ● 일본 국회도서관 소장 「만주국 관리록」에 유하현 경찰서 警士로 기록 ● 유하현 공안국에 金의원 아버지 관련 木當案(당안·서류) 존재 ● 金의원의 큰아버지 金一銑씨는 生前 서신에서 아우 김일련은 以北으로 납치돼 생사불명 鄭 權 鉉 朝鮮日報 도쿄특파원 (블로그)〈khjung.chosun.com〉 吳 東 龍 月刊朝鮮 기자 (블로그)〈gomsi.chosun.com〉 김일련의 직속 상관, 도쿠나가 겐지 등장 열린당 金希宣(김희선·61) 의원의 아버지 金一鍊(김일련)씨가 독립군이 아니라 일제下 만주국 柳河(유하)경찰서에서 特務(특무)로 활동했다는 주장은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었고, 문제는 그의 구체적 활동상이다. 月刊朝鮮은 지난 10월호에서 金의원의 아버지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 경찰이었다는 사실을 金學奎(김학규) 장군의 며느리인 田鳳愛(전봉애) 여사, 그리고 밝힐 수 없는 田여사 가족의 증언을 통해 보도했었다. 이어 지난 9월20일엔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金學奎 장군의 막내딸 金恩順(김은순)씨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그 아버지가 경찰 노릇을 했어요』라고 증언했다. 이 세 사람의 일치된 증언들은 月刊朝鮮이 지난 10월 중순, 만주 유하현 현지 취재를 통해 입수한 김일련의 유하경찰서 특무 재직증명을 통해 사실로 입증됐다. 문서와 사람들의 증언이 일치했던 것이다. 따라서 現 시점에서는 金希宣 의원의 아버지 김일련이 특무로 복무했었다는 사실에서 한 단계 나아가, 특무로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10월18일, 조선일보 鄭權鉉(정권현) 도쿄특파원이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1976년 10월 일본 在外公務員援護會(재외공무원원호회)가 발간한 「만주국 경찰小史(소사)」에서, 金의원의 아버지 김일련의 특무 행적을 추적할 만한 단서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만주국 경찰小史」를 살펴보면, 만주국 通化省(통화성) 柳河縣(유하현)에 근무했던 「도쿠나가 겐지(德永源治)」라는 일본인 경찰의 功績(공적)사항이 등장한다. 도쿠나가 겐지(1908년生)는 관동군 헌병대 출신으로 1937년 11월 만주국 치안부 警務司(경무사) 兵事恩賜室(병사은사실)을 거쳐, 통화성 유하현 경무과 특무股(고) 股長(고장: 係長에 해당)으로 임명된다. 「만주국 경찰小史」에는, 도쿠나가 겐지가 1943년 유하현에서 조선독립운동단 소우잔교(ソウザン敎) 관계자 10여 명을 검거했고, 1945년 5월 東北失地回復中央黨員(동북실지회복중앙당원) 관계자 수명을 검거한 것으로 기록되는 등 독립운동을 탄압한 기록이 등장한다. 이때는 김일련이 도쿠나가의 직속부하로서 유하현 경무과 특무고 特務로 근무 중인 때였다. 패전 후인 1946년 5월, 도쿠나가 겐지는 중국 安東에 잠복 중인 중공군에 체포·투옥됐다. 그 후 北安·치치하얼(齊齊哈爾) 등지로 끌려다니다가 1947년 9월 脫走(탈주)해, 같은 해 10월 사세보(佐世保)港으로 귀국했다. 鄭權鉉 기자는 『기록을 확인한 뒤 도쿠나가의 소재를 수배했으나, 오래 전에 사망한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도쿠나가 특무계장의 공적사항을 보더라도 당시 김일련이 근무한 유하현 특무계가 어느 정도 악랄하게 독립운동가를 때려 잡는 데 앞장섰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당시 만주국 경찰에는 한국인·중국인·몽골인 등이 주로 일선 경찰서에 근무했고, 省의 경찰 본부인 경무과에는 주로 일본인들을 배치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당시 만주국 경찰의 계급구조는 警士(경사), 警長(경장), 警尉補(경위보·주임), 警尉(경위·계장), 警佐(경좌·일선 경찰서장), 警正(경정)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또 하나의 創氏名, 金井英一 지난 10월20일, 東京에서 鄭權鉉 특파원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만주국 경찰연구자 마쿠우치 미쓰오(幕內滿雄)가 『「외무성 外地整理室(외지정리실)」에서 자료를 많이 보관하고 있으니 한번 알아보라』고 해 전화 취재를 한 결과, 1942년末 만주국 총무청 인사처가 발행한 「萬洲國官吏錄(만주국 관리록)」에 金希宣 의원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이 있다는 것이었다. 외무성 직원은 『「만주국 관리록」 758페이지에 만주국 통화성 유하현 경찰서 소속에 비슷한 이름이 있는데, 「가네야마 에이이치(金山英一)」가 아니라 「가나이 에이이치(金井英一)」로 돼 있다. 우리가 자료를 직접 제공할 수는 없고 국회도서관에 똑같은 자료가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만주국 관리록」은 희귀본으로, 일본인들이 만주에서 마이크로 필름으로 떠 와서 「日本人物情報大系 18권」이라는 자료집에 별도로 수록해 놓았다. 鄭특파원이 직접 국회도서관 자료 중 「만주국 관리록」을 확인해 보니, 유하현 경찰서 소속 警士 중 「가나이 에이이치(金井英一)」라는 이름이 있었다. 상단에는 앞서 소개한 도쿠나가 겐지(德永源治)가 警佐로서 그의 상사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 중국 유하현 공안국에서 발행한 재직증명에는 「가네야마 에이이치(金山英一)」로, 「만주국 관리록」에는 「가나이 에이이치(金井英一)」로, 두 개의 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기자는 가네야마 에이이치(金山英一)와 가나이 에이이치(金井英一)가 동일 인물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유하현 주민들은 김일련을 「가네야마 에이이치(金山英一)」로 기억하고 있었다. 月刊朝鮮 11월호에 金의원의 아버지 김일련을 보았다는 증언을 한 崔峰鶴(최봉학·77)씨는 『나는 옛날부터 柳河에서 살아온 사람으로 광복 당시 18세였다. 유하 서문 밖 養食庫(양식고) 근처에 살았던 만주국 경찰 가네야마 에이이치를 알고 있었다』고 확인했다. 지난 月刊朝鮮 10월호에서 金의원의 아버지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日帝 괴뢰국인 만주국 경찰이었다는 사실을 최초로 증언했던 田鳳愛 여사는 자신의 남편 金一鉉(김일현: 김학규 장군의 長男으로 한국전쟁 때 戰死)의 창씨 성이 가나이(金井)라고 증언했었다. 일요신문이 지난 9월23일자에 보도한 김일련의 동생 金一鍵(김일건)씨의 증언에서도, 金씨는 형 김일련의 창씨개명을 「가나이(金井)」와 「金山英一」 두 가지로 말하고 있었다. 후속 취재 결과, 유하현 경찰서의 재직기록에는 金希宣 의원의 아버지 김일련의 창씨명이 「가네야마 에이이치(金山英一)」로 올라 있으나, 이 경찰서가 소장한 김일련에 관한 기록의 원본인 「木當案(당안ㆍ서류)」에는 「가나이 에이이치(金井英一)」로 적혀 있고, 그의 본명(金一鍊)도 倂記(병기)돼 있음을 확인했다. 김일련이 특무로 활동하면서 「가나이 에이이치」, 「가네야마 에이이치」의 두 가지 이름을 쓴 것인지, 재직기록에 「金井英一」을 「金山英一」로 잘못 옮겨 쓴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김일련의 「독립운동 탄압 기록」 발견 지난 10월24일, 기자는 다시 중국 長春(장춘)으로 떠났다. 중국 유하현에 가서 김일련에 관한 특무 활동 기록을 찾기 위해서였다. 유하현 공안당국은 가나이 에이이치(金井英一) 관련 문서는 있으나, 이를 복사해 줄 수는 없다고 잘랐다. 단지 우리 측에 한 차례 김일련에 관한 문서를 열람할 기회만을 주었을 뿐이었다. 공안국 관계자는 『유하현 공안국이 관리하는 범죄기록은 내부 기밀이다. 한국 정부를 통해 절차를 거친다면 복사하도록 협조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외국인인 기자는 공안국 木當案室(당안실)에 들어갈 수 없었고, 대신 현지인인 A씨가 공안국의 협조로 당안실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마침내 김일련의 「범죄기록」을 발견했다. 당안실은 5~6평 되는 공간에 淸나라 말기부터 僞滿(위만·만주국) 경찰, 貪汚分子(탐오분자·부정부패 사범), 형사범 등 각종 범죄자들의 木當案이 최신 기록까지 포함해 빠짐 없이 존재했다. 당안실에서 김일련의 기록을 살핀 A씨의 말이다. 『僞滿 시절의 경찰 기록은 3개의 캐비닛에 잘 정리가 돼 있었다. 김일련에 대한 기록은 木當案의 2卷(권) 30번째 서류에 가나이 에이이치(金井英一)란 이름으로 존재했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 가로쓰기 정자체로 기록돼 있었는데, 20페이지 가량이었다. 3권에는 金의 직속 상관인 도쿠나가 겐지(德永源治)의 기록이 30페이지 분량으로 정리돼 있었다』 「金井英一」이라고 적힌 표지를 넘기자 두 번째 페이지에는 문서의 작성 유래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金井英一에 관한 僞滿 시대의 木當案을 1959년 發現(발현: 발견의 의미)해서 증언을 수집·정리해 1961년 卷宗(권종: 문서를 완성하는 것)했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페이지에는 金井英一이 속해 있는 경무과 특무股에 대한 「系統(계통)」이 소개됐다. 金의 상급자인 경무과장·특무股長과 부하직원인 特務들의 이름이 열거돼 있었다고 한다. 『경무과장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특무고장은 도쿠나가 겐지(德永源治)임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金의 직속 상관으로 돼 있더군요. 金井英一은 광복 당시 직급이 경위보(주임급)로 「간부」에 해당했습니다』 木當案의 3페이지부터는 7~8명의 증인 기록이 등장했다. 1959년경 발견한 문서를 기초로 유하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김일련의 特務 활동 기록을 採錄(채록)한 것이다. 이 진술서에 가나이 에이이치(金井英一)의 본명이 「金一漣(김일련)」으로 나타났다. 「金一鍊」이 아니고 「金一漣」으로 기록된 데 대해 吉林省 정부의 한 전직 간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시 진술자가 중국 발음으로 「진(金) 이(一) 리엔(鍊)」이라고 했다면, 진술을 받아 기록하는 담당자는 「金一漣」으로 기록한다. 중국에서는 「불리다」는 鍊(련)자를 사용하지 않고 「물놀이」 漣(련)자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漣은 鍊과 마찬가지로 중국어로 「리엔(lien)」이라고 발음된다』 金의원의 큰아버지 金一銑, 『아버지 金成範은 獨子』 1945년 이후 김일련의 최후의 행적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金希宣 의원은 「아버지가 金九 선생 암살(1949년 6월) 직전, 밀명을 받고 중국 天津(천진) 혹은 大連(대련)으로 갔다」고 주장해 왔다. 金의원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1954년 시베리아 벨호얀스크 감옥으로부터 오영일이라는 사람이 쓴 편지가 왔는데, 오영일은 아버지 김일련이 사용하던 가명으로 그것이 마지막으로 전해들은 아버지 소식」이라고 적고 있다. 최근 기자는 金의원의 큰아버지인 金一銑(김일선·사망)씨가 1990년 3월 의성 김씨 종친회에 보낸 편지 한 통을 입수했다. 1910년생인 金一銑씨는 광복 당시 36세로 金希宣 의원의 家系를 소상히 알 수 있는 인물이었다. 편지에서 그는 「나는 평남 평원군 서해면 사산리에서 출생했고, 1911년 12월 부모님 등에 업혀 만주 奉天省(봉천성) 유하현 三源浦(삼원보)에서 성장했고, 중국계 학교인 奉天省立 동북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그는 金의원의 부친 김일련(동생)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제 형제는 호적등본에 있는 것과 같이 6남매인데, 제가 장남이고, 제 다음이 妹弟 金一信… 다음이 김일련으로 1915년 5월12일생인데, 以北으로 납치되어 生死가 不確實하다」 그렇다면 金의원의 주장대로 1954년 시베리아 벨호얀스크 감옥에 있다는 것과 그의 큰아버지의 주장은 어느 것이 진실인가. 이북으로 납치되었다면, 김일련의 행방은 북한 측에서 알 가능성이 높아졌다. 金一銑씨는 다섯 살 아래인 동생 김일련에 대해서 金希宣 의원보다도 더 잘 알 수 있는 처지이다. 그런 그가 족보 등재용 보고서에서 동생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以北으로 납치되어 生死가 불확실하다」고 쓴 것은 金希宣 의원의 핵심적 주장과 어긋난다. 아버지가 러시아에서 죽었다는 金의원의 주장보다는 북한에 끌려갔다는 친형의 주장에 더 믿음이 간다. 그렇다면 김일련은 최근까지도 북한에 생존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또 다른 궁금증을 남긴다. 金希宣 의원은 자신을 「金學奎 장군의 종손녀」라고 주장해 왔다. 그녀는 「金學奎 장군이 나의 작은할아버지이며, 할아버지인 金成範(김성범)과 金學奎는 친형제」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金希宣 의원의 큰아버지 金一銑씨는 『父親(김성범)은 1남1녀에 獨子(독자)였다』면서 『(아버지의) 성명은 金成範, 1883년 12월19일생, 고모 金成律(김성률)은 生年月日 未詳(미상)』이라고 했다. 金一銑씨가, 부친 金成範이 『獨子』라고 진술함에 따라 金成範과 金學奎가 친형제라는 金希宣 의원의 주장은 또다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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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러면 누가 친일파인가. 日帝에 순응한 정도가 아니라
日帝에 적극적으로 복종하여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조선인을 괴롭힌 사람들이 친일파이다.
두 가지 조건이 중요하다.
日帝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복종한 것과 조선인을 괴롭힌 일,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면 친일파이다.
일본의 경찰에 취직하여 파출소에서 근무하면서 주로 도적을 잡는 일을 했다면 그를 친일파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가 日帝 경찰의 特高(특고)형사가 되어 독립운동가를 잡는 일에 종사했다면 그는 친일파이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버린 친일파를 불러내 조사하자고 앞장선
과거 열린당 두 국회의원의 아버지는 헌병간부와 특무경찰이었다.
그들은 독립군 소탕이 主임무였다. 이들이 친일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