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땅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이상한 유물들
(Strange Relics from the Depths of the Earth)
J. R. Jochmans
(1) 사람이 출현하였다는 시대(최대로 400만년)보다 훨씬 이전 지층에서 사람 두개골이나 뼈, 이빨 등이 발견된다. (Human skull, bone and tooth in ancient deposits).
1) 1200 만년 된 캘리포니아 테이블산(Table mountain) 금광에서 사람 두개골과 유물들이 발견됨. 1850년대 캘리포니아주 니들즈(Needles) 북서쪽 테이블산(Table mountain) 금광에서는 고대에 멸종되었다는 마스토돈, 맘모스, 아메리카들소, 말, 코뿔소, 낙타 등의 뼈들이 발견되어졌는데, 모두 신생대 3기인 선신세(Pliocene, 1200만년전)로 연대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1853년 스티븐(Oliver W. Stevens)은 가장 아래 갱도에서 큰 돌사발(stone bowl)을 발견하였고, 1857년 허브(Paul Hubbs)는 사람두개골 파편을, 1862년 피어스(Llewellyn Pierce)는 돌절구(stone mortar)를, 1863년 스넬(Dr. R. Snell) 박사는 곡식을 갈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돌판(stone disc)을 발견하였다. 가장 놀라운 발견은 1866년 2월 이 광산의 소유주중 한 사람인 마티슨(Mr. Mattison)이 이곳에서 거의 완벽한 사람 두개골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하버드대학의 위만(Dr. L. Wyman) 박사에게 보내져 조사되었는데 완전한 현대인의 두개골이었고, 두개골내에 뼈, 자갈, 조개 등이 들어있어 발견된 상황에 대한 진실성에 의심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발견된 지층이 1200만년 전이라는 것이다.
2) 1억3500 만년 전 지층서 사람의 뼈가 발견됨. 1867년 아이오와시(Iowa City)의 Saturday Herald 지는 4월 10일자 기사에서 사람의 유골과 도구들이 콜로라도주 길만(Gilman)의 로키포인트(Rocky Point) 광산에서 발견됐다고 보도하였다. 지하 120m 은(silver) 광맥에서 발견된 사람의 뼈에는 잘 다듬어진 구리 화살촉이 같이 발견되었는데, 그 광맥의 지질학적 연대는 무려 1억 3500만년전 이었던 것이다.
3) 쥐라기 지층서 사람의 뼈가 발견됨. 1877년 7월. 4명의 광산시굴자들이 네바다주 유레카(Eureka)로부터 멀지않은 스프링계곡(Spring Valley) 지역에서 금과 은의 광맥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광맥을 탐사하다가 딱딱한 바위에 묻혀있는 사람의 다리뼈, 무릎, 정강이뼈, 완벽한 발뼈 등을 발견하였다. 뼈를 함유하고 있는 암석은 검붉은 색의 규암이었고, 뼈들은 거의 탄화되어 검은 색을 띠고 있었다. 여러 의학자들의 검사결과 매우 현대적인 사람의 뼈로 밝혀졌다. 뼈의 크기는 뒷굼치로부터 무릎까지가 39인치(99cm)로 3.6 m의 신장을 갖는 사람 뼈로 조사됐다. 그런데 이 뼈가 발견된 지층은 공룡들의 시대라는 쥐라기 지층으로 1억8500만년전 지층이었던 것이다.
4) 4 억 2500 만년전 고생대 실루리아기 지층에서 사람의 유골이 발견됨. 1880년에 인쇄된 Scientific American article에는 그해 봄에 St. Louse Republican에서 보고한 특별한 발견을 다시 게재하였다. 부스(R. W. Booth) 박사는 미조리주 플랭크린 카운티(Franklin County)에 있는 드라이 브랜치(Dry Branch)로부터 3마일 떨어진 철광산에서 지하 5.4m 깊이에서 사람의 두개골, 갈비뼈 일부, 척추, 쇄골 등과 두 개의 화살촉 모양의 부싯돌, 숯조각 등을 발견하였다. 부스가 두개골을 만졌을 때 이것들은 조각으로 부서졌고, 다른 뼈들도 조각이 났다. 2주반 후 부스는 7.2m 깊이에서 같은 유골들을 더 발견하였는데, 넙적다리뼈, 척추뼈, 숯이 된 나무들이 추가로 발견되어졌다. 그런데 부스를 놀라게한 것은 발견된 지층이 고생대 실루리아기 초기로 4억2500만년 지층이었던 것이다. 지질시대에서 실루리아기는 육상생물들이 출현하는 시대로 원숭이나 포유류는 물론 파충류도 등장하지 않는 시대인 것이다.
5) 3,000 만년전인 시신세(Eocene) 지층에서 사람의 어금니가 발견됨. 1926년 11월 지그프리드(J. C. F. Siegfriedt)는 몬타나주 빌링스(Billings)로 부터 남서쪽으로 55마일 떨어진 베어 크릭(Bear Creek) 석탄광산의 3번 수갱에서 사람의 이빨을 발견했는데, 에나멜층은 탄소로, 뿌리부분은 철로 대치되어 있었다. 이 발견은 1926.11.11일자 Carbon County News에서 보도되었고, 여러 치의학자들의 조사결과 사람의 두 번째 아래 어금니로 밝혀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빨이 발견된 지층이 3,000 만년전인 시신세 지층이었던 것이다.
6) 2000 만년전 중신세(Miocene) 지층에서 현대인의 두개골이 발견됨. 1958년 스위스의 자연사박물관의 허젤러(Dr. Johannes Huerzeler) 박사는 이탈리아 투스카니(Tuscany) 석탄광산 지하 180m에서 완전한 현대인의 사람 턱뼈를 발견했는데, 5~7세의 어린이 턱뼈였다. 그러나 발견된 지층은 지질학적 연대로 2,000 만년이나 된 중신세 지층이었던 것이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화석이라고 주장하였으나, 그의 동료 고인류학자들은 감히 동조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초기원인이 출현했다는 400만년보다 무려 5 배나 앞선 기간에 현대인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7) 1 억년이 넘는 지층에서 사람의 유골이 발견됨. 1973년 암석수집가인 오팅거(Lin Ottinger)는 빅인디아(Big India) 구리광산에서 불도저로 암석들을 찾고 있었다. 광산은 유타주 모아브(Moab)로부터 남서쪽으로 35마일 거리에 위치하였다. 오팅거는 노출된 암석을 살피다가 갈색 모래암석속에서 뼈와 이빨들을 발견했다. 일주일후 유타대학의 인류학자인 마위트(Dr. J. P. Marwitt) 박사와 사진사, 기자들과 함께 도착하여 두 구의 사람뼈들을 발굴했는데, 관절은 이어져 있어 지층안으로 떨어져 묻힌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죽어 매장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발견된 지층이 1억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로어다코다 지층(Lower Dakota Formation)와 업퍼모리슨 지층(Upper Morrison formation)이었다. 이 발견은 기존의 보수적인 사고와 너무도 틀려 사람들을 매우 혼란하게 하였다. 마위트는 발굴된 뼈들은 초기원인이나 유인원의 것이 아니라, 완전히 현대적인 사람뼈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후 마위트는 갑자기 이 연구에 대한 흥미를 잃고, 유타대학을 떠났고 이 발견은 흐지부지 되었다.
(2) 수억년 된 지층에서 사람의 발자국이나 흔적, 사람이 만든 도구들이 발견된다. (Human footprint, remains, artifacts in ancient deposits).
1) 페루에서 발견된 완벽한 못(nail). 스페인 마드리드의 문서보관소에는 1572년에 기록된 편지가 한통 발견되었는데, 이 편지는 페루에서 발견된 이상한 유물에 대해 스페인 총독으로부터 쓰여진 것이었다. 이상한 유물은 인디언 광산에서 지표면 역암층들의 자갈들을 제거했을 때 발견한 15cm의 완벽한 못이었다. 이 못은 후에 총독에게 기념품으로 주어졌다. 그런데 첫번째 문제는 페루 인디안들은 철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못이 발견된 암석의 연대가 75,000~100,000년 이라는 것이다. (보수적인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인류가 철, 구리, 금, 은 등의 금속을 녹여 이용한 것은 최대 8,000년전의 중동지역으로 생각하고 있음).
2) 5 만년 전 지층속 나무에서 발견된 금속 도끼에 의한 흔적. 1826년 노쓰신시내티(north Cincinnati)의 오하이오강(Ohio river) 근처에서 우물을 파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물을 찾지는 못했지만, 지하 28m 지점에서 날카로운 도끼로 패인 흔적을 가진 나무 그루터기가 발견되었다. 흔적은 깊고 매쓰럽게 패여져 있어 날카로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도끼의 흔적으로 추정되었다. 도끼가 금속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 고안된 철로 만든 쐐기(wedge of iron)가 그루터기 윗부분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루터기가 나온 지층은 50,000~75,000년이었다.
3) 10 만년전 지층서 발견된 금속 용기. 1851년 6월 Scientific American (Vol 7, P298~299) 지의 이슈는 마사추세츠 도체스터(Mssachusetts Dorchester)의 미팅하우스 힐(Meeting House Hill)에서 암반 다이나마이트 폭파작업중 출토된 두 부분의 금속용기(metallic vase)에 관한 것이었다. 두 부분을 합쳤을 때 종(bell) 모양의 용기는 높이 11.4 cm, 밑부분이 16.5cm, 윗부분이 6.4cm였고, 두께는 3mm 정도였다. 금속용기는 아연과 은의 합금으로 이루어졌고, 화환으로 된 6송이의 꽃이 새겨져 있었는데, 은으로 세공되었으며, 금속에 부조, 조각, 세공한 방법 등은 알려지지 않은 형태의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용기가 발견된 지하 4.5m 깊이의 역암층의 연대가 10만년 이었다는 것이다.
4) 지하 30 m 깊이에서 발굴된 이상한 금속 메달. 1870년 8월 일리노이주 페오리아(Peoria) 20마일 북쪽의 론리지(Lawn Ridge)에서 세사람이 우물(artesian)을 파고 있었다. 30m 이상 깊이쯤 팠을 때 펌프는 작은 금속 메달(medallion)을 땅 위로 올려놓았다. 작업자중 한사람인 모피트(Jacob W. Moffit)가 최초로 이 메달을 발견하였고, 이것은 윈첼(Alexander Winchell) 교수에게 보내졌다(후에 Sparks From a Geologist,s Hammer라는 책에서 보고함). 또 한명의 목격자인 윌모트(W. H. Wilmot)는 메달이 발견된 지층위치에 대해서 1871년 12월 4일 기록에서 상세하게 적어놓았는데, 지표로부터 흙(soil) 0.9m, 황색점토 5.1m, 청색점토 13.2m, 검은 식물잔해 1.2m, 단단한 자주빛 점토 5.4m, 연녹색점토 2.4m, 부패된 점토 5.4m, 고토양(palesol, ancient soils) 0.6m, 메달, 황색점토 0.3m, 모래와 물섞인 진흙이 3.3m 였다. 이 이상한 주화-메달(coin-medallion)은 확인되지 않은 구리합금으로 만들어졌는데, 두께와 원형이 매우 정교했으며, 가장자리는 매우 잘 잘려져 있었다. 연구자인 두보이스(William E. Dubois)는 이 메달은 기계(rolling mill)로 제작되었음을 확신하였다. 메달의 양쪽면에는 그림과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금속으로 인쇄되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산(acid)을 이용한 부식방법 등과 같은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통해 그림을 만든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쪽면에는 까운과 두건을 두른 여인이 마치 축도를 하는 듯이 왼손을 들고 있었으며, 오른 손은 왕관을 쓴 작은 아이를 잡고 있었다. 다른 면의 중앙에는 웅크리고 있는 동물이 있었는데, 길고 뾰족한 귀, 큰 눈과 입, 집게같은 팔, 긴 꼬리를 가졌고, 왼쪽 아래로는 말과 같은 동물이 그려져 있었다. 양면 모두 그림 둘레에는 형상이 확실하지 않은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일정한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 알파벳의 형태와 비슷했다. 1876년에 이 메달은 윈첼 교수에 의해 버팔로에 있는 미국지질학협회의 보내져서 많은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시원한 설명은 없었다. 보수적인 역사학자인 레슬리(J. R. Lesley) 교수는 블란서나 스페인의 탐험가가 지나가다가 구멍으로 메달을 떨어뜨린 것이 아닐까 하는 농담과 같은 희극적인 설명을 하였다. 윈첼은 여러 가지 정황을 검토하여 실제로 메달이 그 깊이에 지층에 있었음을 확신했다. 그런데 문제는 충적층의 형성률과 탄소동위원소에 의한 연대측정으로 이 지역 30m 깊이의 지층은 10만년에서 15만년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북아메리카에 고대에 잃어버린 문명이 있었다는 것인가? 구리와 금속을 가공하고, 까운을 입고, 왕관을 쓰며, 동물들을 길들이며, 산을 사용하고, 기계를 만들어 메달을 찍어내는 문명이 10만년전에 존재했다는 것인가?
5) 6 천만년전 갈탄 속에서 나온 쇠로 된 입방체. 1885년 가을 오스트리아 북부 보크라부르크(Bocklabruck) 근처 스콘도르프(Schondorf)에 위치한 철제련소에서 작업자인 리들(Riedl)은 슈완스타트(Schwannstadt) 근처 볼프섹(Wolfsegg)에 있는 광산으로부터 가져온 갈탄 덩어리를 깨뜨렸다. 그런데 그 속에서 이상한 입방체(cube)가 발견됐다. 1886년 광산 엔지니어인 굴트(Dr. Adolf Gurlt) 박사는 독일 본(Bonn)에 있는 자연사 학회(Natural History Society)에 그 물체에 대해 보고했는데, 얇은 녹으로 덮여있는 그 물체는 철로 만들어졌고, 6.7×6.7×4.7cm 크기이며, 무게 784.7g, 비중 7.75 이었다. 네 면은 거칠게 평평했으며, 나머지 두 면(서로 반대)은 볼록하였다. 분명한 깊은 홈이 중간 높이에서 물체 둘레에 새겨져 있었다. 이 물체에 대한 초기 연구는 네이처 (London; November 11, 1886, p36) 지와 천문학(L. Astronomie) 지에 (Paris; 1886, p463) 보고되었다. 진품에 대한 석고형(plaster cast)이 만들어져서 오스트리아 린즈(Linz)에 있는 란데스박물관(Oberosterreichisehes Landesmuseum)에 전시되어 있고, 진품은 보크라부르크(Vocklabruck)에 있는 하이마타우스(Heimathaus)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66~7년에 비엔나 자연사 박물관의 몇몇 전문가들에 의해 세밀하게 분석됐는데, 철로된 물체안에 니켈, 크롬, 코발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사실로 운석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또한 황(sulfur)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간혹 기하학적인 모습을 보이는 자연적인 황철광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쿠라트(Dr. Kurat) 박사와 질(Dr. R. Gill) 박사는 이 물체는 주물로 부어만든 철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1973년 마트리아너(Hubert Mattlianer)는 또 한번의 세밀한 조사후 이 물체는 사람이 조각한 밀납이나 점토 틀에 쇳물을 부어 만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즉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 물체가 나온 석탄을 함유하고 있는 지층이 신생대 3기인 6천만년전 지층이라는 것이었다.
6) 3 억년전 석탄 속에서 나온 금사슬. 1891년 6월 9일. 일리노이스 모리슨빌(Illinois Morrisonville)에 사는 쿨프(S. W. Culp) 부인은 부엌난로에 석탄을 집어넣고 있었다. 큰 덩어리가 둘로 부서지면서 그 속에서 금으로된 사슬(gold chain)이 발견되었다. 사슬은 25 cm정도 길이로, 8 캐럿 금(carat gold)으로 만들어졌고, 12.4 g 정도로 고풍스러우며 기묘한 모양이었다. 6월 11일자 모리슨빌 타임(The Morrisonville Times) 지는 이 금사슬이 우연히 석탄속에 떨어져 발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자가 확신한다고 보도하였다. 석탄 찌꺼기들이 아직도 금사슬에 붙어 있었고, 금사슬을 떼어낸 석탄에는 사슬자국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금사슬을 함유한 석탄이 속해있는 지층은 3억년전 이상의 펜실바니아기 지층이었다.
7) 1억5000 만년 지층에서의 사람발자국. The American Anthropologist (Vol.9, 1896, p66) 지에는 오하이오강(Ohio river)의 웨스트 버지니아 사이드(West Verginia side)에 있는 파커스부르그(Parkersburg) 북쪽 4마일 지점의 암석에서 완전한 사람의 발자국 발견을 보고하고 있다. 발자국은 길이가 36.8cm였는데, 암석의 연대는 1억5000만년이었다.
8) 텍사스 글렌 로즈(Glen Rose)근처 팔룩시강(Paluxy River)의 백악기 지층에서의 사람과 공룡발자국. 팔룩시강은 텍사스주에서 두 번째로 상류와 하류와의 수면 고도차가 큰 강으로(1마일당 5.18 m의 수면이 낮아짐), 큰 홍수가 난 후에는 강주변의 침식이 커서 많은 지역이 엄청난 물살에 의해 파여지고 새로운 화석들이 나타나곤 하였다. 1908년 최초로 공룡과 사람의 발자국이 같이 발견되었는데, 1938년까지 이렇다할 연구가 실시되지 않았다. 1938년 지질학자 버딕(Clifford L. Burdick)과 뉴욕자연사 박물관의 버드(Ronald T. Bird)는 브론토사우르스, 티라노사우르스 등의 발자국을 조사하기 시작하다가, 백악기 초기 지층(1억2천~1억3천년전)에서 완벽한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였는데, 맨발의 발자국은 발가락이 분명히 구별되었고, 발의 크기는 38.1cm 였다. 이들은 육식공룡의 큰 3발가락 발자국들도 발견하였는데, 각각의 발자국은 60.9×96.5cm 크기였고, 발자국 사이의 거리는 3.66 m 였으며, 진흙속으로 깊이 새겨져 있었고, 사람과 공룡 둘 다 달리고 있었다. 1939년 5월 버드는 '매우 분명한 사람 발자국이지만 파충류시대에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라고 하면서 멸종된 원숭이라 하였다 (그러나 원숭이와도 1억년차가 남). 파룩시강은 관광명소가 되었고, 불경기로 지역주민들은 공룡과 사람의 발자국을 관광기념품으로 팔기 시작하였고, 몇몇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위조도 되었다. 그러자 보수진화론자들은 발굴발자국 모두를 위조로 치부하여 버렸다. 그후 지질학자, 고생물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발굴이 시작되어 1백여 군데의 사람 발자국들이 발견되었는데, 어린이 발자국도 발견되었고, 어떤 종류는 북미인디언들이 신던 얇은 노루가죽신과 같은 샌달(sandal)을 신고 있었다. 이것들은 곰, 검치호랑이, 매머드, 공룡들의 발자국 위, 아래에서 또는 나란히 발견되어졌다. 이 발자국들은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인위적으로 조작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증거들로 'mud push-up' 현상(발가락이 진흙을 앞과 옆으로 밀어 올린 현상)을 보여주었고, 발자국이 찍히면서 바로 밑에 다른 색의 점토층에 압력을 가하여 만들어진 'Lamination markings'이 많은 사람과 동물의 발자국에서 발견되어졌다. 일리노이대학의 스미스(Dr. Wilde Smith) 박사는 '건장한 남자의 발자국과 브론토사우르스의 발자국이 같은 지층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백년이 넘는 진화론의 가르침을 내던지게 하는 일이다. 이 사건은 다윈의 이론 전체를 폐기하고 오늘날 모든 생물학을 다시 세워야할 것을 의미하고 있다' 라고 하였다. 그후 발자국들은 수년 간의 침식으로 공룡들처럼 사라졌다.
9) 3 억년전 석탄 속에서 나온 쇠단지. 1912년 오클라호마주 토마스(Thomas)의 도시전력회사(Municipam Electric Plant)에 근무하는 2명의 작업자가 이웃지역인 윌버톤(Wilberton) 근처 광산에서 캐내어 온 석탄을 삽으로 화로에 집어 넣고 있었다. 석탄 한 덩어리가 너무 커서 다루기 힘들어 망치로 내리치자, 덩어리가 부서지면서 쇠단지(iron pot)가 발견되었다. 석탄은 쇠단지 내부에도 있어 몰드(mold) 형태로 들어 있었다. 작업자들은 발견의 진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진술서에 서명을 하였다. 이 쇠단지는 여러 전문가들에 의해 검사되었는데, 하나같이 설명하기를 주저하였다. 쇠단지가 발견된 석탄층의 연대가 3억에서 3억2500만년전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었다.
10) 네바다주 퍼싱카운트피셔 캐년(Pershing Count Fisher Canyon)의 2억2500만년전 중생대 지층에서 사람발자국. 1927.1.25. 크냅(Albert Knapp)은 캐년의 헐거운 바위사이에서 사람의 신발뒤축이 찍힌 화석을 발견하였다. 끈적한 상태에서 발을 잡아 뺀 모양의 화석으로 뒤축모서리는 부드럽고 둥글었으며, 오른쪽은 왼쪽보다 더 닳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발견지층은 2억2500만년 전인 중생대 트라이아스기 석회암 지층이었던 것이다. 화석은 록펠러재단의 전문지질학자에게 분석되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현미경 조사 후였다. 가죽신은 두 줄의 실로 꼬매져 있었는데, 한 선은 바깥 모서리를 따라 이어졌고, 다른 선은 0.8 cm 안쪽으로 평행하게 이어져서 꼬매어져 있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박물관의 허바드(Samuel Hubbard)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초기 지구의 원인들은 이러한 가죽신발을 도저히 만들 수 없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러한 증거앞에 무엇을 대답하여야 하는가. 원숭이가 나타나기도전 수천만년전에 고등한 지적인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11) 3 억년전 고생대 펜실바니아기 지층에서의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 1885년 켄터키주 베레아(Berea) 대학의 브라운(J. F. Brown) 교수는 베레아 마을 동쪽 16마일지점인 쿰버랜드(Cumberland) 고원의 록캐슬 카운티(Rock Castle County)의 빅힐(Big Hill)에서 나온 이상한 발견물을 검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정상부근에서 도로를 넓히기 위해 흙을 제거하다가 석탄기(펜실바니아기) 석회암 지층에 오래된 마차 바퀴자국(old wagon trail)이 나있는 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알렌(E. A. Allen)이 American Antiquarian(Vol7, p39)에서 보고했던 것과 같이 그 지층에는 여러 생물체들의 화석흔적들이 발견되고 있었다. 이 바퀴자국을 목격한 사람들을 더욱 신비하게 하였던 것은 바퀴자국 사이에 매우 잘 보존된 두 개의 사람발자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발자국은 사람의 크기였고, 발가락들은 잘 구분되어 있었으며, 매우 선명하게 찍혀 있었던 것이다. 이후 상세한 추가 연구는 실시되지 않고 있다가, 1930년 베레아 대학의 지질학 교수인 버로우(Dr. Wilbur Greely Burroughs)는 회색의 포츠빌 사암(Pottsville sandstone)에 찍혀 있는 24cm정도의 발자국 12개를 발견하였다. 그런데 발자국들은 지질학적 연대로 3억년 이상된 후기 펜실바니아기 지층이었던 것이다. 보수적인 많은 지질학자들과 고생물학자들은 이 발자국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일종의 양서류의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버로우 박사는 Louisville Courier-Journal (May 24, 1953) 에서 '두 쌍의 발자국에서 비교적 왼발은 오른발보다 앞에 나와있다. 발의 위치는 사람의 것과 똑 같았다. 뒤꿈치에서 뒤꿈치까지의 보폭은 45.7cm 였고, 발자국은 서로 평행하게 났는데, 간격은 정상 사람의 것과 똑 같았다.' 라고 하면서 이 발자국들은 두 발을 가진 생물체의 것이며, 절대로 네 발을 가진 동물의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양서류와 파충류들은 네 발을 가지고 있고, 간혹 뒷다리로 똑바로 서서 걷는 것들은 꼬리를 제3의 다리처럼 사용하여 균형을 유지한다. 그러나 발자국에는 꼬리나 배가 접촉한 어떠한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1938년 10. 29일 Science Newsletter에서 논평했던 것처럼 고생대 펜실바니아기에 똑바로 걷는 양서류나 파충류 화석은 보고된 적이 없었다. 분명히 나타난 5개 발가락, ball, 뒤꿈치는 양서류와 파충류의 발자국이 될 수 없으며, 단지 사람의 것만이 이와같은 것이다. 인갈즈(Albert G. Ingalls)는 Scientific American (January, 1940)에서 '만약 사람이 어떠한 모습이라도 석탄기(펜실바니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존재하였다면, 지질학 전체는 완전히 잘못되었으며, 모든 지질학자들은 사표를 내고 집으로 돌아가 트럭이나 운전하여야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12) 고생대 오르도비스기 지층에서 발견된 신발자국. 1948년 영국 윈더미어 호수(Lake Windermere) 근처에서 신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그 해에 The Field 라는 자연사 학술지에 보고되었는데, 발견된 지층은 믿을 수 없게도 5억년 정도로 추정되는 고생대 오르도비스기 석회암층이었다. 이 신발자국에는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진 흔적들을 보였는데, 뒤뚬치와 발가락 앞쪽의 가장자리에는 납작못으로 시침질을 한 듯한(tacking) 둥근 자국이 나있었으며, 뒤꿈치와 발바닥 중앙부근에는 꽃과 같은 무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자국은 바위의 갈라짐과 부서짐으로 약간 비틀어져 있었는데, 신발의 길이는 20cm, 폭은 8.9cm 였다.
13) 고비사막의 1500 만년된 사암층에서 발견된 이상한 신발자국. 1961년 Soviet journal (No.8, 1961)에는 소련과 중국의 고생물학 탐사대가(탐사대장 Dr. Chou Ming Chen) 1959년에 중앙아시아의 고비사막에서 발견한 홈이 파진 밑창(ribbed sole)을 가진 신발(shoe)자국 화석에 관한 내용이 보고되었다. 이 발자국들은 1500만년된 사암층에서 발견되었는데, 탐사자들 다수가 세밀하게 관찰한 결과 '이것은 어떠한 동물의 발자국이 아니다, 왜냐하면 홈이 파진 무늬(ribbing)이 너무 똑바르고 규칙적이어서 자연적 기원으로는 생길 수 없다' 라고 하였다.
14) 50 만년전 암석에서 나온 이상한 기계장치. 1961년 2월13일 세명의 암석수집가 마이크셀(Mike Mikesell), 레인(Wallace Lane), 맥시(Verginia Maxey)는 캘리포니아주 올란차(Olancha) 동남쪽 12마일 지역에 있는 코소산(Coso Mountains)의 정상 1300m 부근에서 돌 하나를 수집했다. 이것은 안쪽으로 움푹한 선이 나있는 수정을 함유한 돌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정동석(geodes)인줄 알았으나, 후에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조개화석 일부를 함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마이크셀이 돌을 반으로 쪼갰을 때 이상한 물체가 나왔다. 안에서 나온 것은 어떤 기계적 고안에 의한 물체로, 흰색의 단단한 질그릇 재료와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폭 0.85cm의 원통(ceramic cylinder) 이었다. 원통 둘레에는 나무와 비슷한 물질이 감싸고 있었고, 원통 중앙에는 2 mm의 축으로된 선명한 놋쇠질의 금속이 있었다. 이 축(shaft)은 자기력(magnetic)을 가지고 있었고, 발견되고 수년후에도 산화되지 않았다. 또한 원통 둘레에는 구리로된 고리(ring)가 있었는데, 후에 대부분 부식되었다. 원통이 발견된 암석안에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물체가 나왔는데, 그것은 못(nail)과 볼트의 워셔(washer)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Charles Fort Society로 보내졌는데, X-ray 검사결과, 확실히 기계적 도구의 일종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금속 축의 한쪽은 부식되었고, 다른 한쪽은 금속 스프링과 같은 나선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점화통(spark plug)으로도 생각했으나, 축 끝부분의 금속 스프링형태 등은 그동안 발견된 어떠한 점화통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기계적 도구를 함유하고 있는 암석의 연대가 지질학자들에의해 50만년으로 평가되었다는 것이다.
15) 유타주 앤트롭 스프링즈(Antelope Springs) 근처 6 억년전 캄브리아기 지층에서의 사람발자국. 1968.6.1. 마이스터(William J. Meister, 아마추어 화석수집가)는 유타주 델타(Delta) 시 북서쪽 43마일에 위치한 앤트롭 스프링즈에서 화석화된 삼엽충과 완족류를 찾다가, 놀랍게도 삼엽충 화석위에 사람의 가죽신발자국(sandal print)을 발견하였는데, 삼엽충은 으깨져 있었다. 지층은 6억년전 캄브리아기 지층이었고, 자국크기는 길이 26cm, 폭 8.9cm였고 뒤꿈치 부분은 폭이 7.6cm였다. Sandal의 오른쪽 부분은 낡아 있었고, 뒷꿈치 부분은 1.7cm 깊게 파여져 있었다. 이 화석은 유타주 지질조사단 돌링(Dr. Hellmut H. Doelling) 박사에게 보내져 진짜임이 확인되었다. 그해 6. 20일 마이스터는 전문가 버딕(Dr. Clifford Burdick) 박사와 같은 장소로 돌아와 재조사를 실시하였는데, 5개의 발가락이 분명한 15cm의 맨발의 아기발자국을 추가로 발견하였다. (그후 마이스터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함.)
16) 백악기 지층서 나온 이상한 금속 덩어리들. 1968년 프랑스의 동굴학자 두루엣(Y. Druet)과 살파티(H. Salfati)는 세인트진 드리벳(Saint-Jean de Livet)에 있는 채석장의 앱티안(Aptian) 백악기 지층에서 이상한 금속 덩어리들을(metal nodules) 발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덩어리들은 적갈색의 얇은 과자모양(wafer-shaped)으로 끝은 우묵했고, 길이 3~9cm에, 폭 1~4cm 였다. 두 명의 조사자들은 처음에는 화석으로 생각하였으나, 금속성 성질이 밝혀진후 운석의 파편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밀한 조사결과 이 덩어리들은 자연적인 기원으로 보기에는 모양이 너무도 일정하였고, 화학적 분석결과 현대적인 대장일(forging)과 주조(casting)기법과 일치하는 탄소함량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1억2천만년전 백악기말 지층에 사람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발견될 수가 있겠는가? 두루엣과 살파티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물체는 선사 고고학에 의해서 정한 한계보다 훨씬 이전에 지구에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하였음을 입증하였다.'
17) 300~500 만년전 지층에서의 사람발자국. 1969.5.25일 Tulsa Sunday World 지에서는 오클라호마 툴사(Tulsa) 동부지역에서 산에서 발견된 이상한 화석에 관한 기사가 보도되었다. 지질학자인 존슨(Troy Johnson)은 발자국 화석이 많이 나 있는 사암층에서 다섯발가락을 가진 분명한 사람의 발자국들을 다수 발견했다. 이 발자국들은 지금은 멸종된 생물들의 발자국들과 같이 나 있었는데, 그 지층의 연대는 300~500 만년이었다.
18) 1 억년전 지층에서의 사람발자국. 비교적 최근인 1970년대에 오클라호마 북서쪽 카리조 계곡(Carrizo Valley)에서 사람의 발자국과 신발자국이 발견되었다. 맨발자국은 어느 정도 침식이 되었으나 분명히 압력이 가해진 가장자리를 보이고 있었다. 신발자국은 보다 분명했는데 길이는 50.8cm 폭은 20cm이었다. 발견된 지층은 1억년 이상으로 추정하는 모리슨 지층과 다코타 사암층(Morrison formation and Dakota Sandstone) 이었다.
19) 17만 5천년전 지층에서 출토된 두상과 유물들. 1921년 아칸소주 핀치(Finch) 북쪽 2마일에 위치한 크로울리 능선(Crowleys Ridge)으로 알려진 작은 산줄기에서 로랜드(Rowlands)는 자갈 갱을 파고 있었다. 3m 정도를 팠을 때 삽은 커다랗고 딱딱한 어떤 것에 부딪쳤다. 처음에는 큰 바위돌로 생각했으나, 좀 더 파자 그것은 사람의 머리를 조각한 커다란 두상이었다. 높이는 1.2m였고, 사각형의 튀어나온 턱, 작고 굳게 다문 입, 짧은 코, 주름진 이마, 금무늬를 입힌 납작하고 강조된 두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귀에는 두 개 이상의 금고리로 장식되어 있었고, 구리로 된 하트모양의 마개가 가슴에 박혀 있었다. 머리는 조각된 두건으로 휘감겨 있었고 목덜미 아래로 내려져 있었으며 한조각은 목에 붙어 있었다. 머리부근 같은 지층에서 로랜드는 금반지, 화산경석(그 지역에서는 존재하지 않는)으로 만들어진 작은 보석함, 사람, 동물, 별, 달의 작은 조각들을 추가로 발견하였다. 이 두상과 유물들은 곧 지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신문들은 노려보는 듯한 이 두상을 '킹 크로울리(King Crowley)'라고 이름붙여 주었다. 여러 조사자들과 전문가들은 자갈층 3m 깊이의 지층이 17만 5천년이라는 지질학적 연대에도 불구하고, 이 발견물이 진짜임을 인증하였다. 두상과 유물들은 리틀록(Little Rock)에 있는 아칸사스 자연사 박물관에 보내졌고, 발견물과 기록들을 철저하게 검사한 박물관장은 발견물이 진품임을 확인하고 전시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작은 유물 몇개는 워싱톤에 있는 스미소니안 박물관으로 보내어졌다. 매우 보수적인 협회인 스미소니안에서는 이 물건들을 '설명할 수 없는 품목'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이 물건이 나온 지층과는 도저히 타협할 수가 없었다. 15년간의 망설임 끝에 스미소니안은 인류문명사과 맞지 않은 17만 5천년전의 이 두상을 위조라고 선포하였다. 명성있는 스미소니안의 결정에 따라 Little Rock 박물관은 두상과 유물들을 전시대에서 치워버렸다. 그리고 '킹 크로울리(King Crowley)'는 개인 수집가들에 팔려 흩어져 버렸다.
20) 최소 30 만년 이상으로 평가되는 땅속 96 m 지점에서 출토된 인형. 1889.8.1일 직업적인 우물 굴착업자인 쿠르츠(M.A.Kurtz) 는 아이다호(Idaho)의 남파(Nampa)에 있는 집근처에서 두 사람의 동료와 함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작업중이던 스팀 펌프(steam pump)가 갑자기 3.8cm 길이의 갈색의 점토 조각을 토해내었다. 모습은 분명히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 발견은 남파의 여러 중요한 시민들에 의해서도 목격이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점토 인형(doll)이 나온 땅의 깊이가 무려 96m 깊이라는 것이었다 (용암암석 4.5m, 모래 30m, 점토 15.2cm, 모래 12m, 점토 모래 섞인 것 50m). 작은 인형은 반은 점토, 반은 석영으로 구성되었는데, 숙련된 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였다. 오벨린(Oberlin) 대학의 알버트 라이트(Albert A. Wright) 교수는 이 인형은 어린이나 아마추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인형의 모습은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분명했는데 둥그런 머리, 간신히 알 수 있는 입과 눈, 넓은 어깨, 짧고 굵은 팔, 긴 다리를 가졌으며 오른쪽 다리는 부러져 있었다. 모습에는 희미한 옷이나 보석과 같은 것을 새긴 기하학적 흔적이 목둘레 가슴부위와 팔과 팔목에 남아 있었다. 인형은 예술적인 차림을 한 매우 문명화된 사람의 모습이었다. 남파 인형이 실제로 발견된 깊이에서 출토되었는지, 얼마나 오래된 유물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은 보스톤의 자연사 학회의 라이트(G.F.Wright) 박사가 출토된 장소에서 쿠르츠의 장비, 파여진 구멍, 목격자들의 증언 등을 조사하였다. 조사후 라이트 박사는 이 발견이 진짜임을 확신하였다. 쿠르츠는 직경 15.2cm의 강철관으로 구멍을 파기 때문에 그 깊이에서 출토된 것에 대한 실수가 있을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더군다나 펌프는 한쪽 방향으로만 가동되는 것으로서 위에서부터 어떤 물체가 펌프를 통해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라이트는 보스톤 학회에 '이 물체가 보고된 깊이에서 펌프를 통해 출토되었음은 확실하다' 라고 최종 보고를 하였다. 또 하나의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보스톤의 푸트남(F.W.Putnam) 교수는 현미경 분석을 통하여 인형 오른쪽 팔아래는 석영알갱이가 철입자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매우 오래된 시간이 흘렀으며, 발견된 깊이에서 실제 있었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남파 인형의 연대는 얼마나 되었을까? 쿠르츠가 뚫은 맨 윗층의 용암암석은 마지막 빙하기가 진행되기 전에 발생한 콜롬비아 고원(Columbia Plateau)의 선사시대 용암류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 지층 아래 90m 깊이의 묻혀 있던 인형. 현대 지질학자들은 인형이 출토된 지층의 연대를 최소 30만년 이상으로 평가하고 있다. 오늘날 남파인형(Nampa doll)은 보이스(Boise)에 있는 아이다호주 역사학회(Idaho State Historical Society)에 전시중에 있다.
21) 20 만년전 지층에서 발견된 타일 바닥(Tile Floor). 1969.6.27일 에드몬드(Edmond)와 오클라호마시(Oklahoma City) 사이 Broadway Extention 122번 가에서 암반 절단작업을 하고있던 작업자들은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발견을 하였다. 그 발견은 무늬가 새겨진 타일이 깔려있는 바닥(inlaid tile floor)으로 지표면 아래 90cm 깊이에서 발견되었는데 수천 평방 피트의 넓이로 발견되었다. 오클라호마시의 지질학자인 페이트(Durwood Pate)는 1969.7.3일 에드몬드 부스터(Edmond Booster)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이것이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돌들은 평행한채로 다이아몬드 형태로 동쪽을 향하면서 완벽한 모습으로 놓여져 있었고, 10m씩 떨어져 정확한 거리에 위치한 구멍들이 발견되었다. 돌의 상부는 매우 매끄러웠으며, 그것의 하나를 들어올리면 들쭉날쭉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표면에 시간이 많이 경과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잘 놓여져 있어 자연적으로는 도저히 생성될 수가 없다' 또한 페이트는 타일 사이에서 회반죽으로 붙인(mortar) 한 형태도 발견하였다. 그는 타일 표면은 많은 사람들이 쉬기 위하여 깔아 놓은 넓은 바닥(floor)라고 생각하였다. 지질학자인 스미스(Delbert Smith)는 1969.6.29일 Tulsa World에서 '그것에 관한 어떠한 의심도 없다. 그것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그 타일 바닥이 놓여있던 지층의 연대는 20만년으로 평가되었다.
22) 6 억년전 캄브이라기 지층에 똑바로 나있는 이상한 두 줄의 철띠 (iron bands) 자국. 1880.6.13일 Inverness 신문의 리포터이며 아마추어 암석탐험가인 카루터(Walter Carruthers)는 스코틀란드의 로취마리(Loch Maree)와 빅토리아(Victoria) 폭포를 여행중에 그 지역의 지질학적 조사를 하기로 하였다. 카루터는 빅토리아 폭포 상단 300~400야드 사이 물줄기의 서쪽으로 있는 세 개의 작은 폭포중 바깥쪽 바위에 특별한 자국이 남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바위는 캄브리아기의 토리돈 레드사암(Torridon Red Sandstone)으로 표면이 4.8×4.8 m 크기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 자국은 나란히 나있는 두 개의 평평한 띠(bands) 줄로서, 3.2~3.8 cm 폭과 0.64 cm 깊이로 비자연적으로 사암층을 똑바로 4.8 m나 나있었는데, 풍화된 곳에서만 단지 끊어져 있었고, 서쪽부근의 중첩된 암석밑에서 사라져 있었다. 수주일 후 이 이상한 띠자국은 카루터의 동료이며 이 지역 공립학교의 Majesty's Inspector인 졸리(William Jolly)에 의해 조사되었다. 카루터는 이 자국은 매우 비범한 생명체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졸리는 기록하기를 ' 이 띠자국의 폭과 넓이까지 일정하게 지속되는 것이 우연히 만들어질 수는 없다. 두 개의 띠자국은 함께 가까이 고정된 두 개의 쇠막대기에 의해 남겨진 자국임에 틀림없다' 라고 하였다. 졸리의 관측은 몇년 후 자국에서부터 산화철(iron oxide)의 미세한 알갱이들이 확인되면서 더욱 확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철띠(iron band)는 과거 한때 어떤 구조물을 걸려고 하다가 파여진 것이 아닌가 하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여러 발견들은 이 주장이 잘못된 것임이 입증되었다. 첫째, 이 bands는 폭포 상단 매우 높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사람의 접근도 거의 이루어질 수 없으며, 구조물을 설치하기는 더욱 어렵다. 둘째, 이 띠자국들은 0.64 cm 깊이로 얕게 나있기 때문에 어떤 구조물을 지지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하다. 셋째, 각 띠의 옆에는 평행하게 얇은 물결자국의 사암이 남아 있었는데, 이것은 모래가 물에 의해 퇴적되면서 사암으로 굳어지기전 철띠가 모래를 흐트러트린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넷째, 자국이 남겨진 사암은 철의 미세한 흔적들을 보존한 작은 줄무늬(striations)들을 보였는데, 이것은 금속이 최초 모래에 즉 굳어지기전 모래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섯째, 띠 한 쪽의 한 부분은 암석표면 아래로 구부러져 들어가 있었는데, 주의 깊게 그 끝을 파본 결과 주변 사암으로 이어진 산화철(iron oxide)을 찾아내었다. 졸리는 같은 장소에서 다른 띠 자국들을 발견하였다. 세 번째 띠는 다른 두 개를 따라 나있었는데 분명하지 않았고, 연속되어 있지도 않았다. 두 개의 추가발견된 띠는 표면 60 cm 아래에 나있었고, 2.1 m 길이였으며, 또 다른 두 개는 높은 위치에 90 cm 길이로 나있었다. 이 철띠(iron band)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규격화된 폭과 깊이, 각진 모서리, 굴러가거나 파지면서 남겨진 미세한 알갱이 흔적들은 어떤 기계적인 도구에 의해서 남겨진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과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것은 발견된 지층이 무려 6억년전의 캄브리아기 지층이라는 것이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