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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교육-3
솔잎장수[pine leaves seller : 朝鮮風俗 松葉賣]라고 되어 있지만 먼
것은 활엽이 되며 모두 땔감으로 사용이 되는데 솔잎은 기름기가 많아서
화력이 더 셀뿐더러 잘 썩지도 않는다.
그 당시는 어쩌면 사진을 찍으면 혼을 빼간다고 그들 사이에 이야기가
있었는지 모두들 등을 돌리고 서있다.
고무신을 사용하고 소가 있는것으로 보아서 가정형편이 좀 나은 노인들 같다.
황소는 암소 쟁탈전을 하기위해서 뿔이 곧은형 이지만 암소는 뿔이 원형으로 휘어진다.
그 당시는 황소는 종일 서 있으려면 다리가 얼마나 아플까?,
곧은 뿔은 담배 파이프를 만들지만 쪼개서 머리빗을 만든 후 이발관에서 사용했다.
바짓가랑이가 쳐지고 통이 넓은 것은 비활동적이긴 하지만
배가고픈 시절이었으니 남들이 볼 때 초라해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일까?
내가 어린시절 어머니에게 왜 옷에다 풀을 먹이느냐고 물었더니
옷을 물에 빨적에 때가 잘 빠진다고 하셨다.
뒷쪽에 심은 세그루의 나무는 내가 심어보아서 아는데 내가
알기로는 꼭 호두나무처럼 생겼다.
***내가 호두나무를 사다가 심었는데 열매가 열리지를 않아서 베어버렸는데
나중에 안것은 10년을 기다려야 한단다***
나가 보관하는 옛사진 30장중에서 골랐다.
살아있는 교육-3
지금이야 밀가루로 풀을 쑤지만 옛날에는 풀을 만들적에
쌀을 물에 불린 후 옹자배기에 넣고는 주먹 싸이즈의 풀돌
이라는 몽돌로 갈아서 풀물을 만든 후 끓이면 쌀풀이 된다.
나는 16살차이의 어머님의 모유수유[breast feeding]가 안되니 쌀풀을 먹고 자랐다.
'입에 풀칠을 한다'는 뜻의 '호구지책[糊口之策]' 이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 된다.
우리동네는 25가구가 살았는데 나와 동갑내기가 5명이었으며 한친구는
가난하녀 취학을 못했는데 자란 후에는 비관을 하여 자살을 했고 3명은 7세에 입학을 했지만
나는 11월 후반의 늦살박이 이었지만 아버님으로 부터 언문을 배워서
2학기에 입학을 했는데 보통키의 교우들과는 한살차이가 나지만
키가 큰 교우들과는 두살 차이가 났다.
고등학교때 교실을 짓느라고 문경시멘트 40kg짜리를 한포대씩을 높은
곳으로 운반을 하라고 했는데 힘히 부쳐서 겨우 나른 기억이 있으며
초등학교 저학년때 달려가다가 두팔을 짚고 덕수넘는것을 해보지를
못 했으며 다리가 ‘오 다리’인데다가 발이 크고 발목까지 굵어서
50m달리는것을 채크를 했는데 14초 걸렸다.
그리고 다리가 휘었으니 책가방은 무릎의 바깥쪽에 부딛쳐서 많이
닳았는데 지금도 가끔 무릎의 바깥쪽을 많이 부딪치고 있다.
운동회때 상을 따 본것은 암산을 해서 2등을 한적이 있다.
해방 직후에나온 '까막치마 흰저고리 책보를끼고‘라는 가요의
가사가 있는데 검정색 치마는 부엌아궁이에 닿아도 흰치마보다는 더러움을 덜탄다.
오래전에는 가방이없고 보따리를 사용하니 ‘책보따리’라고 불렀다.
해방 후의 소년들은 시장에서 사다주는 양복과 운동화는 좋아했지만
발에 땀이 흥건히 배는 고무신이나 집에서 부모님이 만들어주는 구형의 한복은 싫어했다.
단 고무신의 좋은 점은 신기가 편리하고 아이들이 물을 담은
후 물고기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소년시절에 멀리 보이는 철도나 2층 건물은 산을 넘어야 하는
동네에 사는 나에게는 신기했다.
대원군은 중국이나 일본이 격퇴하지 못했던 미국을 성공적으로
격퇴함으로써 조선의 역량을 과대평가하니 미국의 발전된 물질문명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 것 같다.
나폴레옹황제의 결혼은 6살 년상에 아이가 둘인 과부조세핀이고,
죠지 워싱턴의 처 마사 워싱턴도 2명의 아이를 가진 과부이다.
이에 반해 이조의 왕 27명중 환갑을 넘긴 왕은 고작 3명인데 권세를
일단 쥐기만 하면 나이어린 숫처녀를 여럿 거느리게 되니 그 이상의
신경을 건드리는 다른 것은 바라지 않게 되고 ‘현재 있는 그대로’
가 좋으니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는 것을 배척하고자
쇄국정책(통상 수교의 거부)을 고집한 것은 아닐까?
왕들은 조선이 외국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했는데 핸드뤽 하멜(Hendrick Harmel)표류기
(실은 보고서)의 내용에 네델란드(Netherland; 낮은 땅이란 뜻, 풍차가 있다)
사람 하멜을 억류하게 된다.
동인도회사 직원인 그는 처음 64명이 Sperwer(스삐로베르; 참새;sparrow)호에
승선하여 대만에서 일본(日本; 해뜨는 나라; にぽん; Nippon이 지팡그로 됐다가
저팬으로 변함)으로 가던 중 폭풍에 휩싸여 밤중에 배가 3차례 바위에 부딪치는
바람에 파선되어 일본인줄 알았지만 뭍에 올라보니 처음 본 섬 이었는데
생존자 36명이 표류하게 된다.
하멜이 표류하기전 1616 인조4년에 네델란드인인 박연[얀 얀스 벨테브레
]이 일본으로 가던중 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 땔감을 구하러 갔다가
관헌에게 붙잡혀서 본토로 올라간 후에 결혼을 하고 임금의 배려로 훈련도감을 하면서 살아갔다.
박연이 와서 하멜에게 하는 이야기가 혹시 새나 되면 몰라도 바깥세상으로
다시 나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고 이 땅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거라고 말을 해 주었다.
조선은 쇠가 귀할 때이니 군인이 난파선 나무에 붙은 쇠붙이를
채취하기위하여 불을 질렀는데 포탄 2개가 터져서 2사람이 죽었단다.
그들은 1653(효종4년)년부터 1666년 까지 13년 동안 억류되는데 회사에서는
나가사끼로 떠난 사람이 없어졌으니 실종으로 처리 되었단다.
하멜이 일본으로 가고 싶다고 했으나 그의 뜻은 받아드려지지 않고 좌절된 후
이리저리 다 죽고 8명이 일본의 나가사끼로 도주하여 거기서 그는 밀린
봉급을 받기 위하여 표류기를 쓰게 되는데 하멜이 그린 그림을 보면 약
5백년 전 일지라도 일본에는 이미 2층집이 있었다.
조선왕조가 그들에게 좋은 직책을 주었으면 조선인은 많은 지식을 배울
수 있었을 터인데 임금이 보기엔 그들이 유교사상에 위협적이어서
나무꾼이나 어부직업을 주었단다.
표류기내용에 중국에서 사신이 조공을 받으러 오면 사신에게 최고대우를
해주어 언재나 조선이 중국에 좋게 보고(報告)된다고 한다.
표류인들이 노출될까봐 사신이 조선에 머무는 동안만은 바깥출입을 할
수 없게 금족령이 내리게 되는데 일행 중 한명이 억울한 억류를 호소하려고
사신이 돌아갈 때 길옆 숲 속에 숨어 있다가 행차로 뛰어들다
죽임을 당해도 사신은 전연 알지 못했단다.
조선은 폐쇄적이어 그들이 살수는 있지만 그동안 그들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도 못하고 또 떠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의 기록에 1598년에 쓰시마(대마도; Tymatte)를 일본에게 내어주고
제주도(Quelpaert)를 받았다고 해서 내가 처음 안 사실이다.
제주도지방장관은 하멜에게 쌀을 빻게 했고 하루 종일 100길(길; 사람의 키 높이)
이나 되는 새끼를 꼬게 했는데 1663년에는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수 천 명이
죽었고 강도나 도둑이 많아 군인들이 순찰을 다녔고 식량 창고가
털렸다고 표류기에 기록되어 있단다.
그가 안 사실은 조선인들이 그에게 한 말로 ‘외국인이 일본 땅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즉시 맞아 죽게 된다.’고 했는데 그 말은 나중에 거짓으로 판명 났다.
그들은 한반도의 크기를 남북으로 150마일, 동서로 75마일 정도의 4각형으로
추정했고, 8개의 지방(함경도, 전라도 등)으로 나누어져 있고, 360개의
도시에 크고 작은 섬들이 많이 있으며, 일년에 3번 청나라사신이
공물(貢物)을 거두기 위해 찾아왔단다.
8개지방의 어원을 살펴보면 함흥과 세종떼 김종서가 세운 6진 중
경성(?)이 있었기에 함경도(?), 평양과 안주평야에서 따온 평안도,
사과로 유명한 황주와 해주에서 따온 황해도, 강릉과 원주에서 온
강원도, 전주와 나주에서 따온 전라도, 경주와 상주에서 나온
경상도, 충주와 청주에서 온 충청도가 된단다.
양반 중에 왕으로부터 섬이나 땅을 대부받은 사람도 있으나 죽으면
바로 왕에게 반환되며 60살이 되면 징집에서 면제 되고, 군인들은
날카로운 도리께로 무장하며, 긴급 시에 승려들은 군인으로 변해 칼과 화살로 무장한단다.
남편을 죽인 여자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가에 머리만 나오게 한 채 묻히는데
그 여자 옆에는 나무로 만든 톱이 있어서 그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양반을 제외하고 그가 죽을 때까지 한 번 씩 톱질을 해야 한단다.
그들은 돌아다니며 외국이야기를 하여 곡식을 구하는데 농부들에게
보다는 승려들에게 구걸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알았고,
“승려들은 우리의 관습이나 우리가 가 보았던 다른 나라들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다.”라고 했단다.
돈을 모은 그들은 어선을 한척 샀는데 고기는 잡지 않고 쌀, 식기 등속을 실어 나르니
배의 전 주인은 탈출하려는 기미를 눈치 채고 관가에 보고하려하자 그렇게 되면
모두사형이니 우리가 탈출 후 배를 도둑맞았다고 거짓 보고를 하라고
한 후 밤에 탈출을 하여 3일 만에 일본 섬에 도착하고 1년 후 본국으로 돌아간다.
일본속의 외래어가 80%인 것은 일등국가로 변신하려는 작심에서 비롯되며
최상의 지름길인데, 한자가 반 이상인 것만 보아도 재빨리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인 것이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일어에는 입속에 압축공기를 만든 후 터뜨리며 발음하는 침이 튀는‘ㅊ, ㅋ, ㅌ, ㅍ, 과 ‘ㅓ’,
등의 발음이 없는데 예를 든다면 영어로 ‘flat tire(플렛 타이어)’는
소리글인 한국어로 ‘타이어 펑크’이고 일어로는 외래어인 ‘タイヤ パンク(다이야 빵구)’로
발음되는데 한글의 고무는 일어차용어로 꼬무(コ”ム)에서 왔다.
여기서 멀지 않은 위튼 도서관에는 중국(한국서적 보다 5배가 많다)서적,
히스페닉계 서적을 비롯하여 한국에서 발행한 600여권의 도서가 있는데
내가 쓴 이 책도 이곳에 비치되고 한국일보, 주부생활 등이 비치되어 있는데
다만 일간지나 월간지는 빌려주지 않고 이곳에서만 읽을 수가 있다.
미국에서는 2불을 내고 도서관이용카드를 만들면 영원히 유효하며
카세트, CD, DVD, 비디오태이프등을 무료로 빌려다가 볼 수가 있고
여러 대의 컴퓨터(무료)도 있으며 도서관으로 들어가 자기가 원하는
분야별로 모아놓은 책들을 책꽂이에서 골라 무료로 한꺼번에 50권까지
3주일 동안 빌릴 수 있으며 특별한 책이 아니면 컴퓨터나 전화의
자동응답기를 이용하여 기간의 연장도 몇 번 계속하면 몇 개월도
가능한데 나도 기간연장이용을 해본 경험이 있다.
나는 도서관에서‘경주 최부자 300년의 비밀’이라는 책을 빌려서 읽었다.
누구든지 의문점이 있어서 물으면 책자나 인터넷에서 찾아서 가르쳐주는
직원도 2사람이 상주했는데 대구에 가서 목사가 된 친구의 따님도 이곳에 근무를 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 군인이 몇 명이냐고 미국인에게 물으면 컴퓨터에서 찾은
후 “현역이 686천(미국식)명 입니다.”라고 대답하는데 책의 내용이 필요하면 복사기도 있다.
그리고 부러운 것은 국민들에게 1년 중 최고의 명절인“크리스마스” 하루만 문을
닫고 무료로 공개되는 종류별로 분리된 박물관이 워싱턴시내만 13개나 있는
것을 감안할 때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다.
2007년 9명의 노벨상 수상자중 4명이 미국인이니 가장 많이 배출되는
셈인데 박물관에서 얻어지는 지식은 입체적이니
‘살아있는 교육’
이 라는 나의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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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글입니다
저역시 초딩때는 기차 구경도
못했거든요
울 동네 어르신들 대부분이 기차 구경도 못하시고 세상 떠나신분 들이셨구요
고무신 시대의 저희들에게는
운동화 한번 신어 보는게 최고의 소원이기도 했었던것
같습니다요 ㅎ~~♡
사진속에서 철길이 보이는데요
어릴적 소문에 철로위에다가 철사를 놓고 그 위로 기차가 지나가면
철사가 넙작해지면서 지남철이 된다는 소문이 있었답니다.
2개의 나라에서 사니 머리에 든것이 두배가 되는것 같습니다.
며느리가
"아버님, 저기 가는게 기차라는것 같네요."
"아마도 그런것 같구나!"
모두들 기치를 본적이 없는 분들이었네요.
감솨요..
추억에 젖어 머물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