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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년 간행된 최초의 훈민정음 해설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의 명칭(한글의 옛 이름)이자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 등을 해설해 놓은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한자를 써 오면서 말과 글자의 다름에서 오는 불편을 덜기 위하여
이두(吏讀) 문자를 사용해 왔으나,
이것으로는 우리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 조선 초기에 와서
왕성한 민족적 자각과 전통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재정리하려는 작업과 아울러,
드디어 훈민정음의 창제라는 위대한 문화적 결실이 이루어졌다.
세종은 최만리 등 일부 유학자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집현전 학사들과 더불어 오랫동안 음운과 문자에 관한 연구를 거듭하여
마침내 훈민정음 을 만들고,
세종 28년(1446)에 이를 반포하였다.
이때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령하여
예의, 해례, 정인지 서문 등을 담아 글자 훈민정음에 대한 해설서를 간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책으로서의 『훈민정음』 곧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한글날 특별기고】훈민정음 해례본
이두는 한문을 우리말 어순으로 배열하고 조사 등을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표기했다.
서술어 + 목적어 순으로 되어 있는 한문을 이두는 목적어 + 서술어 순으로 적었다.
이두를 쓰려면 한자, 이두자를 모두 알아야 했고 한문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다.
그래서 이두는 일상생활의 표기가 아닌 공문서 등에 주로 사용했다.
이두의 이吏는 관리를 의미한다
한글 창제 이후에도 이두가 사용 되었다.
하급관리 사이 에서는 1894 년 갑오 개혁 전 까지도 이두가 사용 되었다.
●책으로서의 『훈민정음』 요약
1. 이칭(異稱) :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훈민정음 해례본』이라
불리는 이유는
기존에 알려졌던 예의편에 해례편이 추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의편은 『세종실록』과 『월인석보』에 실려 있어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해례편에 대해서는 1940년에 『훈민정음 해례본』
이 처음으로 발견되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2. 발간연대 : 세종 28년(1446년) 9월 상한
3. 편찬자 :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집현전 학자
4. 내용(성격) : 글자 훈민정음 해설서
5. 표기글자 : 한자
6. 구성 : (1) 본문(예의) : 어제서문, 예의 / (2) 해례 :
① 제자해 ② 초성해 ③ 중성해 ④ 종성해 ⑤ 합자해 ⑥ 용자례 /
(3) 정인지 서문 등 세 부분으로 짜여있다.
7. 소장 : 현재 두 권이 존재한다.
하나는 1940년경 경상북도 안동 어느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
고(故) 전형필(全鎣弼 이 비싼값을 치르고 구입하여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소장하고 있으며,
또 하나는 2008년 고서적 판매상인 배모 씨가 집을 수리하다 발견,
보상을 요구하며 국가 에 반환하지 않고 있는 상태로 있음
8. 가치 : (1) 문화사적 가치를 이정하여 1962년 국보 지정.
(2)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
1. 본문(예의)
① 어제서문(御製序文)
세종 어제 서문은 세종이 친히 쓰신 것으로,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든 동기와 목적이 잘 나타나 있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현대어 번역) “나라의 (일반 백성이 사용하는)말이 나라의 중간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이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하여금 쉬이 익혀 날로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어제서문에 나타나 있는 정신은
첫째로 우리말에 꼭 맞는 나라의 말소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자주정신,
둘째로 백성들이 글자를 모르는 고통을 생각하는
애민정신, 셋째로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도록 한다는 실용정신이다.
② 예의(例義)
자음자와 모음자의 음가와 운용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글자인 초성의 기본음소 17자 및 병서(並書) 6자(ㄲㄸㅃㅉㅆ, 각자병서)를 포함한 23자와
중성 11자의 소릿값을 규정하고, 이어 훈민정음 28자의 여러 가지 운용법을 설명하였다.
곧 종성에는 다시 초성글자를 쓴다는 것, 순경음(脣輕音) 되는 법과 병서를 규정,
중성글자가 초성글자와 결합할 때의 위치,
글자는 합해야(초성•중성•종성) 소리를 이룬다는 것, 사성(四聲:거성•상성•평성•입성)의 표시법 등이 그것이다.
2. 해례(解例)
해례편은 제자해•초성해·중성해•종성해•합자해•용자례로 나누어져 있다.
① 제자해
새 글자를 만든 대원리(大原理)로서 『태극도(太極圖)』 · 『역학계몽(易學啓蒙)』 ·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등 송학계통의 서적에서 이론을 섭취하여,
제자해의 첫머리부터 태극 · 음양 · 오행과 결부된 언어관을 제시하고,
훈민정음의 창제도 성음에 따라 음양의 이치를 다한 것이라고 하였다.
② 초성해
초성(기본음소) 17자를 만든 방법으로 훈민정음의 제자원리가 상형(象形)에 있음을 말하고,
자음자는 먼저 조음(調音) 위치별로 기본이 되는 초성자를 정하고,
이 기본자들은 각각 그 조음 방식 또는 조음위치를 상형하여 제자된 것임을 말하였다.
예를 들어 ‘ㄱ’음에 대하여 『훈민정음』 본문 예의편에 의하면
“ㄱ은 어금닛소리니 군(君)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ㄱ牙音如君字初發聲).”라고 하였다.
그리고 각 조음위치에서 발음되는 자음은,
그 발음이 세게 나는 정도에 따라 기본문자에 획을 더하여 만든다고 하였다(보기, ㄴ→ㄷ→ㅌ).
이어 다시 오행설을 가지고 각 자음을 오행 · 계절 · 음계 · 방위 등과 결부시켜 설명하고,
오행과 결부된 오성의 음상(音相)을 발음기관 및 오행의 특질과 연관시켜서 설명한 다음,
한자(중국)의 전통적인 어두자음(語頭子音) 분류법인 36 자모표의 분류방식에 따라
훈민정음의 자음자를 분류 설명하였다. 표 2〉
또한, 오행과 결부된 오성의 음상을 발음기관 및 오행의 특질과 연관시켜서 설명하였다.
〈표 3〉
또, 초성 23자(기본음소 17자, 각자병서 6자)를 전청(全淸:ㄱㄷㅂㅈㅅᅙ) • 차청(次淸:ㅋㅌㅍㅊㅎ) • 전탁(全濁:ㄲㄸㅃㅉㅆ) • 불청불탁(不淸不濁:ㄴㅁㅇㄹ) 등 청탁(淸濁)으로 분류하고, 훈민정음 28자와 따로 제정한 순경음(脣輕音)의 음가는, “가벼운 소리를 가지고 입술을 잠깐 합하고 목구멍소리(숨소리)가 많다.”고 하였다.
③ 중성해
중성글자는 초성글자와는 달리 천(天) · 지(地) · 인(人) 삼재를 상형하여 기본모음자 ‘ㆍ · ㅡ · ㅣ’를 만들었음을 말하고, 이들 기본모음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표 4〉
이 세 기본모음자는 중세국어의 7단 모음체계를 세 갈래로 인식하고 제자한 것으로서, ㅣ모음을 별도로 보고, ‘ㆍ’모음계열과 ‘ㅡ’모음계열로 나누어서 나머지 모음자들[ㅗ · ㅏ · ㅜ · ㅓ, 이를 초출자(初出字)라고 하였음]을 만들었음을 설명하였다.〈표 5〉
그리고 이들의 관계를 다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ㅗ ㅜ’는 입을 오므리고, ‘ · ㅡ’는 입을 벌리고, 중성 11자 가운데 나머지 ‘ㅛ · ㅑ · ㅠ · ㅕ’(이들을 재출자라고 하였음)는 ‘ㅣ’에서
시작되는 음으로 보고, 이어 또다시 역(易)의 수(數)나 위(位)를 가지고 중성글자들을 설명하기도
하고, 초성 · 중성 · 종성 세 글자의 결합을 설명하기도 하였다.〈표 6〉
④ 종성해
종성해에서는 종성이란 자음으로 끝나는 음절말음임을 역시 한자음을 가지고 다시 설명하고, 중세국어의 성조를 우선 종성만 가지고 설명하였다. 즉, 불청불탁자(不淸不濁字)는 평성 · 상성 · 거성의 종성이 되고, 전청자 · 차청자 · 전탁자는 입성의 종성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어의 종성은 ‘ㄱ · ㆁ · ㄷ · ㄴ · ㅂ · ㅁ · ㅅ · ㄹ’ 8자면 족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자음의 입성 가운데, ‘ㄷ’종성음을 일반에서 ‘ㄹ’로 발음하고 있는데,
이를 ‘ㄷ’음으로 발음해야 된다고 하였다.
⑤ 합자해
합자해에서는, 초성 · 중성 · 종성 글자를 자소처럼 인식하여, 이들 3요소를 좌로부터 우로,
위로부터 아래로 써서 음절단위로 쓸 것을 규정하였고, 합용병서 ·
각자병서의 서법(書法)을 초성 · 중성 · 종성에 걸쳐 설명하였다.
이어 당시의 국어성조를 다시 설명하여, 입성은 중세국어의 성조 단위가 아님을 말하였다.
즉, 긷:깁 몯 등이 종성만을 가지고 볼 때는 입성이지만, 성조로서는 평성 · 상성 · 거성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반설경음(半舌輕音) ‘ᄛᅠ’도 반설중음(半舌重音)인 ‘ㄹ’과 구별하여 사용할 수 있음을 말하고,
중모음 !ㅗ의 가능성도 제시하였다.
⑥ 용자례
용자례에서는 실지 말을 표기하는 보기를 든 것으로서 중세국어에서 90단어의 예를 들어,
그 표기법을 보였다.
초성 ‘ㄱ · ㅋ · ㆁ, ㄷ · ㅌ · ㄴ, ㅂ · ㅍ · ㅁ, ㅸ · ㅈ · ㅊ, ㅅ · ㅎ · ㅇ, ㄹ · ㅿ’의 표기례를
각각 2 단어씩 들었는데,
각자병서와 ㆆ의 표기례가 제외되고, ㅸ의 표기례를 보인 것이 특징이다.
중성은 ‘ㆍ · ㅡ · ㅣ · ㅗ · ㅏ · ㅜ · ㅓ · ㅛ · ㅑ · ㅠ · ㅕ’의 표기례를 각각 4단어씩 보였으며,
종성은 ‘ㄱ · ㆁ · ㄷ · ㄴ · ㅂ · ㅁ · ㅅ · ㄹ’의 8종성의 표기례만을 각각 4단어씩 보였다.
3, 정인지 서문
「정인지 서문」의 내용은
『훈민정음』의 ‘해례’를 집필하게 된 경위,
한자와 이두 사용의 불편함과 새 문자 창제의 동기와 필요성,
세종이 창제한 새 문자의 특징과 장점 등에 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
세종대왕의 뛰어난 업적을 찬양한 것인데,
집필자들을 대표하여 그 우두머리인 정인지가 작성하여 「정인지 서문」이라 한다.
“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所以古人因聲制字 以通萬物之情 以載三才之道 而後世不能易也…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叶七調 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遂命詳加解釋 以喩諸人…正統十一年九月上澣 資憲大夫 禮曹判書 集賢殿大提學 知春秋館事 世子右賓客 臣鄭麟趾拜手稽首謹書”
「정인지 서문」에서는 먼저 풍토에 따라 말과 소리가 다름을 지적하고,
우리나라에서 한자를 빌려 썼으나 한자는 우리말에 맞지 않으며
신라 설총이 만들어 사용해 온 이두도 한자를 빌려 쓴 것이어서
한자 못지않게 불편하여 새 문자를 만들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훈민정음’을 계해년인 1443년 겨울에 세종대왕이 창제하였음을 말하고
새 문자의 성격을 “모양을 그리고 글자는 옛 전자를 본떠 소리로 인하여
음이 7조에 어울린다.”라고 설명한 다음,
“천지인 삼극의 뜻과 음양이라는 이기의 묘함이 다 포괄되지 않음이 없다.”라고 칭송하였다.
이렇게 28자가 아주 교묘하게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나절이면 익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 깨우칠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어서 새 문자인 훈민정음의 장점을 나열하였다.
첫째 이것으로써 한문을 풀이하면 그 뜻을 알 수 있고,
둘째 이것으로써 송사(訟事)를 심리하면 그 실정을 알 수 있고,
셋째 이것으로써 자운의 음을 적으면 청탁을 능히 구분할 수 있고,
넷째 이것으로써 악가(樂歌)를 적으면 율려(律呂)를 극히 조화롭게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세종대왕이 창제한 새 문자는 쓰는 데에 갖추어지지 않은 바가 없고,
통달하지 않은 바가 없어서 바람 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의 홰치는 소리, 개 짖는 소리도 모두 이 글자로써 적을 수 있다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의 집필에 참여한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와 함께
새 문자에 대하여 요점만 간략히 요약한 줄거리를 서술하여 스승 없이도 깨우치도록 하였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하늘이 내신 큰 성인이어서
정음을 지은 것도 어떤 선인의 설을 이어받은 것 없이 자연으로 이룩하여
지극한 원리가 있지 아니한 바가 없다고 설명한 다음,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 오래지만 개물성무의 큰 지혜는
세종이 나타나 베풀기를 기다려 오늘에야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세종대왕의 업적을 찬양하였다.
또, 이 서문을 쓴 날이 1446년 9월 상한이므로, 이 책의 완성일을 알려준 데도 이 서문의 가치가 있다.
이처럼 붓으로 쓴 글자를 나무에 새겨 찍어 낸 목판본으로 제작 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문자가
이 세상에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고 전파됐는지는 훈민정음 창제ㆍ반포 못지않게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책으로,
1997년 1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었다.
훈민정음 언해본
『훈민정음 해례본』 외에 『훈민정음 언해본』이 있다. 『훈민정음 언해본』은
한문으로 쓰여진
『훈민정음 예의본』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한 것을 말한다.
1459년(세조 5년) 간행된 『월인석보』 1권의 첫머리에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이라는 제목하에
훈민정음의 어제서문과 예의 부분이 한글로 번역되어 실려 있다.
예의본의 한 종류라 할 수 있지만, 편의상 따로 언해본으로 부른다.
이는 한문으로 적혀있는 예의본을 한글로 번역하였기에 이를 구분 짓기 위함인데,
언해란 말이 한문을 한글로 번역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언해』는 한문으로 된 훈민정음의 본문을 먼저 쓰고,
그 아래 한글로 협주(夾註)를 단 뒤 한글로 새로이 한문을 풀이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훈민정음에 쓰인 한문을 읽은 뒤 그 한문의 각 글자 풀이를 읽고, 한글로 번역된 부분을 읽게 된다.
한문을 모르더라도 훈민정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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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세계사에 빛나는 우리 글자 세상을 비추다. 창제로부터 발전 과정 살펴보기 1. 들어가는 말 / 2. 당시의 배경 / 3.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 / 4. 반포(頒布)가 3년 후로 미뤄진 이유 / 5. 책으로서의 <훈민정음>(구성, 내용, 책의 발견) / 6. 한글의 다른 이름 / 7. 한글 자모의 이름 / 8. 호머 헐버트의 띄어쓰기 도입과 주시경 / 9. 한글날 제정 / 10.일제강점기 우리글을 지키기 위한 노력 (한글 보급운동, 조선어학회 탄압) / 11. 한글의 우수성 / 12. 앞으로의 과제 1. 들어가는 말 인류의 참된 역사는 언어의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 기록이 없는 시기는 역사 시기가 되지 못한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 전 우리나라에도 언어의 기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자로 기록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비석문과 개인의 문집 등 많은 기록이 있다.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어 놓은 기록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우리 글자가 아니어서 우리 민족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바로 전해 주기에는 부족했다. 더구나 일반 민중들은 글자를 모르고 생활하면서 인간의 권리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 그들은 관청에 호소하려 해도 호소할 길이 없었고, 억울한 재판을 받아도 바로잡아 주기를 요구할 수도 없었으며, 농사일에 관해 기록하려 해도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세종은 우리 민족의 생각과 감정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고유문자를 창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학문적인 역량이 뛰어난 성군으로 혁신적인 정책을 수행해나가는 과감한 성격을 겸비하고 있었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민본 정신이 투철했다. 세종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우리 고유의 글자를 창제하는 계획으로 이어졌다. 2. 당시의 배경 다행히, 당시의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새 글자를 만들어 낼 만한 좋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첫째, 고려 말기 몽골의 침략을 겪으면서 나라 안에서는 점점 자아의식이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둘째, 주위의 민족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의 글자를 가지고 있었으나 우리는 글자가 없어 남의 글(한자)에 의존하는 처지라 이에 따른 이질감, 불편함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셋째, 세종의 개인적인 역량을 들 수 있다. 세종은 남달리 학문을 좋아하고 음운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민본 정신이 투철했다. 더구나 주체적이며 혁신적인 정책을 수행해나가는 과감한 성격을 겸비하고 있었다. 넷째, 집현전에는 세종의 이러한 정책을 도울 만한 유능한 학자들이 많았다. 다섯째, 중국과의 외교 관계 유지에 유능한 통역사 양성이 필요했기에 『동국정운』 등을 편찬하는 등 중국 음운학을 연구하게 되었고, 이는 새 글자를 창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은 세종이 ‘훈민정음’이라는 새 글자를 만들어 내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경복궁 내에 있는 수정전 (세종 대에는 집현전이 있던 자리로, 한글 창제 등 문치의 중심지였다) 3.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사실이 기록에 나타난 것은 『세종실록』 25년(음력 1443년)이다. 그해 12월 조에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是謂訓民正音).” (이달에 임금께서 몸소 언문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니 …… 이것을 훈민정음이라 부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우리 글자 훈민정음이 1443년 12월에 창제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이어 『세종실록』 28년(1446년) 병인 9월 조에 “是月訓民正音成”(이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졌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훈민정음』이라는 책이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이는 1443년 음력 12월에 훈민정음 글자를 일단 완성하고 완성된 글자를 다시 다듬고 그 자세한 풀이를 하여 1446년 음력 9월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40년 7월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해례본)의 끄트머리에 붙인 정인지의 글에 있는 “正統十一年九月上澣……臣鄭麟趾拜手稽首謹書”라고 쓴 것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정통 11년은 1446년이다. 4. 반포(頒布)가 3년 후로 미뤄진 이유 세종은 우리 고유의 글자를 만들기 위한 작업을 은밀히 추진했다. 극비리에 세종은 자신이 익히고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아들인 수양대군(세조)과 딸인 정의공주 등 가족을 통한 실험과정을 거쳐 진행해 나갔다. 이러한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1445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인 최만리((崔萬理, 1398년~1445년 10월 23일)를 비롯하여 신석조, 김문, 하위지, 정창손 등 집현전 내 학자들이 창제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때 올린 상소의 내용은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어긋나며, 스스로 이적(夷狄, 오랑캐)이 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 이두(吏讀)는 한자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되지만 언문(諺文)은 그렇지 못해 유익함이 없다는 점, 신하들과 상의 없이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명에게 언문을 가르쳐 고인이 이미 이룬 운서를 고쳐 인쇄하려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는 점, 동궁(東宮)이 언문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 등 반대의 이유 6가지를 제시했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를 쥐고 있는 왕이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종은 그들의 반론에 하나하나 반박하며 신하들을 설득했다. 이때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의 대표격인 최만리는 세종의 노여움을 사 책망받고 친국을 당한 뒤, 투옥되기도 했다. 한편, 세종은 세글자 훈민정음의 보급을 보다 완벽하게 하기 위한 작업을 서둘렀다. 신숙주를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에겐 훈민정음을 해설하고 널리 이용할 수 있도록 훈민정음 해설서를 펴게 했다. 이것이 1446년 훈민정음 반포와 함께 내놓은 『훈민정음』(훈민정음해례)이다. 이러한 세종의 완벽주의는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세종이 정인지, 권제, 안지 등에 명하여 최초의 한글 문헌으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445년 편찬, 1447년 간행)를 짓게 했다. 내용은 조선 왕조의 건국 정당성과 선조들의 업적을 노래한 악장·서사시였으나 한글의 보급과 정착을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이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수양대군에게 만들게 하여 세종 28년(1446)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하게 한 것 등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1446년 세종의 정실인 소헌왕후가 죽자 수양대군이 죽은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한 불경언해서이었다. 세종 29년(1447) 세종은 수양대군이 올린 『석보상절』을 읽고 친히 찬불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월인천강지곡』이다. 이 모든 것은 한글로 쓰인 것이다. 5. 책으로서의 <훈민정음>(구성, 내용, 책의 발견) ►훈민정음 해례본의 구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와 함께 발간한 훈민정음해례본』은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책은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구성은 본문인 예의(例義)·해례(解例)·정인지 서문 등 3부분으로 되어있다. ▲세종28년(1446년) 간행된 훈민정음 해설서 (1)예의 부문 예의편은 훈민정음 창제목적을 밝힌 어제 서문과 새 글자의 음가, 운용법을 설명한 예의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인 예의는 ① 어제서문(훈민정음 창제목적을 밝혔다.) ② 예의(새 글자의 음가, 운용법을 설명하였다.) 등으로 구분되어있다. ① 어제 서문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 (풀이) “나랏말싸미 듕국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세, 이런 전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홀배이셔도 마참네 제 뜨들 시러펴지 몯할 노미하니라, 내 이랄 윙하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 여듧 짜랄 맹가노니, 사람마다 해여 수비 니겨 날로 쑤메 뻔한킈 하고져 할따라미니라.” 세종 어제 서문에서는, 표기 수단을 가지지 못한 비 지식층 백성들에게 표기 수단을 가지게 하도록 세종이 친히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고 창제목적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한글은 서문에 나타난 대로 '자주, 애민, 실용'이라는 창제 정신의 구현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로 평가받는다. ② 예의(例義) - 참조 : 한국문화대백과 어제 서문에 이어서 예의에서는 중국 36 자모표에 나오는 한자를 그대로 이용하지 않고, 외래어인 한자어의 전래자음(傳來字音)을 이용하여 새로 만든 훈민정음(글자)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이 중에서 초성 23자 자모체계는, 비록 전래자음을 가지고 음가를 설명하기는 하였으나, 인위적인 개신(改新) 의도를 가지고 정리하였던 『동국정운(東國正韻)』 23 자모체계와도 일치하여, 15세기 중세국어의 초성체계와 부합되지 않는 면도 조금 있다. <표1> 예의편에서는 단지 아음 · 설음과 같은 오음(五音) 분류만 표시하였고, 전탁은 병서(竝書)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초성자의 설명을 위하여 이용한 한자들은 중성자와 종성자도 그대로 설명할 수 있도록 고른 것이었다. 중성자는 ‘ㆍ · ㅡ · ㅣ · ㅗ · ㅏ · ㅜ · ㅓ · ㅛ · ㅑ · ㅠ · ㅕ’로 정하였는데, 분명히 이중모음인 ‘ㅛ · ㅑ · ㅠ · ㅕ’도 기본단위 자로 삼은 것이 특색이었고, 종성자는 초성글자를 다시 써서 표시하도록 규정하였다. 예의편의 끝에서는 연서와 병서·합용 등의 표기 방식과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초성 · 중성·종성 글자를 자소(字素)처럼 써서 음절 단위로 쓸 것을 규정하였고, 음절마다 방점으로 성조를 왼쪽에 표시하도록 하였다. (2)해례 부문 해례 부분은 새로 만든 글자의 제자원리를 주로 밝히고, 그 음가 · 운용법, 이 문자가 표시하는 음운체계 등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① 제자해(제자원리, 제자기준, 자음체계, 모음체계, 음상 등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 ② 초성해(초성이 무엇인가를 다시 설명하였다.) / ③ 중성해(중성이 무엇인가를 다시 설명하고, 중성글자의 합용법을 제시하였다.) / ④ 종성해(종성의 본질과 사성 등을 설명하였다.) / ⑤ 합자해(초성 · 중성 · 종성 글자가 합해져서 음절 단위로 표기되는 보기를 보이고, 중세국어의 성조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 ⑥ 용자례(단어의 표기례를 제시였다.) ① 제자해 제자해에서는 『태극도』 · 『역학계몽』 · 『황극경세서』 등 송학 계통의 서적에서 이론을 섭취하여, 제자해의 첫머리부터 태극 · 음양 · 오행과 결부된 언어관을 제시하고, 훈민정음의 창제도 성음(聲音)에 따라 음양의 이치를 다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훈민정음의 제자원리가 상형에 있음을 말하고, 자음자의 제자에 있어서는 먼저 조음위치별로 기본이 되는 초성자를 정하고, 이 기본자들은 각각 그 조음 방식 또는 조음위치를 상형하여 제자된 것임을 말하였다. ②초성해 그리고 각 조음위치에서 발음되는 자음은, 그 발음이 세게 나는(‘厲’로 표현) 정도에 따라 이 기본문자에 획을 더하여 제자한다고 하였다(보기, ㄴ→ㄷ→ㅌ). 계속하여 다시 오행설을 가지고 각 자음을 오행 · 계절 · 음계 · 방위 등과 결부시켜 설명하고, 오행과 결부된 오성의 음상(音相)을 발음기관 및 오행의 특질과 연관시켜서 설명한 다음, 중국의 전통적인 어두자음(語頭子音) 분류법인 36자모표의 분류방식에 따라 훈민정음의 자음자를 분류 설명하였다.〈표 2〉 “가벼운 소리를 가지고 입술을 잠깐 합하고 목구멍소리(숨소리)가 많다.”고 하였다. ③중성해 중성글자는 초성글자와는 달리 천(天) · 지(地) · 인(人) 삼재를 상형하여 기본모음자 ‘ㆍ · ㅡ · ㅣ’를 제자하였음을 말하고, 이들 기본모음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표 4〉 그리고 이들의 관계를 다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ㅗ ㅜ 입을 오므림[구축(口蹙)] ↑ ↑ · ㅡ ↓ ↓ ㅏ ㅓ 입을 벌림[구장(口張)] 중성 11자 가운데 나머지[‘ㅛ · ㅑ · ㅠ · ㅕ’,이들을 재출자라고 하였음]는 ㅣ에서 시작되는 음으로 보고(起於ㅣ), 이어 또다시 역(易)의 수(數)나 위(位)를 가지고 중성글자들을 설명하기도 하고, 초성 · 중성 · 종성 세 글자들의 결합을 설명하기도 하였다.〈표 6〉 ④ 종성해 종성해에서는 종성이란 자음으로 끝나는 음절말음임을 역시 한자음을 가지고 다시 설명하고, 중세국어의 성조를 우선 종성만 가지고 설명하였다. 즉, 불청불탁자(不淸不濁字)는 평성 · 상성 · 거성의 종성이 되고, 전청자 · 차청자 · 전탁자는 입성의 종성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어의 종성은 ‘ㄱ · ㆁ · ㄷ · ㄴ · ㅂ · ㅁ · ㅅ · ㄹ’ 8자면 족(足)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자음의 입성 가운데, ‘ㄷ’종성음을 일반에서 ‘ㄹ’로 발음하고 있는데, 이를 ‘ㄷ’음으로 발음해야 된다고 하였다. ⑤ 합자해 합자해에서는, 초성 · 중성 · 종성 글자를 자소처럼 인식하여, 이들 3요소를 좌로부터 우로, 위로부터 아래로 써서 음절 단위로 쓸 것을 규정하였고, 합용병서 · 각자병서의 서법을 초성 · 중성 · 종성에 걸쳐 설명하였다. 이어 당시의 국어 성조를 다시 설명하여, 입성은 중세국어의 성조 단위가 아님을 말하였다. 즉, 긷:깁 몯 등이 종성만을 가지고 볼 때는 입성이지만, 성조로서는 평성 · 상성 · 거성이 된다고 하였다. ⑥ 용자례 용자례에서는 중세국어에서 90단어의 예를 들어, 그 표기법을 보였다. 초성 ‘ㄱ · ㅋ · ㆁ, ㄷ · ㅌ · ㄴ, ㅂ · ㅍ · ㅁ, ㅸ · ㅈ · ㅊ, ㅅ · ㅎ · ㅇ, ㄹ · ㅿ’의 표기례를 각각 두 단어씩 들었는데, 각자병서와 ㆆ의 표기례가 제외되고, ㅸ의 표기례를 보인 것이 특징이다. 중성은 ‘ㆍ · ㅡ · ㅣ · ㅗ · ㅏ · ㅜ · ㅓ · ㅛ · ㅑ · ㅠ · ㅕ’의 표기례를 각각 4단어씩 보였으며, 종성은 ‘ㄱ · ㆁ · ㄷ · ㄴ · ㅂ · ㅁ · ㅅ · ㄹ’의 8종성의 표기례만을 각각 4단어씩 보였다. (3)정인지 서문 정인지의 서문에서는, 제 말의 소리는 있어도 글자가 없어서 한자를 빌려 씀이 아무래도 어거지라는 것, 한자로 쓰인 책의 뜻을 깨치기 어렵다는 것, 한문으로는 의사소통이 힘들다는 것, 이두(吏讀) 사용이 불편하다는 것 등을 훈민정음 창제의 이유로 들었다. 이어 세종이 1443년(세종 25) 겨울에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는 것, 훈민정음은 간단하여 깨치기 쉬운 글자이면서 여러 가지로 응용 가능하여, 대개의 음(음악, 한자음, 자연음)을 표기할 수 있고, 이 글자의 창제로 한문책의 해석도 쉬워졌으며 의사소통도 가 능해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례본의 저술자가 정인지 · 최항 · 박팽년 · 신숙주 · 성삼문 · 강희안 · 이개 · 이선로 등 8명이라고 하였다. 이 서문을 쓴 날이 1446년 9월 상한이므로, 이 책의 완성 일을 알려준 데도 큰 가치가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해설서 『훈민정음』은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등에도 일부 그 내용이 실려 있어 전해져 왔지만, 한글 창제 원리가 밝혀져 있는 본책은 한동안 오리무중이었다. 그런데 예의와 해례가 모두 실려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실체가 발견된 것은 1940년 무렵이었다. 땅속 깊숙이 묻혀 있다가 발견된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소장하고 있었으나 소장 사실을 몰랐거나 인지했다 하더라고 공적으로 논의가 되지 않아 그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해례본 원본의 존재를 처음 안 이는 이용준(李容準, 1916년-2000년 전후 북한에서 사망 추정)이었고, 이를 제대로 보존하고 세상에 알린 것은 문화재 수집의 대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 두 분의 공로가 무척 크다. 결국, 간송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실체가 간송의 품으로 왔으며, 비밀리에 지켜오다 해방 후 조선어학회 간부들을 불러 한글 연구를 위해 영인본을 만들며 세상에 공개되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1446년에 간행 반포된 것도 기적이었지만, 1940년에서야 발견된 것도 기적이었다. 이때는 일제가 ‘일본식 성명 강요(창씨개명)’ 정책으로 한민족 말살 정책을 펼치던 우리 겨레의 암흑기였기 때문이다. 무척 경사스러운 사건이었지만 발견자(이용준)나 소장자(전형필)나 은밀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실체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창제의 원리를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대 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화장실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의견이 분분했다. 이런 것들은 일제강점기의 일본 어용학자들의 주장이었다. 해례본의 공개로 우리의 언어가 인체 발음기관을 상형화한 사실을 정확히 알려주었다. 백성을 위해서 기획적으로 언어를 창제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일이며, 특히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 최초의 언어로 기록된다. 언어가 그 만든 목적과 유래, 사용법, 그리고 창제의 세계관을 동시에 밝히면서 제작된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진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 1962년 12월 해례본은 국보로 지정된다. 그리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외에도 훈민정음해례본은 또 하나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주본이다. 2008년 고서적 판매상인 배익기 씨가 '집을 수리하다 발견했다.'며 세상에 공개한 것이다. 하지만 배 씨는 상주본의 가치가 1조 원 이상이라면서 국가에 반환하는 대신 1,000억 원을 보상받아야 한다는 주장을계속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2019년, 대법원은 훈민정음 상주본의 법적 소유권은 국가에 있다고 최종 판결했다. 국가유산청의 반환요구에도 응하지 않은 채, 2025년에도 '1000억' 짜리 줄다리기는 약 17년째 계속되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사실을 일린 신문기사(위)와 처음 공개한 전형필(아래), 현재 해례본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 6. 한글의 다른 이름 한글을 일컫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한글의 이름은 문자 창제 당시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외에 ‘정음(正音)’, ‘언문(諺文)’, ‘언서(諺書)’, ‘반절(反切)’, ‘암글’, '가갸글' 등이 있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 당시에는 ‘훈민정음’이라 불렀다. 이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바른’이라는 꾸밈말을 굳이 붙인 이유는, 한자를 빌려 쓰는 것과 같은 구차한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제대로 적을 수 있는 글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때의 소리는 글자와 통한다. ‘정음’은 ‘훈민정음’을 줄여 쓴 것으로 『훈민정음해례』의 끝에 있는 정인지의 글에 이미 나타나 있다. 또, ‘언문’은 원래 ‘언’이란 ‘우리말’ 또는 ‘정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훈민정음해례』에 보면, “문(文)과 언(諺)을 섞어 쓸 때는……” 또는 “첫소리(초성)의 ㆆ과 ㅇ은 서로 비슷하여 언에서는 가히 통용될 수 있다.”라고 하였고, “반혓소리 ㄹ은 마땅히 언에 쓸 것이지 문에는 쓸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언’은 우리글 · 우리말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실록』에는 언문청(諺文廳)이라는 말이 나오고 (28년 11월 조), 또 바로 ‘언문’이라는 말도 나타난다(25년 12월 초). 또, 그 뒤로는 ‘언서’라고도 하였으니, 이것은 한문을 ‘진서(眞書)’라 한 데 대립시킨 말로 훈민정음을 낮추어 부른 이름이다.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는 ‘반절’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중국 음운학의 반절법에서 초·중·종성을 따로 분리하는 방법을 쓰기 때문에, 정음이 초·중·종성을 분리하여 표기하는 점에서 이와 비슷하다고 보아 붙인 이름인 듯하다. ‘암글’이라는 이름도 쓰였다. 이는 부녀자들이나 쓰는 글이라는 뜻이다. 선비가 쓸 만한 글은 되지 못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글을 낮추어 부른 말이다. '가갸글'은 ‘가, 갸, 거, 겨, …’로 시작되는 반절본문의 첫 두 글자를 딴 것이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주시경(周時經) 때로부터 시작되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1908년 주시경을 중심으로 ‘국어연구학회’가 만들어졌으나,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바로 ‘배달말글몯음’으로 이름을 고친 후, 1913년 4월에는 다시 그 이름을 ‘한글모’로 고쳤다. 이때부터 ‘한글’이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했다.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27년 한글사에서 펴낸 『한글』(7인의 동인지)이라는 잡지에서 사용되었고, 그 이듬해인 1928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가갸날’(1926년 제정)을 ‘한글날’이라 고쳐 부르면서 일반화되었다. ‘한글’의 ‘한’은 ‘하나’ 또는 ‘큰’의 뜻으로, 우리글을 ‘언문’이라 낮추어 부른 데 대하여, 훌륭한 우리말을 적는 글자라는 뜻으로 권위를 세워 준 이름이다. 이는 세종이 ‘정음’이라 부른 정신과 통한다고 할 것이다. (7) 한글 낱글자의 이름 정음을 만들던 당시에 한글 낱글자들을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 부르는 ‘기역, 니은, 디귿 ……’ 등의 이름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6세기에 나온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이다. 훈몽자회는 조선 중종22년(1527)에 어문학자 최세진이 지은 어린이용 한자 교재로서 한자 3360자에 훈민정음으로 뜻과 음을 달았다. 훈몽자회의 범례에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한글 자모의 발음과 용법을 간략하게 해설했는데, 이 중 한글 자모의 발음을 설명한 부분이 바로 한글 자모 명칭의 기원이다. 최세진은 ‘ㆆ’을 없애고, 나머지 27자를 ① 첫소리에만 쓰이는 8글자, ② 첫소리 · 끝소리에 두루 쓰이는 8글자, ③ 가운뎃소리에만 쓰이는 11글자로 나누고, ②와 ③ 에 대해서는 지금과 같은 이름을 붙이고 ①에 대해서는 ‘ㅈ(지), ㅊ(치), ㅎ(히)……’와 같이 한 음절 이름을 붙였다. 첫소리로만 쓰이므로 첫소리로 쓰인 예만 보인 것이다. 1933년 조선어학회(한글학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내면서 모든 닿소리 글자는 받침으로 쓸 수 있음을 밝힘과 동시에 ①도 ②처럼 두 음절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28글자 가운데 지금 쓰이지 않는 ‘ㆆ, ㅿ, · (ᄋᆞ)’의 이름은 지어지지 않았고, ‘ㅇ’과 ‘ㆁ’의 구별이 없어짐에 따라 그 이름도 하나로 통일되었다. 이에 따라, 자음 14자는 ㄱ (기역), ㄴ (니은), ㄷ(디귿), ㄹ(리을), ㅁ(미음), ㅂ(비읍), ㅅ(시옷), ㅇ (이응), ㅈ(지읒), ㅊ(치읒). ㅋ(키읔), ㅌ(티읃), ㅍ(피읍), ㅎ(히읗)이 되었다. 그리고 모음 열 자는 ㅏ(아), ㅑ(야), ㅓ(어), ㅕ(여), ㅗ(오), ㅛ(요), ㅜ(우), ㅠ(유), ㅡ(으), ㅣ(이)가 되었다. 8. 호머 헐버트의 띄어쓰기 도입과 주시경(周時經) (1) 호머 헐버트 훈민정음은 창제이래 약 400여 년이 넘도록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는데, 한글에 띄어쓰기를 최초로 적용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였다. 그는 19세기 말에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에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고자 조선인 이응찬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운 후 한국어 학습 교재인 『Corean Primer』》(한국어 첫걸음)을 1877년에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한글 띄어쓰기를 적용하였는데, 이것은 영어의 띄어쓰기가 자연스레 반영된 것으로 보였으나, 한글 띄어쓰기는 대중화되지 못했다. 이후 배재학당 선생으로 활동하던 미국 출신 언어학자이자 선교사인 호머 베절릴 헐버드(Homer Bezaleel Hulbert : 1863~1949) 박사가 한글에 띄어쓰기 도입을 적극적으로 권장함에 따라 1896년 4월 7일에 창간한 「독립신문」의 한글판에 띄어쓰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아울러 이 시기에 마침표와 쉼표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독립신문은 한국 최초 민간 신문이자. 독립협회의 기관지이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신문 창간과 발행 작업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감리교출판국이었던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하였다. 필진으로는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주시경 등이 참여하였다. 헐버트 박사는 미국 동북부 버몬트주에서 태어나 다트머스대를 졸업했다. 1886년 조선 최초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외국어 교사로 오면서 조선 땅을 처음 밟았다. 조선에 도착한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한국어 공부부터 시작했다. 한글을 접한 그는 충격을 받았다. 서툴지만 나흘 만에 어느 정도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헐버트 박사는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1891년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천문·지리·사회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출간했다. 한글 사용을 호소하고 선비와 백성, 남녀의 평등을 주장하는 내용도 담았다. 이 책은 근대 교육사와 한글사에 크게 공헌했다. 육영공원이 축소 운영되자 헐버트 박사는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한글 사랑은 식지 않았다. 1892년 미국에서 한글과 관련한 최초의 논문(‘한글’)을 썼다. 1893년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들어온 그는 배재학당 교사로 일하며 국문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글 맞춤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던 한글에 띄어쓰기법과 가운뎃점 찍기를 도입했다. 한글은 창제 이후 한자와 마찬가지로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마침표를 찍지 않았는데 독립신문의 발행으로 인하여 띄어쓰기가 정착되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서재필에게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1896년 창간)을 창간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에서 ‘한국어가 영어보다 우수하다’는 논문을 발표(1903년)하기도 했다. 고종의 정치·문화·외교 자문에도 응했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박탈하자 1907년 ‘헤이그 밀사’로 네덜란드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일제의 방해로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해방 후 1949년 7월 29일 이승만 대통령 초청으로 한국 땅을 밟았지만, 8·15 광복절 행사를 10여 일 앞둔 8월 4일 별세했다. 헐버트 박사는 유언대로 서울 마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잠들어 있다. (2) 주시경의 국어연구 활동 한편, 주시경(1876년(고종 13 ~1914년)은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에게 발탁되어 독립신문사에 들어갔다. 이후 순한글 신문의 표기통일을 위해 국문동식회를 조직하여 한글 연구를 체계적으로 해나갔다. 1908년 8월31일에는 우리말과 글의 연구.통일.발전을 목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서울 봉원사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며 국어라는 말이 일본어를 뜻하게 되면서 1911년 9월3일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1913년 3월 23일에 ‘한글모’로 바꾸었으며, 이후 1921년 12월3일 ‘조선어연구회’로 다시 변경하였다 1910년에 발간된 『국어문법』(1910)은 국어문법 체계화의 결실이고, 마지막 저술인 『말의 소리』(1914)는 구조언어학적 이론을 구체적으로 창안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음운론에서의 음소 발견, 형태론에서의 어소 발견은 서구 언어학보다 수십 년 앞서는 업적이었다. 그는 또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새받침에 의한 표의주의적 철자법, 한자 폐지와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급진적인 어문혁명을 부르짖었다. 그의 이러한 학문과 주장은 학교와 강습소에서 길러낸 많은 후진이 형성된 후 주시경학파를 통해서 이어졌으며, 후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이들은 최현배 · 김두봉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학회에서 1933년 ‘국어맞춤법통일안’이 제정되었다. 주시경과 더불어 국어연구 활동은 활발하게 진행되어 1908년 최광옥의 『대한문전(大韓文典)》, 1909년 유길준의 『대한문전(大韓文典)』, 김희상의 『초등국어어전』, 1911년 김희상의 『조선어전(朝鮮語典)』, 1913년 남궁억의 『조선문법(朝鮮文法)』, 이규영(李奎榮)의 『말듬』, 1925년 이상춘의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등으로 이어지면서, 1937년 최현배의 『우리말본』으로 집대성되었다. ▲1896년 창간된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한글, 영문판 신문, 띄어쓰기를 도입하여 띄어쓰기가 대중화되어 정착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9. 한글날 제정 일제강점기 일제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쓰지 못하도록 ‘조선어 말살 정책’을 썼다. 당시의 우리 겨레에게는 우리말을 쓰는 것이 민족정신을 가다듬는 한 방편이었고, 우리글을 쓰는 것을 일종의 독립운동으로 여겼으며, ‘한글’이 곧 우리 민족정신의 지주(支柱)였다. 이에 따라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480년이 되던 1926년 조선어연구회에서는 음력 9월 끝날인 29일을 양력으로 고쳐 10월 28일을 훈민정음 반포 기념일로 정하고, 이날을 ‘가갸날’이라 하였다. 당시로써는 반포의 날을 정할 수 있는 기록은 『세종실록』 28년의 기록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나면서 좀 더 가까운 날짜를 알게 되었다. 정인지의 글에 훈민정음 반포가 9월 상순의 일로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조선어학회에서는 반포한 날을 음력 9월 10일로 잡고, 이날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928년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고, 한글의 창제와 그 우수성을 기리며, 그 고마움을 마음에 새기며, 한글과 국어의 발전을 다짐하고 있다. 1.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 온 겨레 /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 새 세상 밝혀 주는 해가 돋았네 / 한글은 우리의 자랑 문화의 터전 /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2. 볼수록 아름다운 스물 넉 자는 / 그 속에 모든 이치 갖추어 있고 / 누구나 쉬 배우며 쓰기 편하니 / 세계의 글자 중에 으뜸이도다 / 한글은 우리의 자랑 민주의 근본 /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3. 한 겨레 한 맘으로 한데 뭉치어 / 힘차게 일어나는 건설의 일꾼 / 바른 길 환한 길로 달려나가자 / 희망이 앞에 있다 한글 나라에 / 한글은 우리 자랑 생활의 무기 /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최현배(崔鉉培)가 작사하고, 박태현(朴泰鉉)이 작곡한 한글날 노래는 한글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공식 노래이다. 한글날이 국경일로 승격된 2006년 이후, 한글의 소중함과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한글날 행사에서 공식적으로 제창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이를 잘 지키지 않는다. 대부분 모르기 때문이다. 부르더라도 1절에 그치기 일쑤다. 세계 최고의 글자 ‘한글’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새로운 다짐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예전 같으면 이에 대한 교육이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시행되었다. 그리고 각급 학교에 입학하면 오리엔테이션 때에 교가를 비롯하여 개천절, 광복절, 한글날 등 각종 기념일에 부를 것을 대비하여 이들 노래를 미리 익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교육 당국의 지도나 학교 당국의 노력도 실종된 상태이다. 나라 사랑, 한글 사랑은 구호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1) 한글 보급운동 한일강제합방이후 일제는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일삼았다. 3·1운동 이후에는 유화적인 문화통치를 실시했으나. 허울뿐이었다. 그들은 은밀하게 탄압과 감시, 민족말살과 황국식민화 교육, 우민화 정책에 따른 단순 실업 교육, 일본어 학습 확대, 한국어 교육 축소를 단행했다. 이런 일제의 차별 교육정책으로 인해 1930년 무렵 문맹율은 약 70%정도에 달하였다. 같은 역사를 가지고 같은 언어를 사용해야 민족의 동질성과 일체감을 확보하고 단결할 수 있으며 민족정신을 고양시킬수 있는데, 당시 조선인의 문맹율은 너무 높았다. 심각성을 깨달은 민족 지도자들은 문맹퇴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한글보급운동에 나섰다. 언론사들도 이 운동에 동참했다. 1931년 동아일보가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하여 대학생으로 조직된 계몽대가 지방으로 내려가 한글을 가르쳤다. 조선일보는 1929년 여름부터 1934년까지 6년간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 아래 문맹퇴치운동을 했다. 조선어학회도 전국순회 조선어 강습회를 열었다. 문자 보급 운동은 민족의식 고취와 계몽운동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에 일제는 1934년에 이 운동을 강제로 금지시키고, 1930년대 말부터 민족말살통치를 실시하며 한국어 교육을 폐지하고 우리말 사용도 탄압하였다. (2) 조선어학회에 대한 탄압 한 나라의 말 속엔 그 나라의 정신, 역사, 문화 그 외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3‧1 운동 10년 후인 1929년 10월 31일, 사회운동가 ‧ 종교인 ‧ 교육자 ‧ 어문학자 ‧ 출판인 ‧ 자본가 등 108명이 민족정신을 지키기 위한 사업으로 ‘조선어사전’ 편찬 모임을 결성했다. 이후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로 이어진 모임은 13년에 걸쳐 철자법, 맞춤법, 표준어 등을 정비하면서 우리말을 사전 원고에 담았다. 일제는 한국인들을 압박하기 위해 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선포하고 일제는 1939년 4월부터 학교의 국어 과목을 전폐하고, 각 신문·잡지를 점차 폐간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량’을 공포하였다. 일제는 1942년 10월에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단체로 단정한 뒤 관련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윤재 · 최현배 · 이희승 · 정인승 · 김윤경 · 권승욱 · 장지영 · 한징 · 이중화 · 이석린 · 이극로 등 11사람이 1차로 일제히 서울에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로 압송되었다. 이후에도 수 차례에 걸쳐 모두 33명이 검거되어 심문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윤재 · 한징은 심한 고문과 추위와 굶주림에 못 이겨 옥중 사망하였고, 재판 또는 복역 도중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어학회가 해산되었으나 압수되었던 원고가 1945년 9월 서울역 창고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돼 이를 바탕으로 첫 우리말 사전인 <조선말 큰사전>은 1947년 10월 9일에 드디어 첫째 권이 출간됐다. <조선말 큰사전>에 얽힌 우리말과 우리글을 목숨처럼 지키려고 했던 선각자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 2019년 초에 개봉된 영화 '말모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던 33인(위), 말모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 주시경 등이 1910년 무렵에 조선 광문회에서 편찬하다 끝내지 못하였다.) 11. 한글의 우수성 한글은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 중에서 창제자와 창제년도가 명확히 밝혀진 몇 안 되는 문자이다. 한글은 그 창제 정신이 '자주(自主), 애민(愛民, 실용(實用)'에 있다는 점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창제 정신과 더불어 ᅟᅡᆫ글의 우수성에 대하여 언급되는 것이 있다. (1) 제자(制字) 원리가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다. (2) 적은 수의 글자로 많은 소리를 적을 수 있다. (3) 쉽고 빨리 배울 수 있다. (4) 컴퓨터, 휴대 전화 등에서 편리하게 쓸 수 있다. 특히, 한글은 24개 자음과 모음으로 8,800개 이상의 발음을 표기할 수 있어, 일본어나 한자보다 훨씬 많은 소리를 표현할 수 있어 한글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인정하고 있다. 또, 국제 언어학 학술대회에서는 한글을 국제음성부호로 채택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실제로 인도네시아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은 한글을 공식 표기 문자로 채택한 사례도 있다. 이처럼 세계의 언어학자들은 한글의 과학적 구조와 교육적 효율성을 높이 평가하며, 국제적으로도 그 우수성이 공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한글의 우수성은 세계의 언어학자들도 과학성, 독창성, 배우기 쉽다는 점을 들어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글은 세계 어떤 나라 일상문자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과학적인 표기체계다.” -에드윈 라이샤워 하버드대 교수 / ▸“한글이 인류가 이룩한 위대한 지적 성취의 하나로 손꼽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제프리 샘슨 서식스대 교수 / ▸“한글은 독창성과 기호 배합 효율성에서 특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다” -재러드 다이아몬드 ’충군쇠‘ 저자 이 외에도 미국의 레어드 다이어먼드는 “한글은 세계 언어 중 가장 과학적으로 짜인 언어”라며, 배우기 쉽고 익히기 쉬운 점에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언어학자들은 한글을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등 여러 기준에서 세계 문자 중 1위로 꼽았다. 또, 영국 역사 다큐멘터리 작가 존 맨은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며, “단순하고 효율적이며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이라고 극찬했다. 유네스코에서는 해마다 세계에서 문맹 퇴치에 공이 큰 사람들에게 '세종대왕 문맹 퇴치상'을 주고 있다. 이 상의 명칭이 세종대왕에서 비롯된 것은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이 가장 배우기가 쉬워 문맹자를 없애기에 좋은 글자임을 세계가 인정했기 때문이다. 12. 앞으로의 과제 - 한글에 대한 우리의 의식 개선 필요 한글은 문화를 꽃피우는 토양이요, 배움의 평등을 이뤄 민주의 근간이 되었다. 한글만큼 우리의 맛과 향과 결을 살려 그대로 글로 옮겨놓을 수 있는 것은 이 지구상에 없다. 쉽게 배워 불편 없이 사용하는데 전혀 손색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의 의식 속에는 한글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 들 때가 많다. 우리 주변에서 한글은 오염되고, 구겨지고, 천대받고 있다. 대중을 선도해야 할 대중매체인 TV 오락 프로그램에서의 자막 처리는 가관이다. 맞춤법에 어긋나는 어휘 사용, 치졸한 언어유희 등 눈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의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말들이 더럽혀지고, 망가지고 있다. 시청자의 시선 끌기라고 하지만, 시청자를 의식하는 것이 한글 파괴보다 앞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대중매체는 존재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외래어와 외국어가 들어와 언어 생태계를 교란하고 있다. 기업체 이름과 상점 간판이 앞다퉈 영어로 바뀌고, 대중음악 노랫말에도 글로벌이라는 이름으로 영어가 점점이 박혀 있다. 굳이 외래어를 쓸 상황도 아닌데 무심결에 영어를 나열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제 물밀듯이 들어와 사용되는 외래어를 우리말로 대체할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네티즌 ⟶ 누리꾼 / 콘텐츠 ⟶ 꾸림정보 / 언박싱 ⟶ 개봉(기) / 플러팅 ⟶ 호감표시 / 팝업스토어 ⟶ 반짝매장 / 웰빙 ⟶ 참살이 / 치팅데이 ⟶ 먹요일 / 혈당 스파이크 ⟶ 혈당 급상승 / 오마카세 ⟶ 주방 특선 / 챌린지 ⟶ 도전잇기 / 피드 ⟶ 게시물 흐름" 등 말이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모두 12개로 제한된 휴대폰의 자판으로 가장 빠르고 쉽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문자가 한글이다. 그런 데도 우리는 주소창 입력에서부터 아무 거리낌 없이 영어를 쓴다. 미국이 인터넷 종주국인 것만큼은 인정하지만 영어가 인터넷을 대변할 만한 언어라고 생각한다면 왠지 서글픔이 앞선다. 한글을 IT환경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기반을 자랑하는 우리나라로서는 세계사에 빛나는 한글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인터넷의 한글화는 정보격차 해소에도 큰 공헌을 한다. 한글 e메일은 사용의 편의성으로 계층 간, 지역 간 정보격차를 해소하고 인터넷 사용자의 저변을 확대할 수 있으며, 또 국민과 정부의 쉽고 빠른 커뮤니케이션으로 전자정부 구현의 길 안내 역할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더구나 한글 자모가 입력 속도, 이해 능력(정확도) 등 IT 환경에서 최적화된 글자라고 자타가 공헌하고 있지 않은가? 한글 사랑은 나라 사랑이며, 이것은 우리의 몫이다 |
| 박재성 칼럼(58) 국보 ‘훈민정음해례본’에 숨겨진 이야기 두 번째 이금로 대표기자 &&&&&&&&&&&&&&&&&&&&&& ♧ " 훈민정음 해례본 전래 " 선대의 인류가 후대에 남긴 물건은 경우에 따라 한 국가가 뒤흔들리기도 할만큼 그 영향력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세계 유산을 지정하는 전문 기구가 존재하는 것이고 각 나라마다 문화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문화재청이라는 게 있는 것이죠. 그런데 70년 전 어느 한국인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유물의 정체가 공개되자, 중국이 발칵 뒤집혔다고 하는데요, 도대체 어떤 것이었길래 중국은 난리가 난 것일가요? 자세한 내용 내용을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은 현대에 들어 한국 문화의 중국 예속화를 시도하면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한복·한식 등 한국 문화를 뭐든 자기들 것이라고 우기고 있고, 그 추악함은 하늘을 찔러 한국에서 반중 감정이 반일 감정을 넘어섰을 정도이죠, 특히 중국은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것에도 손을 댔는데요, 바로 한글입니다. 한글은 조선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었던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으로, 인류가 사용하는 전세계 7000여 개의 문자중에서 유일하게 창제년도와 창제자가 명백히 밝혀진 위대한 유산이죠. 우리 민족의 언어인 한국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자긍심, 그 자체로 성역과도 같은 부분이지만, 추악한 중국은 전 세계가 칭송하는 위대한 한글을 가만히 둘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은 중국어의 발음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훈민정음은 옛 한자를 베겨서 만들어졌다 등의 소리를 하며 빼앗으려 했죠. 하지만 위대한 세종대왕은 후대 중국이 몹쓸 행보를 벌일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한글이 빼앗기지 않도록 미리 경계를 쳐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글의 창제과정이 들어가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이었죠.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글의 창제에 대한 여러 가지 구구한 추측이 난무했지만, 해례본이 발견됨으로써 한글이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가를 알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해례본이 발견된 시기는 1940년으로 당시 일본은 한국의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즉 한글의 창제 원리가 들어가 있는 해례본 역시 그 존재가 들키면 일본에 빼앗길 것이 분명했죠. 하지만 목숨을 걸고 해례본을 지킨 사람이 있었는데요. 그가 바로 문화지킴이라고 알려져 있는 "간송 전형필"입니다. "전형필"은 문화지킴이이라는 칭호 그대로 24살 때, 오세창은 당시 "전형필"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조선은 꼭 독립되네, 동서고금에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고, 그것이 바로‘문화의 힘’이지,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문화 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 가려고 하는 것일세” 이 말에 감명을 받은 "전형필"은 마음을 굳게 먹고, 당시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도자기·불상·석조물·서적 등을 닥치는 대로 수집해서 자기 땅에 남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렇다면 "전형필"은 어떻게 훈민정음 해례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일까요? 사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한 사람은 국문학 김태준의 제자였던‘이용준’으로 자신의 처가인 광산 김씨 종택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을 제일 먼저 발견했습니다. 이용준은 이 사실을 즉시 김태준에게 이야기 했고, 이용준과 함께 본가가 있는 안동으로 내려가 해례본을 직접 확인한 김태준은 경악을 금치 못했죠. 그들은 이 위대한 유산을 잘 보관할 수 있을만한 사람을 물색했고, 김태준은 당시 문화재 수집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던 "전형필"을 떠올렸습니다. "전형필"은 김태준에게서 해례본 이야기를 듣자마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즉시 그 자리에서 은행으로 달려가 1만1천 원을 찾아와서, 1천원은 김태준과 이용준에게 사례금으로 주고 1만 원은 해례본 값으로 치렀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의 물가로 따지면 기와집 열 채 값에 해당되는 금액이었고,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무려 30억 원에 해당되는 금액이었죠. 당시 "전형필"이 해례본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봤는지 알 수 있는 일화입니다. "전형필"은 이것을 사들이고 나서 광복이 될 때까지 이 해례본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습니다. 한국 문화를 철저히 말살시키려고 한 일제강점기 말기에, 한글 창제 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이 책이 드러났다면 좋지 못한 꼴을 당할 것은 당연지사이기 때문이죠. 이후 "전형필"은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피난갈 때 이 책을 먼저 챙겼고, 베개 밑에 두고 잠을 잘 정도로 애지중지하며 보존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해례본이 이어져 내려온 것은 그런 전형필의 노력의 덕이며, 1956년에는 이 소장본을 바탕으로 사진을 촬영하여 만든 영인본이 제작되었습니다. "전형필"은 영인본 제작을 위해 이 소장본을 흔쾌히 내놓았고, 그뿐만아니라 책을 한 장 한 장 해체하는 것까지 직접 했다고 하죠. 이후 해례본은 간송 미술관에 보관됐고, 그 사실이 알려지자 중국에서는 정부 인사를 파견까지 했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정세를 살폈다고 하는데요. 현재도 중국은 한글을 빼앗으려고 난리를 치고 있지만 “훈민정음은 한자의 발음을 쉽게 표기 함으로써 자음을 정립하여 중국어를 통일하는 것이 목적이다”등의 헛소리를 해대며 발악을 해도, 해례본이 국보 70호로 지정되고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이상, 국제사회는 한국과 함께 중국의 추악함을 규탄할 뿐일 것입니다. 민족의 혼과 얼을 지켜내기 위해 절대 더 이상 한국의 문화재를 뺏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전쟁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켰던 "간송 전형필" 선생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 中에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