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2
조몬인※들이 남긴 수천 개의 유적지에서는 수렵․채집과 낚시를 통해 균형 잡힌 식생활을 지속했음을 입증할 유물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 그들은 씁쓸한 맛을 제거한 밤․도토리․호두와 칠엽수 열매를 주식으로 삼았고, 가로 세로 2m의 땅굴을 깊이 파고 가을이면 많은 견과류를 저장했다가 겨울을 났다. 지금까지 조몬시대의 쓰레기 더미에서 확인된 식용 식물은 64종이다. 현대 일본인들이 세계에서 해산물을 가장 즐겨 먹는 습관도 조몬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이다. 돌고래를 얕은 곳으로 유인하여 곤봉으로 때려잡는 잔인한 수법도 조몬인들로부터 물려받은 오랜 악습이다. 물개와 연어도 주요 식품이었다. 조몬인들의 두개골에서 자주 발견되는 ‘외이도 외골증’은 잠수병의 일종으로, 그들이 바닷물 속으로 깊이 들어가 조개류와 해조류를 채취했다는 방증이다. 짐승 가운데서는 멧돼지․사슴․산양․곰 등을 잡아먹은 흔적이 발견된다. 짐승을 잡을 때는 활․함정․사냥개 등을 활용했다.
※ 조몬인 ; 신석기시대인 BC 14000~BC 1300년경까지 일본에 살던 인종
이들이 일본에 살던 시기를 일본史에서는 조몬시대라고 분류한다.
길이 1m가 넘는 거대하고 무거운 토기, 무거운 석기, 반지하 주거지, 거대한 주거단지, 주거지 주변의 묘지 등은 조몬인들이 정착생활을 시작했다는 증거들이다. 주거지는 가까운 곳에 삼림이나 큰 강이나 바다가 있는 곳에 터를 잡았다. 견과류가 풍부한 숲과 연어가 많이 회귀하는 강, 그리고 고기잡이와 채취에 편리한 얕은 바닷가에는 특히 인구밀도가 높았다. 그러면서도 집약적인 형태의 농업을 하지 않았고 가축도 기르지 않았으며, 청동기나 철기를 개발하지도 않았다. 옷감을 짜지도 않았고
무덤을 화려하게 장식하지도 않았다. 문자 개발이나 도입도 시도하지 않았다.
BC 400년에 이를 때까지 중국이나 한국에서처럼 강력한 정치조직도 없었다. 조몬인들은 풍부한 자연식품과 온화한 기후에 편승하여 최대한 편하게 살아갔다.
후기로 가면서 조몬인들이 한국․러시아․오키나와와 교역한 증거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토기․흑요석․낚시 바늘을 수출하고 대륙의 곡물을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만년 동안 한정된 교역 외에는 고립되어 있어서 지구상에서 토기를 가장 먼저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문명의 발전을 이룩하지는 못했다. 조몬시대가 막을 내리기 직전인 BC 400년경의 중국은 이미 철기문화가 진행되어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왕조로 이뤄져 있었다.
농경과 목축의 발전으로 부유층이 형성되어 빈부격차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고 마을은 탄탄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중국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인 한국의 왕조도 철기를 사용하고 벼농사를 짓고 있었다. 중국과 한국의 발전된 문물이 조몬인들에게 전파되지 못한 이유는 일본이 대륙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BC 400년은 일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한국에서 철기문화와 벼농사가 유입되면서 인구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세계 인류문화학자들은 이때 한반도 남부에서 발전된 문명을 이끌던 사람들(가야인)도 함께 건너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일본의 관변 학자들은 거꾸로 왜인들이 건너가 한반도 남부에 거대한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는 억지주장을 펼치고 있다. 일본인들의 비뚤어진 자존심이 학문적 진실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건너온 신문화에 따른 새로운 생활양식의 증거들은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의 규슈 북쪽 해안에서 처음 발굴되었다. 토기를 가지고도 풍부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자연환경 덕분에 지난 1만년 동안 농사를 시작하지 않았던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농경문화를 시작한 증거도 속속 발굴된다.
보․제방․수로․논 등 벼농사를 위한 시설들은 한국 남부의 그것들과 똑같다. 일본에서 자생하지 않는 27종의 새로운 곡류와 가축화된 돼지도 함께 건너왔다. 토기도 조몬토기와 달리 한반도에서 발굴된 것과 동일하다. 구리 제품, 직조기술, 유리구슬, 쌀을 저장하기 위해 땅에 묻는 항아리, 시신을 독에 넣어 매장하는 장례방법, 살림도구와 구들장 등은 모두가 한국문화의 대표적인 양식이다. 일본인들은 이 새로운 문물을 ‘야요이문화’, 그 문화가 지배하던 시대를 ‘야요이시대(BC 400~AD 300년)’라고 명명했다. 조몬시대가 야요이시대보다 14배나 더 길었지만 야요이문화 유적과 유물이 훨씬 더 많이 발굴되고 있다.
야요이문화는 300년 만에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조몬문화는 한동안 공존하다가 우수한 야요이문화에 밀려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무슨 까닭에선지 일본인들은 중국과 한국에서 널리 쓰이던 금속 농기구 대신 뗀석기를 계속 사용했다. 집도 한국식 온돌 외에 불편한 조몬식 집이 한동안 함께 사용되었다. 일본에서 가장 추운 혼슈 지방으로 올라갔던 농경민들은 금세 남쪽으로 돌아갔다. 농사에 부적합한 기후 탓으로 수렵․채집에 능숙한 조몬인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졌기 때문이었다. 일본 최북단의 홋카이도와 그곳에 살고 있던 아이누인은 19세기에 일본 영토로 편입될 때까지 일본과 일본인으로 간주되지도 않았다.
철기는 제련 및 제작기술이 개발되기 전까지 한국에서 대량으로 수입해다 썼다. 인구 폭발로 주거지와 농경지를 두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곳곳에서 전쟁이 빈번해지자 철기로 제작된 무기가 대량 수입되기 시작했다. 무더기로 발굴되는 쇠 화살촉, 방어를 위한 해자, 예리한 철제 무기에 뚫린 두개골 등이 증거물로 출토된다. 이후의 무덤에서 발굴된 증거에 의하면 이때부터 계층 간의 신분 차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868년 도쿄로 이전하기 전까지 오랜 세월 통일일본의 수도였던 교토 주변에서 특히 야요이문화의 고고학적 유적이 많이 발굴된다. 아마도 그 지역이 가장 비옥한 농경지대였기 때문이리라. 길이 450m, 높이 30m에 달하는 고분들은 강력한 군주가 등장했음을 의미한다. 일본은 이 거대한 고분의 발굴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혹 ‘임나일본부 설’의 허구가 입증될까 두려워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재레드 박사는 이러한 주장 대신 ‘불교․문자․말(horse)․도자기․야금술 등을 전파하는 등 한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고 에둘러 표현했다.

아이누인들의 외모
AD 712년, 일본은 마침내 일부 신화가 포함된 첫 번째 연대기를 완성했다. 한국에서 건너온 문명 덕분에 1만년 동안의 조몬시대보다 700년 동안의 야요이시대에 훨씬 더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 일본문화가 비로소 일본어로 기록되기 시작하여 정체성을 확보한 것이다. 연대기를 따라 내려오면 현 일왕 아키히토는 712년 당시 황제의 82대손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야요이시대의 평가에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행여 자신들이 한국인의 후예고 일본문화가 한국에서 건너왔다는 결론에 도달할까 우려해서다. 712년의 연대기도 야요이시대 이전 12000년 동안 일본인들이 독자성을 지켜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초대 황제로부터 43명의 신화적 존재를 황통(皇統)에 넣었다. 그러나 야요이시대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수많은 식량 생산자들의 유전자는 지금도 일본인들의 세포 속에 전해지고 있을 터이다.
지난 12000년 동안 농경은 중국, 한국 남부지역, ‘초승달 지대’, 나일강, 티그리스강 등 지구상의 극히 한정된 곳에서만 진행되었다. 나머지 지역에서는 수렵․채집 생활이 지속되었다. 수렵․채집민들이 더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농경민들은 경작에 적당한 농지를 만나면 우수한 무기와 기술로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수렵․채집민들을 축출했다. 16세기 이후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아메리카․호주․남아프리카에서 수없이 저지른 일이다. 그 이전에는 유럽․동남아시아․인도네시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BC 400년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들도 조몬인들을 몰아내고 비옥한 경작지를 차지하여 인구를 증식시켰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현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건너온 야요이인이라는 사실은 인류문화학적 관점에서 볼 때 너무나 자명하다.
최근 분자유전학자들이 유골에서 DNA를 추출하여 고대와 현대의 일본인들을 비교한 적이 있다. 조몬인은 키가 작고 다리가 짧으며 팔꿈치 아랫부분이 길다. 얼굴은 둥글넓적하고 눈 사이가 멀며 코와 콧마루가 뚜렷하다. 야요이인은 조몬인보다 3~5cm 크고 얼굴은 길고 좁으며 눈두덩과 코는 평평하다. 조몬인의 두개골은 전체적으로 현대 아이누인과 유사하다. 이에 반해 야요이인은 현대 일본인, 나아가 현대 한국인과 비슷하다. 결론적으로 BC 400년 한국인들의 대량 이주는 일본 문화에 뿐만 아니라 혈통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문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언어는 한국어와 일본어에 유사점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매우 다르다. 현대 한국어는 신라로부터, 일본어는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영향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국 고대국가들의 언어는 각각 그 뿌리가 다르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할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 일본의 지식인들도 한국과 일본의 이러한 역사적 연관성을 잘 알고 있다. 지난 5월,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학자 187명이 일본정부의 무리한 독도 영유권 주장과 과거사 왜곡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도 이러한 역사적 공감의 바탕 위에서 벌인 일일 터이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어제 내린비로 해갈은 면한것 같지만 충분치는 않다고 합니다. 다음 비를 기다리며 추수려 일손 바쁜 농촌이 되었으면 합니다. 장수의 고구마도 생기를 찾은듯 합니다. 다시 시작하는 한주, 활기있게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