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서 가장 영웅적인 전투중의 하나로 꼽고 있는
영연방 29여단 글로스터 대대의 설마리 계곡 전투입니다!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 인터넷에서
검색하다 찾은거 옮겨왔습니다!
● 위 치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마지리
● 설치배경
여기 설마리 계곡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되면 항상 혈전을 치루었던 곳으로 동측에는 감악산, 서측에는 파평산등 높은산으로 형성되어 깊은계곡을 따라 마지리에서 신산리를 통하여 의정부를 경유 서울로 진출하는 주요목이다. 예로부터 감악산은 의적 임걱정의 산채가 있던 곳이기도 하고 신라시대에 축성된 성곽이 보존된곳이기도 하다. 이 역사의 현장에 선 영연방 29여단 그로스터 대대는 임진강변으로부터 이곳설마리 입구의 235고지 까지 중공군 63군을 맞아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혈전에 혈전을 거듭하고 대대장이하 전원이 전사하거나 포로가되어 그야말로 옥쇄를 한 한국과 세계전사에 빛나는 신성한곳이다. 그로스터 대대는 이곳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3일간 지연시켜 유엔군이 안전하게 철수하여 서울을 사수하도록 하였음은 물론 이 결과로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 전과를 올렸다. 여기 그로스터대대원의 붉은 선혈과 영혼이 깃든 돌들을 모아 이곳에 전적비를 세우고 후세에 그 업적과 전공을 기리 전하고져 설치 되었다.
● 전적비에 새겨진 글들
(좌 하단)글로스터 언덕위에 세운 이 기념비는 다음 양부대의 영웅적인 공적을 찬양하며 기리기 위함이다.
그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 영포병 170 경박격포대 C소대
이 양부대는 자유를 수호키 위하여 4일간이나 거대한 수의 적병에게 포위된 중에서 용감한 투지력을 발휘하였다.
(중앙하단) 이 기념비는 한국정부의 자혜스러운 도움으로 건립되었다 그로스터샤 연대 제 1대대는 이 기념비가 또한 그들에 못지 않게 자유를 사랑하고 그들과 또다른 영국연방군에 종군중 산화한 용맹스런 한국인을 추모하리라 간절히 비는 바이다,
● 영연방 29여단에 대하여
영국군 톰 브로디에 준장이 지휘하는 영연방 29여단은 배속받은 벨기에군 1개대대(대대장 중령 크레헤이)와 올스터대대(대대장 중령 카아슨 ), 그로스터대대(대대장 중령 칸), 푸질리어연대 1개대대 (대대장 중령 킹르레이 호스티)로 구성되어있고 45야전포병연대 25파운드 포대와 170밀리 박격포대대가 화력을 지원하며 센츄리언 전차 부대가 후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영국은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하여 2세기 반동안 대영제국을 이어온 세계의 전장에서 명예스러운 승리를 거두었던 주 연대에서 이들 3개의 보병대대를 선발하였다. 더욱이 2차세계대전이후 전역한 장병들을 재소집하고 새로인 징집된 신병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부대를 재편성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게 된것이다.
● 영국군의 글로스터(Gloster)고지 전투이야기
일명 설마리 전투라고 하는 영국군의 그로스터 고지 전투는 1951년 4월 이름하여 춘계(春季) 1차공세 때 중공군을 맞이하여 혈전을 거듭하고 622명의 대대원중 39명만이 구사일생으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은 처절하고도 숭고한 영국군의 영웅적인 전투였다. 중공군의 2월공세는 지평리전투에서 유엔군의 완벽한승리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중공군은 지평리 전투에서 입은 손실을 만회하고져 이름하여 춘계공세를 계획 5차례의 전투를 벌리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전투가 사창리 전투와 함께 설마리 영군군 전투인것이다.
1951년의 잔인한 4월은 한국전쟁의 새로운 시발점으로서 그동안 한국전쟁을 지휘해 왔던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경질되고 리지웨이 미 8군사령관이 그 후임으로 미8군사령관을 밴플리트 장군이 부임하게 되어 지휘체계에 일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전쟁속에서 야전지휘관을 해오던 인물들이 차례로 영전하므로서 커다란 전술에 변화는 없었다. 따라서 그동안 리지웨이 장군이 진행하고 있던 단계별 작전을 계속 진행하는 것이 었다.
중공군은 신정공세와 2월 공세를 통하여 남한 전역을 석권하고자 기도 하였으나 이를 실패하자 2개월여에 걸쳐 전투력을 복원하고 전력을 정비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중국본토로부터 6개군을 보충받아 총 70만이라는 대병력을 한반도에 전개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5차에 걸친 춘계공세를 감해하게 된 것이다. 이 춘계공세의 목적은 수도서울을 재점령하여 공산측의 군사적 우위를 과시하고 유엔군을 압박하므로서 유엔군이 스스로 한반도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하거나 향후 논의 되고 있는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위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1차공세 라고 하는 4월 공세는 문산 - 화천에 이르는 약 110km의 전선에 중공군 12개군 36개 사단과 북괴군 1개 군단을 투입하여 서울을 포위공격 하는 것이었다.
영연방군 29여단은 글로스터(Gloster)대대 가 서측의 마지리 일대, 후시리어(Fusilier)대대가 동측의 어유리 일대에 배치하고 여단에 배속된 벨기에 대대를 경계부대로서 임진강의 북쪽 금굴산에 배치하였으며 얼스터(Ulster)대대를 예비로 구용리에 집결시켜놓고 있엇다. 여단정면에서 148고지 (일명 캐슬고지)일대에 배치된 그로스터 대대는 임진강이라는 천연장애물이 있기는 하지만 계절적으로 갈수기로서 곳곳이 도섭이 가능하여 실질적인 잇점은 크지 않았고 도리어 갈대밭으로 형성된 평지나 다름없어서 전투가 벌어지면 어떠한 상황이던 그로스터대대는 심대한 손실이 불가피한 지형적인 불리점을 앉고 배치되었다.
4월 21일 22시경 야간 경계병 3명이 중공군 정찰대가 임진강을 도하하는 것을 발견 조준사격으로 4명을 사살하고 대부분 부상당한채 도주하였다. 그러나 이날밤은 조용히 지나갔다. 다음날 유엔군의 공중정찰결과 임진강 북방에 중공군의 것으로 보이는 대량의 차량종대가 발견되어 영연방 29여단은 추가적인 탄약과 보급품을 지급하고 전투태세에 들어 갔다. 이어서 땅거미가 지기시작하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중공군의 공세가 경계부대인 벨기에 대대에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뒤이어서 서측의 글로스터 대대의 가여울 일대도섭장에서도 중공군의 임진강 도하가 시작되었고 곧바로 전 전선에서 혼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공군의 전술은 변함없이 피리불고 장구치고 괭과리두들기면서 인해전술로 파상적인 공격을 하는 것이 었다.
그로스터 대대는 혼전에 혼전을 거듭하며 낙하산 조명탄의 지원을 받아가며 중공군을 낫으로 풀을 베듯 쓰러트렸다. 대대의 A중대는 6시간동안 보유한 탄약이 모두 소모될 때 까지 중공군을 쓰러트렸다. 이전투에서 예비소대 소대장 커티스 중위는 수류탄에 부상을 당하고서도 캐슬고지에대한 역습을 지휘하다 수류탄을 중공군 벙커의 포구로 들어가 포가 파괴되고 중공군이 살상되었으나 커티스중위도 기관총의 총탄에 맞고 전사하였다. 커티스 중위는 훗날 용기와자기 희생을 인정받아 빅토리아 십자훈장이 추서되었다. 좌일선 중대인 A중대가 진지를 사수하고 날이 밝았을 때 중대는 중대장 엥기어 소령을 포함한 지휘관 모두가 전사하고 장교 1명과 사병53명만이 남아 235고지 (뒤에 그로스터 고지로 명명됨)로 철수 하였다. 우측의 D중대도 12명의 중대원만 남아 역시 235고지로 철수 하였다. 4월 23일 그로스터 대대는 대대를 재편성하고 부상병 40명을 후송하는 한편 F중대가 추가로 도착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국면이 발생하였다. 중공군이 설마리에서 신산리를 잇는 퇴로를 차단하고 강력한 장애물을 설치한 것이다. 브레디에 여단장은 카느중령에게 다음날 대대의 증강이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현재까지 그로스터 대대는 중공군 63군 펭사령관의 계획을 24시간이나 지연시키고 187사단을 패잔병사단으로 몰락시켜 버렸다. 이날밤이 되자 이를 만회하려는 듯 중공군의 공격은 거세게 이루어졌다. 이날 B , C중대는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특히B중대는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로 대대의 전화력이 지원하는 가운데 겨우 20명이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으며 2명이 여단으로 탈출하고 나머지 중대원들은 전원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4월 24일 아침 그로스터 대대는 400명이 채 않되는 대대원을 이끌고 설마리 진입로의 애로를 봉쇄하면서 그로스터 고지에 집결하였다. 브레디에 여단장은 그로스터 대대를 구출하기 위하여 필리핀 대대에 전차로 증강시켜 설마리 계곡을 돌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필리핀 대대는 그로스터 대대후방 6km 까지 진출후 선두전차가 파괴되어 도로가 봉쇄되어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카느중령은 고지를 사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물도, 탄약도 기관총도 모두가 부족하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것은 무전기의 건전지가 부족한 것이었다. 무전기가 없으면 전장의 신이라 불리우는 포병화력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전통에 빛나는 그로스터 대대였다. 부대대장이며 후방부대장인 딕비 소령이 대대장 카느의 심정을 알아차리고 해질무렵 정찰용 경비행기로 중공군의 대공망을 피해 부족한 보급품과 탄약을 일부 보급하는 한편 다음날 공군의 지원이 있을 것임을 알려왔다. 이윽고 밤이 되자 중공군은 물밀 듯이 공격을 해들어왔다, 대대는 1차 공격을 격퇴하고 숨돌릴틈도 없이 2차 공격을 맞이 하였으나 밤새혼전을 치루면서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날이 밝아오자 중공군은 그들의 시체로 또하나의 산을 만들고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이날밤 부스하사는 신호용나팔을 가지고 밤새 기상신호로부터 시작 후퇴신호만 제외하고 불어대었다. 중공군들은 자신들의 피리소리를 제압하는 이 나팔을 빼앗기 위하여 7차례나 집요하게 공격을 가하였으나 부스 하사는 불사신처럼 나팔을 불어대면서 대대원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고 후퇴시 중공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수류탄으로 파괴하였다.
4월 25일 8시 30분 무전기의 건전지 수명이 끝났다. 영연방 29연대는 더 이상 전선을 지탱하지 못하고 덕정으로 철수명령을 내렸다. 한편 여단장 부로디 준장은 오전 10시 비통한 표정으로 그로스터 대대장 카느중령에게 [ 10시30분이후 포병의 지원사격이 끊어진다. 귀대대는 자력으로 포위망을 돌파하여 여단과 합류하라, 이것이 불가능하면 투항을 허락한다.] 라는 최후의 전문을 보냈다. 아 ! 전장의 아픔을 어찌 말로서 표현할까만은 세계전사에도 없는 상급지휘관이 예하 지휘관에게 적에게 투항할 것을 허락하는 역사의 아픈기록이 만들어졌다. 어찌 지휘관으로서 내 부하를 사랑하지 않으리요,,,,,,,,,,,,,,,,,,,,,,
그러나 그로스터 대대는 아직도 그로스터 고지를 사수하고 연막을 이용하여 F-80 비행편대를 유도하여 중공군에게 네이팜탄을 퍼붓고 있었다. 중공군의 전차와 차량이 나뒹굴고 집결중인 병력이 무수히 쓰러져 갔다. 드디어 4월 26일 06시 5분 카느중령은 탈출명령을 받았다. 카느중령은 대대가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음을 잘알고 있기에 생존자들을 유엔군 전선까지 복귀시키고져 계획하였다,
군의관 학키이와 군목, 그리고 위생병들은 중공군이 마지막으로 기어오를 때 까지 부상병을 돌보는일을 게을지 하지 않았다. 나머지 대대원은 소집단으로 편성하여 산악을 이용 포위망을 각개돌파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대대장 카느 중령을 포함한 대다수 인원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D중대원63명만이 탈출에 성공 하였다. 휴전후 확인결과 58명의 대대원이 전투중전사하였고 포로감금중 30명이 추가로 전사하였다.
중공군 63군은 4월 공세에서의 주공집단으로서 서울을 신속히 탈취하도록 계획되었으나 1개 군 3개 사단이 그로스터 대대의 혈전으로 3일동안이나 발이 묶여 체면이 말이 아니였다. 뿐만아니라 주공인 63군의 공격이 지연됨에 따라 전전선에서 중공군의 공격기세가 약화되었다. 따라서 유엔군은 안전하게 철수하여 서울 북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준비하고 중공군의 공세를 차단할 수 있었으니 그로스터 대대의 혈전은 세계전사에 기리 빛나는 위대한 거이었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현대전에 있어서 단위부대의 용기를 과시한 가장 뛰어난 귀감 이라고 격려하였다.
5월 8일 그로스터 대대와 170독립 박격포 C소대는 미대통령의 부대표창을 받았다. 대대장 카느 중령은 빅토리아 십자훈장, 최고무공훈장들을 받으며 그 용기와 행동은 전사에 기리 남아있다.
이 전투에서 장열히 산화한 영국의 젊은 영웅들을 영원히 기원하며 영령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