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그친듯 하나 하늘은 아직 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우뚝 솟은
건물들과 작별을 위한 긴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엄마랑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잔뜩 골이 나 있습니다.
저는 밤새 뒤척이다 잠이들었어요.
눈을 뜬지 30분이 지났음에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은 언제부터인지 몸에 밴 나의 습관입니다.그게 언젠지 정확하진 않지만 짐작은 하고 있어요.
밖에서는 어머니의 손빨래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군요. 그녀가 손빨래를 하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인지 제 마음은 한결 편안했습니다. 세탁기는 오랜만에 제 할 일을 찾을 겁니다.
대신 어머니의 파란 빨래판이 싫증 난 듯 몸을 기댄 채 서 있을거예요. 오늘은 그녀 대신 제가 빨래를 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이제 제가 소리쳐야겠죠.
헌아 빨랫거리 내 와라 하고 어머니가 내방에 대고 소리쳤던 것처럼. 그녀만큼 내 습관들을 알고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을 겁니다. 지금 여기엔 나와 그 사내밖에 없으니까.
알고 계신것처럼 내 이름은 초희예요. 윤초희. 하지만 어머니는 나를 헌이라 부르죠. 나를 헌 이라 부르는 것은 그녀뿐이예요. 그녀는 고등학교 때까지 시인을 꿈꾸던 사람이었고 지금까지 귀천이나 파랑새를 외고 았죠.
가장 존경하던 인물이 허 난설헌이었다고 합니다.그덕에 내 이름은 초희가 되고 어머니는 나를 헌 이라 부르죠. 정말 잊어버리고 싶던 그 이름을 제 스스로 되뇌어 봅니다. 왜 잊고 싶었는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은 아직도 제 이름을 기억하더라구요. 전 그 이름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요.
그녀의 이른 손빨래는 저를 몸서리치게 합니다. 일주일 한 두 번 그녀는 손빨래를 합니다. 짙은 화장을 한채. 짙은 화장을 한 그녀의 손빨래....그것이 공포의 대상이 된건 아마도 그 무렵이죠.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외가에 갔던 저는 낯선 소리에 잠이 깼었죠. 날카롭게 들리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이어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들. 그 소리들은 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다음 날 저는 할머니의 손빨래를 보았습니다. 빨간색 립스틱을 바르고하는, 어머니의 빨래보다 더 힘이 들어간 할머니의빨래는 차라리 절규였습니다.
할머니는 형리가 되어 짙은갈색의 형틀 위에 오른 할아버지의 옷들을 단죄하고 있었어요.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걸쭉한 욕설을 하시면서. 내가 30분쯤 이불 속에 있는 버릇은 아마도 이때 생겼을 겁니다.
-재해-
이곳은 재해지역으로 지정돼야 했어요.
문은 온몸에 멍이 든 채로 목청껏 울며 사내의 등장을 알려왔고 문의 울음을 전해들은 어머닌 큰 눈 가득 설움의 열매를 만들어 냈죠.
맨발로 뛰쳐나온 그녀의 파란 원피스 위로 사내가 무너져 내렸어요. 사내의 몸을 감싸고돌던 술 냄새가 어머니를 파고들었나 봅니다. 그녀를 찌르는 술냄새.이젠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술 냄새는 여전히 견디지 못하는 그녀를 옆에서.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머니를 외면한 채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어요. 안에서 사내를 달랜 그녀는 다시 나가 문을 어루만졌죠. 놀란 아이를 달래듯이, 종아리 쳤던 아이 약 발라주며 어루만지듯이.
그녀가 문을 어루만지는 동안 집안은 공포로 가득했어요. 불시착한 비행체들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질러대는 괴성들. 사내가 두려워 토해내는 소리들을 전 그저 듣기만 할뿐 그들이 지닌 두려움을 제가 잠재울수는 없었어요. 역시 해결사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서야 모든 울음은 그쳤어요. 그날은 하늘이 울며 소리지르며 부수어 대던 여름이었죠 그날 사내처럼,어제의 사내처럼.
나의 어머니! 그녀는 유난히 짙게 눈 화장을 하고 분도 바른 얼굴로 사내의 오래된 냄새가 가득한 옷들을 학대했어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단죄의 대상은 외할아버지의 옷에서 아버지의 옷으로 형리는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바뀌었지만 그 모습만은, 절규하는 듯한 단죄의 모습만은 그대로였죠. 그러나 그녀의 단죄를 받는 것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더군요.
희야 너는 시집가지 마라 시집가지 마. 검버섯 핀 늙은 처녀. 나의 외할머니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죠. 늙은 나무껍질이 숨쉬는 듯한 모습을 한, 항상 제가 껴안고 곰인형 같던 외할머니는 늘 이 말을 되새김질했어요 제가 그녀의 눈에 띄기만 하면.
사내가 어슬렁거리며 욕실로 들어가더니 물방울들이 블랙홀로 빨려드는 소리가 난후 제 앞을 지납니다. 사내는 그 퀭한 눈으로 저를 힐끗 쳐다봅니다. 넌 아버지한테 인사도 안하냐? 어머니의 꾸중이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아 저는 입 속으로 옹알거렸어요.
그만큼 저에게 그 사내의 존재는 무의미했어요. 제 친구들이 아빠한테 어리광을 부릴 때 저는 사내가 무섭기만 했어요. 왜 있잖아요.뽀빠이에 나오는 턱수염 많은 악당같이 느껴졌죠.
전 뽀빠이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죠. 나도 시금치를 많이 먹고 힘이 세지면 사내를 혼내주겠다고요 그 사내가 멋쩍은 웃음을 흘리네요 사내의 그 모습은 정말 못 봐주겠군요 난 사내를 외면합니다. 어머니가 있었다면 그녀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았을 테지만 오늘은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는군요. 대신 밥그릇만이 내 시선을 끌어안습니다.
서둘러 집을 나서는 사내의 뒷모습에선 어제의 사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얀 와이셔츠 깃과 감색 양복 위엔 인정받는 직장인의 자부심이 묻어나고 있을뿐이죠. 하지만 사내와 가장 가까이 있던 우리 어머니는 그런 사내의 자부심 때문에 스스로를 지워 나가야 했어요. 어머니는 잘생기고 능력 있는 사내의 아내였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골목에 있는 아낙들에게 어머니는 그저 남편 잘 만난 행복한 여자였죠. 동네 사람들에게 어제 밤 사내의 모습은 뉴스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들에겐 어제의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니 들렸더라도 그 괴상한 소리의 진원지가 우리 집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겠죠.
어제 사내는 또 한 번 문을 마구 폭행하며 고래고래 소리질렀죠. 남편이 왔는데도 나오지 않는다고, 여자가 너무 버릇이 없다고. 하지만 술의 지배를 받는 사내를 맞은 것은 눈물 그렁그렁한 사내의 여자가 아니라 사내와 여자에게서 나온 아이였어요.
사내의 이런 모습은 오랜만이네요. 어머니가 집을 나간 이후 그런 모습은 처음이니까요.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은 사내에게 일종의 경계심을 갖게 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와 그 사내 사이엔 불문율이 존재했으니까요.
아이들에겐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불문율 말입니다. 그날 얼마 전 어머니가 사내를 맞던 날도 제가 그를 지켜봤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내는 애써 저를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이 집에서 나간지 오늘로 정확히 일주일이 되었지만 사내와 내가 마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입니다. 일주일분의 빨래를 미리해놓는 어머니 덕에 나는 그의 방에 들어가지 않아도 됐고 그보다 먼저 집을 나서는 까닭에 서로 얼굴을 볼 시간이 없었던 거죠. 그런데 오늘은 쉬는 날이라 그와 아침을 함께 했어요.
어머니가 일주일 전 만해도 그녀가 집을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몰랐습니다. 그녀가 워낙 잘 참아 주었으므로 화장과 빨래만으로 그녀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화산활동을 누를 수 있을 거라는 섣부른 낙관을 하고 있었죠. 아주 위험한 생각이었지만요.
그녀가 집을 나간 다음 날 저는 그녀의 방에 들어가 보았어요. 내가 여자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던 날 이후로 처음 그곳에 들어섰던 거죠. 방은 작고 귀여운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며 바다를닮은 하늘이 키우는 새들과 기르는 목화를 그녀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녀의 방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하늘을 방안에 옮겨 놓고 싶어했어요. 방안엔 낮은 책상과 책꽂이가 있고 책꽂이에는 정호승 시인의 시집 몇 권과 이해인 수녀의 꽃삽, 사랑할 땐 별이 되고 ,김연수 시인의 수필 사랑이 있어도 때로는 눈물겹다 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어요. 오래전에 산 카세트라디오도 책꽂이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잊혀졌던 것에 대한 반가움에 난 버튼을 눌러 보았습니다. 라디오는 입을 쩍 벌렸습니다. 나는 치과의사 마냥 그 입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놈의 입안엔 테이프가 들어있었어요. 박지윤의 하늘색 꿈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테이프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옛날을 그리워하던 어머니에게 여고생이 부르는 리메이크곡인 이 노래만큼 딱 맞는 노래는 없을테니까요.
어머니의 가출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야겠기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이방에 들어올때는요. 그러나 청학동 훈장선생님의 의관만큼 완벽하게 정돈된 이방에 들어서는 순간 제가하려는 행동이 이방과 언젠가 돌아올 그녀에게 얼마나 몹쓸 짓인가 싶어 한참 동안 그녀의 방을 유적 답사하듯 꼼꼼하게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앉은뱅이 책상에 작은 서랍을 열었어요. 파란 표지에 노트 한 권과 수첩이 들어있었어요. 전 얼른 수첩을 펴 보았자만 수첩은 저의 기대를 보기 좋게 무너뜨리고 제 소리만 해대고 있었습니다.
공중전화 부스안의 수다쟁이 아줌마처럼. 혹시나 하고 넘긴 노트는 첫 인사부터 저를 당황하게 만들었어요. 蘭兒의 사랑 노래 난아 라는 낯선 이름은 저를 끌어당겼어요.
언니의일기를 훔쳐보는 동생의 콩닥거림이 제게도 찾아왔습니다. 난아의 사랑 노래를 시작하며 라는 제목을 붙인 이 노트의 첫장에는 저의 어머니이기를 거부하는 그녀가 나타났어요.
난아의 사랑 노래를 읽으면서 전 키득키득 웃기도하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난아의 사랑 노래 뒷 표지에는 볼펜 글씨로 귀천과 파랑새가 적혀 있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난아는 아직 수줍은 문학소녀라는 것이었어요. 난아의 사랑 노래 읽고나서 그 사내를 떠올렸어요 하나의 빈틈도 없을 것 같이 보이는 그 사내와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석류 같은 난아는 정말 어울리지 않았어요.
파란 벽지로 둘러싸여 있어서 파란 마음이 자라날 것 같은 곳. 그곳이 그녀의 방이었죠. 제가 방을 나오며 갓 빤 빨래 내음을 맡았다면 믿으시겠어요. 제가 어머니의 손빨래의 의미를 알아버린 그때. 할머니의 방은 짙은 갈색의 커다란 이불장이 터줏대감처럼 지키고 있어서 저는 방문 앞에서 서성거릴 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방에 들어가지 못하는 저를 보고 똥 마려운 강아지 같다고도 하시고 무슨 일 저질렀냐고 꾸중도 하셨지만 전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제 발등만 보고 있었어요. 빨래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어린 저에겐 너무 무서운 것이어서 한동안 외갓집에 가지 못했습니다.
-외출
어머니가 집을 나가던 그날, 어머니는 빨래를 하고 있었어요. 평소의 그녀라면 오늘은 빨래를 할 필요가 없었어요. 이미 어제 그녀의 빨래는 끝났으니까. 하지만 어제의 재난 때문에 어머니는 지금 죄인의 볼기를 힘껏 치고 있습니다. 나는 나대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어요. 친구들하고 약속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나에게 걸려온 전화가 나와 어머니를 바꿔놨어요.
전화기 속 친구가 그러더군요. 집안에 일이 생겨서 약속을 지킬 수가 없다고요. 난 친구 대신 어머니와 외출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내가 바쁘게 움직인 이유가 일순간에 사라진 지금 그렇게 해서라도 나를 위로해야했거든요.
그녀를 끌고 제가 간 곳은 대형서점이였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생각한 것이기도 했지만 저에게도 무언가 푹빠질만한 것이 필요했어요. 그러나 저의 그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됐죠. 어머니가 나간 지금은요.
그곳 서점에서 무슨 일이 생겼냐고요?.전 소설책을 한 권 빼서 읽다말고 힐끔힐끔 어머니를 쳐다봤어요. 어머닌 시집을 들고 계셨어요. 하지만 읽지는 않으셨어요. 엄마! 제가 부르는 소리에 놀라셨는지 대답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을바람에 떨리는 나뭇잎 같았어요.
왜 그렇게 놀라세요 하며 나는 어머니의 어깨 위로 목을 쭉 뺐어요. 어머니가 보고 계신 시집의 표지에는 시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멋쩍은 미소를 짓고 있었어요.
그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은 커질 대로 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머니의 눈을 놀라게 한 시집이 어머니에게서 흘러 나가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온 시집을 제가 주워 들었어요.
그리고 그 시집을 사서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보물 지도를 발견한 아이처럼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셨어요. 서점에서 어머니를 놀라게 한 시집은 지금 어머니께 있습니다. 왜 어머니가 그 시집을 보고 놀라셨을까 하는 저의 궁금증이 풀리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동안 제 상상의 날개는 저를 아주 엉뚱한 곳으로 저를 이끌어 가고 있었어요. 시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혹시 탤런튼가? 하기도하고 우리 맞은 편에서 책을 읽던 파마머리의 아줌마가 시인인가? 하던 비교적 정상인 생각부터 혹시 어머니의 배다른 동생? 하는 정말 엉뚱한 생각까지.저를 마구 끌고 다니던 상상의 새를 원래 자리로 불러들인 것은 어머니의 목소리였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부르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아까 시집을 보고 놀란 이유는 시인 때문이었노라고. 시인이요? 놀라는 나를 향해 펼쳐 보인 것은 70년 대 말의 고등학교 졸업앨범이었어요.그 후에 그녀가 내게 들려 준 이야기는 대강 이러했습니다.
고해성사
그녀가 아직 시인을 꿈꿀 때 그녀에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는군요 그녀와는 가끔 서로가 쓴 시를 바꿔 읽기도하고 유명한 시인들의 시집도 함께 읽으면서 꿈을 키워갈 친구가 있어서요 그녀의 어설픈 글들이 공책 위에서 노닐 때 시인지망생 이라는 젊은 국어선생님이 그녀의 학교에 부임했죠.
그녀는 문예부에 들었고 문예부 담당은 새로 부임한 국어선생님이었답니다. 그녀의 단짝친구가 있었는데 역시 문예부에 들었어요. 문예부에서도 둘은 항상 다른 사람보다 앞서 갔어요.
두 소녀는 성격이 너무 달랐어요. 그녀가 조용한 곳에서 조심스레 시를지어 내놓는 아이라면 그녀의 친구는 자신있게 드러내면서 시를 썼어요. 이런 까닭에 학교에서는 친구를 주목했어요.
하지만 문예부에서는 그녀가 항상 앞서갔죠. 시를 쓰는 방향도 달랐어요. 그녀의 시는 잔잔하고 맑은 시였지만 친구의 시는 거칠지만 힘이 넘치는 시였죠. 그녀의 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색상은 파란색이었죠. 그렇지만 아버진 항상 어둡고 두려운 존재였어요.
그녀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는 김일성 다음으로 무서운 사람이었어요. 아버진 술만 먹으면 어머니에게 주먹을 휘둘렀고 그 다음 날 어머니는 있는 힘을 다해 빨래를 했으니까. 다른 소녀들의 시가 아버지를 연인의 이상형으로 그릴 때 그녀는 아버지와 반대되는 사람을 이상형으로 그렸어요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어머니는 그녀를 혼인시키려고 했어요.
그녀의 어머니는 자기가 살고있는 삶을 딸에게 물려주기 싫어서 동네에서 가장 좋은 청년을 택해 시집을 보냈어요. 그녀 또한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아무 말 없이 시집을 갔어요.
졸업한 지 3개월 만인 5월에 신부가 된 거예요. 그녀가 결혼을 한 후 친구와의 연락이 끊겨서 소식을 알지 못했어요
그 사내의 버릇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한 것은 서로에 대한 어색함이 살며시 담 너머로 사라진 후 였어요.그녀는 그렇게 좋아하는 파란색을 가리기 위해 더욱 더 파란색으로 화장한 것도 그무렵이었어요.
어머니처럼 맞설 힘도 없고 용기도 없는 그녀가 생각해낸 방법이 짙은 화장이었던 거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어머니에게 이 구절은 어떤 주문보다 효과적이었어요.
어머니에겐 아버지의 단점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곧 아내의 도리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약속을 사내와 했습니다. 아이들에겐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아이에겐 추한 모습을 보인 그 사내의 허상들을 문초한 후 나온 그녀는 20년 전 친구를 발견한 것입니다.드러나있는 거짓들 속의 실체를 본 거죠.
자기와 비슷하다고 아니 어쩌면 더 못하다고 여겼던 사람이 시간이 흐른 뒤에 자기보다 훨씬 나은 위치에 서 있을 때 느끼는 미묘한 감정이 그녀를 지배한 것입니다. 그녀는 그 감정들을 떨쳐버리려고 이곳을 떠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참 좋겠어요. 그 미묘한 감정을 멀리 떠나보내면 그녀는 원래 출발했던 이곳으로 돌아올테니까요.
그 사내가 자부심이 묻은 양복을 입고 나간 지금은 오로지 저 혼자만의 시간이어야 한데도 여전히 어머니가 떠나지 않는군요.
그녀가 곁에 있을 때보다 더 강하게 저를 잡는 건 무슨 까닭일까요? 그녀의 존재라는 사실 때문에 감춰졌던 불안감들이 고개 들어 저를 점령하려고 제몸의 능선을 타고 올라오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금 저에겐 그 군사들과 싸울 힘이 없군요. 그녀에게 자신을 조절해 집안에 남을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요.
전화가 오는군요 그녀일지 모르니 빨리 받아야 겠네요. 그녀는 자동응답기엔 아무 말도 하지 않거든요.
-전화-
전화의 주인공은 그녀의 어머니에요. 아직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가출을 알지 못하세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거든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평일 아침부터 저녁 먹는 시간 까진 우리 집에 전화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예요.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머니께 전화할만한 사람이 집에 없어서죠. 밖에 나가서 일부러 전화 해줄 만큼 한가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제가 더 시달리죠.
사내가 전화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하긴 사내에게 오는 전화도 없죠. 매일 회사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람이니까요. 가뭄에 콩나듯 쉬는 날이면 사내는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경마장으로 가죠. 마권을 사서 경주 결과에 따라 돈을 따고 잃는 것이 사내와 궁합이 잘 맞는가 봅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바꾸라고 하셨습니다. 안계시다고 하자 할머니는 또 한바탕 상소리를 하십니다. 오랫만에 전화했더니 집에 불어 있질 않는다구요. 분명 어머니를 향한 상소리요 원망이었는데 제 얼굴이 불이 난 것 같이 빨개지고 벌에 쏘인 듯 화끈거리는 건 아마도 거짓말에 대한 형벌인지 모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어머니가 집을 나간 건 일주일 전의 일이고 이것이 저의 첫 번째 거짓말이었어요. 그녀가 집을 나간 이후로. 전 앞으로 얼마나 더 거짓말을 해야할까요?
초등학교 3학년 때 겨울. 옆에 앉은 아이의 연필을 가져왔어요. 어디서 났느냐고 물어보시길래 학교 앞 문방구에서 거짓말을 했죠. 혼나기 싫었거든요 그랬더니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학교 앞까지 가서 직접 내 거짓말을 확인했어요. 그날 어머니께 종아리를 맞고 벌을 섰던 기억이 나네요. 한참을 벌을 서서 팔이 허공을 받히지 못하고 올렸다 내리기를 여러번 반복하고 나서야 벌 받는 것을 그만둘 수 있었어요. 그 때 그녀는 이런 말을 했어요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게 거짓말이라고...
전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의 화난 얼굴을 보았어요. 제가 그녀에게 그때 이야기를 하면 겨울이 아니었다면 방이 아닌 마당에서 벌을 섰을거라고 어머니는 말을 하셨어요. 그럼 그녀가 시집오던 때보다 더 나이 먹은 지금 여름에 한 이 거짓말은 어떤 벌을 받을까요?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치던 사내의 잘난 허물들처럼 볼기를 맞아야 할까요? 하지만 제 볼기를 칠 그녀는 지금 이곳에 없잖아요. 그녀는 언제 이곳에 와서 제 거짓말에 대한 벌을 줄까요.
그녀가 차라리 집을 나가버렸으면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녀의 화장이 감추기 위한 것임을 알았을 때 전 그녀가 집을 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어요.
나가서 부자가 되면 나를 데려가게 해 달라고.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요. 아. 그렇군요. 그때의 어리석은 기도가 이제야 응답을 받나봅니다. 아니면 어리석은 기도 때문에 벌은 받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죠. 이젠 그녀가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어요. 이젠 제 잘못을 알았으니까 그녈 돌아오게 해달라고.
이젠 그녀를 찾아 나서야 할 때가 되었는지 기도도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을 찾아 가봐야죠.
-추억의 장소를 찾아-
저는 여름휴가를 핑계 삼아 친구 몇을 데리고 그녀의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저를 제외한 모든 일행은 여름 휴가를 왔고 외할머니도 서울서 내려 온 손녀의 친구들이 지낼 방으로 지금껏 쓰시던 안방을 내 주셨습니다. 제가 이곳을 내려온 이유 아니 어릴 적 그렇게 오기 싫어했던 외할머니댁을 우리 일행의 숙소로 정한 것은 제가 가장 먼저 가보아야 할 곳이 이 근처에 있어서라는건 이미 알고 계실거예요.
그래요. 그녀가 집을 나간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그녀의 가출에 영향을 끼친 요소를 찾아낸 것은 그녀의 고등학교 친구가 쓴 시집과 졸업앨범이었죠. 가장 빨리 찾아올 수 있는 곳이 대안이었어요. 하지만 여기는 제가 모르는 곳이나 다름없었어요 초등학교 때의 무서움 때문에 혼자 온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그 이후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다음해 함께 온 적이 있었어요. 그녀가 좋아하는 하늘과 바다 그리고 추억이 있는 곳이라 그녀가 찾아 올 확률은 충분했죠.
중요한 것이 있다면 제가 얼마나 자유롭게 이 마을을 돌아다닐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활동이 자유롭기 위해서 저는 외할머니 댁을 숙소로 정했어요. 그리고 할머니를 통해서 이곳 아이를 소개받았어요. 이쪽 지리를 전혀 모르는 네게 그 아이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았어요. 다음 날 부터 난 이곳 아이와 함께 어머니의 모교를 시작으로 하늘과 바다가 아름다운 곳은 다 돌아다녔어요. 우리의 일정이 다 끝나는 날은 비가 내리고 있어서 점심을 막 먹고 난 시각인데도 사방은 어둠에 싸여 있었고. 바다로 나가지 못한 고깃배들로 항구는 배를 댈 만한 공간조차 없었어요. 일행들은 이미 터미널로 갔으나 할머니가 싸 주시는 물건들과 이것저것 챙겨 떠나야 했기 때문에 멈칫거리고있을 때 어제 인사까지 했던 대안 아이는 나를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데려 가더라구요. 그 아래는 마을 어른으로 보이는 남자 서넛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인지 넷은 빙 둘러서 있었다. 저기! 大安 아이의 손을 따라 간 내 눈이 멈춘 곳은 나무 옆 바위였죠. 가 보자! 이번엔 내가 먼저 뛰기 시작했어요. 하얀 종이였습니다. 한하운의 파랑새가 적혀있는.
나는 터미널을 향해 마구 달렸어요.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 대안에 남을 생각으로 하지만 저는 일행에게 떠밀려 차에 오르고 말았어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사내도 알아야 하니까, 어쨌든 그녀의 님이니까, 서울로 올라가자 내일 다시 이곳에, 이곳에 오더라도 가서 알리자. 버스가 서울에 도착할 무렵 하늘은 개었으나 내 마음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어머니 손빨래소리 같은 마음의 빗소리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어요. 마음 깊은 곳에서 어머니의 손빨래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어요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