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독립운동가
황상규 선생 학술강연회를 찾아
1월 22일,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손정태) 주최로 백민 황상규(白民 黃尙奎) 선생 공훈선양 학술강연회가 열리는 백범김구기념관으로 떠나본다. 이른 8시경 대형 버스 두 대에 오르는 각 기관 단체 60여 명 걸음걸음에 설렘이 한껏 묻어난다.
12시 30분쯤 서울에 도착. 점심식사 후 효창동 백범기념관에 도착했다. 행사에 앞서 기념관과 김구 선생 묘소,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묘부터 참배했다.
기념식에서는 국가보훈처와 광복회로부터 황상규 선생을 대신해서 손자이신 황정태 님께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기념패와 축하패 봉정이 있었다. 그리고 영구보존용 태극기 증정과 인사말씀, 축사가 이어졌다. 특히 이경선 님의 황상규 선생 헌시 낭독과 녹색환경합창단의 선열추념가는 장엄한 장내를 더욱 뜨겁게 달궈놓았다.
‘육탄혈전으로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라.’라는 대구대 김영범 교수의 강연에 숨죽이며 빠져들어 본다.
황상규 선생은 국권 회복에 청춘을 바칠 비장한 결의로 1913년 결성된 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와 풍기에 있던 대한광복단에 가담해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다. 군자금 확보와 무기 구득을 위한 공격적 거사를 수차례 감행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일본경찰에 노출되어 주축 인물이 대거 검거되고 만다.
1918년 말에 선생은 길림으로 건너가 밀양 출신으로 대종교를 통해 독립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단애 윤세복 선생을 만나 스스로 대종교에 봉교하게 된다. 이곳에서 여준, 조소앙, 김좌진, 손일민을 포함한 망명지사들과 뜻을 모아 1919년 2월에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고 재무를 담당한다. 그리고 대한독립선언서의 서명자 39인 중 1인이 된다. 이때 남경 금릉대학에 재학 중이던 김원봉(金元鳳)이 길림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아마 고모부인 황상규 선생의 부름을 받았을 거라고 보고 있다.
김원봉은 밀양 친우들과 다른 재학생들 그리고 밀양의 3·13만세시위를 주동했던 윤세주, 윤치형, 창원 4월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비중세, 청주 3·1운동을 주도했던 곽재기와도 합류하게 된다.
10여 명의 청년은 합숙하면서 폭탄 제조법과 사용법을 익힌다. 폭탄으로 일제 통치 기관과 요인들을 섬멸하고자 1919년 11월 10일 새벽 10개 공약을 내세운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한다.
이어 선생은 국내의 일제식민통치기관 총공격을 계획하고 1919년 12월에 먼저 국내로 들어와 거사를 준비한다. 김영범 교수로부터 국내에 무기 밀반입 과정을 듣노라니 숨막히는 첩보영화를 보는 듯하다.
1차분 폭탄은 의열단원으로 단동에서 원보상회를 운영하고 있던 밀양 사람 이병철이 옥수수 스무 가마 속에 숨겨 밀양에서 미곡상회를 운영하던 김병환에게 보내고, 김병환은 이것을 태연하게 창고에 쌓아 둔다.
2차분 무기는 이성우가 옷상자로 위장해 들고 선편으로 안동현까지 가서 이병철에게 건네준다. 이병철은 무기가 든 옥수수 다섯 포대를 옥수수 열다섯 포대와 뒤섞어 부산진역으로 보내 다시 숨기는 데까지 성공한다.
무기가 무사히 반입되고 7월 10일로 특공거사 결행일까지 정해졌다. 그리고는 서울 인사동 음식점에서 동지들과 거사 행동계획을 의논하던 중 뜻밖의 비밀누설로 급습당하는 변을 겪는다.
‘밀양폭탄사건’이라 불리는 이 거사는 비록 실패했지만 3·1운동 이후 세상의 이목을 가장 놀라게 한 대담무쌍한 것이었다. 총독부에서도 경악에 경악을 거듭하며 간담이 서늘해졌다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일본은 7월 29일 그 ‘전모’를 발표하고, 동아·조선 두 신문에 내면서 ‘밀양폭탄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1920년 6월 16일 황상규 선생은 7년 형을 선고받는다.
의열단은 여기서 굴하지 않았다. 실패를 교훈삼아 보다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운 김원봉은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의거,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투탄의거,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진입 투탄 의거를 연이어 성공하기에 이른다.
▶고향 밀양으로
출옥한 황상규 선생을 고향 동지들은 기뻐하며 반겼다. 선생은 1927년 밀양청년회 집행위원 개선 때 윤치형, 윤세주와 밀양청년회 신임 위원이 된다. 그 후 교육 분야와 한글운동과 같은 밀양 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1927년 12월에는 신간회(新幹會) 밀양지회를 설립하고 지회장을 역임한다. 황상규와 윤세주가 지역 민족운동 재활성에 앞장서면서 밀양의 젊은 사회주의자들도 존중하고 기꺼이 지도받으려는 자세였다고 한다. 1929년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허헌, 김병노, 조병옥과 함께 광주로 내려가 사건 진상 조사와 구속 학생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선생의 인간상과 공적
황상규 선생은 1890년 밀양에서 태어나 1931년 9월 2일 밤 41세로 밀양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고문과 옥고를 치른 데다 출옥 후 많은 활동이 가져온 과로 그리고 신간회 자진 해체에 충격과 울분으로 병을 얻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온갖 악형과 고문에도 선생은 혀를 깨물고 입을 다물어 한 마디도 자백하지 않았다. 다른 피의자들의 진술로 극히 일부만 적시하다보니 조선총독부 치하에서 ‘백지기소’라는 유명한 일화를 낳기도 했다.
선생의 장례는 9월 6일, 수십 개 사회단체가 공동 주관한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러졌다. 밀양군민과 전국에서 수만 명의 동지가 조문을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자 장례행렬이 대규모 시위대나 봉기군으로 바뀔까봐 경남도경이 경북도경에 지원 요청을 하고 요소요소에 잠복시킨다. 조기와 조문, 만장을 압수하는 등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 영구는 부북면 용지리 지동 선영에 가까스로 도착하여 하관 안장하게 된다.
원근 도시 사회단체 대표들과 동지 수백 명이 조기와 만장을 들고 참여했고, 정광(鄭光) 장의위원장의 식사와 29인의 장의위원회 명의의 영결문 낭독에 수천 명이 통곡하여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한다. 또한, 백여 통의 조문과 조전도 일일이 낭독되었다고 전한다.
「일찍이 일합사와 대한광복단운동부터 시작하여 의열단, 밀양청년회, 신간회운동으로 이어진 항일독립투쟁의 가시밭길을 한 치의 흔들림도,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의연당당하게 헤쳐 온 용장 중의 용장이었다. (중략) 선생은 사후에도 밀양 출신 의열단계 독립운동가들의 영원한 맏형이요 정신적 대부(代父)로 여겨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김영범 교수는 말한다. 선생의 공적을 높이 기리어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를 이용해 쉬우면서 재미를 더하는 김영범 교수의 강연은 한 편의 역사극을 보는 듯하다.
▶밀양에 내려 일행 대부분은 명물메기탕 집으로 자리를 옮겨 못다 나눈 여운을 풀며 대화의 장을 이어나갔다.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추천하여 황상규 선생이 선정된 일은 고장에 크나큰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또한 작년 11월에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네 분을 서훈 신청한 결과, 3·13 만세의거의 주역인 정동준(丁銅俊) 선생과 단장만세의거 주역인 반봉갑(潘鳳甲), 반봉출(潘鳳出) 형제분 등 세 분이 서훈을 받게 되었음을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손정태 소장님으로부터 전해 듣고 일행이 박수로 환영하기도 했다.
이번 행사는 박일호 시장님과 주민생활지원과의 담당자분들의 큰 관심과 협조로 알찬 여행이 될 수 있었다. 기념타월을 선물로 준비해오신 황상규 선생의 손자분과 그 가족들의 온화하고도 다복해 보이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황 해 령






녹색환경합창단의 선열추념가

이경선 님의 황상규 선생 공훈선양 헌시 낭독







행사장 입구에서 황정태 님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

황상규 선생의 손자되시는 황정태 님과 그 가족

첫댓글 1월의 독립운동가 황상규 선생 학술강연회 다녀온 소식 올려봅니다.
좋은 글 고맙고 수고하셨습니다.
귀한 걸음하심과
소개 고맙습니다 ^^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