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를 철저하게 앎 경(It1:7) [Sabbapariññā-sutta]
1. 이것은 참으로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아라한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처럼 저는 들었습니다.
“비구들이여, 일체1)를 최상의 지혜로 알지 못하고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여기에 대해서 마음이 탐욕으로부터
빛바래지 못하고 [오염원을] 제거하지 못하면 괴로움을 멸진할 수 없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일체를 최상의
지혜로 알고3) 철저하게 알고 여기에 대해서 마음이 탐욕부터 빛바래고4) [오염원을] 제거하면5) 괴로움을
멸진할 수 있다."
이러한 뜻을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2. 여기서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체를 일체라고 안 뒤에
모든 것들에 집착하지 않는6) 자는
일체를 철저하게 알았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을 넘어섰도다.”
이러한 뜻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셨으니 이처럼 저는 들었습니다.
1) “여기서 ‘일체(sabba)’란 남김없음(anavasesa) 이다.(ItA.i.52)
계속해서 『이띠웃따까 주석서』는 일체의 의미를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ItA.i.52~53)
이것은 『상윳따 니까야』제 4권 「일체 경」(S35:23) §3의 주해와 같은 내용이라 여기에 옮겨 적는다.
“’일체(sabba)’에는 4가지가 있다. 일체로서의 일체, 감각장소[處]로서의 일체, 자기 존재[有身]로서의 일체,
부분으로서의 일체이다.
① 일체로서 일체는 알 수 있는 모든 것인데, [부처님의] 일체지의 지혜의 영역에 들어온 모든 것이다.
② 감각 장소로서의 일체는 네 가지 세계에 속하는 모든 법들이다.
③ 자기 존재로서의 일체는 삼계에 속하는 모든 법들(즉 모든 유위법)이다.
④ 부분으로서의 일체는 물질로 된 다섯 가지 감각 대상들만 이다. [①~④까지] 뒤로 올수록 그 범위가 앞의 것
보다 더 좁아진다.” (SA.ii.357)
네 가지 세계는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에다 [9가지] 출세간(4가지 도와 4가지 과와 열반)을 포함한 것이다.
한편 본경에 해당하는 『이띠웃따까 주석서』는 이 가운데 첫 번째인 일체로서의 일체는 포괄적인 영역을 가진 것
이고 나머지 셋은 부분적인 영역을 가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본경에서 일체는 ③ 자기 존재로서의
일체를 뜻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ItA.i.52)
2) “’제거하지 못하면’이라는 것은 위빠사나의 통찰지와 함께 하는 도의 통찰지를 통해서 거기서 제거하는 것이
적절한 오염원의 회전을 남김없이 제거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한편 청정도론 ⅩⅦ. 298과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8장 §8에 의하면 존재들이 윤회를 거듭하면서 돌고 도는 방식
으로 오염원과 업과 과보의 세 가지 회전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무명과 갈애와 취착은 오염원의 회전에 속하고, 업으로서의 존재라 불리는 존재의 한 부분과 [업]형성들[行]은
업의 회전에 속하고, 재생으로서의 존재라 불리는 존재의 한 부분과 나머지는 과보의 회전[生有]에 속한다.
3) 유익함과 해로움, 비난받아 마땅한 것과 비난받지 않는 것, 5온, 12처, 18계, 4성제 등으로 정리되는 최상의 지
혜로 알아야 하는 모든 법들에 대해서 고유성질의 전도됨이 없이, 최상의 지혜로 알면서 아주 특별한 지혜로 아는
것이라고 설명한다.(ItA.i.53) 본서 「계략을 부리지 않음 경」2(It2:9) §1의 해당 주해도 참조할 것.
4) ‘여기에 대해서 마음이 탐욕으로부터 빛바래고’는 역자는 두 가지를 주목해서 봐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첫째, 주석서는 이 마음을 “자신의 마음의 흐름”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음이라고 생
각하는 것은 실체로는 마음들의 흐름, 즉 마음들이 찰나적으로 생멸하며 상속(相續)을 하는 것이다. 이들이 너무
나 빠르게 상속하기 때문에 따로따로 분리된 여러 유형으로 우리가 간파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법도 이렇듯 빨리 변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마음이
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그 비유를 드는 것도 쉽지 않다.”라고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간적인 차원에서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마음의 흐름, 즉 마음들이 찰나적으
로 생멸하며 흘러가는 것일 뿐이다. 아비담마의 마음은 한 찰나에 일어났다가 멸하는 것이다. 마음은 한 찰나에
일어나서 대상을 아는 기능을 수행하고 멸한다. 그러면 그 다음 마음이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 이렇게 마음은 흘
러간다. 이들은 너무나 빠르게 상속하기 때문에 보통의 눈으로는 각각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둘째, 이 가르침은 『상윳다 니까야』제 3경 「최상의 지혜로 앎 경」과 제 4권 「철저하게 앎 경」등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본경에서는 ‘마음이 탐욕으로부터 빛바래고’로 나타나는데 이 경들에서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없이
탐욕이 빛 바래고’로만 나타나는 것이 다르다. 이처럼 쿳줏따라 청신녀가 전승한 본서에서는 마음 혹은 마음의 흐
름을 강조하여 마음의 찰나성을 통찰해서 마음이 탐욕으로부터 빛바래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5) “최상의 지혜로 알고’를 통해서는 안 것의 통달지를 말씀하셨다. 두 번째인 ‘철저하게 알고’를 통해서는 조사의
통달지를, 세 번째와 네 번째인 ‘탐욕의 빛바램’과 ‘제거함’을 통해서는 버림의 통달지를 설하셨다.
한편 주석서와 『청정도론』은 이 세 가지 통달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 가지 통달지가 있다. 그것은 ① 안 것의 통달지 ② 조사의 통달지 ③ 버림의 통달지 이다. 이러한 세 가지 통달
지로 철저하게 안 뒤에 라는 뜻이다.
무엇이 통달지 인가? 오온에 대해서 철저하게 아는 것이다. 무엇이 조사의 통달지인가 이렇게 안 뒤에 오온에 대
해서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병이라는 등의 42가지 방법으로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 버림의 통달지인가?
이렇게 조사한 뒤에 으뜸가는 도에 의해서 욕탐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ItA.i.53)
“이 가운데 ① 물질은 변하는 특징을 가지고, 느낌은 느껴진 특징을 가진다고 이와 같이 그 법들의 개별적인 특
징을 조사함으로써 생기는 통찰지가 안 것의 통달지 이다. ②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다는 방법으로 그 법
들에게서 보편적인 특징을 제기한 뒤 생기는 보편적인 특징을 대상으로 가지는 위빳사나 통찰지가 조사의 통달
지이다.③ 이런 법들에서 영원하다는 인식 등을 버림으로써 생긴 특징을 대상으로 가진 위빳사나의 통찰지가 버림
의 통달지이다.” (『청정도론』ⅩⅩ.3)
6)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는’이라고 하셨다. 과거 등에 의해서 여러 가지로 구분되고 나누어지는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有身] 모든 법들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고 성스러운 도를 증득함에 의해서 갈방을 생기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갈애를 거머쥐는 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본다. 이러한 표상을 가지기 때문에 사견과 자만으로 거머쥐
는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는 이러한 그릇된 거머쥠이 존재하지 않음을 본다는 뜻
이다.(ItA.i.55)
- 이띠웃따까-
첫댓글 사두 사두 사두. ()
일체의 모든것이 텅빈 알아차림에서 나왔으니 일체의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텅비어있도다
텅비어 있는 것을 만약 그대들이 안다면 일제의 욕탐도 무상함을 알지니
그저 신기루일 뿐이다
일체의 집착은 내가 존재한다는 허망한 망상에 오나니 실로 나란것이 존재하는가?
생각 감정 오감 마음 이 모든것은 텅빈 알아차림의 작용일뿐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는데 누가 기쁘하고 누가 괴로와 하겠는가? 부디 그대들의 생각과 감정 오감 마음을 알아차리는 그자를 반드시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자를 만나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리며 완전히 딴 세상에 살고 있다는것을 느낄것입니다
처음에 너무나도 낫설고 두렵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든 일어나는 현상들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지를 선명하게 보고 알게될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을 본이도 드물고 아는이도 드무니 누가 나를 헤아릴 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