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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비 나무의 노래.......마틴 슐레스케 지음
책제목: 가문비 나무의 노래
부제: 아름다운 울림을 위한 마음 조율
지은이: 마틴 슐레스케 Martin Schleske
사진: 도나타 벤더스 Donata Wenders
출판사: 니케북스
바이올린 장인이 작업장에서 길어 올린 365개의 맑은 생각!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풍성한 통찰이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독일의 바이올린 장인 마틴 슐레스케가 작업장에서 길어 올린 365개의 맑은 생각과 세계적인 사진작가 도나타 벤더스가 찍은 52장의 인상적인 사진이 만나 한 권의 아름다운 명상 책을 빚어냈다. 마틴 슐레스케의 바이올린 제작 과정은 그 자체로서 예술이자, 소명이며, 인생의 비유다. 여기에 바이올린 탄생 과정의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한 사진들이 저자의 깊이 있는 문장들과 어우러져 독자의 가슴에 잔잔한 울림으로 와 닿는다. 살면서 부딪히는 뜻밖의 어려움 앞에서 길을 잃었을 때, 마음을 다잡고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등대 같은 책이다. 이 책에 담긴 하루하루의 생각은 읽는 이로 하여금 소명을 의식하며 매 순간 충만한 삶을 살도록 고무한다. 그의 생각은 기독교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실용적이고 윤리적이며,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풍성한 통찰은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도 고요히 자기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저자 : 마틴 슐레스케
1965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 학교로 손꼽히는 독일 미텐발트 국립 바이올린제작학교를 졸업하고, 뮐러-BBM 음향기술컨설팅회사 소속 바이올린 제작 연구소에서 공부했다. 이어 뮌헨응용학문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뒤, 바이올린 장인 페터 에르벤의 작업실에서 일하다가 1996년 함부르크에서 바이올린 마이스터 시험을 통과했다. 현재 뮌헨에서 바이올린 제작 아틀리에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해마다 약 20대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만들어 낸다. 세계 순회 연주를 하는 솔리스트들과 유명 오케스트라의 수석 주자들이 마틴 슐레스케의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 : 도나타 벤더스
1965년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세계적인 사진작가로 수많은 전시회와 책을 통해 작품을 선보여 왔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명감독 빔 벤더스가 그녀의 남편이다.
--- 이상 출판사 소개 글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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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글들>
인생에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보내려면 하루하루 지혜가 필요합니다. 나중에 돌아볼 때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우리가 보낸 세월의 양이 아니라, 얼마나 충만한 시간을 보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의미 없이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크로노스 Chronos'라 하고, 특별한 의미가 담긴 시간을 '카이로스 Kairos'라 했습니다. 깨어 있음으로 현재 충실한 삶은 카이로스가 무엇인지 아는 삶입니다. 카이로스는 생명으로 채워진 현재입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깨어 있다 보면 일상이 기도가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믿음은 일과 하나가 됩니다. 그런 깨어 있음을 '창조성'이라 부를 수도 있고, '靈性'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요....하루하루의 소중한 경험, 만남, 카이로스의 순간 등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 노래가 되어 흐를 테니까요....
울림이 좋은 바이올린 재목을 찾는 데 이렇게 수고를 들여야 한다면, 울림 있는 삶을 사는 데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할까요? 삶은 순례의 길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 주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인 교리가 아니라, 우리 삶에 얽힌 관계들입니다.
....조화는 대립의 부재가 아니라, 대립하며 존재하는 '관계'입니다........서로 대립하는 것이 조화로운 까닭은, 둘이 합쳐져 하나의 전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다른 한쪽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됩니다.
성공을 위해 신앙을 발판으로 삼는 태도는 십자가 앞에서 온전히 견디지 못합니다. 온 세상이 외적인 성공을 향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런 욕심이 종교의 옷을 입고 나타날 때, 그것은 종교를 천박하게 합니다. 이는 신을 모독하는 일입니다.....세속적인 성공을 복으로 여기는 종교는 세상에 아무것도 줄것이 없습니다. 그런 종교가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도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니까요.
삶이란 정중앙에 흔들림 없이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에는 울음도 없고, 웃음도 없으며, 찬양도 탄식도 의심도 없고, 희망도 가벼운 유머도 진심을 다하는 기도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중간쯤에 엉거주춤 머무를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울림이 죽고, 모든 의지가 어정쩡한 중간 상태에서 정체될 것입니다. 다양한 기운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대신, 삶이 뜨뜻미지근해질 것이며, 결국 영혼의 생기가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새로운 시각을 가지면 삶을 훨씬 애정 어리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방해는 종종 거룩한 引導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방해받을 능력이 있어야 열린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정체성과 소명 중 하나를 잃어버릴 때, 우리 인생은 침몰하거나 영원히 한 곳에 머무를 위험에 처합니다.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내적 무게가 없어 침몰해 버립니다. 폭풍우로부터 배를 지켜 주는 龍骨이 없는 셈이지요. 반대로 자기 소명, 즉 세상에서 해야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돛을 달지 않은 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항해할 수 없습니다.
....자비없는 진리는 악몽이 됩니다. 그럴 때 진리는 은혜로운 신에 반하는 거짓말이 되어 버립니다. 여러모로 가련한 우리의 세계가 진리를 얻음으로써 행복하게 되는 일은 별로 없는 듯 합니다. 진리라는 명분으로 싸우는 광신도는 자신이 더 높은 가치를 위해 투쟁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난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자비를 잃으면 진리도 잃게 되니까요. 광신도의 눈에는 자비가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투쟁해야 할 불의가 보입니다. 광신도가 자비를 잃는 순간, 그는 진리를 신으로 받듭니다. 진리가 하느님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광신도는 진리를 소유했다고 믿지만, 하느님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잊고 맙니다.
...인간은 예술과 학문을 만들어 냅니다. 사랑과 희망을 느낍니다. 제한성과 유한성으로 괴로워 합니다....
겸손은 자기를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경시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중시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우리는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만이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사람만이 자기 본연의 모습대로 살 수 있습니다.
바흐의 Chaconne 에서는 하늘에 사무치는 고통이 느껴집니다. 바흐는 아내의 예기치 않은 죽음 앞에서 <샤콘>을 썼습니다.....샤콘은 아주 감동적이고 사무치는 작품입니다. 한 인간의 괴로움에 대한 답변입니다. 나는 <샤콘>의 마지막 부분에서 위로를 느낍니다.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희망이 거기 있는 듯합니다. <샤콘>은 불가사의한 작품입니다. 바이올린의 절망적인 저항으로 시작해 계속해서 질문과 절망을 거듭합니다.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 없는 듯, 길 잃은 음의 passage가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이런 음은 점차로 따뜻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풍성한 화음에 에워싸입니다. 답을 얻지는 못했으나, 위로받은 음입니다. 비로소 바이올린은 자기를 넘어서고, 마치 오르간의 울림처럼 깊이 공간을 채웁니다. 바흐는 단순한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위로를 경험했음이 틀립없습니다. <샤콘>에서는 한 사람의 세계에 어떤 따뜻한 존재가 발을 들여 놓은 듯, 눈물을 말려 주는 무엇인가가 울립니다. 천상의 개입이 들립니다. 나는 <샤콘>이 고통으로 마구 흔들린 삶에 하느님의 은혜가 개입하는 순간을 묘사한 곡이라고 믿습니다.
믿음은 교리에 맞는 신앙 고백 그 이상입니다. 믿음은 내면의 교사처럼 우리 삶에 감탄과 놀라움을 줍니다. 형식적인 경건을 고집하며, 변화에 열려 있지 않은 공동체는 믿음의 본질과 거리가 멉니다. 교리나 규범을 우상화해서는 안됩니다. 형식적인 것들에 얽매이면 교리나 계명이나 규범이 하느님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휘청거리거나 넘어지지 않게 생각으로 아주 꽉 붙들어야 하는, 나약한 신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지금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살아 있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죽어 버린 교리나 규범입니까?
...어쩌면 본질적인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불현듯 엄습해 오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당신을 엄습할 지혜에 마음의 문을 여십시요....
은혜 또는 은총이라는 말은 신약 성서에 '카리스 Charis'라고 나옵니다. '카리스마 Charisma' 는 은혜의 선물을 뜻합니다. 또 카리스마라는 말은 우아한 아름다움을 뜻하기도 합니다. <시편> 45:2절에 "카리스를 입술에 머금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때의 카리스는 은혜를 뜻하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입술에 머금었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습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카리스마를 지녔습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내는 울림은 마치 음의 구름 속을 거니는 듯 느껴집니다. 부드러움과 힘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재능은 따로따로 고독하게 존재할 때가 아니라, 함께 작용할 떄 빛을 발합니다. 육체적 재능, 정신적 재능 모두 마찬가지 입니다....우리는 다른 사람의 재능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재능을 더 귀하게 여길 때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행복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감사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거쳐 간 선배들 덕분에 수많은 혜택을 누리지만, 그 사실을 종종 잊고 지냅니다. 다양한 지혜와 지식과 문화 앞에서 우리는 머리를 조아려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재능을 미미하게나마 다음 세대로 전달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은혜를 믿기만 하면 모든 일이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풀리리라 생각하는 것은 은혜를 믿는 것이 아니라, '마법'을 믿는 것입니다. 은혜는 저절로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우리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서 훈련하고 연습할 때 비로소 효력을 발휘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으면서 은혜를 들먹여서는 안됩니다. 깨달음을 가슴에 새기고 삶을 바꾸는 사람만이 은혜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음악에 'Symphony'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은 16세기 입니다. 심포니는 전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는 다악장 형식의 곡을 말합니다. 심포니라는 개념은 'Symphonia'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심포니아는 '함께 어우러지는 울림'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협연'은 신약 성서의 친숙한 주제입니다.....똑같아지는 것은 하나 되는 것과 다릅니다. 콘트라베이스나 트럼펫은 똑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향곡에서 그들은 바이올린과 하나가 됩니다.....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다른 공동체와 어우러져 하나 된 소리를 내는 협주곡,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를 지녔으며, 저마다 쉴 때와 연주할 때가 따로 있습니다. 모든 악기가 하나 될 때, 비로소 작곡가의 생각이 청중의 귀에 들립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삶을 해석하고 형상화해 나갈 과제를 받았다. 삶을 해석한 결과가 인생의 최종 결론이 아니라, 한시적인 것이라 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삶을 해석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사람됨의 본질입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존재의 신학자이자 예술가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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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독일인 '마틴 슐레스케'님!
바이올린 장인으로써 작업장에서 길어 올린 365개의 맑은 생각들....
귀한 글들 소개해 주셔서 고마워요, 세상에는 영신적으로 위대한 사람들이 참 많음에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