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Ⅱ-73]아름다운 사람(20)-‘사상가’ 박노해
이름 석 자에 “아름다운 사람”이라며 경의敬意를 표해야 하는 사람은 쌔고쌨다. 그 중의 한 명, 시인 박노해의 첫 자전수필 『눈물꽃 소년』(2024년 2월 느린걸음 펴냄, 255쪽, 18000원)이 ‘정치인’ 최강욱의 신간을 사러 교보문고에 들렀다 나오는데 나의 눈에 찍혔다. ‘아, 이 친구가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책을 펴냈구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구입했는데, 며칠 동안 차마 ‘아까워서’ 읽지 못했다. 하필, 22대 총선일인 오늘 새벽, 단숨에(어찌 이 기막힌 글을 단숨에 읽을 수 있으랴. 여러 번 먹먹한 가슴을 달래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중간중간 쉬며 읽었다) 아니, 네댓 시간만에 완독했다. ‘친구’라 하면 외람된 말이긴 하나, 나와 같은 닭띠(1957년생)이고, 언젠가(찾아보니 2010년 가을) 연이틀을 만나 짧은 얘기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날, 형언할 수 없이 치열한 삶을 산 ‘실패한 혁명가’이었다.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약칭)이라는 반국가단체를 비밀리에 결성하여 투쟁으로 일관하다 수배 7년여만에 체포되어 사형에 이어 무기징역을 살다 7년6개월만에 석방된 ‘수괴 중의 수괴’였다. 27살인 1984년 『노동의 새벽』을 처음 펴내 즉각 판매금지가 되었는데도 100만부가 팔리는 ‘얼굴없는 시인’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을 줄인 필명 ‘박노해’가 어찌 예사로운 이름이랴.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고흥 벌교에서 자란 박기평은 본명처럼 순박한(朴) 촌놈의 바탕(基)인 ‘평화(平和) 그 자체’였다. 걸핏하면 울어대는 ‘눈물꽃 소년’은 그래서 참다운 평화를 이루고자 무시무시한 사회주의자가 되어 감히 '국가전복'을 꿈꾸었다. 1998년 석방되어 민주화운동가로 복권했으나 국가보상금을 거부하고, 2000년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정치와 권력의 길을 뒤로 했다. 비영리단체 <나눔문화>를 설립하고 묵묵히 ‘생명 평화 나눔’의 사상과 실천을 지금껏 이어가고 있다. 그가 내세운 “적은 소유로 기품있게”라는 캐치플레이즈를 봐도 알 수 있다. 20여년간 국경 너머 가난과 분쟁의 땅에서 평화활동을 펼치며, 사진과 글로 진실을 전해 오고 있지 않은가.
아무튼, 이 책은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소년시대’ 이야기 33편을 모은 것이다. 편편이 한 폭의 수채화같고, 소리없는 흑백영화처럼 진한 감동과 눈물을 안긴다. 가슴이 먹먹하거나 뭉클하지 않으면 진짜로 감성이 무딘 사람일 터. 농촌에서 나고 자란 우리 동시대인(1950년대 출생) 모두 거의 비슷한 경험이 있을 터이나, 이처럼 곱고 맛깔지고 정감 어린 사투리로 자신의 소년시대를 기록한 사람은 찾기 어려울 듯하다. 할머니와 어머니, 마을 어른들과 공소公所의 신부님, 선생님과 동무들, 연필 깎아주는 첫사랑 소녀까지, 남도의 작은 마을에서 펼쳐지는 ‘소년 평이(박기평)’의 날들을 엿보시라. 아직 피지 않은 모든 것을 이미 품고 있던 그날들의 ‘절창絶唱’에 다름 아니다. 이런 절창은 어디에서도 보거나 읽을 수 없는 것임을. 아아-, 알겠다. 박노해를 키운 것은 팔할이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첫사랑 소녀였음을, 백기완 선생을 키운 팔할도 딱 박노해와 같음을 처음 알았다.
그의 많은 시와 책들을 읽은 나로선 “역쉬 박노해”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런 그가 일흔을 앞두고 지나온 시간의 굽이를 아득히 돌아보며 “자신의 모든 것은 ‘눈물꽃 소년’에서 시작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문학적으로 소설가 황순원의 <소나기>이나 수필가 목성균의 <누비처네>일 듯도 하지만, 아무래도 유형은 다른 듯하다. 작가의 말에서 그는 “순정한 흙가슴을 간직한 사람들 속에서 보낸 그 어린 날이 (자신을) 키웠다”며 “‘길 잃은 날’엔 자기 안의 소년 소녀를 만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그날 그 눈빛들이 (그대들이 살아가는) 길이 되고, 그 눈물이 (결국은) 꽃이 될 것이고, 그게 희망이고 참된 시작이 될 것이며. 그래서 그대들 모두 (민들레처럼) 사라지지 말아야 하는 아름다운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2010년 가을 세종문화회관에서 <나 거기에 그들처럼>전을 개최했을 때, 작가를 연이틀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박시인, 나와 동갑인데 그대에게 쪽팔리오. 그대에게 늘 (민주화에 대한) 마음의 빚을 진 듯하오”라고 말하니 “아유, 최형, 그러지 말아요. 우리 같이 살아가는 세상인데요” 되레 위안을 준 박노해 시인. 삶의 공동체 <참사람의 숲>을 꿈꾸며, 30년간 써온 우주에서의 인간의 길을 담은 사상서를 집필중이라는데, 사상가思想家 박노해의 건필과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사랑합니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여!
첫댓글 궁금증이 많은 편이어서.... 문득 10여년 전 쯤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을 구입해 읽었다.
출간 당시 먹물 시인들이 스스로 부끄러워 했다는 시집으로 금서 조치에도 100만부 이상이 팔렸다는 시집.
그 중에 얘기치 않은 시가 있어 옮긴다.
천생연분 <박노해> 일부
.......
내가 동료들과 술망태가 되어 와도
며칠씩 자정 넘어 동료집을 전전해도
건강 걱정 일 격려에 다시 기운이 솟고
결혼 후 3년 넘게 그 흔한 세일 샤스 하나 못 사도
짜장면 외식 한번 못하고 로션하나로 1년 넘게 써도
항상 새순처럼 웃는 당신이 좋소.
.......
궁금해서 그 부인을 찾아봤다.
부친이 대지의 펄 벅의 한국 이름 최진주를 따서 '진주'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
숙명여고- 이화여대 약학과 74학번이었던 김진주는 78년 명동에 있는 백병원 약국에 취직했다. 평범한 약사의 길을 흔든 사건은 77년에 있었다. "글쎄, 너희 오빠가.." 엄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종 오빠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연행된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민주화운동을 하는 교회에 가서 활동하다가 박노해를 소개 받아 결혼했단다.
부인 김진주와 친정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