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24
9월25일[연중 제25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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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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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_kNWQqHeLM?si=a-3S6csuZ22YMD3k
(서울대교구 김병규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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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에게 주님 말씀은 긍지요 자랑거리입니까?>
어린 시절 전력 수급이 부족한 탓에 틈만 나면 정전되곤 했습니다. 그런 순간 어머니는 마치 중요한 예식이라도 하듯이 다락방에서 호롱과 새표 성냥을 꺼내 불을 밝힌 후 높은 곳에 올려놓으셨습니다.
작은 호롱불 하나에 칠흑같던 어둠이 사라지고...전혀 보이지 않았던 식구들의 얼굴이 하나 둘 나타나는 것이 그렇게 신기했습니다. 백열등과는 또 다른 운치가 느껴져 참 좋았습니다. 호롱불을 중심으로 둘러 앉은 가족들은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순간이라는 것이 참...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짙은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들에게 찾아오신 한 줄기 빛이셨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어루만지던 따뜻한 등불 같은 존재였습니다.
오늘도 그분의 빛은 매일의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로하고 자극하고 고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께서 던지시는 말씀 앞에 어떤 기분이 드는가요? 그분 말씀이 너무 좋아, 그분 말씀이 생명수보다 시원하고 달콤해서, 나만 간직하기가 너무 아까운가요? 그래서 그분 말씀을 어딘가 붙여놓고 싶고 외치고 싶은가요?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소중한 말씀들을 서랍 안이나 장롱 속에 가둬 놓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떻게서든 그분 말씀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보여주고 알려야겠습니다.
본당 정문이나 성당 내 어디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성찰하도록 초대하는 성경 말씀을 크게 내거는 본당들을 봅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힐끗 한번 돌아보고 훑어보고 지나갑니다. 이 얼마나 주님께서 기뻐하실 노력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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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을 가려서 비추는 등불은 없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다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얼핏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올바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게 마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누구나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어디에나 해당하는 법칙이지만, 말씀의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진다는 것을 가정할 때 말씀을 전하려는 이들이 더 가진 이들이고 그들에게 더 많은 말씀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도 더 받으려면 더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무언가를 주는 이의 뜻에 맞게 쓴다면 주는 이는 더 주게 될 것이 당연합니다.
예전에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승재라는 아이가 민속촌 같은 곳에 갔는데 품바를 하는 거지 옷을 입은 두 삼촌이 장난으로 배고픈 표정을 짓자 승재는 자신이 낙서하고 있던 입장권을 그 품바들에게 줍니다. 아빠는 그것이 돈이 아니기 때문에 승재에게 1,000원 권을 주자 승재는 그것을 품바 바가지에 넣어줍니다. 아빠는 승재가 더 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착한 일을 하려고 할 때 더 줍니다. 하느님이야 그보다 못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도우려는 사람은 더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받은 것을 전해주는 방식은 ‘등불’과 같아야 합니다. 말씀과 은총을 한마디로 하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칫 주님께 그러한 은총을 몇몇만을 위해 사용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참 빛이 아닙니다. 나는 말씀이든 은총이든 사랑이든 모든 이에게 전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의 줄거리입니다. 냉소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피츠버그 TV 일기예보 진행자인 필 코너스는 연례 성촉절 축제를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고 펜실베이니아주 푼수토니의 작은 마을로 파견됩니다. 그는 자신이 그런 하찮은 일을 해야 하는 것에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일을 끝내고 그 마을을 떠나려는 데 눈이 많이 내려서 갈 수가 없었고 어쩔 수 없이 하룻밤을
더 잤는데 또 성촉절입니다. 하루가 무한 반복됩니다. 그는 처음엔 그러한 상황을 즐겨보려 합니다. 감옥에 가도 원상태로 돌아오기에 은행도 털고 쾌락적인 삶을 즐길 대로 즐깁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도 신물이 납니다.
이 지옥과 같은 의미 없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자 그는 자살을 택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같이 파견 나온 프로듀서 리타를 꼬시기로 마음먹습니다. 여러 번 실패하며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모조리 알아내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항상 거부합니다. 무언가 자신에게만 잘해주는 게 의심스러웠던 것입니다.
결국 필은 자신이 리타에게 하려고 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잘해주기로 합니다. 그랬더니 그러한 보답이 돌아옵니다. 리타는 주위 사람들이 다 필을 좋아하게 된 것을 보고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거짓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함께 잠을 자고 일어납니다. 그런데 ‘내일’이 된 것입니다. 드디어 하루가 지난 것입니다.
영화는 타임 루프 개념을 사용하여 무한한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자신의 결점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탐구합니다. 영화는 의미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조로움과 절망 속에서 어떻게 목적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결국 우리의 하루는 이웃 사랑으로 채워져야 하는데 그 사랑은 한 사람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등불처럼 모든 사람을 비추는 것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한 인간만 비추는 태양은 없습니다. 비도 그렇고 바람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입니다. 내가 이러한 참 사랑으로 나아갔을 때 내가 사는 하루가 진정한 하루가 됩니다.
가끔 어떤 젊은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하고 나서 둘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들에게 사랑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주위 사람들에게 번져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사랑을 부어주셔서 둘의 사랑이 더 깊어지게 합니다.
사랑도 받아야 할 수 있는데,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짓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가진 사람은 마치 등불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우리 본성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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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한동안 선선하던 날씨가 갑자기 더워졌습니다. 가을이 오는 것 같았는데, 9월이 시작되었는데 연일 30도가 넘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원인은 ‘인디언 서머’라고 합니다. 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북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하는 기상 현상을 일컫는 말로, 늦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직전 일주일 정도 따뜻한 날이 계속되는 것을 말한다. 종종 서리가 내린 후에도 이런 현상이 생긴다. 원주민들이 이 계절을 겨울이 시작되기 직전에 신이 내려 주는 일종의 축복으로 여겼다는 데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비유적으로 절망 가운데에 뜻하지 않는 희망을 보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디언 서머는 축복과 희망의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겨울 얼어붙은 강에도 ‘숨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숨구멍이 있기에 물고기는 숨을 쉴 수 있습니다. 군대의 행렬도 50분 걸으면 10분간 휴식이 있습니다. 10분간 휴식에 담배도 피우고, 물도 마시고, 뭉친 다리의 근육도 풀어 줍니다. 저의 뉴욕 생활에도 ‘인디언 서머’가 있습니다. 신문홍보를 위해 여러 지역을 다니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새로운 구경도 하고, 신문도 홍보하니 감사할 일입니다. 상반기에는 LA, 토론토, 보스턴엘 다녀왔습니다. 성지순례도 ‘인디언 서머’입니다. 일상의 삶을 벗어나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강대국인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성전은 파괴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의 강가에서 부른 노래가 시편 137장입니다. “바빌론 강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 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리리라. 내가 만일 너를 생각 않는다면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 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이방 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를 간 것에 대해서 절망하였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좌절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깊은 성찰을 하였고, 자신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로 다짐하였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인디언 서머’가 있었습니다. 바로 페르시아 왕 키루스입니다.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이제 그들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집을 짓게 하여라. 그분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키루스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키루스의 선포로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의 유배를 마치고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시온의 운명을 되돌리실 제 우리는 마치 꿈꾸는 이들 같았네. 그때 우리 입은 웃음으로, 우리 혀는 환성으로 가득하였네.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께서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주님, 저희의 운명을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신앙인은 누구나 ‘인디언 서머’가 되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축복이 되고, 희망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행동이 지친 이들이 다시 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우리는 이웃을 위한 ‘인디언 서머’가 되라고 하십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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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8,16-18: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16절). 어두움을 밝히고 다치거나 헤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 빛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거기에서 제 역할을 하여야 한다. 등불의 존재 이유는 방에 들어오는 사람을 비추어주고 어둠을 밝혀주는 데 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두움을 밝혀주는 그 빛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러한 구원의 빛을 받은 우리 신앙인들이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삶의 빛을 비춰주는 등불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 앞에 나의 믿음의 등불을 가리거나 덮어두어서는 안 되고 다른 이들의 삶의 길을 비추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또한 거룩한 교회를 “등경”이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비추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운다고 오리게네스는 말한다. 그러나 이 삶이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믿음이 없는 집안에 어느 누가 처음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삶을 보여주자면, 시련과 고통이 따르게 되고 인간적인 정마저 금이 갈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사고와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을 수용하기 힘든 우리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의 가치관을 전도시켜야 하는, 그리고 새로이 모든 것을 시작하여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마 이러한 방어적인 본능이 인간에게는 일반적인 것 같다.
이제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이 진정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느끼며,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삶이 자유와 구원을 체험하게 해주는 삶임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올려놓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작은 등불이 되는 것이다.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18절) 말씀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들은 계속 더 큰 하느님의 체험을 하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지 않으면 그 말씀의 중요성도 모르고 그러한 말씀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 말씀을 잃어버려도 잃어버린 줄도 모른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5)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우리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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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6-18)
주님은 빛 자체이신 분이고(요한 1,4), 신앙인은 그 빛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광원(光源)’이신 분이고, 신앙인은 그 빛을 받아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비추는 ‘반사광(反射光)’인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주님을 ‘태양’으로, 교회를(신앙인을) ‘달’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신앙인은 바로 그런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가 모세입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내려왔다.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의 손에는 증언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모세는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어 자기 얼굴의 살갗이 빛나게 되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그 얼굴의 살갗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탈출 34,29-30)
주님을 만난 뒤에 모세의 얼굴이 빛났다는 것은, 그가 주님의 빛을 받아서, 그 빛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모세의 ‘빛남’은 주님의 영광과 권위를 대변하고 대리하는 그의 사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삶 전체가 ‘주님의 빛’을 받아서 ‘빛이 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존재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등불의 비유’는 바로 그런 존재가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등불’은 ‘복음’으로 해석됩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지 말고, 침상 밑에 놓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등불을 그릇으로 덮는다는 것은,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감추고, 신앙생활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사실상 신앙을 버린 것입니다.>
등불을 침상 밑에 놓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보는 데에서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보는 사람이 없을 때만, 즉 혼자 있을 때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도 사실상 신앙인이라는 것을 감추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박해 때에 숨어서라도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과, 박해가 없는데도 세속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즉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려고 그렇게 하는 것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결국 각자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빛을 볼 수 있도록 등불을 등경 위에 놓아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는 “신앙과 복음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 감추지 말고 알려라.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여라.”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즉 ‘구원의 빛’을 전해 준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9.11)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9ㄴ-20)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 우리를 박해할 때,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 강하고 더 밝은 빛으로 세상을 비출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 정신과 순교 정신으로 더욱더 강하게 무장하고, 세상의 회개를 위해서 더욱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라는 말씀은, 당신의 가르침들을 잘 새겨듣고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는 “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복음 선포 활동을 하는 이는 더욱 풍성한 은총을 받을 것이다.”라는 뜻의 약속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는 “신앙과 복음을 감추거나 숨기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는 받았던 은총마저 잃게 될 것이다.”라는 뜻의 경고입니다. <이 말씀은, 제 맛을 잃어서 쓸모없게 된 소금은 밖에 버려질 것이라는 경고 말씀과 같은 뜻의 경고입니다.(마태 5,13)>
따라서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우리는 우선 먼저 자기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선교활동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2ㄴ.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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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지난 토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고 그 비유를 직접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씨가 뿌려진 땅에 비유되던 네 부류의 사람들. 그들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결국 마지막 부류의 사람들(좋은 땅)만이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8,15) 열매를 맺습니다. 이 비유의 설명에 바로 이어지는 오늘 복음도 ‘말씀을 듣는’ 주제와 깊이 연관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곧 그저 듣기만 할 것인지 아니면 들은 말씀에 기꺼이 응답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인지 잘 헤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등불은 하느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행동으로 열매 맺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빛을 내며 집 안을 환히 밝히는 사람들입니다. ‘들어오는 이들이 그 빛은 보게 한다.’는 것은 아직 말씀에 맛 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발하는 빛을 보게 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으로 열매 맺은 사람들이 아직 어둠 속에서 헤매는 이들의 길을 비추며, 그들을 참된 신앙으로 인도하는 구실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빛을 밝히는 등불은 그릇 속이나 침상 밑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여 세상을 비출 수 있고,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점점 많은 사람에게 퍼져나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가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가 실현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비록 지금은 숨겨져 있고 감추어진 듯 보이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그 모습을 훤히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의 실천으로 결실을 거두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등경 위에 놓인 등불처럼, 우리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감추어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이들을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 곧 당신의 참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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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는 마치 산 위에 있는 고을의 등불처럼 세상을 비추며, 세상을 향하여 열려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교회 헌장 1항)와 같습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어둠을 무서워하였습니다. 어둠은 빛과 반대되는 것으로 빛이신 그리스도에 비긴다면 악이며, 어둠의 시간은 악이 활동하는 때로 여겨졌습니다. 이 어둠의 악을 물리치는 방법은 ‘빛’밖에 없습니다.
시편 저자는 우리에게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18],105)라고 전합니다.
또한 열 처녀의 비유(마태오 복음 25장 1절-13절 참조)에서 등잔의 불은 그리스도인의 모범적인 삶인 기름을 통하여 세상을 밝히는 것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죄 말고는 모든 일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히브리서 4장 15절 참조) 또한 우리는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빛과 생명으로 초대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랑을 실천하고, 그리스도께 받은 우리의 ‘빛’을 비추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더욱 믿고 따르게 하며 (마태오 복음 5장 16절 참조), 빛으로 어둠의 두려움을 물리치고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덕을 잘 닦아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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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등불을 등경 위에 놓아 빛을 보게 한다.”
얼마 전에 누님을 모시고 몇 차례 가보고 싶던 통영 한산도를 드디어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마련한 집의 안방 벽에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섬에서 지었다는 시가 걸려 있었습니다. 남매는 그 시와 함께 한산도를 오래도록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수루에서 깊은 밤까지 나라를 걱정하던 장군의 그 마음이 그 시를 통해 전해지는 것입니다. 통영에서 시간에 맞추어 배를 타고 한산도로 향하며 한산해전을 치루던 그 바다를 지나 한산도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도착해서 그 수루에 올랐습니다.
물론 그 옛날의 수루가 아니라 하지만 고증을 통해 복원된 자리에서 보이는 바다에서 군영터와 섬들이 그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었습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1545-1598)은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해인, 7월 8일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장군이 이끄는 일본수군의 59척의 전선을 격파하거나 나포한 한산해전을 치릅니다. 그 뒤 남해 제해권 장악을 위해 1593년 7월 15일 여수에서 이곳 한산도로 본영을 옮기지요.
이곳에서 3년째인 1795년 8월 15일 자 난중일기에서 “이날 밤 희미한 달빛이 수루에 비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시를 읊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장군은 1597년 2월 26일 한성 의금부로 죄인의 몸으로 압송될 때끼지 3년 7개월을 이곳 한산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당시 장군은 육군과 해군이 협공해서 왜적을 물리쳐야 한다고 조정에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의 착잡한 심정은 근심으로 가득했을 것이고 나라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심정이 장군의 일기와 시에 스며있습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한산도월명야상수루 (閑山島月明夜上戍樓) 무대도심수시 (憮大刀 深愁時) 하처일성강적갱첨수 (何處一聲羌笛 更添愁)
또 한편의 장군의 나라걱정의 마음이 또 한편의 시(詩), ‘한산도 야음(閑山島 夜吟)’에서 우러나옵니다.
남쪽 바다에 가을빛이 저무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근심 가득한 마음에 잠 못 이루는 밤 잔월이 궁도를 비추네
수국추광모(水國秋光暮) 경한안진고(驚寒雁陣高) 우심전전야(憂心轉輾夜) 잔월조궁도(殘月照弓刀)
장군의 어록 중에 ‘명성에는 주인이 없어서 왔다가도 가는 법이다. 공명무주체상전(功名無主遞相傳)’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조정에 죄인으로 압송되기도 하고 백의종군의 위치로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편단심 나라사랑의 마음은 역사에 남아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 복음 8장 16절-17절)라는 말씀에서 이충무공의 삶이 연결됩니다.
비록 유대인들의 미움과 세도가 그분을 죽이는 것 같아도 주님께서는 세기와 세기의 사람으로 이어지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님과 이충무공의 삶을 직접 비교할 수 없지만 장군은 조정의 억울한 누명과 모함으로 생명의 위기를 맞았으나 1298년 정탁(鄭琢, 1526년-1605년) 좌의정이 올린 신구차(伸救箚) 상소문으로 인해 극적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다시 전장으로 나가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에서 장군은 사라질 수 있었던 위태한 순간들이 나라를 구하는 하늘의 도움으로 백성들은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델란드의 속담에 “선행(善行)은 모래에 쓰이고, 악행(惡行)은 바위에 새겨진다.”라는 말이 있지만 반대로 충무공의 나라 사랑의 충절의 삶은 역사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일본 강점기 동안 충부공의 발자취와 유적을 없애려 했지만 백성의 마음에 새겨진 그분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마음만큼은 말살하지 못하고 한산도의 ‘제승당’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충무공의 삶을 성경과 직접 연결할 수 없지만 ‘의인(義人)은 성실함으로 산다’ (하바쿡 예언서 2장 4절)라는 말씀과 또한 ‘의인(義人)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로마서 1장 1절)라는말씀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충무공의 믿음은 무엇일까요? 바로 개인의 이익 추구보다는 나라 사랑과 나라를 위험에서 구하는 신념과 충절이라 할 수 있겠지요.
예루살렘의 성 밖의 ‘골고타’라는 작은 언덕에서 죄도 없이 십자가에서 생의 마감을 하신 주님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묵상합니다.
주님께서는 비록 사형수로 초라하게 돌아가셨지만 그분을 사랑하며 따르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등불로 남아 어두운 죄와 죽음에서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등불을 세상의 세력은 침상 밑으로 내리려 했었고, 그릇으로 덮으려 했어도 십자가 부활의 빛을 오늘도 비추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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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등경 위에 얹어놓은 등불>
신앙의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진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바를 믿고, 가슴에 새기고, 실행함으로써 비로소 열매가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 생활화하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요, 죽은 믿음(야고 2,17)입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합니다”(루카8,16).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빛을 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빛을 다른 사람에게 비춰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빛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으로 봉사하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믿음이 약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합니다.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영적 성장을 위해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주님의 은총을 희망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복음의 지식을 생활화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오히려 지식과 믿음이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고 살지 않으면 이미 받은 믿음의 은총도 시들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수하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제대로 간수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은총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지 않습니다.(로마 11,29) 다만 내가 잃어버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십시오.”(1베드 4,10)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2고린 4,7) 주님께서는 당신의 빛을 나를 통해서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부디 우리의 관심사와 모든 행동이 주님을 담아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려 행동하면 할수록 더 견고한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등경 위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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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5년째 사제로 살면서, 사제가 되는 것과 사제로 사는 것에는 간격이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제가 되는 것만으로는 예수님과 일치할 수 없으며, 예수님의 뜻을 되새기며 실천하는 사제로 살아야 예수님과 진정으로 일치하면서 제대로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신학생 때는 사제가 되는 것으로 저절로 예수님과 일치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25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전혀 그렇지 않음을 비로소 느낍니다.
묵상해 보면 솔직히 아직도 멀었습니다. 즉, 아직도 사제로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함을 반성합니다. 단지 주님의 사랑과 자비에 힘입어 조금씩 나아지려 노력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제로 사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인이 되는 것과 신앙인으로 사는 것의 간격도 마찬가지임을 깨닫습니다. 당연히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데, 신앙인 그 자체에만 머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안일한 마음만을 가지고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안일한 마음을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적극적으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 안에서 드러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인 자체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대신 신앙인으로 사는 것에 집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 것에 집중할수록 신앙인으로 사는 것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만 집중하며 세상 것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럴수록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서 들어오는 이들이 이 빛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등불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는 것처럼 감춰지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에 환하게 당신을 드러내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역할은 주님께서 세상에 잘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주님을 세상에 잘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단순히 신앙인 자체에만 머물면 주님을 오히려 세상 안에서 가리는 모습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 살아가면 모든 이가 환한 빛이신 주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이 당연한 진리를 너무나 쉽게 잊어버렸던 것이 아닐까요? 그 당연한 진리를 따라야만, 즉 신앙인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가야만 가진 것을 주님으로부터 더 충만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좀 더 가까워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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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명>
루카 8,16-18 (등불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사명>
자
이제
안락한
내 품 떠나
거친 세상
곱게 다듬어라
자
이제
따뜻한
내 품 떠나
차가운 세상
뜨겁게 녹이어라
자
이제
평화로운
내 품 떠나
난폭한 세상
부드럽게 가꾸어라
자
이제
깨끗한
내 품 떠나
더러운 세상
아름답게 이루어라
자
이제
빛나는
내 품 떠나
어두운 세상
환하게 밝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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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이 되고 빛이 되게>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환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등불을 켠다는 것은. 어둡기 때문이다. 밝히기 위해서다.
그러니 주님 말씀대로 등불을 켠 사람은 그것을 덮을 이유가 없다. 만일 덮는다면 어리석음이고 바보짓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등불을 켜서 덮는 것이 아니라 아예 등불을 켜지 않는다. 어둡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어두워도 그 어둠을 내가 밝힐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실로 많은 사람이 어둠을 어둠이라고 생각지 않고 산다. 어둠에 적응된 사람이거나 어둠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둡다면서도 불을 밝히지 않는 사람도 제법 많다. 투덜거리기만 할 뿐 자기가 불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밝히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이 밝혀야 한다고 하고, 다른 사람이 밝히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기만 한다.
그래서 네가 밝히면 되지 않냐고 하면 자기는 등불이 없다고 겸손을 핑계로 대거나 등불을 드는 그 귀찮고 힘든 일을 왜 자기에게 하라고 하냐고 오히려 성을 낸다.
의지가 없다고 하지 않고 등불이 없다고 하고, 사랑이 없다고 하지 않고 능력이 없다고 한다.
또 소시민 정체성에 안주한다. ‘나 같은 소시민이 뭘!’이라는 안주다.
그런데 빛이 되는 일에는 아무도 소시민이라 예외가 아니고 아니어야 한다. 큰 등불이 없다면 작은 등불이라도 있으면 된다. 역시 의지 없고 사랑 없음을 소시민 정체성으로 합리화하는 것뿐이다.
어쭙잖은 겸손과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님 말씀을 엉뚱하게 이해하여 그럴 수도 있다.
그제는 기후 정의 미사와 행진이 서울역에서 있었는데
그 미사를 봉헌하면서 그리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의 생각이 짧았고 노력도 부족했음을 알게 됐습니다.
주례하신 주교님께서 여야 할 것 없이 정치권이 기후 위기의 급박한 문제에 관해 관심이 없고 그래서 대책을 서두르지 않는데 이 자리에 천만 명이 모였다면 그들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그리고 사제들이 정치 사회 문제와 관련해서는 촛불을 드는데 더 큰 위기인 기후 문제와 관련해서는 촛불을 드는 사람도 사제도 많지 않습니다.
저도 평소 할 수 있는 한 실천하고 주위에도 얘기하였지만 그제 주교님 말씀을 듣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면피 수준이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운동을 펼쳤어야 하는데
나의 실천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나의 실천을 떠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극적으로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그제 모임도 이 말씀 나눔을 통해 여러분에게 홍보할 수 있었는데도 여러분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하지도 초대하지도 않아서 반성했습니다.
나의 선행이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사랑이 되고 빛이 되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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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살아 계신 하느님은 우주 인류 역사의 중심이시다>
- “우연은 없다” -
"주님, 주께서는 의인에게 복주시고, 사랑으로 감싸 주시나이다."(시편5,13)
지난 주말 토-일요일 양일간 장충동 수도원 피정집에서 왜관 수도원 서울 봉헌회 14명의 피정지도를 하면서 4회 강의를 했습니다. 온통 하느님과 기도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어디서나 눈들어 하늘보고 기도하라 직립인간의 인간임을 강조했습니다. 수도원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네 발로 걸어다니는 여러 개와 고양이들은 결코 하늘을 볼 수 없습니다. 온통 먹이를 찾아 다니는 것이 일입니다.
그러니 하늘을 잊고, 기도를 잊고 땅에서의 먹고 사는 일에 온 힘을 쏟는 탐욕뿐의 영성부재의 사람이라면 이런 네발 달린 동물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지요. 너무나 자명한 살아 있는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둘이니 하나는 하느님이요, 하나는 죽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죽음을 늘 기억하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며 살 때 비로소 겸손하고 진실한 참 삶일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은 인류 역사의 중심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생사를 주관하시며 인류 역사를 이끄십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바로 오늘 강론의 제목입니다.
“우연은 없다. 지나고 나니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이요 섭리였다,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다.” 제 자전적 고백 ‘사랑밖에 길이 없었네’ 맨처음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그렇습니다. 몰라서 우연이지 알고 보면 지금까지 모두가 하느님의 은혜로운 섭리였음을 깨닫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더라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을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 9월18일 일간지 1면 오른쪽에 크게 자리잡았던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의 성 김대건 신부 성상 축복식 사진이, 어제 9월24일자 가톨릭신문과 가톨릭평화신문의 1면 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사진과 더불어 1면 톱기사 제목입니다.
“성 김대건 신부, 가톨릭의 심장 바티칸에 우뚝 서다”
순교 177주년인 2023년 9월1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 성상 봉헌
1846년 9월16일날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가 177년후 똑같은 날 2023년 9월16일 바티칸에 성상으로 부활하리라고, 우뚝 세워지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지요! 바로 우연이 아닌 순전히 하느님 은총의 섭리였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신림동 관악산 기슭에서 8년 동안의 교편생활을 접고 지금 여기 별내동 불암산 기슭 요셉수도원에서 평생 정주의 수도사제의 삶을 살리라고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었겠는지요! 이 또한 하느님의 기막힌 섭리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역사와 사건의 중심에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계신 하느님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요 하느님의 일에 최선을 다해 협조해 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요즘 국내 정치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감지합니다. 하느님은 인간들이 악하게 일을 꾸민 것을 오히려 구원섭리에 도움이 되도록 이끄십니다.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는, 즉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신 하느님이라는 제갈량의 어록도 생각납니다. 물론 이에는 하느님께 협조하는 인간의 최선의 노력도 함께 해야 함을 봅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마디의 뜻은 ‘열흘 붉은 꽃이 없으며, 권세는 10년을 못간다.’뜻으로 참으로 하느님 앞에,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한문이나 숱한 속담들의 진리 안에 함축된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합니다. 모두가 지나가지만 하느님만은 언제나 삶의 현장 중심에 자리 잡으시고 영원한 현재로 현존하시며 당신 뜻대로 역사를 이끄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주님께서는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시자 키루스는 마침내 바빌론에 유배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에 돌려보내고 하느님의 집을 짓기 위한 온갖 협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기쁨을 노래한 오늘 화답송 126장 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흡사 속담처럼 들리는 이 말씀 안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섭리를 봅니다. 오늘 복음도 세 단절어 안에서 우리는 이런 속담처럼 그 말마디 안에 담겨져 있는 하느님의 구원 섭리를, 또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깨닫게 합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바로 등경 위에 놓아져 있는 등불같은 존재로 이웃을 환히 밝히는 복음적 삶을 삶으로 하느님께 적극 협조하라는 말씀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인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앞에 진실하고 정직한, 투명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안팎이 다른 이중적 위선의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잠시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폭로될 것이요, 이미 하느님 앞에서는 다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이란, 천지 자연의 법칙은 광대하여 엉성한 듯 보이지만, 악인에게 벌을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뜻의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 범죄는 불가능함을 깨닫습니다. 이 모두가 하느님 앞에 진실하고 투명한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져 빼앗길 것이다.”
자만하지 말고 끊임없이, 한결같이 노력, 훈련하여 습관화하라는 것입니다. 역시 영적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이런 속담들 잘 듣고 헤아려 삶의 지침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서를 통해서만 아니라 이런 지혜의 결정체인 속담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배워 깨닫게 하십니다.
참으로 이런저런 속담들이나 사건들을 통해서도 부단히 하느님의 뜻을 찾고 깨달아 알 때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이겠습니다. 평생 매사 깨어 하느님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참으로 우리를 겸손하고 진실하고 지혜롭게 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뿌릴 씨를 가지고 울며 가던 그들은, 곡식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돌아오리라."(시편 126,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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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1)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8,16)
<은총의 흘러넘침!>
오늘 복음(루카8,16-18)은 '등불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군중에게 말씀하시면서, 등불이신 예수님을 나의 말과 행위로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계십니다.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안으로, 내 안으로 쌓아 가두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복(은총)은 흘러넘쳐 너에게로 전해지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복(은총)은 흘러넘쳐져서 너에게로 전해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은총의 흘러넘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 복음이 되고, 그리고 말과 행위로,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등불이신 예수님,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선포된 기쁜소식인 복음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은 '은총의 은총을 더하는 일'입니다.
너에게로, 가까이에 있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로 흘러넘쳐져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나의 따뜻한 미소, 나의 따뜻한 말 한마디, 나의 작은 희생과 봉사,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너를 기억하는 나의 작은 기도, 하느님과 너 그리고 나를 위해 죄짖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의 작은 노력들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님을 깊이 깨닫는 복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즈라기1,1-6)는 바빌론 유배에서 해방되는 모습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죽이는 것(멸망)도, 살리는 것(해방)도, 모두 주님이 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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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 복음 8장 17절) 등불이신 예수님!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 명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코로나와 함께하는 명절이지만, 우리의 마음만큼은 둥근 보름달처럼 넉넉하고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등불의 비유'입니다. 등불이신 예수님, 어둡고 그늘진 세상을 훤히 밝히시러 오신 예수님,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을 밝히는 등불, 빛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 복음 5장 16절)
'등불과 빛'이 상징하는 것은 '구체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당신의 전 존재를 너를 위해 내어놓는 사랑으로,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셨고 빛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수많은 성인성녀들과 순교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고, 빛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늘진 세상,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착한 행실과 작은 관심들, 미소와 따뜻한 말 한마디와 인사가 그곳을 훤히 비추는 등불이요 빛입니다.
요즘 우리 안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입니다. 거기에 코로나 팬데믹이 더해져서 우리의 친교가 점점 더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너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극화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늘진 삶,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그곳을 나의 착한 행실로 훤히 비추고 밝히는 등불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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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8acXgRBiz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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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8, 16)
등불은
등불의 소명에
충실합니다.
빛이 시작되는
곳에서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말씀도 빛이며
나눔도 사랑도
빛입니다.
빛으로 빛을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등불입니다.
그토록
환하게 밝히고자
하는 삶의
기쁨입니다.
등불 같은
신앙은
가장 좋은
사랑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빛 안에서
만나고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하늘의 시간은
빛의 시간입니다.
빛을 잊고
살았습니다.
마음을
주님의 빛 위에
올려놓지
못 했습니다.
마음도 서로
이끌고
밀어주어야
절망을 이기는
빛이 됩니다.
간절한 사랑은
어둠을 이기는
소명이 됩니다.
신앙의 본분이며
사람의 최소한의
도리가
말씀을 읽고
사랑을 실천하는
등불같은 삶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말씀의 빛으로
살아나고
나눔의 빛으로
피어나는
우리들 삶입니다.
등불이 되시어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맞이하시는
주님의 사랑처럼
사랑의 빛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우리가
누군지를
모르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등불이 되어
우리 한가운데에
서십니다.
보이기 시작하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새롭게
보게되는
빛의 신비입니다.
빛으로
빛을 사랑하는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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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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