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사랑의 가객, 김현식」을 편자한 육상효씨가 日刊스포츠 기자로 활동 했을 때 김현식의 자서전을 담당하면서 쓴 내용입니다.
대개의 원고들은 처음에는 정서로 그러나 장수가 좀 넘어가면 알아보기 힘든 난필로 되어 있었다. 아마 마음먹은 만큼은 글이 안되는지 장수가 넘어가면서 글쓰만큼 그의 삶에 대한 논리적 사고도 스스로 흐려져가는 모습이었다. 그 어느 뒷장쯤에는 그가 이번 그의 일대기를 이끌어갈 나름의 계획을 적어놓은 곳도 있었다.
1. 탄생, 2. 어린 시절, 3. 청년 시절, 4. 방황, 5. 고독, 6. 자각, 7. 성장, 8. 미래
그는 그의 삶을 정리하는 글의 순서를 이렇게 적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와 얘기하고 그 중 비교적 정리가 잘 된 '그러니까 서른에서 마흔 사이의……'로 시작하는 원고를 첫회에 내보내기로 했다.
병실은 그말고 다섯 명의 환자가 더 있었다. 오십이 넘어 보이는 중노인이 둘, 서른 앞뒤일 것 같은 청년이 둘, 그리고 미국 유학중에 잠깐 귀국했다가 입원한 열입골이나 열여덟쯤 돼 보이는 부잣집 소년도 있었다. 김현식은 그들 대부분이 자신이 꽤 유명한 가수라는 걸 몰라보는 데 상당히 기분이 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문을 위해 들른 어느 여대생이 그를 알아보고는 사인을 부탁했을 때 비로소 약간 우쭐해졌다고 했다. 더구나 그 여대생이 누워있는 가면서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저쪽에 누워 있는 환자가 조용필만큼 유명한 가수……"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는 두고두고 즐거워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내가 병석을 찾을 때마다 병실 사람들에게 내가 신문사 기자라고 소개하고는 호기롭게 나를 부르고는 이런저런 심부름까지 시켰다. 아마 자신이 신문사 기자를 아무렇게나 부릴 수 있는 굉장한 스타라는 사실을 은근히 그렇게 강조하고 싶었나보다.
그가 병원을 들락거린 이력은 꽤 오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한 초기에 그는 한남동 단국대 앞에 있는 '백제병원'에 다녔고, 동부이촌동으로 이사오면서부터는 집 옆 '금강병원'에 다녔다. 놀라운 것은 그가 '백제병원' 다닐 때는 내과쪽 병실보다는 정신과 쪽 병실에 자주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몸이 쇠약해질 때마다 소속사 음반사와 가족들은 그를 정신 병동에 입원시켰다. 그를 더욱 쇠약하게 할 수 있는 과로와 술로부터 그를 차단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병원에서 쉬다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그는 다시 나와 활동에 임했다.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 가수가 음악활동을 해가는 비정상적인 방식이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의 몸이 결정적으로 쇠약해지게 된 이유를 마약과 폭음에 돌린다. 1987년 구속 이후 대마초가 현실적으로 어려워지자 그는 그만큼의 환각을 술에서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마약에서 술로 가는 길을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마약의 환각을 술에서 찾기 시작하면 간이 배겨낼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아침이고 낮이고 언제나 술을 마셨고, 취해 살았다.
(김현식의 자필원고 1 )
보성중 3학년이 되었을 때 그는 고교 입학을 위해 다시 책을 손에 잡았다. 대학에 다니던 사촌형들에게 이것저것 물어가며 열심히 했지만 책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라 성적은 쉽게 오르지 않았다. 말기에 조금 오른 성적을 가지고 그는 우기다시피 하여 그해말 경기고에 원서를 냈다. 결과는 역시 낙방이었다. 그 낙방으로 이런저런 어린 방황을 하다 그는 몇달 후 후기 명지고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원하던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그는 이미 학교에는 별반 취미가 없었다. 그 학교의 유일한 흥밋거리는 당시 유명하던 밴드부였다. 그는 입학하자마자 밴드부에 들어갔다. 당시 고교 밴드부는 소위 '군기'라고 불리는 규율이 무척 엄했다. 1학년이면 악기 연습보다는 선배들의 뒤치닥거리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렇게 밴드부 생활을 하다 어느 날 선배의 악기를 만진 죄로 혼내는 선배와 육박전을 벌이고는 밴드부에서 쫓겨났다. 밴드부를 나온 그가 학교에서 더 이상 흥미를 둘 곳은 없었다. 그는 1학년말쯤 가족들 몰래 자퇴서를 내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리곤 곧바로 당시 종로에 있던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검정고시를 봐서 대학에 갈 수 있고, 학교처럼 딱딱한 규율도 없으니 그에게 검시학원은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차츰 학원에 나가는 일보다는 종로통의 꼬마 깡패들과 어울리는 일이 많았고, 그러면서 칠십년대 초반 청바지·생맥주·통기타가 청년문화를 대변하던 시절 종로통의 통기타 업소들을 드나들게 된다.
어느 날 통기타 업소의 무대에 설 결심을 하고 집에 와서 맹연습을 했다. 기타를 들고 앉아 당시 유행하던 곡들을 맛들어지게 불러대던 장발의 아마추어 가수들이 그렇게 멋지게 보일 수 없더란다. 또한 저 정도면 나도 조금만 연습하면 충분히 하겠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집에 틀어박혀 연습한 지 한참 만에 웬만큼 연습이 됐다고 생각한 그는 기타를 메고 종로통으로 나가 가수 지망생들을 위한 업소의 오디션에 나갔다. 잔뜩 긴장해서 호세 펠리치아노의 「한때 사랑이 있었네」(Once There Was a Love)를 불렀고, 이어 비틀즈와 CCR까지 내리 불렀다. 그의 생에 첫 무대에 대한 평가는 "자식, 기타 실력은 별로지만 노래는 제법 하는데."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 말로 그는 그날부터 '벌판'이라는 업소의 아마추어 가수가 되어 매일 노래할 수 있었다. 가수래야 출연료도 없고 세 끼 밥 사주고 가끔 저녁 때 술 사주고 지배인 기분에 따라서 차비 몇푼씩을 받는 게 고작이었지만 매일 무대에 올라 노래부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무척 행복했다 한다. 그는 종로의 '벌판'에서 명동의 '쉘브르'로, 그리고 '썸씽'으로 자신의 출연 무대를 넓혀나갔다. 앞서 얘기하던 사촌형 양국정은 그때 군대에 가 있었는데 휴가를 나와서 김현식을 만났더니 어린 녀석이 머리를 기르고는
"형 내가 맥주 한잔 살게"
하며 어디론가 끌고가더란다. 하도 기가 막혀서 따라가보니 종로에 있는 '벌판'인가 어딘가에 들어가서는 한가롭게 생맥주를 시켜서 앞에다 놓고는, 자신은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는데 꽤 그럴듯하게 부르더라는 것이다.
"그때 노래하는 걸 말리고 때려서라도 공부를 시켰어야 했는데."
뒷날 그는 사촌동생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술회했다.
(김현식의 자필 원고 2 )
이즈음 그는 나이가 그보다 두 살 위인 어느 여대생과 첫사랑을 하게 된다. 고교 첫 시험에 낙방하고 방황하던 시절에 만난 여자였는데 그는 어디서나 자신의 첫사랑을 이 여자로 꼽았다. 그녀는 연세대 철학과에 진학해서도 그가 노래하는 업소를 찾아와 다시 공부로 돌아가 대학에 진학하라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그에게 늘 다그쳤다. 그는 그런 그녀를 늘 피해 다녔다. 이미 음악에 대한 꿈으로 대학은 안중에도 없었고, 그녀와 자신은 갈 길이 다르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녀는 어느 날인가부터 그를 찾아오지 않았고, 그런 갑작스런 공백에서 오는 허전함으로 그가 만든 노래가 그의 데뷔앨범에 들어 있는 「당신의 모습」이다.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이승희라는 친구가 찾아왔다. 기타를 아주 잘 치는 친구였다. 그는 대뜸 같이 듀엣을 하자고 말했다. 김현식의 생각에는 같이 활동을 하면 기타를 잘 치는 그 친구의 장점과 노래를 잘하는 자신의 장점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제의를 받아들였다. 듀엣이라야 특별한 이름도 없는 그냥 '김현식과 이승희'였다. 그룹이라면 이 '김현식과 이승희'가 그의 생애 최초의 그룹이었다. 나중에 그는 이승희라는 친구가 당대의 스타 가수 이장희와 친동생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게 그는 이장희의 동생과 같이 몇 개의 업소를 전전하면서 조금씩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어느 날 이승희가 연습실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국도호텔 나이트클럽에 출연요청을 받았다고 그는 숨도 채 고르지 않고 말했다. 당시 서울의 앞 양동에 있었던 국도호텔 나이트클럽은 송창식, 이장희 등 당대의 스타들이 드나들던 최고의 나이트클럽이었다. 물론 김현식과 이승희는 이 스타들의 무대 사이사이를 이어가는 들러리 역할이었지만 비로소 무대다운 무대에 선다는 생각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이승희와 헤어진 뒤 김현식은 지금은 '신촌블루스'에서 보컬을 맡고 있는 김동환과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됐다. 듀엣을 하기로 결정하고 둘은 연습을 위해 인천 앞바다의 작약도로 떠나기로 했다. 그야말로 노래만을 부르며 한달 넘게 있다 오기도 했다. 노래밖에는 아무것도 매달릴 것이 없었던 열아홉, 스물의 청년들이 바로 그때 그들이었다. 김현식과 처음 노래를 같이했던 이승희는 직금은 CM송 기획실을 운영하고 있다. 그 일을 제외하면 그는 가요계에서는 거의 떠나 있는 상태다.
그의 두번째 파트너 김동환은 그때의 김현식을 어느 자리에선가 이렇게 술회했다.
"가수에는 두 종류가 있다. 선천적 목청을 타고난 가수와 후천적 발성 노력에 의해 자기 목소리를 만들어가는 가수가 그 두 종류인데, 김현식은 아마 전자에 속할 것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제 스물도 안 되었는데 이미 가수로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웬 양아치 같은 녀석이 노래는 기막히게 잘했다."
- 6편에서 계속 -
첫댓글 가객